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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숙제 (2) (62/204)

#62. 숙제 (2)2021.02.21.

시간을 확인해보니 벌써 밤 11시다. 아직 주무시진 않으실 거 같긴 한데, 그렇다고 불쑥 찾아뵙기엔 너무 늦은 시간. 물론 오는 길에 서울로 올라가는 중이라고 연락드리긴 했지만, 그 말이 곧 오늘 찾아뵙는다는 말은 아니었으니까. 주방장님도 별다른 말씀이 없으셨고. 역시, 내일 뵙는 게 낫겠다. 솔직히 말해서 여기저기가 안 쑤신 곳이 없다. 게다가 피곤해서 그런지 자꾸만 하품이 나오고. 그래. 얼른 씻고 자자. 칼이 어디로 도망가는 것도 아닌데, 내일 가져다드리면 되지. 그렇게 생각하곤 샤워실로 들어갔다. *** 씻고 나서 방으로 돌아와 보니, 톡이 와 있었다. 크크큭. 그새 많이도 보냈다. 요새 엄청 바빠 보이던데, 그래도 톡할 시간은 있는 모양이지? 뜨거운 물로 씻어서 그런가 조금은 피곤이 풀리는 느낌을 받으며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러곤 톡을 확인했다.

- 서울이에요?

- 앙, 마중 나가고 싶었는뎅.

- 너무 일이 많아.

- 도착했어요?

- 숙소?

- 자요?

- 씻나?

- 하아, 보고 싶다.

- 보고 싶당.

- 보고 싶당.

- 보고 싶당.

- 서진영!

- 보고 싶다구우!

- 자나 보다.

- ……내일 일어나면 전화 줘요.

어쩐지 마지막 톡에서 쓸쓸함이 느껴지는 건 왜일까. 난 머리를 긁적이곤 답톡을 날렸다.

--- 지금 막 도착해서 씻고 나왔어요.

그러자 곧바로 톡이 날아왔다.

- 앗! 서징ㅇㅓㅇ이다!

흠, 언제 내 이름이 서징어가 된 걸까? 급하게 치면서 오타가 난 거 같긴 한데……. 근데 어째 오징어랑 어감이 비슷하다? 설마 일부러 그런 건 아니겠지? 살짝 의심이 들어 눈가를 좁히고 있을 때, 계속해서 톡이 날아들었다.

- 앙! 너무행!

- 난 하루 종일 자기 생각만 했는데.

- 왜 연락 안 해요?

- 도착했으면 연락부터 해야죠!

- 진짜 불공평해.

- 나만 좋아하는 거임?

- 아니다. 처음부터 그러기로 했지.

- 어디 아픈 덴 없죠?

- 많이 피곤하겠다.

- 얼른 씻어요.

- 아, 씻었다고 했지. 힘들 텐데, 푹 자요.

그녀 말대로 피곤하다. 하지만, 이대로 잠들면 두고두고 말이 나올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 피곤하긴 한데, 좀 더 있다가 자려고요.

- 엉? 왜요?

--- 왜긴요. 지금 톡하잖아요.

한참을 기다려도 답톡이 없다. 갑자기 일이라도 생긴 건가? 아니면 잠들었나? 혹시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니겠지? 흠, 그런 것치곤……. 대화 앞에 1이 없어진 것도 그렇고. 자는 거 같진 않은데. 그럼 뭐지? 내가 말실수라도 했나? 별별 생각이 다들 때였다. 화면 속에서 토끼 한 마리가 튀어나왔다. 한데, 음침하다.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한 손으로 입을 가리고 어깨를 들썩이며 웃고 있었다. 헐. 이건 뭐……. 고개를 한차례 내젓고는 톡을 보냈다.

--- 본 지도 오래됐는데, 전화라도 할래요? 아, 지금 많이 바쁜가?

톡을 보내기 무섭게 전화가 걸려왔다.

“여, 여보세요?”

반응이 너무 즉각적인 거 아냐? 조금 놀라서 말을 더듬고 말았을 때, 수화기 너머에서 밝다 못 해서 생기발랄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 앙, 제 목소리가 그렇게 듣고 싶었어요?

“아, 예……. 뭐, 그렇……죠.”

코를 마시는 듯한 웃음소리가 들려오고.

- 아이참, 피곤할 텐데 얼른 자지 않고요.

“……이제 자야죠. 통화 끝나고 나면. 근데, 요즘 바쁘다고 하지 않았어요?”

- 바쁘긴 해요. 런칭이 코앞이거든요.

“아, 런칭…….”

잘 모르는 얘기가 흘러나왔다. 의류 쪽은 젬병인지라 하나도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귀담아들었다. 가끔 맞장구도 쳐주면서. 그렇게 한 시간이 넘도록 통화를 했고, 결국 12시가 넘어서야 잠들 수 있었다. 물론 중간중간 졸아서, 무슨 내용이었는지는 하나도 생각나지 않는다. *** 세상모르고 자다가 놀라서 잠이 깼다. 그야말로 눈이 번쩍 뜨여졌다. 창을 통해 쏟아져 내리는 햇살 때문에.

“윽.”

피곤하면 눈부터 뻑뻑해지는 타입이라 그런지, 강렬한 햇볕이 감당하기 어렵다. 손을 들어 눈을 가리면서 몸을 일으켰다. 시간을 확인해 보니……. 엇! 9시? 젠장! 벌떡 일어나 침대를 뛰듯이 벗어났다. 씻을 틈도 없이 옷을 챙겨 입다가 멈칫했다. 머릿속에 어제 주방장님이 전화로 하셨던 말씀이 떠올라서. 점심때 나오란 말씀이셨지. 그땐 당연하다는 듯 아침에 정시 출근하겠다고 했는데……. 쯧, 이래서 사람은 함부로 장담을 하면 안 되는 건가. 연신 혀를 차다가 한숨과 함께 다시 옷을 벗었다. 당연히 잠을 자기 위해선 아니다. 씻어야지. 어제 씻고 잤는데도 이상하게 몸이 무겁다. 뜨거운 물로 샤워라도 해야 정신이 날 것 같달까. 흠, 그러고 보니 어느새 이런 생활에 길들여졌다 싶다. 뜨거운 물? 늦게 일어나 지각을 걱정하는 마음. 그리고 벽에 걸려 있는 깨끗하다 못해 하얗게 빛나는 조리복. 얼마 전 같으면 꿈도 못 꿀 일이다.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그려진다. 그러니까……. 이 정도에 힘들다고 말하는 건 어리광…… 아니 사치인 거다.

“읏차!”

기지개를 켜며 화장실로 향했다. 샤워기를 틀자마자 쏟아지는 물줄기를 보고 있자니, 어제까지 일들이 꼭 꿈처럼 느껴진다. 새벽부터 일어나 산을 기어올라 길어온 물로 세수를 하던 게 겨우 하루 전 일인데……. 그나저나 괜찮으시려나 모르겠다. 아시게 되면 충격받으실 텐데.

“아직 검사 시작 안 했으려나?”

아저씨랑 사모님 걱정에 마음이 무거워졌지만, 고개를 내저으며 중얼거렸다.

“사모님이시니까.”

그리고 아저씨니까. 잘 이겨내시리라고 믿는다. 후우, 그렇게 생각을 해보지만 여전히 심란하기만 하다. 하루 더 있다가 올걸 그랬나? 뒤늦은 후회가 들었지만, 이제 와서 어쩌나. 갈수록 머리가 복잡해져 안 되겠단 생각이 들었다. 딴생각을 하자. 아, 그래. 얼른 씻고 주방장님께 가봐야지. 칼도 드려야 하고, 갔던 일도 말씀드릴 겸. 자꾸만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으며 샤워기에서 떨어지는 물줄기에 몸을 맡겼다. *** 걸치고 있는 하얀 가운. 가슴 한쪽의 주머니엔 펜이 꽂혀 있다. 그리고 한 손에는 차트가 들려 있었고. 그런 의사를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는 곽기범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수면내시경을 마치고 잠들어 있는 아내의 손을 놓지 않는다.

“보호자분, 보셔서 아시겠지만 떼어낸 물혹은 세 개입니다. 그중 하나가 약간 크고 나머진 좁쌀만 한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물론 조직검사는 하겠지만, 별다른 이상이 있어 보이진 않구요.”

“하아, 감사합니다!”

곽기범은 자신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여 보였다. 아내보다 먼저 대장내시경을 받았던지라 의사가 하는 말을 이해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종합검진인지라 이제 겨우 시작이나 다름없지만, 일단 위장과 대장 쪽은 두 사람 다 큰 문제가 없다고 하니 졸였던 마음이 탁 풀리며 몸에서 힘이 쭉 빠지는 느낌이었다.

“으음…….”

그때, 아내가 깨어나며 옅은 신음을 흘린다. 반사적으로 아내의 손을 꼭 쥐자, 살며시 눈을 뜬 아내가 말없이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수고했어.”

그의 말에도 아내는 대꾸 없이 입가에 미소가 머금을 뿐이었다.

“자, 그럼 저는 가보겠습니다. 아, 오후에 곽기범 씨 흉부 MRI 있는 거 아시죠? 검사 잘 받으시고요. 나중에 또 뵙죠.”

“아이고, 의사 양반. 고생하셨수다.”

그렇게 의사가 가고 난 뒤, 10여 분쯤 흘렀을 때 아내가 기운을 차리고 일어났다. 그리고 곧이어 두 사람은 심전도 검사를 비롯해 여러 가지 검사를 이어나갔다. 문제는 점심시간이 지나 MRI를 찍고 나서였다. 3시간이나 기다려 들어간 진료실에 앉아 의사의 얼굴을 살피는데, 어째 표정이 심상치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고 모니터에 떠 있는 사진을 들여다봐도 뭐가 뭔지 모르겠고. 곽기범이 불안한 속내를 드러내지 않으려 애쓰고 있을 때, 아내가 물었다.

“저어,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그때, 의사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이내 담담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 모습이 애써 표정을 바꾼 듯해서 더욱더 불안해지는 두 사람이었다. 의사는 그런 두 사람에게 이렇다 할 설명을 하지 않은 채 간호사에게 지시부터 내렸다.

“김 간호사님. 최 선생 호출 좀 부탁해요.”

그때부터였다. 간호사의 안내를 받아 다시 밖으로 나간 부부가 대기실에서 불안해하고 있을 때, 호출받은 의사가 헐레벌떡 뛰어와 진료실로 들어가는 게 보였다. 그러길 얼마나 지났을까. 다시 이름을 부르길래 들어가니, 의사가 말했다.

“곽기범 환자분, 마음 단단히 하시고 들으시길 바랍니다.”

그 소리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불안한 예감이 적중했다.

“추가로 검사를 해봐야 알겠지만, 현재로선 폐암인 거 같습니다. 아, 너무 걱정 마시고요. 제가 방금 말씀드렸죠? 확진이 아니라 의심되는 정도라고. 이 얘기가 무슨 얘기냐면, 여기 이 사진 보시면 아시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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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어지는 설명대로라면, 폐암이 아닐 수도 있지만 강하게 의심된다는 거다. 다만, 확진을 내리지 못할 정도로 작아서 추가 검사가 필요하고, 그 결과에 따라 어쩌면 수술이나 약물치료가 필요할지도 모른다는 얘기였다. 이것만으로도 청천벽력같은 소리였지만, 그나마 다행인 건…….

“그, 그러니까 마……만에 하나 폐, 폐암이라고 해도 아직 초기니까 치료가 가능하다는 말씀이신 거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는 남편 대신 아내가 떨리는 목소리로 묻고 있었다.

“맞습니다. 불행 중 다행이라고나 할까요. 폐암의 경우엔 어지간해선 통증을 느끼지 못해서 치료 시기를 놓치는 경우가 많은데, 이렇게 초기에 발견한 게……. 아, 물론 아직 확진은 아닙니다만. 아무튼, 검사 추이를 지켜보시죠. 당부드리겠습니다만, 혹여라도 이상한 생각 하시지 말고요. 이 정도면 설사 확진 판정이 나도 완치 가능성이 크니까요.”

“……나을 수 있다는 얘기인가요?”

“후우, 의사로서 어떻게 함부로 장담하겠습니까마는, 치료만 잘 받으시면 건강한 몸으로 퇴원하실 수 있을 겁니다.”

어떻게든 밝은 표정으로 긍정적인 얘기를 이어가는 의사의 얘기에 그나마 놀란 가슴을 진정시킨 곽기범과 그의 아내는 진료실을 나왔다.

“여보…….”

“괘, 괜찮아. 의사 양반이 그러잖아? 치료하면 낫는다고.”

“…….”

“난 괜찮대도 그러네. 당장 죽는 것도 아니고, 치료하면 된다는 데 왜 그래? 이거 감기 같은 거야, 감기. 그, 그러니까……. 기다려 보자고. 그리고 혹시 알아? 의사 양반이 잘못 본 걸지?”

애써 담담한 모습을 보이려는 남편을 손을 꼭 잡아주며 아내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그러면서 마음 한편으로는 서진영을 떠올렸다. 왜인인지는 몰라도 전화를 걸어, 그 아이의 목소리를 듣고만 싶어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녀는 이내 고개를 내젓곤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아직은…… 검사 결과가 완전히 나온 것도 아니니 자신이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서.

“환자분, 지금부터 정밀 검사할 거니까, 저 따라오시면 됩니다.”

간호사의 안내에 따라 흔들리는 마음을 추스르며 애써 걸음을 내딛는 두 사람이었다. ***

“고생했다.”

내가 내민 상자를 보지도 않고서 주방장님은 그렇게 말씀하셨다.

“그 간나 새끼래 장난이 아니었을 텐데, 니래 힘들었겠다. 어드러케 많이 갈구던?”

역시 예상대로다. 그냥 칼이나 한 자루 받아오라고 보내신 건 아닌 듯하다.

“아닙니다. 배운 게 많습니다.”

“기래?”

묘한 표정을 짓고서 날 보시는 주방장님. 그러시더니 툭 하고 내뱉으신다.

“빈말은 아닌 거 같고……. 근데, 이거이 뭐이가?”

“예?”

“뭐기 뭐이야? 상자가 왜 두 개냐 이말이디?”

“아, 그건…….”

채 말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고윤수 주방장님이 어느새 상자를 열고 계셨다. 그러곤 흠칫하신다. 뭐지? 왜 저런 반응을? 상자 안에선 검은색이 감도는 칼 한 자루가 보인다. 그닥 비싼 재료를 쓴 것 같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싸구려 같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 아니 아니. 싸구려면 또 어떤가. 아저씨가 주신 칼 아닌가. 흐흐흐. 그게 아니라도 잡으면 손에 착 감기는 게, 내 마음에 쏙 드는 칼인데……. 겉으로 봐선 날이 잘 드는지는 모르겠지만, 잘 갈아서 쓰면 되겠지…… 하고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주방장님이 여전히 상자 안을 들여다보며 중얼거리셨다. 한숨도 들려왔던 거 같기도 하고.

“……드디어 임자를 만난 거이가?”

“예?”

내가 되묻자, 주방장님은 상자를 닫고는 손으로 툭 하고 쳐 내 쪽으로 밀어내셨다.

“이거이 날 왜 보여주네? 내래 달려면 줄 거네?”

“아, 아뇨. 그런 게 아니라…….”

내가 개인적으로 아저씨한테 받은 거라곤 해도, 주방장님껜 말씀드려야 할 거 같아서 가져온 건데. 주방장님은 더 이상 관심이 없다는 듯 칼이 든 상자 쪽으론 눈길도 주지 않으신다. 대신 날 빤히 바라보시기만 하신다. 아우, 가시방석이 따로 없다. 그렇게 안절부절못하고 있을 때였다.

“망치질은 견딜 만하드나?”

어? 어떻게 아셨지? 눈이 동그래져서 쳐다보자, 주방장님이 픽하고 웃으신다. 다 아신다는 눈빛이셨다. 그러다가 말씀하셨다. 한데, 어째 나한테 하시는 말씀이 아닌 듯하기도 하고…….

“걷지는 못해도 길 수는 있갓지.”

“……?”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일어나라우.”

“예? 아, 예…….”

“가자우.”

어딜? ……하는 눈빛을 해 보이자, 주방장님의 눈빛이 변하셨다. 이제까지 따뜻했다면……. 지금은 진지하다 못해 서늘하기까지 하다. 그런 채로 주방장님이 입꼬리를 끌어올리니, 무섭다. 그래서 아무 말도 못 하고 따라 일어서는데, 주방장님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신다. 또 내가 뭘 잘못했다 싶어서 주춤거리자, 주방장님이 칼이 담긴 상자들을 가리키신다.

“저거이 놓고 갈 거네?”

“아, 아뇨.”

상자들을 챙겼다. 아니 그러려던 순간, 주방장님의 음성이 귀에 꽂혀 들었다.

“네 것만 챙기라우.”

응? 하는 눈빛이 되어 돌아보는데, 주방장님은 이미 등을 돌리고 계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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