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 조짐 (2)2021.02.28.
게스트가 피아니스트라서 그런지 이런 퍼포먼스도 가능하구나…… 싶었다. 거기에 내가 생각하는 대로 녹화가 되면, 그 자체만으로도 이슈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뭐, 그게 아니라도 재밌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밀면…… 아니, 그 당시엔 밀냉면이라고 불렀다던가? 아무튼, 그걸 재현하는 것도 즐거울 거란 생각도 든다. 여러모로 기대된달까.
“그나저나 왜 사모님한테선 연락이 없지?”
전화라도 걸어봐야 하나? 시간을 확인하면서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너무 늦었는데……. 전화를 해 볼까 하는 마음이 들었지만, 이내 포기했다. 사모님이 전화를 안 하시고 계신다면 그러시는 이유가 있을 거란 생각에. 걱정되긴 하지만, 한편으로는 나레이션을 통해 이미 결과는 알고 있었으니까. 분명 폐암 초기라고 했지. 아저씨가 놀라시긴 하시겠지만, 그래도 이겨내실 거라고 믿는다. 그렇다고 해도 걱정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그렇게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 걱정을 안고서 저택으로 향했다. 그 후 어떻게 왔는지 거의 기억이 없다. 그만큼 나도 취해 있었다는 거겠지. 저택 내 숙소. 씻어야 하는데……. 뒤늦게 올라오는 취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동안 쌓아 두었던 피로가 이참에 확 올라온 건지 눈꺼풀이 너무 무겁다. 결국, 난 옷을 입은 채로 뻗고 말았다. 으음……. 핸드폰에서 뭔가 소리가 들려오는 거 같은데……. 눈을 감은 채로 힘없이 손을 뻗어보지만 좀처럼 핸드폰이 잡히질 않는다. 툭. 몇 번인가 손을 휘젓다가 그대로 떨궜다. 그러곤 잠이 그대로 잠이 들었다.
*** 아침이라고 하기엔 조금 이른 시각. 새벽 5시에 눈을 뜬 나는 잠시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고 있다가 몸을 일으켰다.
“끙.”
절로 신음이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그래도 나가야 한다. 스스로 약속했으니까. 하루도 안 빠지고 운동하기로. 간단한 씻고 나서 추리닝 차림으로 숙소를 나섰다. 숙취 때문인지 골이 살짝 아팠지만, 그래도 뛰기로 했다. 아오라지에 있을 때처럼 물을 긷고 나무를 할 필요는 없었지만 그래도 운동이 필수라는 걸 온몸으로 깨달았기 때문이다. 목표량은 2킬로미터. 아침마다 조깅을 통해 근력과 지구력을 좀 더 키우고, 나중엔 전문 트레이너가 있는 헬스장도 가볼 생각이었다. 아저씨한테서 힘을 쓰는 요령에 대해 배우긴 했지만, 그건 말 그대로 요령일 뿐, 그걸 몸으로 체득했다는 건 아니니까. 남들보다 조금 더 체력이 좋다곤 해도, 그 힘을 어떻게 사용하느냐가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으니 주저할 필요가 없는 거다. 게다가 주방장님이 내준 숙제도 왠지 아저씨가 알려주신 것과 맞닿아 있다는 느낌이었다. 그러니 뛴다.
“훅, 훅…….”
겨우 2킬로쯤이야 하고 생각했는데, 장난이 아니다. 저택을 나와 동네를 빙 돌아 위쪽에 있는 야트막한 산까지 뛰어갔다 온 게 다인데도 숨이 찬다. 다행히 근육이 굳어 쥐가 나거나 하진 않았지만. 여실히 느낀다. 운동은 운동, 노동은 노동이란 걸. 결국, 노동으로 만들어진 몸은 밸런스가 제대로 맞춰지지 않는다는 걸 다시 한번 깨달으며 저택으로 돌아왔다. 그래도 한 시간쯤 뛰고 나니 몸이 개운하다. 응? 어젯밤에 온 톡을 확인하다가 웃고 말았다.
- 아직도 술 마시는 중이에요?
- 많이 마시진 마요. 몸 상해요.
- 벌써 12시인데 설마 아직까지 밖?
- 연락 줘요. 걱정되니까.
- 집이죠?
- 자요?
- 자나 보네.
- 나 할 말 있는데…….
- 아침에 일어나면 연락 줘요.
시간차를 두고 띄엄띄엄 온 톡을 읽다 보니 무슨 일기를 읽는 느낌이다. 귀엽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고……. 바로 톡을 보냈다.
--- 어제는 집에 오자마자 쓰러져 잠들었네요. 덕분에 톡도 확인 못 했어요. 미안합니다.
답톡이 바로 날아들 줄 알았는데, 좀처럼 기다려도 연락이 없다. 대화 앞에 떠올라 있는 1자도 그대로고. 바쁜가? 아님 자나? 이따가 다시 연락해 보지 뭐. 조금 더 기다리다가 나갈 준비를 했다.
“사모님한테도 연락해 봐야 하는데…….”
어젯밤부터 계속해서 마음 한구석을 맴돌던 아저씨에 대한 걱정. 오전 중에 전화 한번 해 봐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샤워기에 물을 틀었다. 그렇게 샤워를 마친 후 옷을 챙겨 입곤 출근을 하니, 주방은 아무도 출근하지 않았는지 한산하다 못해 적막하기까지 하다. 전등을 켜고 어제 썰다 만 당근을 꺼내 칼질을 시작했다. 탁탁탁탁. 아무도 없는 주방 안에 도마를 때리는 칼질 소리만 울리고 있었다.
“아우, 머리……. 깨질 거 같아.”
준석이 형이 온 건 6시가 조금 넘었을 때였다.
“야, 나 어제 얼마나 마신 거냐?”
“음, 죽지 않은 게 용할 만큼? 저였으면 오늘 못 나왔을 거예요.”
“어쩐지. 와, 알람 소리 듣고 일어나는데 나는 누가 망치로 두들겨 패는 줄 알았다.”
그럴 만도 하지. 마신 술이 얼만데. 형이 마신 술만 소주 3병에 맥주가 3만cc다. 중간중간 화장실에 가질 않았으면 취하기도 전에 배 터져 죽었을지도 모른다.
“형수님이 뭐라고 하진 않으세요?”
“어? 와이프? 끄응. 글쎄 별말 없던데……. 사실, 그게 더 무서워.”
웃음이 나왔다. 준석이 형이 자타공인 애처가인 건 맞다. 자칫하면 공처가가 될 조짐도 보이지만, 다행히 형수님이 또 이럴 땐 별소리 안 한다는 거지만. 어떨 때 보면 형수님이 형을 조련하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 이랬건 저랬건 형은 전생에 나라를 구했을 거라는 데 내 손모가지를 건다. 형수님처럼 현명한 여자를 요즘 세상에 어디서 구한단 말인가.
“북엇국 먹는데, 좀 눈치 보이긴 하더라.”
봐라. 임신까지 한 상황에서 밤늦도록 술이나 진탕 마시고 들어온 남편이 뭐 이쁘다고……. 그것도 하루 이틀도 아니고. 워낙 사람을 좋아해 나뿐 아니라 친구들과도 종종 만나 술을 마시는 형인데, 한번 마셨다 하면 어제와 비슷한 양상의 상황이 펼쳐지곤 하니까 말이다. 하여간 장가 하나는 잘 갔다니까.
“근데, 방송 언제냐?”
뜬금없긴. 갑자기 생각난 듯 묻는 준석이 형의 질문에 살짝 민망해져서 대답했다.
“오늘이요.”
“오! 서 셰프! 드디어 오늘 맹활약을 하시는 건가?”
“아뇨. 그런 거 아니에요.”
그때, 문이 열렸다.
“어, 나오셨어요?”
주방 문을 열고 들어서는 안성댁 아주머니께 인사를 하자 고개만 끄덕이신다. 여전히 표정 없는 얼굴이셨지만, 그래도 처음에 비해선 많이 좋아진 거 아닐까…… 하고 생각해본다. 처음 여기 왔을 땐 못마땅한 표정이 역력해서 지금처럼 말도 못 붙였지 않던가.
“혜순이 누나, 왔어요?”
곧이어 혜순이 누나도 오고, 도마 위에 수북이 쌓여있던 당근 조각들을 치운 후 칼을 챙겼을 때 김진호 셰프가 출근했다.
“메뉴는 다들 알 거고. 저녁에 회장님 늦으신다니까 오늘은 좀 일찍 끝내는 거로 하지.”
종종 있는 일이었다. 강 회장이 일 때문에 늦게 오는 날에는 희한하게도 다른 식구들도 저녁식사를 하러 오질 않는다. 와도 서너 명 정도? 거의 점심식사 때와 비슷한 수준이다 보니 준비하는 식사의 양이 줄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해서 메뉴가 바뀌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양이 줄면 시간이 주는 건 당연한 일이다. 나로선 잘된 일이었다. 오늘 방영되는 ‘네 마음의 요리를 들어봐!’를 마음 놓고 볼 수 있게 되었으니까.
“시작들 하지!”
김진호 셰프의 얘기와 함께 주방이 분주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예!”
대답은 우렁차게 했지만……. 후, 왜 이러지? 어제도 그랬지만, 오늘 유난히 손에 일이 잡히질 않는다. 사모님한테서 연락이 없는 것도 그렇고……. 방송 나가고 욕먹는 거 아닌지 모르겠네. 그나저나 고윤수 주방장님께서 내주신 숙제는 어쩌지? 이래저래 심란하기만 한 마음을 추스르며 요리에 집중하려 했다. 그런다고 은근히 죄어오는 불안함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지만. *** 전화가 걸려 온 것은 점심식사가 거의 끝나갈 무렵이었다.
“잠시만 전화 좀 받고 올게요.”
준석이 형한테 양해를 구하곤 주방을 벗어났다.
“사모님?”
내 얘기에도 아무런 대꾸가 들려오지 않는다. 그것만으로도 가슴이 털컥 내려앉았다. 다시 한번 사모님을 부를까 했지만, 이상하게도 좀처럼 입술이 떨어지지 않는다. 그래도 이대로 있으면 안 된단 생각이 들었다.
“거, 검사는 어떻게…….”
말이 끝나기도 전이었다. 수화기 너머에서 나직하지만, 촉촉한 음성이 들려왔다.
- 진영아.
“예?”
갑자기 내 이름을 부르니 괜스레 심장이 두근거린다. 혹여라도 무슨 일이 있나…… 아니, 무슨 일이 있다는 건 이미 알고 있지만, 내가 예상하지 못한 일이라도 생겼나 싶어서 걱정부터 앞선다. 그렇게 마음을 졸이고 있을 때였다.
- 고맙다.
순간 숨이 막혔다. 그리고 뭐라 할 말이 없었다. 나왔구나. 결과……. 젠장. 치료가 가능하다곤 해도, 역시 아무 이상이 없었으면 했는데. 아무런 말도 못 하고 그대로 석상처럼 굳어있었다. 그 상태로 기다렸지만, 수화기 너머에선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전화를 끊은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고요하다. 그게 더 마음을 아프게 만들었다. 난 입술을 잘끈 씹으며 기다렸다. 사모님의 얘기를.
- 그, 그이가…….
아……. 살짝 떨리고 있는 사모님의 음성을 듣고 있자니, 목이 멘다.
- 폐암……이래.
수화기 너머 착 가라앉은 목소리. 눈앞이 캄캄해졌다. 여장부 중의 여장부라고 생각하고 있던 사모님이시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도 아무렇지 않을 순 없으실 거다. 그런데도 담담한 목소리……. 아, 그러려고 하신다. 그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어느새 코끝이 시큰해졌다. 괜히 죄송하고, 안타까워서.
“사모님…….”
- 어, 그래. 진영아.
여전히 차분하게 들려오는 목소리. 하지만, 떨리는 건 어쩔 수가 없으시나 보다.
“아저씨는…… 괜찮으실 거예요. 아시잖아요. 아저씨. 아저씨라면 이겨내실 거예요. 그러니까…… 힘내세요.”
- 응. 난 괜찮아. 그이도…… 그렇고.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목소리에 물기가 어려 있다. 근데 그걸 또 들키지 않고 싶으신지 별일 아니란 듯 말씀하신다.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진짜 별일 아닌 줄 알 정도다. 나로선 그게 더 가슴 아프다. 정말 별일 아니었으면 좋았을 것을.
“……제가 갈까요?”
- 아냐. 병원에서도 폐암…… 초기라고 하고, 치료하면 나을 수 있댔어. ……그이도 감기 같은 거니까 걱정 말라고 큰소리치고 있고. 그러니까 오지 마.
“…….”
순간, 이대로 기차역으로 가 강원도로 달려갈까 하는 충동이 일었다. 그걸 애써 참으며 얘기했다.
“초기래요?”
알면서 묻는다. 그런데도 마음은 아리다. 머리와 가슴이 따로 노는 그런 느낌이었다. 어느새 눈가가 뜨거워졌다. 코도 살짝 막혀서 자꾸만 들이키게 된다. 근데 또 그걸 들키긴 싫어서, 아니 들려드리고 싶지 않아서 꾹 참았다.
- 응. 그렇대. 폐암인데…… 치료는 가능하다고…….
말씀을 끝까지 하지 못하신다. 먹먹하다. 그때, 사모님이 말을 이어 얘기하셨다.
- 수술을 할지는 아직 결정 안 났는데, 항암치료는 받게 될 거래. 의사 선생님 말씀으로는 조금만 늦었으면 힘들 뻔했다고…….
꾹. 핸드폰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나마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초기라서. 뭐라 할 말이 없어서 가만히 있는데, 사모님은 한참 동안 말씀이 없으셨다. 그러다가 다시 한번 내 이름을 부르신다.
- ……진영아.
“예.”
내가 애써 감정을 추스르며 대답하자, 사모님이 말씀하셨다.
- 너 아니었으면……. 정말, 고마워.
울고 계신 건가? 말끝이 흔들리며 물기에 젖어 있었다. 울컥하는 순간이었다. 그러면서도 다시 한번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만일에 하나라도 늦게 발견돼서 치료마저 불가능했더라면……. 생각만 해도 아찔하고, 눈앞이 다 캄캄해진다.
“그런 말씀 마세요. 제가 받은 게 얼만데요.”
“……그래. 알아. 네 마음.”
“…….”
“그래도 고마워.”
처음으로 나레이션에게 고맙다는 생각을 하면서 통화를 마쳤다. *** 아릿한 마음은 여전했지만, 그래도 초기에 발견돼서 다행이란 생각이었다. 예전엔 어땠는지 모르지만, 요즘은 폐암도 일찍 발견돼서 완치가 가능하다고 하니까. 후우, 그렇다곤 해도……. 사모님 혼자서 힘드실 텐데. 내일 촬영이 끝나면 가봐야 하나? 일가친척까진 모르겠지만, 자식도 없이 두 분이서 서로 의지하며 살아오신 분들이라 지금처럼 힘든 시기엔 나 같은 놈이라도 옆에 있어 드리고 싶었다. 마음 같아선 지금 당장 가고 싶지만……. 애써 마음을 다잡고 일에 몰두했다. 그편이 걱정을 지울 수 있을 거란 생각에. 그렇게 하루를 보내고 이하연에게 톡이 온 것은 저녁식사가 거의 끝나갈 무렵이었다.
- 막 공항에 도착.
- 비행 중이라 톡을 지금 확인했어요.
- 형식이 오빠가 그러던데, 오피스텔에서 같이 방송 보기로 했다면서요?
- 헤헤. 저도 그쪽으로 가는 중.
비행기? 어제 이후로 톡이 없더니만……. 확인해 보니 앞쪽에 확인하지 않았던 톡이 하나 더 있다.
- 급하게 일이 생겨서 중국 가요. 될 수 있으면 방송 전까지 오겠지만, 혹시라도 못 오게 되더라도 서운해하지 말라고요.
음……. 왜 이걸 못 봤지? 할 말 있다고 한 게 이거였나? 근데, 중국이 가깝긴 가깝구나. 출장인데 하루 만에 다녀오고. ……아닌가? 무리해서 온 건가? 그녀의 얼굴이 떠오른다. 하얀 얼굴에 커다란 눈. 길게 뻗은 속눈썹. 그리고 도톰한 입술이 차례차례 떠올랐다. 그러자 갑자기 가슴이 두근거렸다. 왜일까? 갑자기 그녀가 못 견디게 보고 싶어졌다. 그래서 그런지 톡을 보내는 내 손길이 빨라졌다.
--- 얼른 와요.
단 네 글자였다. 근데 그걸 보내놓고 나니, 어째서인지 얼굴이 다 뜨겁다. 속마음을 들킨 것만 같아서. 아니, 진짜 들킨 건가? 어째 답톡이 없다. 분명 1자는 사라져 있는데. 한참을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 제가 그렇게 보고 싶어요?
실소가 나온다. 동시에 바짝 당겨진 실처럼 팽팽해져 있던 마음이 한순간 느슨해지는 느낌이었다. 그 느낌은 뭐랄까. 맥이 빠진다기보단 뭔가 부드러운 것에 몸을 기대는 느낌이었고, 동시에 차갑게 굳어있던 마음이 따뜻하게 풀리는 그런 기분이었다.
--- 저도 일 끝나면 바로 갈게요. 거기서 봬요.
그렇다고 그런 기분을 그대로 옮겨 보낼 순 없는 노릇. 쑥스럽고 간지럽달까. 나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 강구철 사장은 불 꺼진 사무실 안에서 TV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미 대부분의 직원들이 퇴근했지만, 그만은 좀처럼 사무실을 떠날 수 없었다. 그건 단지 아버지인 강 회장이 아직까지 회사에 남아 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의 시선이 머물러 있는 TV 속 화면. 뉴스가 흘러나고 있었지만, 그의 귀로는 하나도 들려오지 않는다. 대신 지난주부터 이어져 온 상념이 머릿속을 떠다녔다. 그리고 그것은 기어이 의문으로 이어졌다.
“대체 뭘까?”
뭐가 아버지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일까? 자신이 보기에 ‘네 마음의 요리를 들어봐!’는 재밌는 예능 프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물론 비즈니스 영역에선 마케팅에 도움이 되긴 하겠지만, 그뿐이었다. 그런 작은 부분들은 자신이 신경 쓸 부분도 아니었고. 그의 기준에서 보자면 솔직히 말해서 아무런 가치도 없었다. 늘 큰 그림을 그려야 하는 자리에 있기에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 할 수 있었다. 경영자는 나무가 아니라 숲을 봐야 하니까. 그런 면에서 보자면 아버지 역시 자신과 크게 다르지 않을 거였다. 자신의 롤모델이자, 모든 걸 따라 하고 배우려 했던 분이 아버지셨으니까 말이다. 그런 아버지가 그깟 예능 프로에 관심을 가지신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 지금도 봐라. 직원을 통해 알아본 바로는 이 순간에도 아버지께선 퇴근도 안 하시고 회사에 남아 계신다고 한다. 틀림없이 ‘네 마음의 요리를 들어봐!’를 보기 위해서일 거다. 그렇게 한참이나 머리를 굴리며 TV를 바라보고 있던 강구철 사장의 눈이 번뜩였다.
‘역시 그 때문인가?’
그의 머릿속에 한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서진영. ‘네 마음의 요리를 들어봐!’의 메인 셰프. 그리고 이내 또 한 사람의 이름이 떠오른다. 강형식.
자신의 조카이며, 살아 있었다면 삼한그룹이란 제국의 적법한 승계자였을 형님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 꽈악. 쥐고 있던 리모컨을 힘껏 움켜잡는 강구철 사장. 그의 입매가 일그러지는 순간 눈동자에선 서늘한 빛이 뿜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