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3. 숙제 (3) (63/204)

#63. 숙제 (3)2021.02.24.

주방은 비어 있었다. 당연한 건가? 오전 10시. 아직 점심을 준비할 시간이 아니다. 다른 이들이 오려면 한 시간은 있어야 할 테다.

“칼 꺼내라우.”

개량한복 차림 그대로 주방장님이 말씀하셨다. 그런 모습으로 별 얘기도 아닌 몇 마디 하시는데도 압박감이 장난 아니다. 난 그 말씀대로 상자를 조심스럽게 열었다. 상자 안은 짚이 가득하다. 신경을 바짝 세우고 짚을 헤치자, 그 안에 무명천으로 둘둘 말린 게 보인다. 칼이다. 검은빛이 감도는 칼날과 함께 나무 재질 그대로의 손잡이. 아저씨가 내게 주신 칼. 그걸 천천히 꺼내 들어 주방장님께 내밀었다.

“왜 날 주네?”

“그, 그럼?”

영문을 몰라 묻자, 고윤수 주방장님이 불쑥 물으셨다.

“점심 메뉴가 뭐이가?”

벽에 걸려 있는 식단표를 힐끔거렸다.

“게살 스프랑 류산슬, 고추잡채, 팔보채입니다.”

식사는 면류다. 면보단 밥을 좋아하시는 강 회장님이셨지만, 평일 이 시간엔 집에 안 계셔서 그런 거겠지. 집안에 남아 있는 이 집 가족들이라고 해봐야 다섯 명도 채 되지 않을 터. 양을 많이 할 필요도 없다.

“팔보채 할 줄 아네?”

“예.”

“해보라우.”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서 덜컥 겁도 났더랬다. 하지만 안 할 수도 없는 일이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주방장님의 지시이니. 난 주방장님을 힐끔거리며 식재료들을 챙기기 시작했다. 팔보채(八寶菜).

16561220838399.jpg

  중국인들이 바바오차이라고 부르는 이 요리는, 글자 그대로 해석하자면 여덟 가지 보물 채소라는 뜻이다. 말이 여덟 가지 채소지, 그냥 여러 가지 채소와 해물, 혹은 돼지고기나 닭고기 등을 기름에 볶아 따끈하게 먹는 대표적인 중국 요리다. 한마디로 말해서 야채에 곁들인 고기볶음이다. 여기서 중요한 건, 고기 쪽이 아니란 것. 야채를 얼마나 잘 썰고, 또 식감이 살아있도록 데쳐내는가가 관건이다. 칼질이야 늘 해오니 별거 아니고, 데치는 것도 물만 끓이면 되는 일이니 어려울 거 하나 없다. 그런데도 칼을 쥔 손을 좀처럼 움직이기 어렵다. 긴장돼서. 머뭇거리며 주방장님을 보다가 당근 위에 칼을 올렸다. 서걱. 뭐, 뭐야. 칼날을 대기 무섭게 썰린다. 별 힘을 주지 않았는데도. 평소와 다른 느낌에 놀라 헛숨이 나오려는 걸 참았다. 그런 채로 주방장님 눈치를 보았지만, 아무 말씀이 없으시다. 이럴 땐 오히려 말씀 없으신 게 더 무섭달까. 난 마른 침을 한차례 삼키곤 다시금 칼을 들어 올렸다. 서걱. 진짜 장난 아니네. 칼이 어찌나 날카로운지 별 힘을 주지 않아도 당근이 썰려 나간다. 대신……. 이거 좀 삐뚤게 썰린 거 같은데? 뭐, 이정도야. 채 써는 거니 두께가 약간의 차이는 있게 마련이니까. 한차례 숨을 들이마신 후 본격적으로 칼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탁탁탁탁탁. 경쾌한 소리와 함께 칼날이 당근을 썰어나간다. 그때마다 칼이 도마를 때리며 리듬감 있는 소리를 울렸다. 그 소리와 더불어 삶은 무 자르듯 쉽게 잘려나가는 당근. 칼질에 익숙해지니 즐겁기까지 하다. 이제껏 느껴보지 못한 재미랄까. 그렇게 당근은 길게 잘라 채 썰고 있을 때였다. 한참 동안 말없이 지켜보시던 주방장님의 손이 쑥 들어온다. 헛! 기겁한 난 칼을 번쩍 치켜들고 후다닥 뒤로 물러났다. 그걸로도 모자라 숨을 몰아쉬었다. 아씨, 깜짝이야. 자칫했으면 피 볼 뻔했다. 주방장님 손가락을 썰어버리는 장면이 떠오르며 나도 모르게 진저리를 쳤을 때, 고윤수 주방장님은 당근 한 조각을 들어 올려 눈으로 꼼꼼히 살피셨다. 그러더니 도로 도마 위로 내려놓고 말씀하셨다.

“뭘 좋은 거 먹고 왔네?”

“예?”

“늙은이 앞에서 힘자랑할 일 있냐 이 말이다. 쯧, 당근을 썰라고 했더니, 아주 뭉개 놨구만 기래.”

어디가? 하는 생각이 솟구쳤지만, 내색하진 않았다. 저렇게 말씀하시는 데엔 다 이유가 있을 거란 생각에. 아니나 다를까. 주방장님은 내게 손을 뻗으셨다. 무슨 뜻인지 알기에 얼른 칼을 뒤집어 손잡이 쪽부터 내밀었다. 그걸 쥔 주방장님이 가타부타 아무런 설명도 없이 당근을 채썰기 시작하셨다. 응? 한데, 소리가……. 통통통통통통통. 다르다. 뭔가 규칙적이고 리듬감이 있다. 아니 아니, 그거야 나도 그 정도는 할 수 있다. 진짜 다른 건……. 살아있다? 이게 말이 되는지 모르겠는데, 소리가 살아있었다. 그것만이 다는 아니겠지만, 가장 결정적인 차이라고 할 수 있다. 뭘까? 왜 나랑은 소리가 다른 걸까? 그거야 당연히 칼질이 다르니 그런 거겠지만, 그러니까 어떤 면에서 다른 거냐고? 의아함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그렇게 멍한 눈빛이 되어 주방장님의 칼질을 바라보고 있는 사이, 당근 하나가 가늘고 긴 조각들로 분해되어 도마 위에 수북하게 쌓였다. 그제야 멈춘 칼. 그 칼을 내게 내미는 주방장님이셨다.

“알갓네?”

아뇨. 전혀 모르겠는데요? 속마음과는 다르게 아무런 대답도 못 하고 있자, 주방장님이 픽하고 웃으신다. 그러더니 칼을 받아드는 날 향해 물으셨다.

“니 눈엔 이거이 뭐로 보이네?”

주방장님의 시선은 어느새 당근이 가득 담겨 있는 밧드 쪽으로 가 있었다.

“당근입니다.”

“그렇디. 당근이디. 그러믄 저거는?”

“돼지고기요.”

“아직도 모르갓니?”

“…….”

뭔 소린지 알 것도 같다. 아니 알 것도 같은데…… 정확히 모르겠다. 그러니까, 당근이랑 고기 써는 칼질이 달라야 한다는 건가? 방금 주방장님이 ‘뭉개졌다’라고 하신 말씀이 머릿속에 남아 살짝 자존심이 상한다. 야채를 썰 때랑 고기를 썰 때 칼질에 들어가는 힘이 다른 거야 당연한 건데……. 내가 그렇게 세게 잘랐나? 입술을 잘끈 씹고 있을 때였다. 나와 눈이 마주친 주방장님이 눈짓으로 썰린 당근을 가리키신다. 손을 뻗어 채 썰린 당근 조각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눈앞으로 가져와 확인한다. 뭐지? 잘린 단면이 촉촉한 게 잘 썰린 거 같은데. 나도 모르게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이번엔 주방장님이 썰어놓은 당근을 들어 확인했다. 뭐가 다르다는 거……. 어? 나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겉면에 물기가 없다. 그렇다고 해서 말라비틀어졌다는 게 아니다. 생각할 틈도 없이 손이 움직였다. 요리사의 본능이랄까. 입에 들어온 당근을 씹어본다. 아삭. 깜짝 놀랐다. 당근이 이렇게 맛있었나? 내가 알던 당근의 식감과는 차원이 다른 느낌. 난 눈이 휘둥그레진 채 도마 한쪽에 밀어놓은 당근들을 보았다. 거기엔 내가 썰어놓은 당근들이 수북하다. 살짝 떨리는 손을 뻗어 당근 조각을 집어 들었다. 그러곤 입으로 가져오는데, 마른침이 넘어간다. 당연히 군침이 도는 게 아니다. 긴장돼서다. 사각. 이빨이 박히는 순간 들리는 소리와 함께 당근이 뭉개지는 느낌이다. 이맛살이 구겨졌다. 소리만 다른 게 아니라서. 맛도 다르다. 식감도 다르고. 어, 어째서? 분명 같은 재료인데, 이렇게 차이가 날 수가 있는 거지? 의아해져서 주방장님을 바라보자,

“야야, 서진영이. 내래 답까지 알려주면 재미없디 않갓어?”

저렇게 말씀하시는 걸 보니 더 이상 말씀해줄 것 같진 않다. 뭘까? 대체 주방장님의 칼질과 내 칼질이 뭐가 다른 거지?

“……살살 써는 건가?”

중얼거리면서 주방장님을 힐끔거리자, 주방장님은 말씀 없이 옅은 미소만 베어 물고 계시다. 한데, 눈빛은 날카롭기 그지없다. 한마디로 말해서 정답이 아니란 얘기. 젠장. 그럼 뭐지? 머릿속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툭. 그때, 내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곤 돌아서시는 주방장님이 눈에 보였다. 그러곤 이 말만 남겨 놓고 떠나셨다.

“고생하라우.”

  *** 미치겠다, 진짜. 주방장님이 떠나시고 난 뒤 한참 동안이나 서 있었고, 그러는 동안 주방 식구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낼 때까지도 난 답을 내리지 못했다. 그 후로도 마찬가지. 아니, 점점 심해지는 기분이다. 갈수록 멍해져 손을 멈추기 일쑤였다.

“야, 너 왜 그래? 아직 피곤이 안 풀린 거야?”

오죽하면 보다 못한 준석이 형이 걱정스럽게 물었겠는가.

“아뇨. 그런 건 아니고……. 저, 형.”

“왜?”

“형은 어떻게 썰어요?”

“응? 그게 무슨 말이야? 뜬금없이.”

“아니 아니……. 그러니까, 채소랑 고기랑…… 칼질이 다르잖아요?”

“다르지.”

“어떻게…… 다를까요?”

준석이 형이 벙찐 얼굴로 날 쳐다본다. 그걸 정말 몰라서 묻냐는 눈빛이었다. 아이씨, 내가 진짜 몰라서 묻겠냐고요. 나도 그 정도는 알긴 아는데……. 그때, 준석이 형이 살짝 장난기 어린 눈이 되더니 말문을 열었다.

“채소는 살살, 고기는 과감하게?”

생각이 나랑 비슷하네. 하기야 애당초 채소는 힘을 많이 주지 않아도 잘 썰리기 마련이니까. 그렇긴 한데. 음……. 정답은 아닌 듯하다. 그랬으면 주방장님도 그런 반응을 보이시진 않았겠지.

“요리사마다 다르겠지만, 다른 사람도 비슷할걸? 그래서 야채용 칼이랑 고기용 칼이 다르잖아?”

“그야 그렇지만…….”

영 마뜩잖다. 빙긋이 웃으며 날 바라보시던 주방장님의 얼굴이 떠오른다. 분명 뭔가 있는 거 같은데……. 뭘까? 주방장님은 뭘 얘기하고 싶으셨을까? 난 곁눈질로 김진호 셰프를 바라보았다. 웍을 잡고 고기를 볶고 계신 모습. 언제나 그렇듯 밑 재료 손질은 내가 미리 다 해놓았기 때문에 오늘도 칼질을 보기는 어려울 터다. 그렇다고 대뜸 ‘칼질 좀 보여주세요.’할 수도 없으니. 하아. 한숨을 푹 내쉬자, 준석이 형이 픽하고 웃고는 말했다.

“뭔 고민인지는 모르겠는데, 살살 좀 해라. 살살. 그러다 너 쓰러지는 수가 있다?”

“에이, 형도 알잖아요. 저 체력 하나는…….”

“웃기고 있네. 누군 체력이 저질이라서 막 쓰러지고 그러는 줄 아냐? 인마 사람 몸이 강철도 아니고, 한계에 부딪히면 무조건 무너지는 거야. 괜히 스트레스 많이 받는 사람이 막 병에 걸리고 그러는 줄 아냐고.”

끙. 저렇게 말하면 할 말이 없지. 결국, 순순히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알겠다는 제스처로 고개를 끄덕이자, 준석이 형이 내 어깨를 토닥인다.

“쉬엄쉬엄해. 열정적인 건 인정하는데, 인생 마라톤 아니겠냐?”

“예. 형.”

쯧, 대답은 했지만 역시나 마음에 들진 않는다. 마음 한구석에선 기껏 고윤수 주방장님이 신경 써서 숙제 아닌 숙제를 내주셨는데, 거기에 제대로 부응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고. 젠장, 이럴 때 나레이션이 들리면 오죽 좋아?

“어? 근데 이거 못 보던 칼이다?”

“아, 이거요?”

그때였다. 따라라라, 라라……. 얼씨구? 웬일로 내가 원할 때 떡하니 들려온대?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라 조금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이내 기분이 좋아져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일 뿐이었다. - 고윤수 주방장님이 알려주시고자 하는 걸 근본적으로 보고자 하는 마음이 없으니 답을 구하지 못한다는 걸, 서진영은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알아, 안다고. 그러니까 나 대신 좀 답을 주라고. 아니면 힌트라도……. - 역시 서진영은 모지리다. 생각이 몽당연필만큼 짧기만 하다. 컥. 모, 몽당연필. 왜 하필 비유를 들어도 몽당연필로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일순 부아가 치민다. 그래, 내 생각이 짧아서 몽당연필이라고 치고. 그래서 뭐가 문젠데? - 서진영 같은 애들이 문제집 사면 답지부터 확인하는 법이다. 헐. 누가? 내가? 대학 문턱엔 가본 적도 없지만, 그래도 예전에 한창 공부할 땐 그래도 제법…… 아, 지금 이게 문제가 아니잖아. 그러니까 뭐야? 나레이션이 하는 말을 들어보니……. 답을 알려줄 생각은 없다는 거네? 그래. 내가 더럽고 치사해서라도 혼자서 알아내고 만다.

“뭐야? 무슨 말을 하다 말아? 근데, 야 칼이 좀 거시기 하다. 색도 좀 그렇고. 무쇤가? 검은빛이 도는 게…….”

“최준석! 슬슬 플레이팅해.”

“아, 알겠습니다!”

김진호 셰프의 지시에 준석이 형이 후다닥 멀어진다. 그 모습을 보지도 않은 채, 난 나대로 고민에 빠져들고 있을 때였다. 부르르르. 응? 핸드폰이 울려서 확인해보니 뜻밖의 번호가 떠 있었다. 근데 문제는 지금 근무 중이라는 것. 다행히 요리가 거의 다 완성되어 상차림만 남겨 놓은지라 바쁠 때는 지났으니 받아도 되긴 하겠지만, 그래도 눈치가 보이는 건 사실. 준석이 형을 바라보자, 형은 접시에 요리들을 담으며 내게 눈짓으로 문 쪽을 가리킨다. 고마워요, 형. 난 이내 씩 웃어 보이곤 밖으로 나갔다.

“어, 웬일이야?”

- 모레지?

대뜸 물어오는 강형식이었다.

“뭐가?”

- 뭐긴 방송이지.

아, 그거…….

“그렇지. 모레.”

모레 방송되는 류승렬 편 2회분을 생각하니 내일 있을 촬영이 자연스럽게 머리에 떠오른다. 아오라지에서 돌아오자마자 촬영도 해야 하고, 방송도 모니터해야 하고, 그 와중에 주방장님이 내주신 숙제도 풀어야 한다. 그렇다고 본업인 주방일에 소홀할 수도 없다. 와, 서진영. 바쁘네 바빠. 스케줄이 빡빡하다 못해서 터질 지경. 누가 보면 연예인인 줄 알겠다.

- 그때쯤엔 시간이 좀 날 거 같은데. 어때? 같이 볼까? 간만에 술 한잔 하면서.

“그러지 뭐.”

- 좋아. 그럼 모레 우리 집으로 와.

딱 집어서 자기 집이라고 말하는 걸로 봐선 저택의 자기 방에서 보자는 것 같지는 않다.

“어디? 오피스텔?”

- 마음 편히 보려면 아무래도 거기가 낫지 않겠어?

난 사실 어디든 상관없지만, 녀석은 아직도 여기에 있는 게 불편한 모양이다.

“그래, 그럼. 거기서 보지 뭐.”

- 오케이! 나 지금 바빠서 가야 하니까, 나중에 다시 전화할게.

“그럴 필요 없어. 바쁜데 굳이 뭘 또 전화씩이나.”

- 아무튼, 끊는다.

전화를 끊고 나서 피식 웃고 있을 때였다. 따라라라라, 라라……. 느닷없이 들려오는 나레이션. 뭐, 기습적이라면 기습적인데 이런 일이 몇 번이나 반복되니 전혀 놀랍지 않……아야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솔직히 말해서 심장이 덜컥한다. 젠장. 아저씨가 폐암에 걸렸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부터인 거 같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