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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조짐 (1) (64/204)

#64. 조짐 (1)2021.02.26.

그러고 보니 아저씬 어떠신지 모르겠다. 아직 검사 결과가 나오지 않은 건가? 아니면 폐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고 실의에 빠지신 걸까? 아저씨도 아저씨지만, 사모님도 상심이 크실 텐데. 걱정이 앞서지만, 그렇다고 내가 먼저 전화하기도 그렇고……. 후우.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그래서 이번엔 뭔 소리를 하려고?”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한편으로는 긴장감에 손에 땀을 쥐며 귀를 기울였다. 아니 머릿속에서 울리는 소리에 집중했다. - 서진영은 멍충이다. 헐. 잔뜩 긴장하고 있던 내가 바보같이 느껴질 정도다. 여러모로 지금 상황이 어이가 없게 느껴져서 절로 한숨이 나온다. 참네. 내가 멍청이? 야야, 솔직히 나 정도면 꽤 잘하고 있는 거 아냐? 삐뚤어지다 못해서 망가지기 일보 직전이었던 강형식의 마음도 돌려놨고, 녀석에게 언젠가 필요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김진숙 회장한테서 명함도 받아냈잖아? 뿐인가? 박유나에게 그녀가 임신한 상태란 걸 알려준 것도 나고, 트라우마와 같은 기억을 지닌 류승렬을 보듬어 준 것도 나다. 그밖에도 이런저런 일들을 내 손으로 직접 다 처리했구만. 이정도면……. - 그래도 서진영은 멍충이다. 아, 진짜 뭐래! 짜증이 솟구쳐서 눈살을 확 찌푸렸을 때였다. - 서진영은 지금 완전히 까먹고 있다. 모레 있을 방송 촬영을 위해 힌트를 줬음에도. 이래서는 촬영 나흘 전에 페이슬리 박이 원하는 밀면이 대충 밀가루나 반죽해서 만들어내는 면이 아니라고 얘기해준 게 전혀 의미가 없는 것이다.

“……!”

……할 말이 없다. 분하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네. 나레이션의 얘기대로 까맣게 잊고 있었으니까.

“제길!”

멍청이 소리를 들어도 싸다. 두 손으로 마른세수를 하며 중얼거렸다.

“피곤하긴 진짜 피곤했나 보다.”

변명이라면 변명이겠지만, 솔직히 좀 벅찼다. 아저씨 폐암 문제도 완전히 해결된 게 아닌데, 페이슬리 박까지 챙기기엔 내 대뇌 용량이 달린달까. 거기다가 피곤에 절어 자고 일어난 뒤, 주방장님의 시험 아닌 시험까지. 아니, 숙젠가? 아무튼……. 과부하다. 쯧, 그래도 뭐 어쩌겠냐고. 확실히 이번엔 내 실수가 맞는 것을. 어떻게 보면 나레이션은 날 도와주고 있는 셈인데, 그걸 까먹어놓고서 난 잘못한 거 하나 없다고 큰소리 칠 정도로 얼굴 가죽이 두껍지는 않다. 그렇긴 한데……. 어쩐다?

“겨우 이틀 남았는데, 그걸 무슨 수로 구한다냐?”

또다시 한숨을 흘리려던 순간, 번뜩하고 떠올랐다.

“아, 맞다!”

준석이 형 고향이…….

“부산이라고 했지!”

황급히 주방을 향해 돌아선 뒤 문을 열고 준석이 형을 찾았다. ***

“형.”

“어? 왜?”

점심식사가 끝나기 무섭게 준석이 형을 주방 한쪽으로 끌고 가 물었다.

“형 고향이 부산이죠?”

“그렇지. 부산 서면.”

“그럼요. 혹시 밀면에 대해서 좀 알아요?”

“밀면? 알긴 알지. 근데 그건 왜?”

“음, 밀면이 옛날엔 지금이랑 맛이 달랐다면서요?”

“어 그래? 그건 또 몰랐네.”

……번지수 잘못 짚은 거 아닌지 모르겠다. 그래도 뭐 나레이션을 통해서 이미 밀면을 예전 방식으로 만드는 방법은 이미 숙지하고 있었으니까. 단지 도구가 없다는 게 문제지.

“그렇다고 하더라구요. 이름도 밀냉면이라고 불렀다고 하던데…….”

“아, 그러고 보니 예전엔 그랬던 거 같기도 하고. 근데 갑자기 밀면 얘기는……. 너 혹시 방송 때문에 그러냐?”

싱긋 웃어 보이자, 준석이 형이 손을 뻗어 내 머리를 거칠게 헝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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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이. 형이 뭐라 그랬냐?”

“…….”

“나만 믿으라고 했냐, 안 했냐?”

“그랬……죠.”

“그러니까 자꾸 말 빙빙 돌리지 말고 말해봐. 뭐가 필요한데?”

멍해진다. 그래 이 형…… 이런 형이었지. 겉으로 보기엔 살짝 허당끼가 있어 보이지만, 진짜 속은 꽉 찬 남자. 어떻게 보면 자기 덕분에 여기 주방에 들어왔고, 그 후로 운 좋게 TV 방송까지 할 수 있게 된 후배가 아니꼽게 느껴질 법도 한데 전혀 그렇질 않다. 오히려 뭐든 도와준다고 한다. 이러니 내가 형이라고 안부를 수가 있겠냐고.

“……고마……요.”

“응? 뭐라고?”

“아녜요.”

“아니긴 뭐가 아냐? 뭔데 그래? 응? 형이 뭘 어떻게 도와줄까? 말해봐, 인마.”

난 가만히 형을 바라보다가 미소 지을 수밖에 없었다. 다른 건 모르겠는데, 그래도 막 살진 않았구나 싶어서.

“어쭈? 웃어? 지금 형을 비웃는 거야? 응? 그런…….”

“아우, 머리 좀 때리지 마요. 안 그래도 요즘 머리 안 돌아가서 미치겠는데……. 여기서 더 나빠지다간 진짜 멍충이 된다니까요.”

“뭐? 멍충이? 하하하. 너 그거 아냐? 요즘 되게 웃겨. 방송물을 먹어서 그런가? 응? 그 뭐냐, 유머 감각도 좀 생긴 거 같고, 가만 보면 얼굴도 좀 잘생겨진 거 같기도 하고…….”

“아, 놔요. 볼을 왜 당기고……. 그리고 원래 제가 한 얼굴 하거든요!”

“크크큭. 미친놈. 이거 진짜 골 때리는 놈이네. 넌 네 입으로 그런 말 하고 싶냐?”

아, 농담도 못 하나. 나도 내가 어떻게 생겼는지 알거든요? 뭐, 그래도 평균은 되지 않나? 이 정도면 대한민국 남자들 중엔 그래도 중간쯤은 가지 않겠냐고.

“그만 좀 해요. 머리털 다 빠지겠네.”

“크크크크. 알았어, 알았어. 그래서 뭐가 필요한데?”

형이 잔뜩 헝클어 놓은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며 툭 내뱉듯 말했다.

“제면기요.”

“제면기?”

“예. 옛날에 쓰던 거 있잖아요. 나무로 만든.”

형의 얼굴에 황당함이 어린다. 두 눈에 ‘헐!’이라고 쓰여 있는 거 같다. 그런 눈빛으로 날 보다가 묻는 준석이 형이었다.

“그런 게 아직 남아 있겠냐?”

“……그렇겠죠?”

역시 구하기 어려운 걸까? 한데, 준석이 형이 갑자기 심각한 표정이 되거니 입술을 쭉 내밀곤 턱을 만지며 생각에 잠기는 모습이다. 그러다가 뭐가 떠올랐는지 눈을 치켜뜨며 입을 살짝 벌렸다.

“잠깐만 있어 봐.”

갑자기 핸드폰을 꺼내는 형. 저만치서 혜순이 누나가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을 때, 형은 문을 열고 주방을 벗어났다. 따라갈까 하다가 괜히 주방 식구들 눈치가 보여서 나는 시선만 다른 곳으로 돌렸다. 그러길 얼마나 지났을까. 오 분쯤? 그 정도 지났을 때였다. 준석이 형이 문을 빼꼼히 열더니 손짓으로 날 불렀다. 점심시간이 끝나긴 했어도 나나 형이나 눈치를 봐야 하는 처지라 그런 듯하다. 말뜻을 알아듣고 안쪽을 힐끔거리며 밖으로 나가자, 형이 대뜸 말했다.

“황학동 알지?”

“알죠.”

“거기에 내가 아는 친구가 있는데…….”

나왔다. 아는 친구. 대한민국 사람들이 대화의 장을 열 때 꺼내 드는 비장의 카드. 진위여부 확인은커녕 사실상 출처조차 의심스러운 얘기에 저절로 귀를 기울이게 되는 마법 같은 단어지만, 그럼에도 희한하게 뭔가 어려움이 닥칠 땐 실제로 힘을 발휘하기도 한다는 게 우습다. 아무튼 형은 손짓 발짓까지 해가며 얘기를 이어 갔고, 그 이야기 끝에 난 홀린 듯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럼 그렇게 한다?”

“저야 땡큐죠.”

“자식하곤.”

또 머리를 헝클려고 하길래 얼른 뒤로 물러나자, 준석이 형은 주먹을 들어 때리는 시늉을 하며 핸드폰을 들었다. 그러곤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어, 나야. 아까 말한 거 부탁 좀 하자. 응? 잠깐만. 야, 언제까지 필요한 거냐?”

핸드폰을 손으로 막고 물어보는 형에게 ‘내일’이라고 말해주자,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후 다시금 통화를 이어나가는 형이었다.

“어, 그래? 내일까진 힘들어? 그럼 언제까지 되는데? 야, 안 돼애. 아깐 구할 수 있다며? 아, 몰라 몰라. 정 안 되면 모레 아침까지라도 준비해줘. 돈? 얼만데? 15만 원?”

날 바라보는 형에게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그려 보이자, 준석이 형은 고개를 끄덕인 뒤 핸드폰에 대고 얘기했다.

“오케이. 바로 입금할 테니까, 물건이나 제대로 된 놈으로 보내줘. 아까 말했지? 이거 촬영 때 쓸 건데, 중간에 막 부서지고 그러면 진짜 클난다? 완전 쪽팔리는 상황…… 아, 알았어. 믿지. 아무튼, 부탁 좀 하자. 응, 응. 조만간 한번 보자고. 그럼 너만 믿고 끊는다?”

“뭐래요?”

“알아보니까, 평택인가 어딘가에 골동품으로 한 대 나온 게 있다네? 그래서 내일까지 보내라고 했더니, 그건 힘들대. 제대로 작동되는지도 확인해야 하고, 그게 아니라도 쓸 수 있게 소제도 하고 고칠 건 고쳐야 한다고……. 모레 아침까진 보내준다고 하더라.”

“확실히 믿을 순 있는 거죠?”

“애가 좀 똘아이이긴 한데, 그래도 일 처리는 확실해. 적어도 지 입으로 말한 건 정확히 지키는 타입이랄까?”

“그럼 됐네요.”

솔직히 그걸 어디서 구할까 걱정이었는데, 어찌어찌 해결된 거 같아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을 때였다. 턱. 형이 내 어깨에 팔을 두르며 웃는다. 어쩐지 음흉한 웃음이었다.

“흐흐흐. 이 형이 막 고맙고, 존경스럽고, 대단하단 생각이 마구마구 치솟지 않냐?”

“그거야 진작부터 그랬죠.”

“그치?”

“그럼요.”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이따가 일 끝나고 맥주 한잔할까요?”

“야이, 장난해? 맥주? 매애액주?”

“끙. 그걸로 부족…….”

“자식이! 술은 역시 소주지!”

싱글싱글 웃는 준석이 형이었다. 그 웃음이 전염되는지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고.

“근데, 형수한텐…….”

“야이씨! 이 좋은 날, 응? 넌 꼭 초를 쳐야겠냐?”

농담도 못 하겠네. 진심으로 화를 내고 있는 형을 보면서 고개를 내젓지 않을 수 없었다. *** 저녁식사까지 끝나고, 약속대로 준석이 형과 함께 저택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근방에 있는 먹자골목에서 술을 마셨다. 고깃집에서 시작한 1차에 이어 2차로 호프집까지. 맥주는 술도 아니라고 하더니, 어느새 준석이 형은 만취 상태였다. 하긴 1차에서만 둘이서 소주 5병을 마셨으니. 더욱이 준석이 형은 기분이 업됐는지, 술잔을 채우기 무섭게 들이켜고 있었다.

“좀 천천히 마셔요.”

나보다 배 이상은 마신 듯하다. 결국, 형이 너무 취해서 더 이상은 무리란 판단을 내리고 호프집을 빠져나왔다. 어느새 시간은 밤 10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술이 거나하게 취한 형의 목청은 높아질 대로 높아져 있었고. 다행스러운 건 평일이라 그런지, 밤늦은 시간의 길거리가 한산하다는 것.

“내가! 응! 너 그렇게 될 줄 알았다아아!”

하아, 오늘 밤 이 소리만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르겠다.

“이 내-가아아아! 진즉에! 알아봤다 이거야! 서진영! 서! 진! 영! 이노마는 뭐가 돼도! 되겠구나아아아! 하고!”

이 소리도 하도 들어 귀에 딱지가 앉을 지경이다.

“알았어요. 알았다니까 그러네.”

“알긴 인마, 뭘 알아! 너어, 잘해라! 인생 길지 않아. 잘해, 잘하라고…….”

혀가 잔뜩 꼬부라져서 한 말 하고 또 하고……. 그러면서 비틀거리는 형을 거의 질질 끌다시피 해서 길가로 나왔다. 그러는 동안에도 형은 계속해서 주정 아닌 주정을 부리고 있었고. 그런데도 이상하게 자꾸만 입가에 미소가 그려진다. 뭐가 그렇게 좋은 걸까? 우리 형님, 진짜 기분 좋은가보다. 참네, 속도 좋지. 자기보다 한참 어린 동생이 잘나간다면 잘나가는 건데, 그게 뭐 그리 좋다고. 부르르르르. 진동이 느껴졌다. 내 건 아닌데? 그럼 형 건가? 형을 어느 상가 계단에 앉히고, 형 상의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남의 전화니 안 받는 게 정상이겠지만, 딱 느낌상 형수님일 거란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어우, 잠시만요. 전화 좀 받고요. 예, 형수님.”

“뭐야? 형수? 어? 너한테 형수면 나한테도 형순데?”

“아뇨. 지금 들어가실 거예요. 예, 좀 취하셨네요.”

“응? 내 얘기하는 거야? 쓰읍! 나 안 취했거든!”

“걱정 마세요. 제가 같이 타고 갈……. 아유, 아니에요. 굳이 그러실 필요 없는데……. 내일 출근하긴 하죠……. 알겠습니다. 그럼 그렇게 할게요.”

막 전화를 끊으려던 참이었다. 준석이 형이 내 손에서 핸드폰을 빼앗아가더니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다.

“너 누구야! 누군데……. 어? 마누라? 아하하하. 우리 와이프구나.”

대번에 목소리가 부드러워지는 형을 보면서 쓰게 웃지 않을 수 없었다. 고개를 한차례 내젓고선 택시를 불렀다. 그러는 동안, 형은 핸드폰을 들지 않고 있는 손으로 머리에 하트를 그리고 있었고.

“우리 와이프∼ 사랑해요∼”

다행히 택시는 금방 잡혔다.

“아하하하. 기분 좋다! 사랑하는 우리 님과 한평생 살고 싶…….”

손에서 힘없이 미끄러지는 핸드폰을 얼른 받아서 확인해 보니 전화는 이미 끊어져 있었다. 와, 무슨 술을……. 이건 진짜……. 술이 사람을 마셔버렸네. 혀를 차면서 형을 구겨 넣듯 택시에 실었다.

“기사 아저씨, 신도림역 가주시고요. 두영 아파트 3차 정문에서 내려주시면 됩니다.”

차 뒷좌석에 널브러져 있는 형을 걱정스럽게 쳐다보고 있을 때, 택시가 출발했다. 난 당연히 떠나가는 택시의 번호판을 확인했고. 그런 뒤, 형수님께 문자를 찍어드렸다. 지금 출발한다는 문자와 함께 택시 번호까지. 휴우, 잘하는 건지 모르겠다. 뭐, 형수님이 직접 나오신다고 하시니까. 걱정이 담긴 눈빛으로 도로 쪽을 한 번 더 바라보곤 돌아섰다. 그때였다. 부르르르. 문자가 날아든다. 확인해보니, 조강훈 FD가 보낸 거였다.

- 늦어서 죄송합니다. 대본이 지금 마무리됐네요. 확인하시고 궁금한 게 있으면 언제든 연락 주세요.

흠, 대본을 보냈나 보네. 난 얼른 메일을 확인했다. 대본이 첨부된 메일이 보인다. 데이터를 생각하며 잠시 망설였지만, 그냥 눈감고 다운 받았다. 그리고 대충 훑어보다가…….

“이것 봐라?”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걸까? 대본이 아주 찰떡이다. 내가 생각하고 있는 거랑 묘하게 매칭된다고나 할까. 핸드폰을 끄면서 씨익 웃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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