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 박예지 (2)2021.03.21.
아이의 이름을 예지로 지었다. 꽃술 예(蘂)에 슬기 지(智). 꽃의 중심이랄 수 있는 꽃술처럼 예쁘고 또 예쁘라고, 그러면서도 슬기롭기를 바라며 지어준 이름이었다. 시집온 지 오 년 만에 어렵사리 임신을 한 며늘아기는 대를 이을 남아가 아니라 죄송하다는 말을 했지만, 박갑진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귀하고 또 귀할 뿐이었다. 얼마나 귀한지 안고 있을 때면 혹여라도 떨굴까 싶어 벌벌 떨 정도였다. 자는 얼굴은 또 얼마나 예쁘던지. 손이며 발이며 어떻게 저렇게 작을까. 그런데도 있을 건 다 있는 게 마냥 신기하기만 했다. 그렇게 자다가 갑자기 깨서 서럽게 울 때면 안절부절. 괜히 미안하고 안쓰러워 어찌할 줄을 몰랐다. 아들 녀석들을 키울 때는 몰랐는데, 진짜 눈에 넣어도 안 아플 것만 같았다. 오죽하면 아이가 한밤에 깨어 울기도 전에 먼저 일어나는 건 어미가 아닌 할아버지인 그였을까. 그해 겨울, 전국적으로 돌던 독감에 아이가 걸려서 열이 40도까지 올랐을 땐 차라리 자신이 아팠으면 하는 마음에 눈물이 핑 돌았다. 남들은 어쩔지 모르지만, 박갑진은 저 말도 아직 못하는 어린 것이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울까 걱정돼서, 혹여라도 잘못될까 염려되어 가슴이 찢어질 것만 같았더랬다. 다행히 응급실로 달려가 그곳에서 하룻밤을 뜬눈으로 꼬박 새우고, 아이의 열이 내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엔 아이가 기특해서, 또 그런 아이를 자신보다 먼저 떠난 아내가 지켜준 것만 같아서 마냥 고맙기만 할 따름이었다. 그 후로도 아이는 때때로 아프기도 하고, 또 때로는 말썽도 부리며 무럭무럭 자라났다. 어찌나 빨리 자라는지, 손녀 재롱에 웃다 보면 어느새 한 뼘씩 키가 커 있었다. 그게 아쉽고 한편으론 기꺼웠다. 정말이지 기적 같은 일이었다. 아이가 자라는 모습이란. 그걸 곁에서 바라보는 건 더없이 즐거운 일이었고. 가끔은 아이가 할아버진 아무것도 모른다며, 가슴을 후벼 파는 소리도 했지만 상관없었다. 며늘아기가 버릇없다면서 혼을 내는 걸 말린 건 진짜로 아무렇지도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저 언제까지고 아이의 옆에서 그 아이가 커나가는 걸 지켜볼 수 있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자신이 피아노를 치는 걸 옆에 앉아 까르르 웃으며 듣고 있는 손녀는 그만큼이나 기쁜 일이었다. 그래서였을 거다. 건반 두 개에 손가락 다섯 개가 다 올라갈 만큼 작은 손이란 걸 알면서도 피아노를 가르쳐준 것은. 뚱땅거리며 울리는 건반 소리가 누군가에겐 소음으로 들렸을지도 모르겠지만, 그에겐 아니었다. 적어도 그에게 있어선 세상 그 어디에서도 들을 수 없는, 감미롭지 짝이 없는 선율이었다. 그런 아이였다. 박갑진에게 있어서 손녀 예진은. 가끔 아이의 고사리 같은 손을 잡고 시장을 거닐 때는 여기저기 손녀 자랑을 하느라 바쁠 정도로. 정말이지 행복했다. 그의 인생을 아이가 태어나기 전과 태어난 후로 나눌 정도로 그에게 새로운 삶을 안겨준, 아이와 함께한 시절이었다. 그렇게 언제까지고 이어질 것 같던 시간들이 멈춘 것은 너무 뜻밖의 사건으로 인해서였다.
“믿어도 된다며!”
“누가 보증까지 서랬어?”
“너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야? 그 새끼, 응! 좆같은 네 친구……. 강태는 절대 뒤통수 때릴 놈이 아니라고 한 게 너 아니었냐고!”
“아이 씨……!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형이 애야? 애냐고! 사업은 형이 했지, 내가 했어? 왜 나한테 와서 화풀이인데? 나도 그 새끼한테 얼마를 꼬라박았는지……. 아휴, 말을 말지, 말을 말아. 씨발!”
“뭐? 이 새끼, 너 지금 뭐라고 했어! 다시 말해봐!”
“내가 뭘? 틀린 말……. 윽!”
“이젠 내가 네 형으로도 안 보이냐? 응? 안 보이냐고!”
멱살까지 잡고 싸우는 두 아들의 모습에 박갑진은 참담한 심정이 되고 말았다. 물론 말려도 봤지만, 이미 골이 깊어질 대로 깊어질 아들들은 남남보다 못한 사이가 되고 말았다. 박갑진이 안타까운 마음으로 자식들을 보고 있을 때, 작디작은 손이 늙고 주름진 손가락을 꼭 잡아 온 것도 그때였다.
“미안하구나, 아가. 할애비가 미안하구나.”
뭐가 그렇게 미안하다는 걸까? 예지는 사실 이해가 가질 않았더랬다. 사업은커녕 돈 개념도 없던 아이로서는 자초지종이야 알 길이 없지만, 그 어린 눈에도 삼촌이나 그 삼촌과 싸우는 아버지라면 몰라도 할아버지가 뭔가를 잘못한 거론 보이지 않았으니까.
“할아부지, 울지 마. 할아부지가 울면 예지도 울 거야. 아아아아아앙…….”
그해 겨울. 유난히도 눈이 많이 내렸음에도 예지는 난생처음으로 감기에 걸리지 않았더랬다. 대신……. 잃은 것은 더 많았다. 그 어느 때보다도. 아버지는 사업에 실패했고, 태어난 후 줄곧 지내온 집을 떠나야 했다.
“금방 올게요. 할아부지.”
“그래, 아프지 말고……. 잘 다녀와.”
“응. 엄마가 열 밤만 자면 온다고 했으니까, 그때까지 아프면 안 돼?”
“……어여 가.”
마지막까지도 예쁘게 두 손을 모아 배꼽 인사를 하며 환하게 웃는 예지. 그 모습을 눈에 담으며 박갑진은 애써 눈물을 참았지만, 그런다고 큰아들 내외와 함께 아이가 탄 택시가 멈추는 일은 없었다. 그렇게 예지는 한국을 떠났다. *** 내가 주방 쪽에 자리를 잡자, 페이슬리 박도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무대 쪽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기고 있다. 끝내 하려는 모양이네. 하아, 진짜 그게 되긴 되려나? 칼질과 피아노 연주의 앙상블이라. 실제로 가능하다면 꽤 괜찮게 들리긴 하겠지만. 물론 스튜디오에선 그 정도까진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신현정 피디의 말에 따르면 편집으로 처리해 방송에 내 볼 거라고 하니, 믿어볼밖에. 다행히 여기선……. 내가 요리하는 동안, 배경음 깔 듯 페이슬리 박이 잔잔한 연주를 한다는 컨셉이다. 아무튼, 카메라가 피아노로 향하는 페이슬리 박을 쫓는 동안, 스탭 한 명이 슬쩍 다가와 제면기를 건네준다.
오, 묵직한 게 좋다. 나무로 만들어서 그런가, 왠지 정감 어린 느낌이기도 하고. 다만 오래전 물건이라는 걸 말해주려는 듯 여기저기 손때가 묻고 닳은 부분도 보이지만, 반죽이 닿는 부분은 깔끔하게 처리되어 있다. 한마디로 말하면 쓸 만하단 얘기다.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인데? 방송과는 별개로 좋은 조리기구를 손에 쥐었단 생각에 절로 흐뭇해진다. 그때, 들려오기 시작한 피아노 소리. Engagement Party. 영화 라라월드의 OST다. 내가 근래 본 몇 안 되는 영화 중 하나였기에 기억하는 장면에서 나온 곡이기도 했다. 남주와 여주가 멀어지는 걸 안타깝게 표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꿈을 위해 자신만의 길을 가는 모습을 그린 곡이랄까. 영화 때문인지는 몰라도 듣는 것만으로도 괜히 아스라한 눈빛이 될 수밖에 없는 연주였다. 그 소리를 들으며 반죽을 시작했다. 소매를 걷고 손에 전분을 묻힌 후 적당한 크기의 볼에 밀가루를 개고 그 와중에 소금을 넣었다. 그러곤 치대길 십여 차례. 어느 정도 찰기가 생기고, 반죽이라고 부를 정도가 되었을 때 도마 위에 전분을 뿌렸다. 철퍽. 볼에서 꺼낸 반죽을 던지듯 손에서 떼어놓자 찰진 소리와 함께 도마 위에 달라붙는다. 다시금 반죽을 치대기 시작하자 반죽 속으로 들어간 공기가 기포가 되어 터지며 묘한 소리를 울리기 시작한다. 그런 가운데서도 피아노 연주는 계속되고 있다. 하지만 이미 요리에 몰입한 내 귀엔 들어오지 않는 상태. 그러기엔 살짝 긴장한 탓일 터다. 사실 나도 재래식 제면은 처음이기 때문. 그나마 소금만 넣은 반죽은 여기 오기 전 연습 삼아 몇 번 해보긴 했지만, 그것만으로 잘 될지 불안하지 않다면 사람이 아닌 거지. 그래도 아직까진 괜찮다. 어디까지나 저놈의 구식 제면기를 사용하는 게 잘 될지 불안하다는 거지 반죽이야 그리 어려울 것도 없고, 실제로도 칼국수에서 짜장면까지 골백번도 더 해봤으니까.
“서 셰프님, 오늘은 면인가요?”
오늘은 왜 조용한가 했다. 한진석의 입담이 시작되자, 난 고개를 들어 정면을 쳐다보았다. 때마침 날 향한 카메라가 보인다. 노려본 것까진 아니지만, 나름대로 의미심장한 눈빛을 한차례 보인 뒤 열심히 피아노를 치고 있는 페이슬리 박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면서 말했다.
“밀면이라고 들어보셨는지 모르겠는데…….”
들어봤는지 못 들어봤는지는 몰라도 먹어보긴 했을 거다. 나레이션의 얘기대로라면. 파리에서 먹었던 음식이 바로 밀면이니까.
“요즘이야 서울을 비롯해 여러 도시에서도 찾아볼 수 있지만, 원래 부산에서만 먹을 수 있었던 면 요리죠.”
“밀면입니까? 하아, 오늘도 스테이크는 날아갔군요. 아쉽네요. 진짜 잔뜩 기대하고 왔는데!”
한진석……. 저 능청을 어쩐담? 오늘 만들 요리가 밀면이라는 걸 뻔히 아는데도 저런 말투와 저런 표정을 지을 수 있다는 게 그저 신기할 따름이다.
“예, 예. 밀면이죠. 밀면. 근데 그거 알아요? 밀면이란 게 원래…….”
한국전쟁부터 시작해 미국원조를 거쳐 밀냉면으로 불리던 시절까지, 유래라면 유래라고 할 수 있는 이야기를 풀어냈다. 누가 들어도 알기 쉽게 얘기한 탓일까? 방청객들이 오오! 하며 탄성을 흘린다. 흠, 아무래도 알바가 아닌가 의심되는 상황이다. 이런 별것도 아닌 얘기에 저토록 과한 반응을 보이는 걸 보면.
“부산에 가면 밀면만 있는 건 아니죠. 다들 잘 아시겠지만, 서울에 이어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이면서 무역항으로서도 세계적인 규모를 자랑하는…….”
“뭡니까? 서 셰프님? 지금 부산 홍보하는 겁니까? 혹시 돈 받았어요?”
“전혀요. 그냥 밀면 얘기하다가 잠깐 삼천포로 빠진 거뿐입니다.”
“흐흐흐. 저도 장난 한번 쳐본 겁니다. 하시던 말씀…… 아니, 요리 계속하시죠.”
“후우! 직접 손으로 치대려니 제법 힘드네요.”
다 됐다 싶어서 반죽을 두 손으로 들어 올려 좌우로 잡아당겨 보니 적당히 늘어나는 게 느껴진다. 오오오오오! 응? 방청객들 반응이? 호응이 괜찮다 싶어서 슬쩍 반죽을 흔들어본다. 쭉쭉 늘어난 반죽이 허공에서 줄넘기처럼 휘돌 때쯤 도마를 때리고, 이내 다시금 들어 올려 쭉 잡아당기길 몇 차례. 오오오오오오오오! 방청석이 난리다. 확실하군.
“방청객들 알바 아닙니까?”
툭 던진 말에 웃음이 터졌다. 그때 마침 피아노 연주가 끝나고, 페이슬리 박이 잠시 쉬면서 날 바라보는데……. 눈빛이 묘하다. 뭐랄까, 흥미롭다는 표정을 짓다가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다. 뭔가 떠오르는 것이라도 있나? 흠……. 좀 더 지켜봐야 할 것 같은데. 완성된 반죽이 마르지 않도록 젖은 면포로 덮어둔 채 양념을 만들기 시작했다. 당연히 칼은 아저씨한테 받은 걸 쓸 참이다.
“뭡니까? 그 칼은? 못 보던 칼인데, 신상인가요?”
“노코멘트 하겠습니다.”
“와! 너무 하네. 누가 들으면 진짜 민감한 걸 물어본 줄 알겠네요!”
“민감한 사안 맞습니다. 그러니까, 칼에는 관심 꺼주시고요.”
“아, 신기해서 그러죠. 보통 보던 거랑 다르니까. 개비한 거 같은데, 칼날도 어째 거무칙칙한 게…… 그거 썰리긴 합니까?”
난 대답 대신 칼질을 시작했다. 타다다다다다다닥. 양념에 넣을 채소는 물론이고, 고기며 무 등을 쉴 새 없이 썰었다. 살짝만 힘을 줘도 썰려 나가는, 보통 칼로는 느낄 수 없는 호쾌함에 나도 모르게 신바람이 났더랬다. 그래서인지 써는 내가 다 신기할 정도로 손이 빠르게 움직인다. 그걸 본 방청객들이 다시 한번 환호성을 내지르고, 한진석마저 감탄사를 연발한다. 그에 비해 페이슬리 박은 어째서 아까부터 계속 아무 연주도 안 하고……. 응? 왜 날 보고 있는……. 아! 여기서도 느껴질 정도로 살짝 흔들리는 어깨. 입술까지 잘근 씹는 게 보인다. 기억난 건가? 긴가민가했지만, 칼질을 하면서 계속 한눈을 팔긴 힘들어서 이내 시선을 도마로 되돌렸다. 따다다다다다단……. 그때쯤 다시금 들려오기 시작하는 피아노 연주 소리. 리시버를 통해 촬영팀으로부터 사인을 받은 거겠지. 한데, 그 소리가 아까와는 사뭇 다르다. 뭔가 제대로 집중하지 않은 듯한 느낌이랄까. 신경이 쓰였지만 일단 요리를 이어가는 게 먼저란 생각에 칼질을 마저 하고 양념과 고명까지 마무리했다. 그 와중에 물을 끓여 달걀도 삶았고. 후우, 이제 남은 건 면을 뽑는 건데……. 따앙! 피아노 소리가 크게 울리며 연주가 멈춘 것도 그때였다. 페이슬리 박이 내 손에 들린 제면기에 눈길을 고정한 채 석상처럼 굳어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