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 차 조심해. (4)2021.02.17.
대체 뭔가 싶어서 고개부터 집어넣고 살펴보니, 마당 한가운데 두 명의 남자가 서 있는 게 보인다. 응? 저 사람들은? 어제 왔었던 일본인들이었다. 소우치던가? 아니 소우타라고 했던가. 아무튼, 그치들이다. 참, 끈질기기도 하지. 아저씨가 말 한마디는커녕 상대조차 안 해줬는데, 그런 수모를 겪고도 또 찾아왔네. 그만큼 아저씨의 칼이 욕심이 난다는 건가? 와장창! 아저씨가 내던진 사기그릇이 바닥과 부딪쳐 산산조각이 나는 소리에 흠칫하고 말았다. 결국, 두 명의 일본인들은 쩔쩔매다가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그들과 교차하듯 집안으로 들어온 날 향해 아저씨의 고함이 날아든 것도 그때였다.
“넌 어딜 갔다가 이제 기어들어 오는 거야!”
“……잠시 시내에 볼일이 있어서요.”
“미친놈. 오늘 돌아가야 한다는 놈이 그렇게 굼떠서야……. 얼른 짐 싸. 해지기 전에 나서야 막차라도 얻어 타볼 것 아니냐.”
우렁우렁하던 아저씨의 음성이 어느새 낮아져 있었다. 여전히 쌕쌕거리며 숨을 몰아쉬곤 계셨지만. 그런 아저씨 옆에서 사모님이 안쓰럽다는 듯 날 쳐다보고 계셨고. 그 눈빛만 봐도 무슨 얘기를 하는지 알고도 남겠다. ‘지금 화가 많이 나셔서 그래. 절대 너한테 화를 내는 건 아니란다. 알지?’ 하고 말씀하시는 듯하다. 예, 알죠. 저 성격……. 열흘도 넘게 옆에서 봤는데 왜 모르겠어요. 난 고개를 끄덕이곤 아저씨께 얘기했다.
“아저씨 잠시 얘기 좀 해요.”
“……?”
내가 평소랑 다르다고 느끼셨는지, 입만 벙긋거리실 뿐 뭐라 하질 않으신다. 그러다가 이내 의아하단 눈빛을 보이시는 아저씨를 뒤로하고 그대로 몸을 돌렸다. 그러곤 마루로 올라가니, 아저씨와 사모님이 뒤따라 올라오는 소리가 들린다. ***
“뭔 짓거리냐? 이게?”
사모님까지 방에 들어오는 걸 확인하고 서류를 내놓았을 때 아저씨가 보인 반응이었다.
“보시면 아시잖아요.”
“……그러니까 뭐냐고.”
“뭐긴요. 건강검진 패키지죠.”
두 사람 다 아무런 말씀이 없으셨다. 그런 채로 서류에만 눈길을 던진 채 가만히 계신다. 예상대로라면 지금쯤 서류들을 북북 찢거나 앞에 놓인 다과상이라도 뒤엎어야 하는데……. 생각과 많이 달라서 오히려 내가 놀랐다. 그러다 보니 대꾸하려던 말들도 무용하게 돼버렸다. 덕분에 아무런 말도 못 하고 있을 때였다. 서류를 집기 위해 내미는 아저씨의 손이 눈에 보였다. 한데, 어쩐지 살짝 떨리는 듯한 느낌이다. 설마 하는 마음에 다시 보려고 할 때, 아저씨가 말씀하셨다.
“이걸 왜…… 우릴 주는 거냐?”
대놓고 물으시니 뭐라 할 말이 없다. 그렇다고 당신 몸속에 암세포가 자라고 있다고 사실대로 말씀드릴 수도 없고. 젠장. 맨날 이런 식이지. 아씨, 진짜. 이놈의 나레이션! 무슨 숙제라도 내주듯 골치 아픈 문제만 잔뜩 얘기하지, 그에 대한 솔루션 따윈 일절 없다. 한마디로 말해서 나더러 알아서 처리하라는 거지. 그래, 한다 해!
“돈 때문에 그러는 거면…….”
“누가 그걸 물었냐? 왜냐고 물었지?”
여기가 고비란 걸 직감한다. 까딱하면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간다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리 준비한 말을 꺼냈다.
“사, 사모님 때문이지 왜겠어요?”
두 사람이 일제히 내게 시선을 던진다. 아니 쳐다보기는 아까부터 쳐다보고 계셨지. 아무튼, 한층 더 강렬한 눈빛으로 날 보고 계셨다. 특히 사모님께서. 난 그 시선들을 애써 피하며 말도 안 되는 변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가, 간장이랑 고추랑이랑……. 앞으로 계속 얻어먹으려면 사모님께서 건강하셔야 하잖아요. 그리고 봄이 되면 여기 와서 나물에 대해서도 더 배워야 하는데, 그때 사모님이 아프기라도 하면 저만 손해죠. 그래서……. 하, 하는 김에 아저씨 것도 했구요. 맨날 꽉 막힌 데서 쇳가루 마시는데 폐가 남아나겠느냐고요. 아, 몰라요. 환불은 절대 안 된다니까 가시든가 말든가 알아서 하세요.”
나도 안다. 이게 얼마나 황당하고, 또 멍청한 변명인지. 세상 어디에 간장 고추장 얻어먹겠다고 이런 짓을 하는 놈이 있겠냐고. 나물 얘기도 그렇다. 굳이 마음먹으면 여기가 아니라도 배울 곳은 많다. 그걸 아시니 아저씨도 저런 표정을 짓고 계시는 거겠지. 후우, 얼굴 확 일그러지신 걸 보니 이제 곧 고함을 내지르며 길길이 뛰실…….
“알겠다.”
“……!”
뜻밖의 반응에 내가 눈을 치떴을 때, 아저씨는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이 되어 서류를 챙기고 계셨다. 턱!
“뭐하냐?”
서류를 잡고 있는 내 손을 보다가 시선을 내 쪽으로 옮기며 아저씨께서 묻고 계셨다.
“지금 가요.”
“뭐 이놈아?”
“아깐 알겠다면서요?”
“끙. 야 이놈아, 내가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뭐가 그렇게 할 일이 많은데요? 그래 봐야 사람 목숨보다…… 아씨, 몰라요. 빨리 짐 챙기세요. 지금 가면 입원 수속 밟을 수 있다고 했어요.”
“후, 그래. 네가 이러는 건 고마운데, 내 몸은 내가 안다. 그리고 누가 안 받는다고 했냐? 환불도 안 된다며? 그러니까 연말에…….”
“아씨, 연말은 무슨! 맨날 쇳가루 펄펄 날리는 대장간에만 틀어박혀서 쇳물 녹이고 망치 두드리는데 그놈의 폐가 남아나냐고요! 그러고도 알긴 뭘 다 안대. 아, 뭐해요! 얼른 나갈 준비 안하시고!”
나도 모르게 울컥해져서 목청이 커져 버렸다. 안 그러면 속내가 드러날 것 같아서. 그걸 느끼신 건지, 아니면 내가 이렇게까지 막무가내로 나올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는지 아저씬 멍하니 날 쳐다보다가 천천히 말씀하셨다.
“무슨 검사를 바로 해? MRI인지 뭔지 찍으려면 전날 밥도 굶고…….”
예상외로 부드럽게 얘기를 하시는 아저씨를 보다 보니, 울컥했던 마음도 서서히 가라앉았다.
“그건 내시경이고요. 아무튼, 그런 검사도 하겠지만, 무슨 검사든 간에 입원해서 하는 게 좋다고 했어요. 그러니까, 빨리 옷 갈아입으세요. 빨리.”
“헛참! 저놈이 뭘 잘못 먹었나? 여보, 쟤 왜 저러는 거야?”
아저씨가 황당하다는 듯 사모님께 물었지만, 어쩐지 사모님은 말씀이 없으시다. 그저 나만 바라보고 계실 뿐. 그때, 아저씨께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말씀하셨다.
“알았다, 이놈아. 내가 안 갈까 봐 그러나 본데, 네 말대로 하마. 그래도 지금은 시간이 늦기도 하고, 갈 때 가더라도 정리는 하고 가야 할 거 아니냐. 그러니 내일 가도록 해.”
난 가만히 아저씰 바라보다가 되물었다.
“진짜죠?”
“허허. 내 이제껏 네놈 같은 놈은 처음 본다.”
다시 한번 고개를 내젓는 아저씨셨다. 그 후, 저녁 무렵 밥을 먹을 때까지 사모님은 무슨 생각이신지 아무런 말씀이 없으셨다. 그리고 밥을 코로 먹는지 입으로 먹는지 모르게 식사를 마친 뒤에 밖으로 나와 바람을 쐬고 있을 때였다.
“추운데 왜 나와 있어?”
돌아보니 사모님이셨다.
“그냥요. 좀 답답해서.”
심란해서 그런 거지만, 사실대로 말할 순 없었다. 그 때문에 사모님과 눈을 마주치기가 겁났달까. 시선을 다른 쪽으로 돌리고 있는데, 사모님께서 물어오셨다.
“병원까지 갔다 온 거니?”
“버스 타고 가니까 금방이던데요?”
“…….”
“…….”
대장간이 식은 채여서 그런지 마당은 어둡기만 했고, 그 어둠 속에서 침묵은 더욱 무겁게 어깨를 짓눌러 온다. 그게 견디기 힘들어 먼저 입을 열었다.
“아저씬 주무세요?”
“응.”
“사모님도 일찍 주무셔야죠. 그래야 내일…….”
스륵. 언제 다가오셨는지, 사모님의 두 손이 내 손을 잡고 있었다.
“…….”
말없이 서 있자, 사모님께선 한 손으로 내 손등을 부드럽게 쓸어내리셨다.
“고마워.”
아이씨……. 뭐냐고. 왜 갑자기 눈알이 쿡쿡 쑤시는 건데. 난 고개를 돌리고 눈에 힘을 주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 이하연과 잠시 톡을 하다가 일찍 자야 한다고 얘기한 뒤, 막상 잠자리에 드니 잠이 오질 않았다. 덕분에 거의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다음날 새벽같이 일어났다. 아저씨나 사모님이나 두 분 다 워낙 잠이 없으신 분들인지라 해가 뜨기도 전에 아침을 먹고 나서 길을 나설 준비를 마치자 그제야 해가 떠오른다. 그러고 나서 삼십 분쯤 지났을까. 차 한 대가 비탈길을 올라왔다.
“많이 기다리셨소? 빨리 온다고 왔는데…….”
“아녜요. 우리도 지금 막 채비를 마쳤어요.”
안 그래도 어젯밤, 택시를 산속까지 부르면 올까 고민했었는데 다행히 아랫마을 산다는 우 씨란 분이 차를 가져오셨다. 원래 타고 다니시던 건지, 아니면 산길이라도 일부러 가져오신 건지, 차는 SUV였다. 어느 쪽이 되었든 택시를 안 불러도 돼서 좋았다. 아마도 사모님께서 연락하신 모양이었다.
“형님, 짐 다 실었소. 얼른 갑시다.”
“뭘 그렇게 안달이야? 병원이 어디로 가는 것도 아닌데.”
“흐흐흐. 원래 내가 성격이 급하지 않소. 여러 말 말고 얼른 갑시다. 길 막히기 전에.”
“헛참, 사람하곤.”
아저씬 못 이기는 척 대문 밖으로 걸음을 옮기셨다. 그러다가 걸음을 멈추시더니 날 보며 묻는다.
“가다가 터미널에 내려주면 되냐?”
“아뇨. 저도 갈 건데요?”
“가긴 어딜 가?”
“어디긴요, 병원이죠.”
“미친놈.”
뭐라고 하실 줄 알았더니 더 이상 아무 말씀이 없으시다. 그저 가만히 바라보시다가 돌아서셨을 뿐. 그러곤 사모님이랑 같이 우 씨 아저씨의 차 쪽으로 향하고 계셨다.
“뭡니까? 형님 숨겨둔 아들 있었소?”
“아들은 무슨.”
“그럼 누구요?”
“몰라도 돼.”
대문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들으며 멀뚱히 서서 둘러보았다. 집안 곳곳이 눈에 박혀 든다. 내가 며칠씩이나 걸려 칠한 담장이. 늦가을의 따가운 햇살을 맞아가며 보수한 지붕이. 며칠 전 온 비를 거뜬히 막아주었던 기왓장들이 보인다. 매일 새벽 산으로 돌아다니며 해온 나무들. 엊그제 죽을 둥 살 둥 패놓은 장작도 마당 한쪽에 쌓여있다. 이젠 안 하는 게 더 이상한 물 긷기. 저 벽 너머엔 욕실이 있다. 그곳엔 오늘 아침에도 길어온 물이 가득할 테고. 특히 대장간. 첫날부터 엉겁결에 들었다가 결국 호통 속에 놓치고 만 쇠집게가 가지런히 놓여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여기저기……. 내 손길이 안 미친 곳이 없다. 사모님과 함께 앉아 나물을 다듬고 장을 담그던 툇마루 하며. 그때 동네 아주머니들 수다 떨듯 별거 아닌 대화를 하면서 많이도 웃었더랬지. 그런 날 매번 아저씨께서 타박하시긴 했지만. 그리고……. 사모님이랑 함께 담근 고추장이랑 간장이 들어있는 장독들도 눈에 띈다. 무려 서른 개가 넘는 장독들. 저 중 절반이 사모님이 알려주신 레시피에 따라 만든 특제 고추장이었다. 아, 된장도 있긴 한데 그건 그저 맛만 봤지 만드는 과정은 보질 못했다. 장독 앞쪽으로는 산에서 따온 산나물들이 널려 있었다. 햇볕이 잘 드는 곳이라 그런지 벌써 말라비틀어져 원래 부피의 삼분의 일도 되지 않아 보였다. 그것들을 보고 있자니, 벌써부터 여기가 그립다. 열흘 남짓 있었을 뿐인데, 한 십 년은 여기서 산 것 같다. 다시 올 수 있을까? 올 수 있을 거다. 아니, 꼭 와야지. 감정을 추스르고 있는데, 차에 오르기 직전 아저씨랑 사모님이 나누는 대화가 들려온다.
“병원은 무슨. 잘 먹고 잘 자고 운동도 맨날…….”
“노동이랑 운동이 같아요? 당신 작년에 나온 건강검진도 안 받았잖아요. 진짜, 진영이한테 고마워해야 한다고요.”
“아, 누가 뭐래? 그래서 가잖아. 거참. 사람 무안하게.”
“하하하. 형님도 무안해할 때가 있소? 내가 20년도 넘게 봐왔는데 형님 그러시는 거 처음 봅니다.”
“내가 뭘 어쨌는데!”
투덜거리던 아저씨가 버럭 소리치신다. 날 향해서.
“넌 뭘 그렇게 보고 있어! 다시 안 올 놈처럼!”
“그냥요.”
“싱겁긴. 아, 안 갈 거야!”
안 간다고 하실 땐 언제고. 아저씨의 재촉에 미련을 내려놓고 돌아섰다.
“지금 가요.”
가방을 둘러메고 차에 오르기 무섭게 SUV가 먼지를 일으키며 산길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 길이 막히지 않은 덕분에 점심때가 되기 전에 병원에 도착할 수 있었다. 밥이라도 먹고 가라고 하는데도 우 씨 아저씬 바쁜 일이 있다며 급히 떠나셨고, 혹시라도 검사에 지장이 있을까 싶어서 아저씨랑 사모님은 식사를 거르시기로 했다. 입맛이 없어서 나 역시 거를까 했는데, 사모님이 하도 닦달을 하셔서 하는 수없이 편의점에서 빵 하나랑 우유로 점심을 때웠다. 그러곤 접수처로 가서 물어보니 여직원이 친절히 안내해준다.
“여기 앉아 계세요.”
참 이상한 일이다. 평소대로라면 아저씬 자긴 발이 없는 줄 아냐며 불같이 역정을 내실 테고, 사모님은 자기가 해도 된다며 날 말릴 텐데……. 어제도 그렇고, 오늘도 두 분은 그저 내가 하자는 대로 따라주시고 있다. 봐라. 내가 접수증을 가지고 돌아서는데도 아저씬 병원 곳곳을 구경하듯 쳐다보고 계시고, 사모님은 그저 날 보며 빙글빙글 웃고만 계시는 거. 뭐, 아무튼 두 분께 접수처 앞에 길게 늘어서 있는 의자에서 기다리시라고 말씀드리곤 여직원이 말해준 대로 움직이다 보니, 입원 수속을 빠르게 마칠 수 있었다. 그리고 아저씨가 입원한 병실 안. 6인실이긴 했지만, 운이 좋은 건지 아니면 지방이라 그런 건지는 몰라도 마침 두 자리가 비어서 두 분 다 같은 병실에 계실 수 있었다.
“네놈 하자는 대로 다 했는데 넌 왜 그러고 섰냐? 아, 서울 안 갈 거야?”
누군 이러고 싶어서 이러나? 발길이 떨어져야 말이지.
“오늘 저도 여기서 잘…….”
“염병! 아, 내일이 촬영이라며!”
“연기됐대요.”
사모님의 얘기에 아저씨는 큼하고 헛기침을 하시더니, 조금 누그러진 음성으로 말씀하신다.
“그래서? 오늘 안 간다고? 넌 내 얼굴 보는 게 지겹지도 않냐?”
“아, 누가 아저씨 보려고 그러나요? 사모님 때문에 그러죠!”
“말하는 거 하곤. 하여간 한마디를 안 져요, 한마디를.”
다시 눈 마주치면 또 가라고 할까 봐서 시선을 딴 데로 돌리고 있을 때였다.
“옜다.”
뭔가 해서 바라보니, 아저씨가 언제 꺼내신 건지 상자 두 개를 내어놓으신다.
“뭔데요?”
“뭐긴 이놈아. 칼이지.”
칼……. 깜빡하고 있었다. 근데 왜 두 자루……. 아, 나한테도 한 자루 주시기로 했지. 기뻐야 하는데, 상황이 이렇다 보니 마냥 신나지만은 않는다. 아무튼, 열어는 봐야 할 거 같아서 우선 큰 것부터 확인했다.
“그건 노인네 갖다 주고. 그 옆에 게 네놈 거고.”
아저씨 말씀이 아니더라도, 나무상자를 열어보니 익숙한 칼이 들어있다. 시퍼렇게 날이 서 있는 칼날. 그런데도 날카롭다기보단 은은한 은빛을 뿌리고 있는 게 그 자체로 예술품처럼 보일 지경이다. 손잡이도 무슨 재질로 만들었는지는 몰라도 검은 광택이 감도는 게 멋스러웠다. 거기에 비해서 내 건 상자부터 다르다. 크기도 작고 오래됐는지 겉감이 꺼칠꺼칠하다.
“못 쓰는 거 주신 거 아녜요?”
“미친놈. 그게 어떤 물건인 줄 알고…….”
“아, 그냥 해본 말…….”
멈칫하고 말았다. 상자를 열자, 드러난 칼은 생소하기 그지없었다. 우선 광택이 없다. 아니, 칼날 자체가 검은빛이 돌아서 그렇게 느껴지는 건가? 아무래도 이거 그냥 쇠 같지가 않은데? 게다가 눈으로 봐선 날도 제대로 서 있는 거 같지 않고.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손잡이를 보니 그냥 나무다.
“와, 너무하시네. 손잡이 좀 좋은 거로 만들어 주시지.”
“지랄! 그 나무가 뭔지나 알고 그런 소릴 나불거리는 거냐?”
“그래도 마음에 들어요.”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다. 손잡이를 쥐어보니, 손에 딱 들어온다. 희한한 건 나무인데도 차갑고 딱딱한 게 아니라 어쩐지 따뜻한 느낌과 함께 부드럽게 손바닥에 감긴다는 점이다.
“근데, 이거 날도 제대로 안 서서 풀이나 베겠어요?”
말을 하면서 손가락으로 날을 만지려 하자, 아저씨가 기겁을 하셨다.
“야이, 미친놈아! 어디다 함부로 손을 대! 손가락 잘리려고!”
흠칫해서 움직임을 멈추고 아저씰 바라보자, 한숨을 푹 내쉬며 중얼거리신다.
“내가 잘하는 건지 모르겠다. 쯧, 뭐……. 스승님 말씀대로 40년이나 묵혔으니, 그럼 된 거지. 이젠 내 손을 떠났으니 네놈이 구워 먹든 삶아 먹든 알아서 해라.”
도통 모를 소리를 하시는 아저씨셨다. 그런 아저씨를 빤히 쳐다보는데, 불쑥 말씀하신다.
“칼도 받았겠다, 그만 가. 난 피곤해서 잘 테니까.”
“그래. 진영아. 이제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까, 가봐.”
“그래도…….”
좀처럼 발걸음이 안 떨어져 머뭇거리고 있자, 아저씬 진짜로 등을 돌리고 누우시며 툭 하고 내뱉으신다.
“해진다.”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가 사모님을 향해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럼 가볼게요.”
여전히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이시는 사모님. 그러면서 날 따라오신다.
“나오실 필요 없어요. 피곤하실 텐데, 그냥 계세요.”
“답답해서 그래. 바깥 공기 좀 쐴 겸 나갔다 오지 뭐.”
말린다고 들으실 것 같지도 않아서 아저씨 쪽에 대고 다시 한번 인사드렸다.
“갈게요.”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하지만 어깨가 살짝 움찔거리는 거로 봐선 잠들진 않으신 거 같다. 그 모습을 보다가 돌아서려는데,
“차 조심해.”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떠오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복도로 나오며 바라본 병실 안. 침대에 모로 누워계신 아저씨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와 박힌다. 저렇게 작으셨나? 대장간에선 그토록 크게만 느껴지시더니. 속내가 겉으로 드러나지 않도록 애쓰면서 고개를 돌렸다. *** 11월 중순이 넘은지라 찬바람이 부는데도 사모님은 부득불 따라 나오셨다. 하는 수없이 버스 대신 택시를 불러 세웠다. 버스를 탄다고 하면, 거기까지 따라오실 거 같아서.
“그만 들어가세요.”
“너 가는 거 보고 들어갈게.”
“그럼 갈게요. 그리고…….”
“…….”
“검진 결과 나오면 꼭 연락 주시고요.”
“그럴게.”
“꼭이요!”
이번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신다. 입가에 미소를 머금으신 채.
“안 가실 겁니까?”
택시운전사의 재촉에 어쩔 수 없이 택시에 올라탔다.
“추운데 얼른 들어가세요.”
차창 앞에 서 계신 사모님. 그 모습을 눈에 담고 있을 때였다. 차가 출발하기 전에 사모님이 얼른 다가와 열린 차창 차이로 손을 쑥 넣으시곤 물러나신다.
“……!”
내 손에 쥐어진 지폐. 얼결에 받은 돈을 보곤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을 때 택시가 출발했다. 뒤늦게 돌아본 풍경에서 손을 흔들고 계신 사모님만이 눈에 들어와 박히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