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 숙제 (1)2021.02.19.
서울로 돌아가는 길은 순탄했다. 올 때처럼 헤매지 않고 버스 몇 번 갈아타자, 곧바로 기차를 탈 수 있었다. 신현정 피디로부터 연락을 받은 것도 막 기차에 오른 직후였다.
“예. 서진영입니다.”
- 혹시 일하던 중이셨던 건 아니죠?
왜 그렇게 묻나 생각하다가 지금이 점심때라는 걸 깨달았다. 원래대로라면 한창 점심식사 준비에 바쁠 시간인 것이다.
“아뇨. 지금 기차 안이에요.”
- 어디 다녀오시는 건가 보네요.
“예. 그렇게 됐습니다. 혹시 게스트 때문에 전화 주신 건가요?”
- 맞아요. 방금 확정됐거든요.
“다행이네요. 그럼 내일 촬영하는 건가요?”
- 아뇨. 그래도 게스트가 바뀌었으니, 서두른다고 해도 빨라도 모레나 촬영이 가능할 거 같아요. 근데 그것 때문에 혹시 일에 지장이 있으신 건 아니신지 모르겠네요.
내일모레라……. 엊그제 얘기한 대로 촬영일은 수요일인가?
“괜찮습니다. 오히려 저 말고 다른 분들이 어떤지 모르겠네요.”
사실이다. 어째선지 모르겠지만, 고윤수 주방장님은 방송으로 일정에 대해 꽤 관대한 태도를 취하고 계셨다. 희한한 건 삼한가의 어느 누구도 이걸 가지고 뭐라 하는 사람이 없었다는 거였다. 내가 방송에 출연하는 게 삼한그룹에 도움이라도 되는 건가 생각해보았지만 그런 거 같지도 않고……. 솔직히 이해가 가질 않았지만, 그런가 보다 하고 있을 뿐이다. 주방장님이나 김진호 셰프나 다 생각이 있으신 거겠지. 덕분에 준석이 형만 죽어 나가는 중이랄까. 이번에도 내가 아우라지에 다녀오는 사이, 형은 내 몫까지 전부 떠안아야 했을 거다. 당연히 미안함이 앞선다. 그래서 더 잘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 한진석 씨에게도 이미 양해를 구해놓은 상태예요. 스케줄 조정도 끝냈고요.
“그렇군요. 그럼, 모레 방송국으로 가면 되는 건가요?”
- 예. 스튜디오로 오시면 됩니다. 아, 한데 궁금하지 않으세요? 게스트가 누군지?
그러고 보니 그걸 못 들었네. 뭐 솔직히 말하면 지금으로선 딱히 궁금하진 않다. 머릿속에 아저씨 일이 꽉 차 있어서 그런 거겠지. 사실 듣는다고 해서 뭐가 달라질 것도 없을 거고. 그래도 미리 들어서 나쁠 건 없겠지.
“누군데요?”
- 페이슬리 박이라고 아세요?
음, 전혀 들어본 적 없는 이름이다. 근데, 외국인인가? 아니면 성이 박인 거로 봐서 교포?
“우리나라분이긴 한 거죠?”
수화기 너머에서 작게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 교포라고 할까, 국적은 미국인데요. 태어나긴 한국에서 태어나셨다고 하더라구요. 아마 인터넷으로 검색하면 나올 거예요. 외국에선 꽤 유명한 피아니스트니까요.
“그래요? 한번 검색해봐야겠네요. 아무튼, 그분이 나오신단 얘기죠?”
- 예.
“그렇군요. 그럼 그렇게 알고 있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나서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국적은 미국인데 고향은 한국? 언뜻 드는 생각은……. 입양? 아니지. 그랬으면 박씨 성을 쓸 리가 없지. 난 핸드폰을 다시 켜곤 망설였다.
“여긴 와이파이 안 되나?”
될 리가 없지. 달리는 기차 안에서 무슨…….
“되는데?”
어? 난 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시선을 돌리곤 웃고 말았다. 다섯 살이 됐을까? 통로를 두고 건너편 의자에 앉은 남자아이 한 명이 스마트 패드를 흔들고 있었다.
“와이파이 돼요!”
“쉿! 엄마가 기차 안에선 조용히 해야 한다고 했지?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엄마로 보이는 여자는 여기저기에 대고 고개를 숙여 보이고 있었지만, 의외로 사람들은 불쾌한 반응이 아니다. 다들 아이가 귀엽다는 듯 쳐다보며 웃어 보일 뿐이었다. 나 역시도 웃으며 손을 흔들며 말했다. 속삭이듯 작은 목소리로.
“고맙다.”
씩 하고 웃는 아이를 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어디 보자, 페이슬리 박이라고 했지? 핸드폰 설정에 들어가 와이파이를 띄워보니 진짜로 있다. 와, 요즘은 기차에서도 와이파이가 터지는구나.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검색을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멍한 표정이 되고 말았다. 검색하는 와중에 들려온 나레이션 때문이었다. - 페이슬리 박은 부산 출신이다. 솔직히 말해서 울적한 기분이었다. 아저씨 문제로 인한 후유증이랄까. 애써 밝게 지내려고 생각하곤 있었지만, 그게 좀처럼 안 된달까. 아마 아저씨께서 건강검진을 받고, 어느 정도 치료가 될 때까진 마음을 푹 놓긴 힘들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 그런가, 차라리 이렇게 갑자기 나레이션이 들려오니 마음이 편했다. 뭔가에 열중할 수 있어서인 거 같다. - 사업에 실패한 아버지가 전 재산을 처분해 가족들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간 것은 8살이 되던 해였다. 그 후로 그녀는 한국에 대해서 잊고 살았다. 사기를 당한 기억으로 한국이라면 치를 떨다시피 하는 부모님 영향으로, 그녀 역시 한국을 고국으로 생각지 않았던 까닭이다. 다행히 미국에 건너간 뒤 아버지가 사업에 성공했고, 부유한 가정에서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그리고 집안의 전폭적인 지원 하에 어릴 때부터 피아니스트로 두각을 드러낼 수 있었던 그녀로선 한국을 잊고 산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 그녀가 다시금 한국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 계기는 사실 별게 아니다. 피아니스트로 성공한 후 파리 공연을 할 때 먹어본 음식 때문이었다. 그래, 저 심정 이해한다. 사람이 다른 건 다 잊어도 먹어본 음식에 대한 기억은 오래간다는 걸 나 역시 경험으로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 그녀는 그저 베트남 음식인 줄로만 알았다. 매콤한 국물에 담가진 길고 가는 면. 이상하게 입에 맞아서 파리에 있는 동안 점심은 꼭 그걸로만 먹었던 음식. 그게 밀면이란 것도 나중에야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기억해냈다. 그리운 맛을. 육수에 밀가루와 전분을 섞어 만든 국수를 넣고 수육, 무초절임, 삶은 달걀 등의 고명을 올려 먹는 국수 요리. 밀면에 대한 기억이 떠올랐고, 시장을 거닐며 자신이 넘어질까 손을 꼭 잡고 있던 주름지고 거친 손도 기억해낸 것이다. 그럴 줄 알았다. 아, 물론 그녀가 재미교포임은 검색을 통해 진즉에 알고 있었고, 지금 새로 알아낸 사실은 그녀가 고향인 한국, 정확히는 부산을 그리워하게 만든 계기가 바로 음식 그러니까 밀면이라는 것이다. 원래 그런 거지. 가장 행복했던 순간, 사랑하는 이와 함께 먹은 음식은 평생을 가도 가슴에 남는 법. 내 경우엔 부모님과 함께 여행을 가서 먹던 메기 매운탕이다. 페이슬리 박의 경우도 마찬가지겠지. 여덟 살에 미국으로 건너갔다고 했으니, 당시 어렸던 그녀가 밀면을 제 돈 주고 사 먹었을 리는 없고, 누군가 사줬을 텐데 나레이션이 말하는 주름지고 거친 손의 주인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 손의 주인을 그녀는 그리워하는 것일 터. 그 매개체가 되는 게 밀면인 거고. - 한번 떠오른 기억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고, 나날이 커져가는 그리움은 까닭 모르게 가슴을 옥죄었다. 페이슬리 박이 한국을 찾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누군지는 나도 궁금하다. 그녀에게 밀면을 사준 사람이.
“아무튼, 메뉴는 결정된 건가?”
근데, 문제가 하나 있다. 그것도 매우 성가신. - 그녀가 기억하는 밀면은 지금의 밀면과 많이 다르다. 그 당시와는 달리 시간이 흐르면서 밀면은 점진적인 개선이 이루어졌고, 식감은 물론이고 불면 가닥가닥 끊어지는 점도 많이 사라졌다. 그때 비하면 지금의 밀면은 상당 부분 달라져 있다. 헐. 그래서 나더러 어쩌라고. 설마 예전에 만들던 밀면을 재현하라는 건가? 어처구니없는 표정이 되고 말았을 때, 나레이션이 덧붙이고 있었다.
- 페이슬리 박이 그리워하는 맛은 어린 시절 맛본 밀면이다. 내 이럴 줄 알았지. 하아, 이거 어디 가서 예전 방식의 레시피를 구하나…… 하고 있는데, 얼씨구? 이번엔 웬일로 나레이션이 레시피를 알려준다. - 원래 밀면은 50년대 초반 한국전쟁 때 미군이 원조한 밀가루를 전쟁통에 양식으론 턱없이 부족하게 된 쌀을 대신 유용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처음 만들어진 곳은 당시 피난처였던 부산항으로, 지금은 밀가루에 전분을 섞어 만들고 있지만, 그 당시엔 오로지 밀가루와 소금만으로 만들었으며 그 때문에 조금만 힘을 줘도 끊어지기 일쑤며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도 금세 분다는 것이 특징이다. 더욱이 90년대 이후 반죽기를 이용하게 되고 유압식 제면기를 사용하면서 대중화되었지만, 옛날 방식대로 맛을 내기 위해선 손으로 직접 반죽하고 제면기 또한 나무틀로 만들어진 것을 이용해 사람의 힘으로 직접 면을 뽑아내야 하는데, 만드는 방법은……. 흠, 이러면 또 내가 할 말이 없지. 그렇긴 하다만……. 웬 제면기? 뜻밖의 단어가 날 당황스럽게 만들고 있었다. *** 전화를 끊은 신현정 PD의 옆에 어느새 조강훈 FD가 와있다. 뭔가 할 말이 있는지, 쭈뼛거리기는 하는데 입은 아교라도 바른 듯 좀처럼 열지 않는다.
“무슨 일이죠?”
조강훈 FD는 그녀가 서진영과 전화할 때와는 태도며 말투가 백팔십도 다르다는 생각을 하면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어, 세원시청 측에는 뭐라고 답변을 할까요?”
잠시 생각에 잠기던 신현정 PD는 뒤늦게 스텝들이 자신을 힐끔거리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 시선이 걱정스러운 눈길이란 것도. 더불어 그 이면엔 의아함도 깃들어 있다. 어째서 신현정 PD가 명제준 세원시장이 아닌 페이슬리 박을 선택했는지 궁금하단 눈빛들이다. 하긴 그럴 만도 하다. 인지도 면에서 보나 화제성 면에서 보나, 페이슬리 박에 비해 명제준 세원시장이 압도적인 게 사실이니까. 방송이라는 게 결국 시청률로 판가름이 나는 분야란 걸 감안하면, 어느 쪽을 택해야 하는지는 명약관화. 그런데도 신현정 PD가 페이슬리 박을 게스트로 섭외한 게 이해가 가질 않는 걸 테다. 하지만 스텝들이 간과하는 게 있다. 아니 알고들 있지만, 그 달콤함에 취해 애써 무시하는 거겠지. 굳이 예측할 필요도 없을 만큼 명제준 세원시장을 섭외하면 높은 시청률을 보장할 거라는 생각에, 다른 건 다 무시하고 있는 것일 터다. 다만 문제는 그 ‘다른 게’ 매우 치명적이라는 점이다. 자칫하면 프로그램의 존폐를 결정지을 정도로. 적어도 신현정 PD가 생각하기엔 그랬다. 왜? 정치란 그런 거니까. 국민이 주인이라는 개념이 확실하게 정립되어 있는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정치란 떨어지려야 떨어질 수 없는, 삶과 밀접한 주제지만 한편으로는 그렇기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이유야 간단하다. 십인십색. 사람들마다 생각이 다르기 때문이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저마다 사는 방식이 다르고, 가진 게 다르고, 꿈꾸는 게 다르니까. 그만큼 민생에 맞닿은 정치는 추구하는 게 다를 수밖에 없고, 그래서 정국이 여야로 나뉘고 표밭도 갈리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한국에 있어서만은 정치는 민감한 주제일 수밖에 없다. 오죽하면 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종교와 정치 얘기는 하지 말라고 할까. 하물며 정치인을 게스트로 초대하는 걸 간단히 생각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아무리 미디어와 콘텐츠가 범람하고, 정계와 방송계가 마치 악어와 악어새처럼 서로가 서로를 이용하는 현실이라고 해도 본질은 달라지지 않는다. 잘나가던 연예인이 말 몇 마디 잘못했다가 방송계에서 사실상 퇴출당하고, 각광받던 매체가 정권이 바뀌는 순간 간단한 법 개정 한 번에 몰락하는 마당에, 이제 갓 시작한 프로그램 정도야 말할 것도 없다. 그런 모습을 시사 교양국에 있으면서 무수히 봐온 신현정 PD로선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나마 그녀가 한 번쯤이나마 명제준 세원시장을 저울에 올려본 것은 다름이 아니다. 명제준은 무소속으로 출마해 당선되었던 까닭이다. 그렇다곤 해도……. 역시 위험하다. 아직은.
“검토 중이라고만 전하세요.”
그래서 보류다. 조금은 더 시간을 두고 이것저것 따져보고 싶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방송이 거듭됨에 따라 프로그램 자체가 조금은 더 힘을, 정확히는 영향력을 가지게 되기를 희망하면서.
“알겠습니다. 그럼 그 일은 그렇게 처리하고, 출연자들에게 대본부터 전달하겠습니다.”
아직도 미련이 남는지 개운치 못한 표정을 한 조강훈 FD가 대답과 함께 돌아섰다. 그 뒷모습을 보면서 신현정 PD가 한숨을 삼켰다. 서진영을 믿고 밀어붙이곤 있지만, 예능 쪽이 자신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치열하고 또 화려하다고 생각하면서. *** 마지막 계단을 밟고 올라선 순간, 거친 숨이 터져 나왔다.
“후아!”
장난 아니다. 몸이 천근만근 무겁다.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숨을 헐떡일 정도니 말해 무엇할까. 너무 무리했나? 아침부터 병원에 들렀다가 서울로 오는 건 아무리 젊은 육체라도 부담스러웠던가 보다.
“다 왔다!”
숙소 문이 닫히는 순간,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신발도 벗지 못한 채로 숨을 골랐다.
“와씨, 장난 아니네!”
여독? 그 정도가 아니다. 군대를 갔다 온 건 아니지만, 행군이라도 한 것 같은 느낌이랄까. 진짜…… 군인들 상 줘야 한다니까. 등에 메고 있던 배낭을 마치 군장이라도 대는 양 벗어던지곤 중얼거렸다.
“맷돌 가져왔으면 진짜 새 될 뻔했네.”
병원에 들렀다 오느라 챙길 여유가 없어서 그냥 두고 온 건데, 그게 신의 한 수였다. 참네, 생각해보면 그건 또 뭐하러 샀나 몰라. 쯧, 어쩔 수 없는 거지. 뭐 눈엔 뭐만 보인다고. 요리사인 나로선 요리도구에 욕심을 내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설사 그게 요샌 줘도 안 갖는 맷돌이라고 할지라도. 아무튼, 그 무거운 맷돌을 이고 지고 왔더라면 진짜 힘들 뻔했다. 아마 오는 길에 쓰러져 지금쯤 병원 응급실에서 링거를 맞고 있지 않을까?
“후우!”
그나저나 어쩔까? 지금이라도 주방장님을 찾아뵈어야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