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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 페이슬리 박 (1) (70/204)

#70. 페이슬리 박 (1)2021.03.12.

뭐래? 어처구니가 없어서 물었다.

“뭘 하자고?”

“좀 뜬금없이 들리겠지만, 내 감으론 이거 대박이라고 본다.”

“대, 대박?”

“그래. 대박!”

“……그래서? 상품으로 만들자고?”

“응!”

“니네 회사에서?”

“응!”

“그럼 막 마트나 슈퍼 같은 데서 팔리겠네?”

“그렇게 되겠지.”

난 녀석을 빤히 쳐다보다가 물었다.

“그러다 망하면?”

그러자 강형식은 대답 대신 크게 웃었다. 어찌나 크게 웃는지, 내가 다 민망할 정도였다. 그렇게 한참을 웃더니, 녀석은 눈꼬리에 맺힌 눈물을 손등으로 찍어내며 말했다.

“안 망해, 아니 절대 망할 수가 없어.”

“너무 장담하는 거 아냐?”

“아니. 상품만큼 소비자 반응도 정직한 법이거든. 맛있는데 망한다? 그건 이제 막 사업을 시작한 업체 정도나 돼야 가능한 일이야. 반대로 말하면, 상품을 출시했는데 망했다? 그건 맛이 없었다는 얘기기도 하고. 이런 말 하면 좀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식품회사 그중에서도 특히 대기업에서 내놓은 상품이 대중적인 입맛을 사로잡을 정도로 맛있다면, 망하려고 애를 써도 망할 수가 없다는 거지.”

나 역시 한 가지는 동의한다. 사모님 표 맛간장은 맛있다는 것.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맛간장과 비교를 해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는다. 아니 애당초 비교하는 것 자체가 죄송스러울 정도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맛간장을 만들기 위해 들어가는 재료만 서른 가지가 넘는다. 그것도 일반인들은 좀처럼 먹어볼 수 없는, 아니 평생 구경 한번 못해본 산나물들이 주를 이룬다. 솔직히 말해서 맛만 그런 게 아니라 향까지 살아있으니, 한국인이라면 맛없다는 말을 할 수가 없는 게 사모님 표 맛간장이었다. 여기까진 동의하는데……. 사업은 또 다른 영역인지라 나로선 뭐라 대답하기 어렵다. 특히…….

“……사모님께 물어봐야 하는데.”

“그게 무슨 말이냐?”

난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이내 털어놓았다. 산속에서 지내며 사모님과 함께했던 시간들을. 아저씨 얘기라든가, 그 외에 잡다한 일상들에 대해선 빼고서. 그런데도 한참이나 걸려서야 모든 얘기를 마칠 수 있었다.

“그럼 이렇게 하자.”

“어떻게?”

“맛간장 가진 거 있지?”

고개를 끄덕이자, 강형식이 기분 좋게 웃는다.

“샘플로 조금만 덜어줘. 그걸로 난 사업부랑 협의할 테니까, 넌 그동안 사모님을 한번 만나봐.”

“음……. 글쎄. 지금 그럴 상황은 아닌데…….”

“시간이 걸려도 좋으니까 부담 갖지 말고. 만약 안 되면 또 어떠냐? 설마 내가 너한테 뭐라고 하겠냐? 그저 난 이렇게 훌륭한 상품이 이대로 묻히는 게 안타까울 뿐이야. 아, 물론 사업성 역시 뛰어나서 욕심이 나는 것도 사실이고.”

정직하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융통성이 없다고 해야 할지. 그저 정에 호소하고 그럴듯한 말로 포장해도 될 텐데, 녀석은 그러지 않는다. 솔직한 심정을 고스란히 털어놓고 있는 것이다. 후우, 이러니 내가 어쩌겠냐고.

“장담은 못 해. 자세히 말하긴 어려운데, 지금 아저씨께서 좀 편찮으시거든.”

“아! 그, 그래?”

“그래. 그러니까 너무 기대하진 마. 어쩌면 말도 못 꺼내볼 수도 있어.”

“……그렇게 알고 있을게.”

녀석의 얼굴에 실망감이 스쳤지만, 어쩔 수 없는 건 없는 거다. 누가 뭐래도 맛간장은 사모님께서 만드신 거고, 그걸 어떻게 사용하든 그 전에 사모님과 상의하는 건 너무 당연한 일이니까. 평소 때라면 그저 전화 한 통이면 될 일이겠지만, 지금은 너무 미묘한 때이기도 하고, 심정적으로 나도 이 얘기를 꺼내고 싶지 않았으니까. 적어도 아저씨께서 어느 정도 괜찮아지실 때까지는.

  *** 다음날 일찍 일어나 오피스텔 지하에 있다는 피트니스 센터에서 러닝머신을 뛰고 난 후 강형식을 따라 길을 나섰다.

“태워다 준다니까 그러네.”

“됐어 인마. 차도 막히는데 얼른 가봐.”

“진짜 괜찮대도. 조금 늦는다고 하면…….”

“예, 예. 마음만 받죠. 실장님께서는 늦지 않게 출근하셔서 직원들에게 모범을 보시도록 하십쇼.”

혀를 차며 고개를 내젓는 녀석을 뒤로하고 차에서 내렸다. 날 내려준 후에도 차창을 내리며 머뭇거리던 녀석은 내가 등을 돌리고 걸어가자 그제야 못 이긴 척 차를 출발시켰다.

“보자, 여기서 갈아타면…… 한 이십 분이면 도착하겠네.”

지하철역으로 내려가며 핸드폰에 깔린 앱을 확인하곤 느긋하게 걸음을 옮겼다. 촬영시간보다 두 시간이나 일찍 나온 터라 시간은 여유롭다 못해서 남아돌 정도였다. 그러다 보니 평소와는 달리 천천히 움직이며 역내로 들어섰다. 다들 출근하는지 사람들이 바쁘게 걸어가는 모습이 역동적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쫓기는 듯 보였다. 그렇게 사람들 구경을 하면서 혹여라도 사람들이랑 부딪힐까 봐 일부러 벽 쪽으로 붙어서 걸어가고 있을 때였다. 저만치에 서 있는 여학생들이 날 쳐다보고 있는 게 보인다. 교복을 입은 거로 봐선 초등학생을 아닌 것 같고, 중학생쯤 됐으려나? 귀엽고 깜찍한 느낌이라 나도 모르게 수아가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어젠 정신이 하나도 없어서 외숙모께 전화를 못 드렸네. 지금이라도 전화를 할까 하다가 너무 이른 아침이다 싶어서 이따 점심때쯤 통화하기로 마음먹었다. 여학생 무리 중 한 명이 내 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한 것도 그때쯤이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서 그 아이를 쳐다보는데, 아이는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고 또 날 보면서 천천히 다가왔다. 그러더니 내 앞에 이르러 불쑥 묻는다.

“서진영?”

헐. 말세다, 말세. 내 키의 반 토막만 하고, 내가 그동안 먹은 밥그릇 수의 반의반도 안 먹은 아이가 내 이름을 막 부르고 있다.

“누구?”

그래도 혹시나 해서 물었다. 수아 친구이거나 수연이 누나 제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렇다고 해서 내 이름을 제 친구인 양 막 불러댄 게 용서되는 건 아니었지만. 하지만, 둘 다 아니었다. 설마 하는 생각도 있었는데, 그 설마가 맞아 들었던 것이다.

“서 셰프죠?”

이런. 설마 날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 거라곤 상상……은 해봤지만, 진짜로 이런 일이 벌어지니 상상했던 것보다 더 황당하다.

“맞긴 한데…….”

“꺄아아아악!”

야야! 이게 지금 비명인지 탄성인지 지를 일이야! 그것도 딴 사람들 다 보고 있는데, 사람 쪽팔리게.

“맞대! 맞대! 서진영 맞대!”

그래, 맞아! 맞으니까, 이제 그만 좀 해라. 와씨, 얼굴이 달아오르다 못해서 뜨거울 지경이다. 심지어 고개도 못 들겠다. 너무 창피하면 쥐구멍을 찾는다더니, 농담이 아니라 지금 내 눈앞에 쥐구멍이 있으면 어떻게 해서든 몸을 구겨 넣고 싶은 심정이었다.

“사인해 줘요!”

“저두요!”

“난 사진 찍을래염!”

찍을래염? 말투하곤……. 확 그냥…… 귀엽네. 살짝 다르긴 한데, 이하연 닮은 말투라서 묘하게 친근하게 느껴진달까. 그게 아니더라도 아직은 어린 티를 벗지 못한 여학생들인지라 뭘 해도 귀여울 나이인 거지.

“사인?”

“예!”

병아리 새끼들도 아니고, 세 명이 동시에 대답하는 풍경은 다른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던가 보다. 하아, 결국 난 여학생들을 비롯해 갑자기 몰려든 사람들에게 사인을 해주느라 지하철을 두 번이나 놓쳐야 했다. ***

“간혹 그런 일이 있죠.”

“그래도 이해가 안 가네요.”

“흐흐흐. 일반인들 기준에선 특이한 일인 건 분명하죠.”

“그러니까요.”

“실검에도 떴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거 아닐까요?”

아닌 게 아니라 내 이름은 어젯밤까지도 실검에 올라 있었다. 물론 잠깐이나마 1위에 올라갔던 이름도 곧바로 떨어져 10위 언저리에서 머물긴 했지만. 그러다가 오늘 아침에 확인해보니, 나는 말할 것도 없고 류승렬의 이름도 온데간데없었다. 기사도 마찬가지였고. 하긴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다. 쌍천만을 찍은 류승렬도 하루면 없던 일처럼 취급되는데 나 같은 일반인이야 말할 필요도 없겠지. 그만큼 콘텐츠가 빨리 소모된다는 것이기도 하겠지만, 아직까지 사람들에게 ‘네 마음의 요리를 들어봐!’가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되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지표라고 보아도 무방할 터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날 알아본 여학생들이 이상한 거겠지.

“방송을 아예 안 하실 거면 몰라도, 적응하시는 게 좋을 거예요. 연예인 병에 걸려서 주변만 살피는 것도 문제지만, 반대로 너무 안하무인이면 사람들한테 욕먹을 수도 있거든요.”

“애들이니까 알아본 거겠죠.”

날 마중 나온 건지, 아니면 우연히 만난 건지는 몰라도 방송국 앞에서 마주친 조강훈 FD와 함께 스튜디오 쪽으로 향하면서 지하철에서 있었던 일에 관해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다.

“확실히 애들이 빠르긴 빠르죠. 아마 걔들 아니었으면 다들 못 알아봤을걸요?”

“그렇겠죠?”

“예. 어지간히 뜬 경우가 아니면, 연예인들도 잘 못 알아봐요.”

“후우. 그러니까, 난 재수가 없…….”

“재수가 좋은 거죠. 알아봐 주는 사람도 있고.”

응? 그런 건가? 뭐가 어떻게 좋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유명해진 거라고 볼 수도 있으니……. 아, 몰라 몰라. 뭘 이런 걸 고민하고 앉았냐고.

“오! 서 셰프니이이이임!”

스튜디오에 들어서기 무섭게 들려오는 목소리. 저만치서 한진석이 오두방정을 떨면서 달려오고 있다. 반갑게 구는 건 좋은데, 텐션이 지나치게 높다는 게 사람을 참 곤란하게 만든다. 뭐, 그게 저 양반 매력이겠지만. 그건 그렇고…….

“일찍 오셨네요?”

“오늘은 다른 스케줄은 없거든요.”

그럼 집에서 쉬거나 하다못해 카페에서 차라도 한잔 그랬냐는 물음이 목구멍까지 넘어왔지만, 한진석 특유의 빠른 말재간에 원천봉쇄를 당했다.

“집에 놀면 뭐해요? 이렇게 현장에 나오면 같이 놀아줄 사람이 넘쳐나는데.”

아, 저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구나. 방송계에서도 성실하기로 유명하다더니 달리 그런 게 아니라……. 심심해서였다는…… 비밀을 알게 된 난 픽하고 웃을 수밖에 없었다.

“엇! 사자!”

응? 이건 또 무슨……. 한진석의 시선을 따라 눈길을 돌리다가 다시 한번 웃고 말았다. 이번엔 쓴웃음이었다. 스튜디오에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다름 아닌 신현정 피디였기 때문이다. 와, 이 아저씨 진짜 집요하네. 지난번 촬영 때도 그러더니, 여전히 신현정 피디를 사자라고 부르고 있다. 자신을 사자랑 따악! 마주친 하이에나라고 했던가?

“아이고. 눈 마주쳤네요. 하는 수 없죠. 가시죠. 사자 앞으로!”

한진석이 실실 웃으며 앞으로 나섰다.

“따-악!”

하는 소리와 함께. ***

“인사들 하세요.”

신현정 PD는 한걸음 물러나며 얘기했고, 그와 동시에 한 여성이 앞으로 걸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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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훤칠한 키에 밝은 머리칼만큼이나 환한 미소를 지닌 이십 대 여자였는데, 어색한 한국어 때문인지 이상할 만치 괴리감이 느껴졌다. 외모만 보면 분명 동포인데, 말을 섞는 순간 외국인을 대하는 느낌이랄까. 이쪽에선 오히려 영어로 말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잘 부탁드립니다.”

“반가워요. 와우, 근데 진짜 미인이시다!”

“호호호호. 나, 당신 TV에서 봤어요.”

“음하하하. 봤죠? 제가 이렇습니다. 외국에서도 곧잘 본다고 하더니. 이러면 나도 한류스타…….”

“아뇨, 아뇨. 피디가 보여줘서 쪼금 봤어요. 웃겼어. 많이.”

“아, 하하……. 그, 그렇군요. 근데, 한국말 잘하시네요? 계속 미국에서 살았다고 하던데?”

말이 빨라서 그랬을까? 아니면 민망함을 감추려고 말을 돌리는 속도를 따라잡지 못한 걸까. 페이슬리 박은 한진석의 얘기를 잘 알아듣지 못하는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자 옆에 서 있던 조강훈 FD가 제법 유창한 영어로 그녀에게 통역해주었다. 그제야 말뜻을 알아들은 그녀가 배시시 웃더니 엄지와 검지를 붙였다가 살짝 띄우며 말했다.

“쬐끔. 한국말 배운 지 세 달밖에 안됐어요.”

예상외다. 쬐금이라고 표현한 서투른 한국어 실력이 예상외라는 게 아니라, 한국말을 배웠다는 사실 자체가 예상 밖이었다. 뭔가 특별한 이유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을 때였다. 따라라라라, 라라……. 아주 적절한 타이밍에 들려오는 음악 소리. 반가운 마음에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리자, 그걸 봤는지 페이슬리 박이 눈을 반짝인다. 그러거나 말거나 난 즐거운 마음 반 기대 반으로 나레이션을 듣고 있었다. 그리고……. 나레이션이 끝났을 때, 표정을 일그러뜨리지 않을 수 없었다. 하아, 미쳤네 진짜! 이거 쿡방이라며? 아니, 쿡방을 빙자한 힐링 프로그램이라며? 그런데 왜? - ……그녀에게 피아노를 처음 가르쳐준 사람은 다름 아닌 할아버지셨다. 그래, 그래. 할아버지. 좋지. 그러니까, 할아버지가 가르쳐준 거면 가르쳐준 거지, 왜 나한테……. - 워낙 어렸을 때라 페이슬리 박은 기억하지 못한다. 할아버지가 잡아주던 손도, 건반을 하나하나 짚어주며 음악에 대해 알려주시던 손길도, 심지어는 얼굴조차 떠오르지 않지만, 그럼에도 그녀의 무의식 속에선 여전히 그리움의 대상으로 남아 있는 할아버지셨다. 따라라라라, 따라……. - 그녀의 할아버지는 아직 살아 계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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