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5. 박예지 (3) (75/204)

#75. 박예지 (3)2021.03.24.

그녀는 정말이지 좋아했더랬다. 비록 주름지고 윤기 없이 늘어진 손이었지만, 대신 크고 따뜻한 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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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손으로 건반을 치던 순간 들려오던 연주는 아직 어리기만 했던 그녀를 때론 기쁘게 했고, 또 때론 슬프게 했으며 어떨 때는 웃게 만들어주었다. 그런 그녀에게 피아노를 가르쳐준 것도 그 손이었다. 햇살이 가득 들이치는 창문 앞에서 무릎 위에 그녀를 앉힌 채 피아노와 어떻게 하면 친구가 되는지 알려주던 손을 그녀는 기억한다. 하지만 그 손을 잡고서 쫑알쫑알 떠들어대면서 시장을 걷던 기억은 언젠가부터 꿈결처럼 느껴졌고, 그조차도 이제 와선 드문드문 떠오를 정도로 오래된 기억이 되어버렸다. 아니, 어쩌면 이미 잊혔는지도 모른다. 더 이상 한국이라는 나라가 고국으로 느껴지지 않는 것처럼. 그랬는데……. 떠올려버렸다. 푸근하면서도 따뜻하던 그 목소리를.

“그렇게 재밌니?”

더불어 언제나 그녀의 눈높이에 있던 낯익은 손도. 너무 어려서 잘 보이지 않는 가게 안을 보기 위해 까치발을 들고 있던 자신을 덥석 안아 목마를 태워주던 손. 그러면서도 혹여 떨어질까 걱정되었던지 허리를 꽉 안고 있던 두 손은 당시의 그녀에게 있어서 더없이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그 손에, 그 팔에, 그 어깨에……. 마음 놓고 자신을 맡긴 채 들여다본 가게 안. 너무 비좁아서 의자는커녕 간이 테이블 하나 놓을 수 없는 가게였던지라, 손님들은 가게 밖에 선반처럼 매달아 놓은 허름하고 좁다란 나무 테이블 앞에 서서 음식을 먹어야 했다. 그래도 음식은 푸짐했더랬다. 다만 어린 그녀로선 너무 매운 탓에 입이 부르틀 정도여서 몇 가닥 먹지도 못했지만. 그럼에도 그곳, 밀냉면 식당을 가자고 졸랐던 건……. 다름이 아니었다. 반죽을 치대는 모습이 재밌었고, 또 반죽을 나무로 된 이상한 상자 안에 넣고 몇 번 손을 움직이면 길고 가느다란 수십 개의 면이 되어 나오는 게 너무나도 신기해서였다.

“내일 또 보러 올까?”

“응.”

“그래. 그럼 오늘은 이만 가볼까? 엄마가 기다릴라.”

“진짜 내일도 또 오는 거야?”

“그러엄.”

“약속.”

“약속!”

여전히 목마를 탄 채로 내려다본 얼굴. 그 얼굴이 자신을 향해 더없이 인자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녀는 조막만 한 손으로 주름진 얼굴을 매만지며 웃음을 터뜨렸더랬다.

“아하하하! 할아부지, 좋아!”

  *** 스튜디오가 정적에 휩싸였다. 누구 하나 말하지 않았고, 심지어 움직임도 없었다. 나 또한 마찬가지. 들고 있던 제면기는 여전히 손에 들린 채였고, 반죽은 여전히 면포에 덮인 채였다. 그런 상태로 페이슬리 박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때, 연주를 멈춘 그녀의 입술을 벌어졌다.

“…….”

하지만 바람 소리만 빠져나올 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그 모습이 보는 이로 하여금 가슴이 답답하게 만들었다. 그런 마음은 나뿐만이 아닌지 한진석은 물론이고 방청객들, 심지어 스탭들마저 안타까운 눈빛을 보이고 있었다. 하아……. 나나 한진석, 신현정 피디를 포함한 스탭들이야 그녀의 사정을 아니까 그렇다 치지만,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여기 앉아 있는 방청객들까지 저런 모습을 보일 거라곤 상상조차 못 했다. 아마도 그건, 그녀의 모습 때문일 터였다. 뭔가 잃어버렸던 것을 바라보는 듯한 눈빛. 오랜 시간이 지나 간신히 되찾았지만, 명확히 떠오르지 않는 기억으로 인한 혼란. 더불어 후회. 그 복합적인 감정이 떨리는 입술에서 얼굴 전체로, 그리고 온몸으로 천천히 번져간다. 끼이익. 급기야 의자를 끌며 일어난 페이슬리 박…… 아니, 박예지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걸음을 옮겨 무대에서 내려왔다. 그러곤 내가 서 있는 주방 쪽으로 다가왔다. 그 모습을 스튜디오 안에 있는 모두가 숨죽인 채 지켜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끝날 것 같지 않던 걸음 끝에 조리대에 다다른 그녀가 내가 들고 있는 제면기를 내려다보았다. 그러면서도 한참이 지나도록 그녀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대신 그녀의 눈동자는 쉴 새 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기억해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런데도 더 이상 어떠한 행동도, 말도 하지 않는 이유는……. 짐작건대 두려운 것이리라. 잊지 말아야 할 기억을 잊은 자신에 대한 두려움. 혹은 오랜 시간 잊고 지냈던 기억을 마주해야 한다는 두려움. 어느 쪽이 되었든, 그녀로선 버거울 터다. 단 한 발. 그 한 발만 내디디면 되는 일이건만,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 발길일 테지. 그러니……. 내가 도울 수밖에. 난 들고 있던 제면기를 내려놓았다. 내 쪽이 아닌 그녀 쪽으로. 툭. 흠칫. 나무로 만든 제면기가 대리석 테이블을 때리는 순간, 그녀는 놀랐는지 몸을 떨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서고 있었다. 그 상태로 또다시 굳고 만 그녀…… 박예지. 한참을 기다렸다. 아니, 실제론 얼마 되지 않는 시간일 터다. 하지만, 그녀에게나 그런 그녀를 지켜보는 나로서나 1초는 1분 같았고 1분은 한 시간 같이 느껴졌다. 그러길 얼마간. 그녀는 입술을 짓씹었다. 알 수 있었다. 그녀가 용기를 내려 한다는 걸. 자박. 걸음을 내딛는 그 작은 소리가 크게 울렸다. 자박. 두 걸음 만에 테이블 앞으로 바짝 다가선 그녀, 박예지의 손이 천천히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제면기를 향해 뻗는 손. 멈칫. 그러다가 주춤하는 그녀였지만, 이내 다시금 움직인 손은 마침내 제면기에 닿았다. 스윽. 마치 쓰다듬듯이, 부드럽게 제면기를 어루만지는 손은 덜덜 떨리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아무런 말도 못 하는 게 안타까웠지만, 이대로라면 촬영 끝날 때까지도 달라질 게 없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였다. 제면기는 그녀에게 맡겨둔 채로 반죽을 덮고 있던 면포를 벗긴 것은. 그런 뒤, 반죽을 들어 제면기에 올렸다. 그녀의 눈동자가 한순간 커지는 걸 확인하며, 난 틀에 고정한 반죽을 역시나 나무로 되어 있는 압축기로 힘껏 눌러 밀어냈다. 그러자 구멍 사이로 밀려 나오는 수십 가닥의 면들. 그 모습을 박예지는 그렁그렁한 눈동자로 쳐다보고 있었다. *** 이미 예측하고 있던 순간이었다. 서진영이 반죽을 할 때부터. 페이슬리 박은 묘한 눈초리였고, 심지어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까지 갸웃거렸다. 그 장면을 놓칠 신현정 피디가 아니었다.

“페이슬리 박 줌인! 표정 놓치지 마세요!”

그녀의 지시에 따라 스탭들이 한껏 긴장한 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순간에도 서진영은 한진석과 만담 아닌 만담을 주고받으며 요리를 이어가는 중이었다. 타다다다다다다닥. 칼질은 빠르다 못해 유려했다. 요리사들 눈에는 어찌 보일는지 모르지만, 일반인들 눈에는 충분히 대단하게 느껴질 정도의 솜씨임에는 분명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전국…… 아니 세계까지 확장하면 저 정도의 칼질을 할 줄 아는 요리사는 수천 명도 넘을 거다. 또한 ‘네 마음의 요리를 들어봐!’의 컨셉 역시 요리사의 기교에 맞춰져 있지 않았다. 당연히 대부분 카메라의 초점은 페이슬리 박에게 맞춰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그 판단은 옳았다. 요리가 이어지는 가운데, 페이슬리 박은 연주를 재개하지 않고 있었다. 무언가 그녀의 심경이 변화하고 있다는 증거였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했다. 그렇기에 신현정은 지시했다.

“페이슬리 박에게 연주하란 사인 보내세요.”

약속했던 대로 하라는 요구는 무리라고 하긴 어려울 터다. 하지만 그것도 때와 장소에 따라 달라진다는 걸 모르지 않는 신현정이었다. 그럼에도 이러는 이유는……. 자극. 트리거까진 아니지만, 적어도 판단할 수 있는 근거는 될 수 있을 터다. 그녀의 예상처럼 페이슬리 박이 무언가 행동할 듯 행동할 듯하면서도 움직이지 못하고 있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예상대로였다. 사인이 나가자 연주를 재개한 페이슬리 박이었지만, 연주는 매끄럽지 못했다. 앞서 피아노를 연주했던 사람이 아닌 다른 사람이 치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그제야 신현정 피디는 확신했다. 그녀가 확실히 달라졌다는 걸. 그리고 곧 특이점에 도달한다는 예감도 들었다.

“페이슬리 박 풀샷으로!”

지시를 내린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녀의 예감은 적중했다. 따앙! 크게 울리는 피아노 소리와 함께 페이슬리 박이 연주를 멈춘 것이다. 그 순간, 신현정 피디가 나직이 말했다.

“2번 카메라와 3번 카메라 페이슬리 박에 고정. 5번 카메라는 제면기!”

저거다. 트리거는. 신현정 피디는 눈을 빛냈다. 서진영이 칼질을 마치고 조리대 아래쪽에 내려놓고 있던 제면기를 들어 올린 찰나 들려온 소리. 분명 입을 벌리고 있었지만, 그것은 말이라고 하기보단 한숨에 더 가까웠다. 오랫동안 속에 담아두었던 무언가를 뱉어내는 듯한 한숨. 그렇게 페이슬리 박의 입술이 벌어지는가 싶더니 한숨 같은 소리가 들려오자, 신현정 피디가 남몰래 주먹을 움켜쥐었다.

‘됐어!’

뒷말은 들려오지 않았지만, 충분히 예측 가능했다. 그렇기에 신현정 피디는 기다렸다. 페이슬리 박이 움직이기를. 그리고 그 순간은 생각보다 일찍 찾아왔다. 온몸을 부르르 떠는가 싶더니……. 끼이이익. 의자를 끌며 일어난 페이슬리 박이 천천히 움직여 주방 쪽으로 향했고, 멈칫거릴 뿐 다가서지 못하는 그녀를 의식한 서진영이 제면기를 내밀뿐 아니라 반죽까지 올려 면을 뽑아 보였다. 그리고 그 순간 제면기를 그립다는 눈빛이 되어 쓰다듬던 페이슬리 박의 눈이 촉촉하게 젖기 시작했다.

“2번, 3번, 5번, 7번 카메라, 두 사람 잡아요!”

지미집을 포함해 스튜디오 안의 카메라들이 사방에서 두 사람, 페이슬리 박과 서진영을 화면에 담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서진영은 느릿느릿 움직여 음식을 완성해나갔다. 제면기를 이용해 뽑아낸 면을 삶고, 그사이 고기를 데치고 삶은 달걀을 먹음직스럽게 갈랐다. 그 모습을 페이슬리 박은 아무런 말 없이 쳐다만 보았다. 그사이 서진영은 보란 듯이 천천히 움직이는 대신 단 한 순간도 쉬지 않고 움직여 최대한 빠르게 밀면을 만들어냈다. 툭. 가볍게 내려놓은 은색 그릇. 흔히들 냉면 그릇이라고 부르는 널찍한 그릇에는 붉은빛이 감돌며 먹기 좋게 비벼진 밀면이 담겨 있었다. 고기와 무초절임, 그리고 반쪽으로 잘린 삶은 달걀이 고명으로 올려진 밀면을 페이슬리 박이 여전히 조용하게 바라보고 있었지만, 이미 그녀의 눈은 눈물이 가득했다. 그렁그렁 맺힌 그 눈동자는 많은 감정을 담고 있었고, 그 복잡하기 이를 데 없는 감정을 담아내는 데는 카메라만 한 게 없을 터였다. 그때, 서진영이 젓가락을 내밀었다. 흠칫한 페이슬리 박이 서진영을 올려다보다가 이내 젓가락을 받아들었다. 덜덜덜. 떨리는 손이어서만은 아닐 터였다. 계속해서 면이 미끄러지는 것은. 정말이지 서툰 젓가락질이었다. 마치 어린아이처럼 뻣뻣하기 이를 테 없는 손동작이었기에 몇 번이나 시도해도 좀처럼 잡히지 않는 면발이었다. 그런 그녀를 보다 못한 서진영이 내민 것은 포크였다. 그러자 페이슬리 박은 자신을 향해 내밀어진 포크를 서글픈 눈빛이 되어 쳐다보았다. 그리고 다시금 고개를 들어 서진영을 바라보는 그녀, 페이슬리 박의 눈에 가득 차올라 있던 눈물이 주룩 하고 흘러내린 것도 그때였다. 뭐가 그리 서러운 걸까. 아니, 그리운 걸까? 그것도 아니면 후회스러운 것일까. 그녀는 눈물을 흘리면서도 포크를 받지 않았다. 그저 한차례 고개를 내젓더니, 또다시 밀면을 집기 위해 젓가락질을 시도하고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쉽사리 잡힐 면이 아니었다. 그게 그렇게 속이 상했던 걸까? 급기야 그녀는 훌쩍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울면서 시도하길 수십 차례. 끝끝내 서툴다 못해 투박한, 차라리 막대기를 쓰는 게 나을 정도의 젓가락질로 면을 집어 올리는 데 성공한 페이슬리 박은 아까보다 한층 더 떨리는 손으로 부들부들 떨면서 면을 입에 넣었다. 그리고 미국에서 살다 온 그녀에겐 매울 수밖에 없는 밀면을 씹으면서…….

“우…욱…….”

감정이 북받쳤는지 울먹였다. 그러면서도 마지막까지 입에 있는 밀면을 씹어 삼킨 그녀는 울음을 그치지 않은 채로 또다시 밀면을 집기 위해 시도하고 또 시도했다. 그러길 얼마쯤. 쨍그랑. 힘이 다했는지, 그녀의 손에서 벗어난 젓가락이 그릇을 때리며 튕겨 나갔다. 그 순간이었다. 페이슬리 박…… 박예지가 그릇을 두 손으로 움켜잡곤 울음을 터뜨렸다.

“우우우우……허어어어어엉!”

뚝. 뚝. 뚝. 그녀의 눈에서 떨어진 눈물이 밀면 안으로 들어가고 있을 때, 박예지는 양손으로 밀면 그릇을 구겨버릴 듯 꽉 잡고선 오열했다.

“어어어엉……하……할아버지이이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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