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3. 첫술에 배 터진다. (3) (53/204)

#53. 첫술에 배 터진다. (3)2021.01.31.

“예. 김동하 국장의 입김이 좀 있었던 모양입니다.”

조심스럽게 얘기하는 조연출의 말에 노경환 피디의 표정이 서서히 변해갔다. 그제야 지금의 상황이 이해가 간다는 듯이.

“잘 만들었군.”

어찌나 건조한 말투인지. 칭찬 같지 않은 칭찬을 던지곤 노경환 피디는 더 이상 볼 것 없다는 듯 시선을 돌렸다. 그런 그의 얼굴에 더 이상 의아함 따윈 찾아볼 수 없었다. 경쟁심도. 하기야 애당초 신현정 피디가 자신의 경쟁자라고 생각해본 적도 없었지만. *** TV에선 콩트 아닌 콩트가 펼쳐지고 있었다. 아니, 만담인가?

- 못하는데?

- 어? 못해요? 그럼 안 되는데?

  큭, 나도 모르게 얼굴이 찌푸려진다. 동시에 도저히 고개를 들 수가 없어서 아예 시선을 돌려버리려는 찰나, 옆에서 키득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끅끅.”

사모님……. 아주 그냥 숨넘어가시겠다. 아니, 저게 웃깁니까? 살짝 어이가 없어져서 사모님을 바라보고 있을 때, 아저씬 언제 가져왔는지 탁주 한 사발을 쭈욱 들이키곤 김치를 주욱 찢어서……. 아, 그게 넘어갑니까 지금? 대한민국 방방곡곡 제 얼굴이 팔리고, 그걸로도 모자라 저렇게 바보처럼 비치고 있는 마당에. 조금, 아주 조금 서운해져서 눈살을 찌푸리며 노려보았다.

“야 이놈아. 그러다 가자미가 형님 하자고 하겠다.”

“……좀 그래서 그럽니다.”

“뭐가 좀 그래? 저런 거 다 웃자고 보는 건데.”

“그래서 재밌습니까?”

“이놈이! 찍긴 지가 찍고서, 왜 여기 와서 화를 내고 지랄이여? 지랄이? 그래, 이놈아. 재밌다. 재밌어서 탁주가 술술 넘어간다, 됐냐? 됐어?”

“……재밌기도 하시겠습니다.”

“잼은 빵집에 가서…….”

“아 진짜!”

하다 하다 이젠 아재 개그까지 날리시는 아저씨께 버럭 소리치고 있을 때였다.

- 모시겠습니다. 류승렬 배우님이십니다!

  놈이 나왔다. 동생 삼기엔 성질 오지게 더러운, 무려 쌍천만 관객을 동원한 충무로의 블루칩. 류승렬의 등장이었다. 그리고 녀석은 첫 등장 신부터 강렬한 눈빛으로 시청자들을 사로잡고 있었다. 햐, 내가 진짜 인정하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네. 잘생긴 것만으로도 일단 먹고 들어갈 텐데, 행동거지 하나, 눈빛 하나에도 간지가 줄줄 흐르다 보니 절로 눈이 간다.

“어머! 승렬이네?”

우리 사모님, 승렬이랑 친한가 보다. 아예 대놓고 조카 부르듯 하고 있다.

“예. 승렬이에요.”

내 말을 들은 사모님이 날 빤히 쳐다보신다. 왜요? 전 편하게 부르면 안 돼요?

“친해?”

음, 대답하기 애매한데? 인사도 했고, 형·동생 사이로 지내기로 한 것도 맞은데……. 친하다고 말하기엔 또 그렇다.

“아마도……요?”

“풋.”

“……왜 웃으세요?”

“그냥.”

“…….”

“…….”

“킥.”

웃으려면 웃고, 참으려면 참으실 것이지. 입을 가리고 쿡쿡거리시는 건 또 뭔지. 콕 집어 말하긴 어려운데, 뭔가 마음에 안 든다.

“그냥이 아닌 거 같은데요?”

그래서 물었더니만. 사모님은 빙그레 웃으시더니 웃음기가 묻어나는 음성으로 말씀하셨다.

“저 아이, 딱 봐도 한 성깔 하겠다 싶어서.”

“그러니까, 그게 뭐가 웃긴…….”

“뭐긴 이놈아. 네놈 하는 거 보니까, 애저녁에 통성명 수준은 넘어선 거 같은데. 그럼 뻔하지. 앞으로 저놈한테 달달 볶일 일만 남았다는 거 아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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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끙. 할 말이 없다. 한숨이 나오려는 걸 꾹 참으며 다시금 TV 쪽으로 시선을 돌리다가 또 한 번 사모님이 무섭다는 생각을 했다. 아니 예리하다고나 할까. 그저 사람 표정 한번 보곤 그 속내를 짚어내는 통찰력이란. 이래서 연륜 연륜 하는구나 싶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나이만 먹는다고 다 저러진 않을 테지 싶어, 속으로 혀를 내두르게 된다.

“근데, 요리는 언제 해?”

누가 보면 아무것도 모르는 듯한, 그야말로 순박하기 그지없는 미소로 물어오시는 사모님을 보다가 씩 웃었다. 나만 당할 수야 없지.

“전들 아나요?”

“자기가 출연해놓고, 자기가 모르는 게 어딨어?”

자연스럽게 말을 하면서 내 앞에 있는…….

“바, 밥그릇은 왜 가져가는 겁니까?”

“말 한마디에 천 냥 빚을 갚듯이, 맘을 고약하게 쓰면 밥을 굶게 되는 거란다.”

“그런 게 어딨……끙……어요!”

아우, 누가 야장 마누라 아니랄까 봐. 힘도 무지 세시네. 간신히 밥그릇을 빼앗아 바짝 끌어당겨 놓자, 사모님은 픽하고 웃기만 하실 뿐이다. 장난이셨던 모양인데, 당하는 쪽에선 꽤 서럽거든요? 개도 밥 먹을 땐 건드리지 않는 법인데…….

- 그러니까, 친구 따라서 연극반에 놀러 갔다가 딱 붙잡혔다는 거네요?

  어? 벌써 저 얘기를 하고 있네? 사실 내가 TV에 나온다는 사실만으로도 좀 멋쩍기도 하고, 카메라에 비칠 때는 또 꿔다놓은 보릿자루 같은 느낌도 들어서 일부러 사모님과 투닥거렸는지도 모른다.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사모님께서도 받아주신 걸 테지. 봐라. 그 증거로 지금은 내가 아닌 TV에 시선을 던지고 집중하고 계시는걸. 내가 부끄러워할까 봐 나름 신경 써주시는…….

“그래서 요리는 언제 해?”

끙. 그럴 리가 없지.

“오늘은 안 해요.”

“왜? 이거 요리 프로라며?”

“쿡방을 빙자한 힐링 프로거든요.”

“힐링? 누가 다쳤어?”

그 힐링이 그 힐링이 아닌데……. 진짜 몰라서 물으시는 건지, 아니면 알면서 저러시는 건지. 뭐, 어쨌든 확실히 다친 놈이 있긴 하지.

“그런 놈이 있어요.”

난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웃고 있는, 화면 속 류승렬을 바라보며 한숨을 살짝 내뱉었다. ***

“십이 프로 넘어갑니다!”

조강훈 FD의 외침에도 신현정 PD의 표정은 달라지지 않았다. 하기야, 겨우 이 정도에 멘탈이 무너지기 시작하면 앞으로 방송밥 먹기는 글러 먹은 걸 테지만.

“시, 십일 프로로 떨어졌습니다!”

시청률이 오르락내리락. 시시각각 움직이는 그래프가 말해주듯, 현재 방송을 보는 시청자들의 마음은 말 그대로 갈대와 같았다. 당연한 일이다. 특이점에 도달하지 않은 방송은 아무리 연출을 잘하고 편집에 공을 들여도 그 재미가 일정 수준을 넘길 순 없다. 그걸 잘 알고 있으면서도 다들 긴장 가득한 얼굴이 되어 모니터룸을 떠나지 못하고 있는 걸 테다.

“시, 십 프로……입니다.”

마지노선으로 정해둔 10%. 요즘은 케이블 쪽도 걸핏하면 20% 30% 하는 마당이니, 지상파 그것도 온 가족이 모여 앉아 보는 오후 7시, 예능 프로에서 10%로도 못 넘으면 망신도 그런 망신이 없을 터다. 하지만 신현정 PD는 신경 쓰지 않았다. 이제 곧 특이점이 오니까. 그럼 반전까진 아니지만, 분명 시청자들의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할 것이다.

“댓글 반응은 나쁘지 않아요.”

“뭐라는데?”

“대부분 류승렬 얘기고, 가끔 한진석 얘기도 있어요.”

딱 예상대로다. 당연하겠지만, 서진영에 관한 얘기는 가뭄에 콩 나듯 보일 뿐이다. 그것도 전부 ‘쟨 누군데 저기서 저러고 있냐?’ 따위의 글들이었다. 그 점에 대해선 방영 전부터 다들 짐작하고 있었기에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다만…….

“SBC 쪽 기세가 심상치 않습니다.”

동 시간대 방송되고 있는 타 방송국 예능 프로. 힐링을 주요 테마로 잡은 이쪽과는 달리 철저하게 오락에 중심을 맞춘 프로였다. 더구나 출연자들도 대부분 요즘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는 연예인들 위주로 짜여있다. 뿐만 아니라 게스트도 만만치 않다. 국내 팬만 해도 100만 명이라는 보이그룹. 한마디로 시청자 100만 명은 확보해놓고 시작하는 셈이었다. 더욱 분한 것은 헤나의 변심이었다. 원래는 이쪽에 패널로 출연하기로 했었는데, 갑자기 말을 바꿔 출연하기 어렵게 됐다고 하더니 어느새 저쪽에 붙어버린 것이다.

“지난주 방송분 시청률이 이십 프로를 넘어 거의 삼십 프로에 근접했었다고 합니다.”

요즘 들어 케이블 방송국들이 선전 아닌 선전을 하면서 시청률을 야금야금 뜯어가는 바람에 좀처럼 나오기 어려운 수치였다. 첫방이라면 더더욱. 솔직히 말하자면, 저쪽의 반이라도 했으면 하는 게 조강훈 FD의 심정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그리 쉬운 일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기에 이처럼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모니터하는 중이다.

“들었어요.”

“예. 꽤 잘 찍었더라고요.”

“저도 봤어요.”

“시, 실시간 검색어도…….”

더 이상 들을 것도 없었다. 때론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이 있는 법이다. 신현정 PD는 현재 양측의 판도가 어떠한지 잘 알고 있었다. 모르긴 몰라도 지금 포털 사이트는 저쪽 얘기들로 활활 타오르고 있겠지. 하지만 괜찮다. 그녀는 믿고 있다. 서진영을 믿었고, 무엇보다도 그를 여기까지 끌고 온 자신을 믿었다. 그리고 방송에서 보여줄 그의 진면목을. 의심치 않았다. 자신의 가슴을 흔들었다면, 분명 시청자들도 흔들 것임을. 그녀는 손톱만큼도 의심하지 않았다.

“신경 쓰지 말고 모니터에 집중하세요.”

“……예.”

풀죽은 목소리로 대답하곤 돌아서는 조강훈 FD에겐 눈길조차 주지 않고 신현정 PD는 모니터를 뚫어질 듯 쳐다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서진영이 일어서는 장면.

- 어?

- 재료…… 챙기려고요.

- 아! 그럼? 오오! 서 셰프! 재료 선반 쪽으로 가나요?

  카메라가 그를 비추는 동시에, 화면이 분할되며 또 한 대의 카메라가 류승렬을 비추고 있었다. 조용히 선반과 냉장고를 오가며 재료를 골라 담는 서진영. 그런 그를 묘한 눈길로 뒤쫓고 있는 류승렬. 그러는 와중에도 한진석은 계속해서 멘트를 치고 있었다.

- 쌀까진 이해합니다만, 저 햄은 뭐죠? 수제 햄도 아니고, 그냥 슈퍼마켓에 가면 살 수 있는 싸구…… 큼……. 아, 실망입니다! 실망이에요!

  맞는 말이다. 기껏 쿡방이라고 보고 있는데, 요리사란 사람이 고르고 고른 재료가 싸구려 햄이란다. 당연히 실망하지 않을 수 없다. 자신도 그랬으니까. 하지만……. 서진영이 비닐장갑을 끼고 김치를 꺼내는 순간이었다.

- 지금 이게 무슨!

  살짝 달아오른 얼굴로 벌떡 자리에서 일어서는 류승렬. 어지간히 화가 났는지 이까지 갈고 있었다. 그리고……. 서진영이 올리브유를 집어 들었다가 곧바로 내려놓고는, 마가린을 집어 들었을 때였다.

- 어! 저, 저……건!

  류승렬의 입에서 탄성인지 탄식인지 모를 소리가 튀어나왔다. *** 방송은 여기서 끝났다. 하지만, 신현정 피디는 이 부분에서 뇌관을 심어놓았다. 그것도 사람들의 호기심을 제대로 건드리는. 다음 주 예고. 누가 봐도 싸구려인 도시락. 음식도 초라하기 짝이 없었고. 그런데도 도시락을 먹으며 눈물을 줄줄 흘리는 류승렬. 그러다가 결국 오열하는 그 모습은 궁금증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1분도 채 안 되는, 짧디짧은 영상만으로도 어쩐지 가슴을 울린다. 그 이유도 모르면서 짠해지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정작 본편에 대한 제대로 된 정보는 철저히 숨기고 있다. 이러면 정말이지 보지 않을 수 없게 되겠지. 적어도 이 영상을 본 사람이라면. 대박! 편집 한번 기가 막힌다고나 할까. 앞서 방송된 본편보다, 아니 그 본편이 있었기에 이처럼 반전이 펼쳐지는 거겠지만, 아무튼 다음 주 예고는 기가 막혔다. 내용을 다 알고 있는 나조차 입을 떡 벌리지 않을 수 없을 정도니 말 다 했지.

“뭐니? 쟤 화내다가……우네?”

사모님의 얘기에 모든 게 들어있었다. 아마 오늘 방송을 본 사람들은 다들 같은 질문을 던지고 있지 않을까? 지금 날아들고 있는 톡처럼.

- 뭐에요?

- 저 사람 왜 저래?

- 갑자기 화를 내는 것도 어이없는데, 저 표정은 뭐예요?

- 진짜 웃겨!

- 자기가 뭔데 우리 자기한테 화를 내?

내가 언제 이하연의 자기가 됐는지는 둘째치고, 대화창에 떠오른 글귀에서조차 느껴지는 분노에 절로 몸이 움츠러든다. 이래서 여자가 무섭다. 예고편에서 류승렬이 왜 우는지는 전혀 개의치 않는 걸까? 그저 나한테 화를 내고 있다는 게 거슬리는 모양이다. 류승렬이 눈앞에 있으면 당장에 열 손가락에 손톱을 세우고 달려들 기세다.

--- 사정이 있어요.

- 사정이요?

--- 보시면 알아요.

- 그게 먼데요?

- 아, 혹시 저 사람이 우는 거랑 상관있나?

- 그러고 보니, 왜 울어요?

이제야 그게 눈에 들어오나 보다. 아니 보기는 이미 봤을 테고, 머리가 그쪽으로 돌아가기 시작한 거겠지. 어쨌든 이번엔 또 그게 엄청 궁금해졌나 보다.

- 갈켜줘요∼

--- 그럼 재미없죠.

웃는 이모티콘이라도 보낼까 해서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는 사이, 다시금 톡이 날아든다. 하아, 언제 날 잡고 핸드폰 좀 연구해봐야지. 이래선 톡도 제대로 못 하겠다.

- 앙, 궁금행.

- 말해줘요!

- 말해줘!

- 응? 응?

끝에 가선 애교까지 동원해 스포를 해달라고 부탁하는 이하연. 그녀의 반응에 난 웃고 말았다. 방송을 탄다는 게 이런 기분이구나.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지어진다. 그때, 핸드폰이 진동하더니 메시지가 날아들었다.

- 옷이 날개라더니, 그렇게 입으니 얼마나 좋니? 앞으로도 좀 그렇게 입고 다녀라. 그리고 방송 잘 봤다. 재밌더라, 진짜. 다음 주가 기다려져.

수연이 누나가 보내온 것이었지만, 아마 수아도, 외삼촌도, 외숙모도 옆에서 난리들을 쳤겠지. 그래서 하나로 모인 얘기가 저 메시지일 것이다.

--- 그냥 다 스타일리스트가 해준 건데요, 뭐. 근데 재밌다니 다행이네요.

살짝 쑥스럽기도 하고, 날 걱정해준 마음이 고맙기도 해서 괜스레 헛기침을 하고 있을 때였다.

“밥 다 먹었으면 일어나지, 뭐하고 그러고 있어?”

아저씨께서 자리에서 일어나며 내 허벅지를 발로 툭 차신다.

“뭐해? 안 따라오고?”

“예?”

“밥 먹었으면 일해야지.”

“일이요?”

해도 졌구만, 무슨 일? 여태까지 이런 일이 없었는데……. 황당해져서 아저씰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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