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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 잊는다고 잊히는 게 아니다. (1) (76/204)

#76. 잊는다고 잊히는 게 아니다. (1)2021.03.26.

촬영 상황은 실시간으로 보고된다. 김진숙 회장에게. 당연히 실제 방송처럼 편집까지 마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진행이 매끄럽지도, 보기 편한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현장감은 뛰어나다. 그래서였을까. 스튜디오 안에서 벌어진 일들을 개인 휴대폰으로 찍어서 보내온 영상을 보고 있는 김진숙 회장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 점은 박 실장 역시 마찬가지였다. 영상 속에서 흘러나온, 페이슬리 박이 밀면 그릇을 부여잡고 오열하는 소리만이 회장실을 울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한참이나 울면서 밀면을 먹던 페이슬리 박이 한진석과 서진영의 도움으로 간신히 진정하고 난 뒤였다.

“후우…….”

김진숙 회장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털썩. 긴장감이 풀린 건지, 그녀는 의자에 몸을 던지듯 파묻고선 중얼거렸다.

“인물은 인물이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그녀의 눈동자엔 아직도 돌아가고 있는 동영상. 그중에서도 특히 서진영에게 머물러 있었다.

“……진짜 이해가 안 되네. 얜 대체 뭐니?”

영상 속 서진영을 향한 눈빛이 점차 강렬해지는 가운데, 김진숙 회장은 도저히 이해가 가질 않는다는 표정을 해 보였다.

“신들렸나? 어떻게 이럴 수 있지?”

지난번에 느꼈던 바였다. 사람의 마음을 정확히 짚어내는 느낌이랄까. 그것도 꼭꼭 숨겨왔던, 혹은 자신조차 잊고 있던 감정을 제대로 건드리고 있다. 그게 너무 신기하고 한편으론 황당하다.

“이번에도 시청률은 꽤 높을 거 같습니다.”

박 실장의 얘기에 김진숙 회장이 어처구니없다는 얼굴이 되었다.

“이번에도?”

“…….”

“하아, 이번에는……이겠지! 모르긴 몰라도 지난번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파장이 클 거야. 안 본 사람은 몰라도 본 사람이라면…… 대한민국이 눈물바다가 되지 않을는지. 그렇게 되면 진영에 대한 재조명이야 당연한 거고, 프로그램이 확 뜨는 것도 시간문제겠지. 대박이란 얘기야.”

“지금이라도 광고 늘릴까요?”

“아니. 지금 들어간 것만 유지해도 충분해. 대신…….”

입술을 살짝 짓씹은 김진숙 회장이 눈을 가늘게 해 보이며 얘기했다.

“반드시 CF 성사시켜.”

그녀의 얘기에 알겠다고 대답하는 박 실장의 눈동자에 간만에 강한 의지가 깃들었다.

  *** 원래대로라면 촬영이 끝났어야 할 시각이었다. 시간상으로도 그랬고, 분량 면에서도 충분했다. 이미 힐링이라는 컨셉에 맞게 20여 분에 걸쳐 대화가 오갔으니, 그거면 충분하고도 남았다. 페이슬리 박이 생각보다 빨리 감정을 추스르고 눈물을 그친 것은 확실히 의외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에게 몰입된 감정이 어딜 가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니까 피아노를 할아버지께 배웠다는 거네요. 당시에 먹던 음식이 이거고요.”

그렇게 남은 얘기까지 다 들었고, 더듬더듬 옛 기억을 끄집어내 말하는 중에도 그녀가 울고 웃을 때마다 한진석은 적절한 맞장구를 쳐주었다. 그러는 동안, 신현정 피디가 사인을 보내왔다. 눈치를 챈 난 한진석에게 신호를 보냈다. 한창 그녀와 대화를 나누고 있던 한진석은 올 게 왔다는 표정이 되더니 천천히 얘기를 꺼냈다. 이미 할아버지가 살아계신다는 걸 알고 있는 그녀일지라도, 지금부터 할 얘기는 절대 서둘러서는 안 된다는 걸 직감한 것이다.

“많이 보고 싶으시겠어요.”

“……예. 볼 수 있다면…… 뵙고 싶어요.”

촬영 전 호들갑스럽게 어메이징을 외치던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게 아메리칸 스타일인지 아닌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지만, 그녀에게선 짙은 그리움이 느껴졌다. 그만큼 감정이 북받친 거겠지.

“잠시만요.”

때를 놓치지 않고 손을 치켜들었다. 그러자, 페이슬리 박은 무슨 일인가 싶어서 날 바라본다. 한진석 역시 모르는 척 날 보며 의아하단 표정을 지어 보였고. 상황 자체는 의도적인 면이 없잖아 있었지만, 단순히 시청률을 의식한 행동만은 아니었다. 그녀의 감정까지 고려해 진행 중이었을 뿐이다.

“아! 피디님께서 페이슬리 양의 사정을 들으시곤 급히 할아버지 되시는 박갑진 씨가 계신 곳을 수소문하셨는데, 지금 찾았다고 하네요.”

말이 끝나기도 무섭게 벌떡 일어나는 페이슬리 박. 그녀가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스튜디오 밖, 신현정 피디를 바라보는 모습을 카메라가 뒤쫓고 있었다.

“지금 갑니까?”

내가 물었고, 사전에 약속된 대로 신현정 피디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얘기했다.

“괜찮으시겠어요? 혹시 다른 스케줄이나…….”

말을 다 하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페이슬리 박의 반응은 빨랐다.

“갈래요!”

금방이라도 자리를 뛰쳐나갈 것처럼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이 살짝 안쓰러워졌다.

“그럼…….”

손을 앞으로 내밀자, 한진석이 그녀를 이끈다.

“가시죠.”

페이슬리 박과 한진석이 스튜디오를 벗어나는 순간, 내 뒤를 따라서 스탭들이 카메라를 들고 따라붙기 시작했다. *** 부산으로 향하는 미니버스 안, 카메라가 비추고 있었지만, 누구 하나 말문을 열지 못했다. 이미 스튜디오 안에서 할 얘기들은 대부분 한 탓도 있었고, 무엇보다도 잠시 후면 할아버지를 만나게 된다는 긴장감 때문인지 페이슬리 박이 가슴에 손을 얹고서 연신 심호흡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걸 또 지켜만 보기엔 한진석의 입담이 만만치 않다.

“저, 페이슬리 양.”

“……?”

조심스럽게 그녀를 부르는 한진석을 페이슬리 박이 쳐다보자, 한진석이 최대한 부드럽게 물었다.

“지금 심정이 어떠십니까?”

그런다고 한들 그녀의 감정이 담담할 수야 없을 터다. 또다시 한차례 크게 심호흡을 한 뒤에야 그녀가 더듬거렸다.

“모르겠어요. 그냥…… 그냥…… 여기가 아파. 응…… 아파요.”

자신의 가슴을 잡고 목이 메는지 말을 잇지 못한다. 그러면서도 할 말은 또 한다. 다만, 좀처럼 잇지 못할 뿐.

“그리고…… 미안해요. 너무 미안해. 할아버지한테……. 흑.”

말하는 중에 빠르게 눈물이 차오르던 그녀의 눈가가 또다시 그렁그렁해지더니 결국 넘쳐 뺨을 차고 흘러내렸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보는 사람이 다 가슴이 쿡쿡 쑤셔왔다. 혈육이란 그런 건가 보다. 말로는 쉽사리 표현되지 않는 정. 단순히 사랑이나 그리움만으로는 절대로 표현할 수 없다고 느낀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나 역시 그리워졌다. 가슴이 먹먹해졌다. 어머니……. 그리고 아버지. 한번 떠오르자 쉽사리 가라앉질 않아서, 시선을 어디에다 둬야 할지 모르겠다. 하는 수 없이 눈길을 돌려 차창 밖을 바라본다. 한낮의 대로는 차로 넘쳐나고 있었다. 이제 막 시가지를 가로질러 고속도로 입구로 접어들려는 참이었다. 이래서야 언제 부산까지 갈까 싶었지만, 솔직히 상관없었다. 이미 차 안은 페이슬리 박의 흐느끼는 울음소리로 가득했고, 그걸 들은 이들…… 한진석을 비롯해 스탭들까지도 말없이 눈물짓고 있었으니까. 그렇게 얼마나 갔을까. 답답하기만 한 가슴만큼이나 꽉 막혀 있던 정체 현상이 풀리고, 미니버스가 쌩쌩 달리기 시작하고 나서 한참이나 달렸다. 어느새 울다 지친 페이슬리 박을 깨운 것은 휴게소에 잠시 들렸을 때였다. 뭐라도 먹고 가야 한다는 생각에. 하지만 입맛이 없었는지 그녀는 무엇 하나 입에 대질 못 했다. 하긴……. 나라도 그랬을 거다. 이해하고도 남았기에 몇 번 권해보곤 말았다. 잠시 후, 다시 시동을 건 미니버스는 두 시간이 넘게 달린 후에야 비로소 톨게이트에 이르렀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부산, 페이슬 리의 할아버지께서 계신 곳에 도착할 수 있을 터였다. 후우, 괜찮을는지. 절로 마음이 무거워졌다. 나레이션이 말해준 덕분에 그녀의 할아버지가 살아계신다는 것도 알게 되었고, 또 이렇게 찾아뵙고는 있지만, 마냥 마음이 편하진 않은 것이다. 정말이지 옛말 틀린 게 하나 없다는 생각이 든달까. 망운지정(望雲之情 구름을 보며 그리워한다는 뜻)이라 했고, 풍수지탄(風樹之歎 부모에게 효도를 다 하려고 생각할 때에는 이미 돌아가셔서 그 뜻을 이룰 수 없음을 이르는 말)이라고 하더니만. 그나마 할아버지께서 아직 살아계시니 다행이긴 하지만, 과연 할아버지를 만나게 되면 페이슬리 박은 또 어떤 반응을 보일는지 그저 걱정스럽기만 하다. 이런 생각들과 함께 염려스러운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어느새 차가 목적지에 가까워졌는지, 신현정 피디가 신호를 보내왔다. 페이슬리 박 모르게 숨을 크게 들이쉬며 말문을 열었다.

“오 분 후쯤이면 도착할 거 같습니다.”

내 말을 들은 페이슬리 박의 얼굴이 상기되며 눈빛이 흔들리는 게 보였다. *** 버스가 들어선 골목은 아무리 좋게 얘길 해도 깨끗하다곤 말하기 어려웠다. 노후된 곳이었고, 게다가 오르막이었으며 길폭은 차 한 대가 간신히 지나갈 정도로 좁기만 했다. 길 양옆으로 게딱지처럼 다닥다닥 붙은, 지은 지 20년은 더 되어 보이는 벽돌집들을 지나쳐 다다른 곳은 언덕 위 낮은 콘크리트 담장 안이었다. 아마도 그녀의 눈에는 꽤 이국적으로 비칠지 모르겠지만, 한국에 살면서 하루가 다르게 발전해온 도시들을 두 눈으로 보아온 나로서는 이처럼 낙후된 건물이 아직 무너지지 않고 버티고 있다는 게 신기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녹슨 대문이야 그렇다 치고, 잿빛의 삼 층 건물은 디자인이라곤 느껴지지 않는, 그야말로 성냥갑처럼 네모반듯했고 문이며 창들이 이제는 잘 쓰이지 않는 알루미늄 섀시로 되어 있었다. 그나마도 페인트가 군데군데 벗겨져 있어서 허름하단 인상을 지우기 어려웠다.

“여긴 시에서 운영 중인 병원입니다. 환자들 대부분은 자립이 어려운 노인분들이시고요.”

이미 사전에 정보를 들은 한진석의 길지 않은 설명. 통역을 통해 그 설명을 들은 페이슬리 박의 표정이 무너지는 게 보인다. 아무리 한국의 사정을 모른다지만, 스무 살이 넘은 그녀가 지금 들은 얘기가 무얼 뜻하는지 모를 리가 없었다.

“여, 여기가…… 흑.”

한 손으로 입을 막고 울먹거리던 그녀가 건물 입구를 발견하곤 그쪽으로 뛰듯이 빠르게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렇게 마음만 앞서서 뛰어가는 그녀를 촬영진이 뒤쫓았다. 그리고 잠시 후, 복도 한가운데서 우리를 기다리던 조강훈 FD와 조우했다.

“이쪽으로.”

초조한 표정이 역력하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연신 페이슬리 박의 눈치를 본다. 뭔지는 모르지만, 이상할 만치 납득이 됐다. 애당초 이곳이 병원이라는 것만으로도 짐작이 간달까.

“여깁니다.”

아니나 다를까. 계단을 통해 2층으로 올라왔을 때부터 느껴지던 무거운 공기. 그리고 복도를 통해 전해지는 적막함. 그 끝에 마주한 병실 안 풍경은…….

“으음…….”

한진석의 입에서 흘러나온 침음이 모든 걸 설명해준다. 뚜뚜뚜뚜뚜뚜……. 규칙적인 소리와 함께 화면에 표시되는 녹색 포물선들이 보였다. 8인실의 병실에서 의식이 있는 환자는 한 명도 없었다. 설마? 불길한 생각을 지우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병원에서 촬영을 온다는 얘기를 미리 들은 건지, 어느샌가 의사로 보이는 남자 한 명이 간호사 두 명과 함께 다가왔다. 그러곤 사람 좋아 보이는 얼굴로 얘기했다.

“다들 기력이 없으셔서요. 주무시고 계시는 겁니다.”

“아! 그럼…… 저건 왜?”

한진석이 노인분들 머리맡에 있는 기계들을 가리키자, 의사가 친절히 말해준다.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기력이 없으시다고. 그러니 혹시 몰라 계속 체크하는 거죠. 언제 위급상황이 벌어질지 모르니까요.”

“그, 그렇군요.”

“아, 이분이?”

뒤늦게 의사는 페이슬리 박을 발견하곤 물어왔다.

“맞습니다. 박갑진 씨 손녀분이십니다.”

내 얘기에 의료진들과 페이슬리 박이 간단히 인사를 나눴다. 뒤이어 의사가 설명했다.

“먼저 오신 분께는 이미 말씀드렸는데……. 현재 박갑진 씨는 인지능력 감퇴, 즉 중증 치매를 앓고 계셔서 지인분들을 알아보지 못하시는 건 물론이고 일상생활마저 힘든 상황입니다.”

“아!”

안타까움에 다들 침음을 흘리고 있을 때, 의료진들이 일행을 병실 안으로 안내했다.

“여기 이분이 박갑…….”

그리고 의사가 소개를 하기도 전이었다. 의료용 침대에 누워 있는 노인을 향해 페이슬리 박이 성큼 다가서고 있었다. 침대 옆, 협탁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동자가 떨린다. 손바닥만 한 액자에 끼인 채 세워져 있는 낡은 사진 한 장. 그 작은 프레임 안에는 해맑게 웃는 여아를 품에 안은 노년의 남자가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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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액자는 하나가 아니었다. 다만, 그 안에 들어있는 게 사진이 아니었을 뿐. 세 개의 액자엔 영문으로 된 신문 기사가 스크랩되어 있었다. 신문 속 사진 그 어디에도 노인은 없었지만, 대신 한눈에도 누군지 알 수 있는 여자가 보였다. 아직 앳된 얼굴을 한 소녀가 피아노를 치고 있는 모습. 객석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는 스무 살 무렵의 여자. 그리고 세계적인 관현악단과 함께 리사이틀을 하고 있는 모습까지. 세월을 훌쩍 뛰어넘어 8살 소녀는 몇 장의 사진 속에서 더없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파르르르. 그 앞에 선 페이슬리 박의 눈꺼풀이 떨리며, 눈썹 아래 눈동자가 쉴 새 없이 흔들렸다. 그리고 그 눈동자는 이내 침상 위로 향했다. 담요로 덮여있기는 했지만, 그런다고 해서 앙상하게 마른 몸을 숨길 순 없었다. 듬성듬성 짧게 자른 머리칼은 하얗게 센 모습이었고, 주름으로 가득한 얼굴은 노환으로 인해 지쳐 보였다. 솔직히 말하면 그 어디에서도 페이슬리 박과 닮은 점은 찾기 어려웠다. 그럼에도……. 덜덜 떠는 페이슬리 박은 손을 뻗어 앙상하게 마르고 주름으로 가득한 손을 움켜쥐고 있었다. 울음을 참는지, 이를 악물고 있는 그녀의 콧잔등이 잔뜩 일그러졌고 두 눈에는 물기가 차올라 금방이라도 볼을 타고 흘러내릴 듯했다. 그런 채로 자신의 할아버지를 내려다보던 페이슬리 박. 그녀의 꽉 다문 입술 사이로 참았던 감정이 토해졌다.

“흑……!”

순간 목이라도 꺾이듯 푹 숙인 그녀의 고개. 그 상태로 페이슬리 박이 목놓아 울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모두가 처연해졌을 무렵이었다. 여전히 그녀를 뒤쫓고 있던 카메라가 그녀와 그녀의 할아버지. 두 조손의 모습을 담고 있을 때, 페이슬리 박의 할아버지……. 박갑진이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 올렸다. 가늘게 떠진 눈이 자신의 가슴에 파묻고 오열하는 젊은 여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줄도 모르고 페이슬리 박은 그저 고개를 숙인 채로 서글피 울고만 있을 뿐이었고. 그때였다. 깡마른 노인의 손이 천천히…… 아주 천천히 올라갔다. 스윽. 그러곤 페이슬리 박의 긴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흠칫. 그제야 그 손길을 느낀 페이슬리 박이 몸을 치떨며 고개를 쳐들었다. 허공에서 만난 두 개의 눈. 미국과 한국 간의 거리만큼이나 오랜 시간적 차이를 두고 마주한 할아버지와 손녀는 잠시간 그렇게 말없이 서로를 쳐다만 볼 따름이었다. 이미 눈물이 차다 못해 그렁그렁한 그녀. 그런 그녀를 바라보는 노인의 마른 눈빛이 점차 그윽해져 간다. 아스라한 그 눈빛에선 세월이 묻어나왔다. 그것이 회한인지 아니면 반가움인지는 모르겠으나 여전히 푸석한 노년의 손만은 울먹이는 여자의 머리칼을 쉴 새 없이 쓰다듬고 있었다. 그런 채로 병실 안에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그 정적은 놀랍게도 노인의 더듬거리는, 나지막하면서도 따스한 음성에 깨져나갔다.

“……왔니?”

길지 않은 한마디. 그 한마디에 손녀는 무너졌다.

“우……우……욱.”

와락. 할아버지를 껴안은 페이슬리 박이 울음을 터뜨린 것도 그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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