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 박예지 (1)2021.03.19.
“2번 카메라, 한진석. 5번 카메라 서 셰프.”
페이슬리 박이 연주를 이어가고 있는 동안에도 신현정 피디만은 넋을 잃는 식의 과오를 범하지 않았다. 그녀는 스튜디오 안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온통 페이슬리 박의 연주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는 찰나에도 오로지 연출을 생각하며 날카로운 시선으로 상황을 살폈다. 그러곤 시시때때로 변하는 한진석과 서진영 그리고 페이슬리 박의 눈빛과 태도 등을 고려해 시기적절하게 지시를 내리는 중이었다. 그 덕분에 녹화는 조금의 빈틈도 없이, 초반에 보여주기로 했던 장면들을 모조리 카메라에 담아낼 수 있었다. 따다다다단……딴. 마지막 음을 끝으로 연주가 끝나고 커튼이 올라가는 순간에서야 마음속에 날카롭게 벼려있던 칼을 내려놓은 신현정 피디는, 조금은 긴장감이 풀린 표정이 되어 팔짱을 꼈다. 그리고 스튜디오 안을 바라보았다.
“아! 죄송합니다. 너무 몰입하다 보니 그만 인사하는 것도 잊고 말았네요. 나흘 전에 입국하셨다죠? 섬세하고 아름다운 연주로 클래식 음악계의 신성으로 불리고 있는 페이슬리 박입니다!”
한진석이 그답지 않다고 느낄 정도로 제법 진지한 표정으로 페이슬리 박을 소개하자, 그 옆에 앉아 있던 서진영 또한 자리에서 일어나 손뼉을 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신현정 피디는 눈을 가늘게 해 보였다.
‘당신이 원하는 대로 판은 다 깔았어요. 이제 뭘 보여줄 거죠?’
전체적인 그림을 자신이 그리고 있지만, 그 세세한 컨트롤은 사실상 서진영에게 넘겨준 거나 마찬가지. 자신이 페이슬리 박이라는 패를 띄워 서진영의 앞에 대령했으니, 이제 다음 수순은 서진영이 그녀와 함께 어떤 장면들을 연출…… 아니, 보여줄 것인가에 이번 회차의 성공 여부가 달렸다고 할 수 있었다.
“1번 카메라, 페이슬리 박 따라가며 얼굴 잡아요!”
무대에서 내려와 소파 자리로 온 페이슬리 박이 당연하다는 듯이 서진영과 가볍게 포옹하려고 할 때, 악수를 하기 위해 손을 내밀다가 멈칫한 서진영. 환하게 웃는 그녀의 미소를 확인한 그의 눈가가 살짝 떨리는 것을 매의 눈으로 포착한 신현정이었다.
“4번 카메라 줌인. 서 셰프의 표정 담아요.”
그 순간 그녀는 알아차렸다. 지금 서진영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아마도 페이슬리 박의 가정사를 떠올리고 있겠지. 하지만, 이 장면을 보는 시청자들은 어떨까?
“6번 카메라, 방청석!”
그 답은 이미 방청객들이 내려주고 있었다. 문화적 차이로 인해 아리따운 여성과의 포옹에 당황하는 대한민국 청년? 아니면 아직은 세속적인 때를 묻히지 않은 순수한 청춘의 서툰 모습? 어느 쪽이 되었든 나쁘지 않다.
‘좋아. 저 표정……. 당장은 시청자들 눈에는 인간적으로 비칠 거야. 당장은.’
하지만 나중에는 어떨까? 페이슬리 박의 사연을 알게 되었을 때도 과연 그럴까? 그녀는 자신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자신이라면 시청자들이 이 장면을 다시금 되새기게 만들 수 있다고. 편집이라는 마법봉을 휘둘러서라도 반드시 그렇게 만들 것이다. 지금 카메라에 잡힌 서진영의 모습은 어딘지 모르게 어수룩하게 느껴지지만, 그 모습 뒤에 숨겨진, 얼마 지나지 않아 수면으로 떠오를 그 예리하고 섬세한 면모를 생각하면 방금 보여준 모습은 분명 시청자들에게 한층 더 극적인 감동을 안겨줄 수 있을 거였다. 서진영이 얘기한 대로라면 된다면 말이다.
‘밀면이라고 했던가?’
그것도 그냥 밀면이 아니라 옛날 방식을 고수한 밀냉면의 재현이라고 했다. 그걸 가지고 페이슬리 박의 추억을 끄집어내겠다고 말하던 서진영을 떠올리곤, 신현정 피디는 자신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대체 언제 그런 조사를 했단 말인가? 작가들조차 채 알지 못하는 걸 어떻게 알아왔는지는 둘째치고, 어린 시절 추억과 함께 그리움이란 감정을 무의식에서 끌어내겠다는 계획은 정말이지 그녀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사실 사정을 모르는 사람에게 말한다면 얼토당토않은 계획이라고 치부할 터다. 서진영이 지닌 본질적인 힘. 사람의 내면을 꿰뚫어 보는 눈을 믿지 못하는 이라면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하지만 자신은 다르다. 바에서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난번 촬영 때까지. 몇 번이고 자신을 놀라게 만든 서진영을 믿는다. 그 증거로 그는 페이슬리 박조차 잊고 있던 과거의 기억 속에서 ‘할아버지’란 존재까지 끄집어내었다. 덕분에 촬영 직전 대본을 전격적으로 수정해야 하는 수고로움이 있었지만, 시청자들의 반응만 확실하다면 그 정도야 수고랄 것도 없는 일. 오히려 신현정 피디로서는 자신의 방송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서진영의 자세가 그저 기꺼울 뿐이었다.
“좋아요. MC 멘트 들어가고. 서 셰프 프레임에서 잠시 제외. 3번 카메라 한진석과 페이슬리 투샷으로.”
머릿속의 상념을 날려버리곤 곧바로 추가적인 지시를 내린 신현정 피디의 눈동자엔 기대감이 가득 담긴 빛이 흘러나왔고, 그 눈길의 끝에는 화면에서 벗어나 조용히 앉아 있는 서진영이 머물고 있었다. ***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지난번 촬영 때와는 달리 꿔다놓은 보릿자루 신세는 면한 듯싶었다.
“이미 외국에서는 그 실력을 인정받았다는 건데, 대체 언제부터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한 겁니까?”
한진석이 밑밥을 깔아 보지만, 한국말이 서툴러서 그런지 페이슬리 박의 대답은 매번 한 박자 늦게 흘러나왔다. 그나마 그녀가 귀에 꽂고 있는 리시버를 통해 거의 실시간으로 통역해주고 있기에 가능한 대화였다.
“한국에 있을 때 배웠어요. 다섯 살? 그쯤이었던 거 같아요. 아, 그렇다고 따로 레슨을 받은 건 아니었어요. 그냥 집에 피아노가 있었고, 자연스럽게 접하다 보니까 관심을 가지게 된 거 같아요. 그 후에 미국으로 가서야 본격적으로 시작했고요.”
음, 대충 알 만하다. 페이슬리 박이 기억을 못 하는 거 같다. 피아노 연주를 누가 알려준 건지. 한차례 한진석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러자 그가 눈치껏 고개를 끄덕였다. 무언의 승낙. 발언권을 얻은 난 조심스럽게 얘기했다.
“그래도 누군가는 알려줬을 겁니다. 저 역시도 그랬거든요.”
“그래요? 난 또 셰프님은 혼자서 깨우친 줄 알았는데.”
익살스러운 한진석의 대꾸에 방청객들이 웃는다. 나 또한 이번에는 픽하고 웃고 말았다.
“그래서, 서 셰프님은 언제부터 요리를 시작했는데요?”
그 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한진석의 질문에 난 어깨를 으쓱였다.
“날 때부터?”
“킥! 장난치지 말고∼.”
“장난 아닌데?”
“엉? 정말?”
정말일 리가 있나? 한진석도 이미 알고 있고, 방청객들도 다 알고 있을 터다. 그저 웃자고 하는 얘기란 것쯤은.
“농담이고요. 한 열 살 정도? 그쯤이었을걸요?”
“와아! 증말요?”
한진석이 놀랍다는 듯 눈을 치뜨고, 한 박자 늦게 통역을 통해 내 말을 알아들은 페이슬리 박 역시 그레이트 따위를 외치며 엄지를 치켜들었다. 피식.
“뭘요. 대단할 것도 없죠. 다들 그러지 않나? 그 나이 때쯤 요리 한두 가지는 하잖아요?”
“에? 무슨 말도 안 되는…….”
“말이 안 되긴 뭐가 안 돼요? 지금 이 순간에도 혼자서 라면 끓여 먹는 애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부모님들이 바빠서 라면 끓여 먹고, 동생 있는 애들은 떡볶이까지 곧잘 해서 먹이는데. 계란 부쳐서 열무김치랑 고추장 넣고 비빔밥 해 먹는 애들도 많다니까요. 한진석 씨는 안 그랬어요?”
“아! 그런 거라면, 저도 그때쯤 요리를 시작한 셈이죠.”
“거봐요. 그렇다니까. 아마 페이슬리 양도 그랬을걸요? 본인 입으로도 그랬잖아요? 집에 피아노가 있었다고. 다들 그렇게 시작하는 거죠. 손쉽게 접할 수 있으니 흥미만 있으면 곧잘 흉내를 낼 수 있다는 게 어린아이들의 장점이니까요.”
“오, 말 된다, 말 돼. 제가 아는 동생 하나가 그러더라고. 그 친구 아버님이 무협지 좋아해서 집에 한가득이었는데, 그 덕분에 기역 니은을 무협지 보고 떼었다고.”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흐르면서 페이슬리 박도 끼어들어 자신의 친구들 얘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그렇게 점점 스튜디오 안이 화기애애해져 가고, 어느 틈에 우린 마치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처럼 수다 삼매경에 빠져들고 있었다. 물론 그 와중에도 난 고민을 거듭하고 있었지만. 다른 건 다 그렇다 치고……. 나레이션이 알려준 사실. 즉 페이슬리 박에게 피아노를 알려준 게 할아버지란 걸 어떤 식으로 말해야 할지가 문제다. 다행히 내가 눈짓을 보내자, 이번에도 한진석은 찰떡같이 알아들었다.
“근데, 아까 말한 서 셰프한테 요리 알려줬다는 사람은 누굽니까?”
근데 제면기는 언제 오려나? 아직까지 오긴커녕 연락도 없는 게 살짝 불안해진다. 괜히 옛날 방식으로 만든다고 했나? 쳇, 나레이션이 추천하는데 별수 있냐고. 그건 그렇고……. 슬슬 밑밥을 깔아야 할 타이밍이긴 한데……. 그래도 너무 진도 빼는 건 곤란하겠지. 제면기가 올 때까진 어떻게든 시간을 끌어야 할 테니.
“아, 제가 말했나요? 누구한테 배웠는지?”
뜻밖에도 대답은 한진석이 아닌 페이슬리 박에게서 들려왔다.
“아직 못 들었어요!”
그만큼 내 얘기에 흥미를 보인다는 거니, 나쁘지 않다.
“누군데요? 말해 봐요, 응?”
“저도 궁금해요.”
픽하고 웃고는 대답해줬다. 긴가민가한 표정으로.
“엄마?”
“워오. 역시 재능은 유전이란 거군요.”
솔직히 그것까진 모르겠다. 내가 기억하는 어머니의 요리는 그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뭔가 울컥하게 만드는 힘이 있을 뿐, 그 맛까지는 사실 기억나지 않으니까. 그런데 희한한 건 막상 뭔가를 먹게 되면 저절로 그 맛들이, 그리고 그걸 먹을 때의 상황이 불현듯 떠오른다는 거다. 혀가 기억하는 걸 테지. 머리가 아니라. 어느 쪽이든 사실 같은 말인지도 모르지만……. 추억이란 이름의.
“그래서 뭐부터 배웠는데요?”
“미역국이요.”
“오! 쎄다, 쎄. 그때가 몇 살 때길래…….”
“아까 말했잖아요. 10살 때 정도였다니까요.”
“농담 아니었어요? 그럼 장난 아닌데? 완전 영재네 영재. 요리 영재!”
와씨, 시간 벌려고 별 얘기를 다 하고 있다. 근데 진짜 왜 안 오는 거람? 이러다 새되는 거 아닌지 모르겠다. 쯧, 안되면 그냥 수타로 뽑지 뭐.
“영재는 무슨. 다 똑같죠. 뭐든 그렇잖아요? 부모님이 뭔가 하고 있는 걸 보면 따라 하고 싶어지는 거. 그게 뭔지도 모르면서.”
방송용으로 하는 말이 아니라 사실이다. 그맘때쯤 난 실제로 미역국을 끓여봤더랬다. 어머니께서 직접 알려주신 건 아니었지만. 엄마 생신 때였다. 보기엔 쉬워 보였으니까. 당연히 나도 할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리고 물까진 어찌어찌 앉혔는데……. 마른미역을 통째로 넣는 바람에 망했다. 누가 알았나? 그게 그렇게나 불어버릴 줄. 납작하게 말라 있던 미역이 몇 배는 커져서 냄비뚜껑을 뒤집어버리고 튀어나올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더랬지.
덕분에 외출했다가 돌아오신 어머니께선 한참이나 멍하니 주방을 바라보셨던 거로 기억한다. 하긴, 기가 막히셨을 것이다. 주방이 온통 미역으로 난장판이었으니까.
“그렇게 호기심에 시작하지만, 점점 빠져들게 되고 그러다 정신 차려보면 그게 직업이 되어 있는 경우가 왕왕 있다는 거죠. 저처럼요.”
“흐흐흐. 맞아요, 맞아. 나도 그런 케이스라니까? 나 어릴 때부터 말하는 거 엄청 좋아했거든요. 주위 사람들이 내 얘기 듣고 웃는 게 좋았달까. 그래서 좀 과장되게 행동하기도 하고, 쉴 새 없이 떠들어댔는데, 봐봐. 지금 MC하고 있잖아요?”
“원래 개그맨 출신 아니에요?”
“그렇죠. 개그맨. 이상하게 남들 웃기는 게 그렇게 좋더라니까.”
우리 둘이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옛 추억을 더듬고 있자, 이에 질세라 페이슬리 박이 슬쩍 끼어든다.
“맞아요. 나도 그랬어요. 스쿨 플레이에서…….”
“스쿨 플레이? 학예회 같은 건가요? 애들 막 나와서 장기자랑 같은 거하고 그러는 거?”
“맞아요. 스쿨 아츠 페스티벌. 8살 때 처음으로 나갔는데, 미국 간 지 얼마 되지 않은 때라서 말도 잘 못했거든요.”
“그래서 피아노?”
“댓츠 라잇! 무대에 올라가는데 어찌나 떨리던지. 그때 관객석에서 부모님들이 보고 계시다가 파이팅! 하시는 거예요. 그걸 듣곤 용기를 내서 건반을 두드리기 시작했죠. 근데 희한한 건, 치다 보니까 떨리던 마음이 진정되면서 편안해지는 거예요. 막 기분도 좋아지고. 그렇게 즐겁게 피아노를 치고 난 후, 일어나서 객석에 대고 인사를 하는데……. 와우! 다들 박수를 치고, 친구들이 내 이름을 부르면서 달려들더라고요. 선생님도 잘했다고 칭찬하시고……. 엄마는 웃으시는데, 눈물을 흘리고 계시고…….”
그때 기억이 떠오른 걸까. 페이슬리 박은 상기된 표정이었고, 눈가가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살짝 떨리는 목소리였고. 자신의 음성이 높아져 있다는 것도 인지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그 모습을 보다가 물었다.
“이제껏 가장 인상 깊은 음식이 뭐예요?”
정말 뜬금없는 물음이었는지라 페이슬리 박뿐만 아니라 한진석도 어이없다는 듯 날 쳐다보고 있었다. 뭐, 당연하다면 당연한 반응이겠지만. 내 시선은 지금 그녀가 아닌 스탭이 들고 있는 제면기에 꽂힌 상태였다. 드디어 왔단 말이지. 살짝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첨언했다.
“한국 음식 중에서.”
날 빤히 쳐다보던 페이슬리 박이 되물었다.
“한국 음식이요?”
“예. 8살 때까진 한국에서 살았다면서요?”
“아, 기억이 잘 안 나는데…….”
“그럼 근래에 먹어본 음식 중에는 한국 음식이 없어요?”
“있어요. 그……. 뭐라더라. 파리에서 먹어봤는데, 누들이었어요.”
“라면이구나!”
한진석이 툭 끼어들었지만, 정답은 아니었다. 나야 이미 답을 알고 있었고, 심지어 촬영 직전 말해준 탓에 신현정 피디도 뒤늦게나마 알고 있는 상태였다. 당연하지만, 한진석도 알고 있었다. 대본에 쓰여 있으니까. 그런데도 저렇게 능청스럽게 멘트 치는 걸 보면 천상 연예인이지 싶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대본을 읽지 않은 페이슬리 박은 어깨를 들썩이며 고개를 내저었다.
“정확한 이름은 몰라요. 솔직히 조금 매워서 처음엔 먹기 힘들었지만, 먹다 보니 꽤 맛있더라고요.”
옅게 미소를 머금었다. 됐다. 이 정도면 판은 충분히 깔렸다는 판단이었다. 제면기도 왔겠다. 더 이상 망설일 까닭이 없다. 난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진짜 가끔 의심된다니까요. 한국인의 유전자엔 매운맛에 대한 DNA라도 있는 건가 싶어서. 혹시 그거 알아요? 사실 매운맛은 미각과는 상관이 없다는 거?”
“어? 그래요?”
한진석이 장단을 맞춰주고.
“그렇다더라고요.”
소파에서 벗어나 식재료 선반 쪽으로 걸어가며 얘기했다.
“단맛, 짠맛, 신맛 등은 혀에 있는 미뢰를 통해 그 맛을 인식하는 반면, 매운맛은 통각이라더라고요. 그럼 우리가 맵다고 느끼는 감각은 그냥 아픈 거에 불과하단 건데……. 웃차!”
선반 아래쪽에 놓여 있는 20kg짜리 밀가루 포대를 들어 올렸다. 사실 면을 만드는데 이 정도까지 많이 필요하진 않지만, 어쩌겠는가. 제면용 밀가루인 중력분은 이보다 작은 게 없는데. 아마 구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시각적인 효과 때문에 그런 듯하다. 다 쓰지 못하더라도 이런 걸 원하는 거겠지.
“오오오오! 서 셰프님, 근육 장난 아닌데요?”
오버하고 있는 한진석만큼이나 페이슬리 박의 반응도 즉각적이다. 꺅꺅거리진 않지만, 두 손으로 입을 가리곤 두 눈을 초롱초롱 빛내는 게 꽤 귀엽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별다른 감정이 느껴지는 건 아니고. 뭐, 촬영진의 의도에 충실히 따라주는 거라고나 할까. 아무튼, 그 상태로 면을 만들 때 쓸 소금과 양념용 재료들을 챙겼다. 그러면서도 아까 하던 말을 마저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말이 그렇다는 거고요. 사실 전 동의하기 힘들어요. 매운맛이란 게 그저 통각이라니……. 과학적으로는 어쩔지 모르지만, 전혀 납득이 안 된달까. 제가 한국인이라서 그런가? 매운맛이 빠진 밥상은 전혀 상상이 안 되니까요.”
고명의 재료로 쓰일 고기와 달걀, 무 등을 챙긴 후 조리대로 향했다. 턱! 반질반질 윤기 나는 대리석 조리대 위에 밀가루 포대를 내려놓곤 물었다. 페이슬리 박에게.
“혹시 부산이라고 아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