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2. 첫술에 배 터진다. (2) (52/204)

#52. 첫술에 배 터진다. (2)2021.01.29.

애초에 흥미 자체가 없어서인지는 몰라도 그다지 재밌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럼에도 강구철 사장은 계속해서 TV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유야 간단하다. 아버지인 강 회장이 그러고 있었으니까. 뭐가 재밌는지, 아니 표정 하나 바뀌지 않는 걸 보면 강 회장도 재밌어하는 눈치는 아니지만, 그런데도 눈길 한번 돌리지 않고 계속해서 TV만 보고 있으니 답답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어쩌랴. TV 쇼 프로 따위야 별거 아니니만큼 여기서 일어난다고 해도 눈 밖에 나진 않을 거다. 정 눈치가 보이면 바쁘다고 하면 그만. 그렇긴 해도 만약의 일이라는 게 있다. 저게 정말 강 회장에게 의미 있는 거라면, 그게 뭔지를 알기 전까진 함부로 움직여선 안 된다. 뭐든 겉으로 보이는 게 다가 아니라는 걸 항시 강조하는 강 회장이 또 무슨 얘기를 할지 모르니까 말이다. 그 나이 먹도록 아직도 본질을 꿰뚫어 보지 못하냐며 혀를 차는 소리를 듣는 것도 이젠 지긋지긋하다. 그래도 답답한 건 어쩔 수 없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관심은커녕 마음에도 없는 말이 튀어나왔다.

“한진석이 말을 꽤 잘하는군요.”

한창 멘트를 날리고 있는 한진석을 보다가 한마디 해보지만, 강 회장은 대꾸는커녕 고개조차 끄덕이지 않는다. 괜히 민망해진 강구철 사장이 다시 TV 쪽으로 시선을 돌리다가 눈이 커졌다.

“……?”

어디선가 본 듯한 얼굴이 화면에 떡하니 떠올라 있었기 때문이다. 누구였더라? 떠오를 듯 말 듯…… 기억이 잘 나질 않았다.

- 자, 그럼 이제 만나볼 시간입니다. 오늘부터 우릴 엄청난 맛의 향연으로 안내하고, 초대되는 게스트에겐 힐링을 선사할 셰프이십니다. 모시겠습니다!

  갖은 잔망을 떨면서 소개하는 MC 한진석의 과장된 손짓과 함께 카메라가 줌인 되고, 한 사람의 얼굴이 확대되었다.

‘저놈은……?’

단번에 알아보진 못했지만, 기억을 더듬어보니 떠올리지 못할 얼굴도 아니었다. 강구철 사장은 속으로 되뇌었다.

‘……이름이 뭐였더라?’

관심이 없으니 기억날 리가 있나. 하기야, 원래대로라면 이름은커녕 얼굴조차 기억 못 할 일이다. 요새 강형식과 자주 어울린다는 보고에 잠시 관심이 갔었던 터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주방에 새로 들어온 요리사, 아니 요리 보조라고 했던가? 어느 쪽이 되었든 그로선 그저 하찮은 일꾼일 따름이었다. 옛날로 치면 머슴쯤 될까. 당연히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그저 저런 허접스러운 놈과 어울려 지내는 자신의 조카를 비웃고 있었을 뿐. 한데, 저놈이 왜 저길? 도저히 이해가 가질 않는 상황에 눈썹을 한껏 일그러뜨리다가 갑자기 떠오른 생각에 아버지, 강 회장 쪽을 바라보았다. 때마침 TV에서 흘러나온 대화에 강 회장이 반응하고 있었다.

- 서진영입니다.

- 그게 단가요?

- 예.

- 크큭. 좋습니다. 오늘도 맑은 날씨 되겠습니다.

  ‘혹시 아직도 그 녀석을……?’ 하고 생각하고 있을 때, 강 회장이 고개를 주억거린다. 조카 녀석으로 인한 불안감과 함께 불쾌감이 일기 전에 의아함이 먼저 고개를 쳐들었다. 대체 뭘 보고 저러시는 걸까? 이젠 이해가 가질 않는 걸 넘어서서, 지금 자신이 본 게 현실이 맞는 건지 의심스럽다. 아버지가 누굴 보고 고개를 끄덕인다고? 어지간한 일에는 반응조차 보이지 않기로 유명한 분이 바로 아버지 아니던가. 오죽하면 석불이란 별명까지 얻으셨을까. 문제는 그 점이 더욱 무섭다는 것이지만. 쉽사리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시니, 일 처리를 잘한 건지 못한 건지 감을 잡기조차 힘들 정도. 그런 분이 저런 모습을 보인다? 어이가 없다 못해 황당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그런 감정도 잠시. 꾹. 자신도 모르게 손에 힘이 들어가고 있었다. TV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오직 한 명의 얼굴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얼굴은 어느새 그의 뇌리에 떠오른 또 한 사람의 얼굴……. 강형식의 그것과 겹쳐졌다. TV를 바라보는 강구철 사장의 시선에 잡힌 서진영의 얼굴. 그 얼굴을 노려보는 눈빛에 한기가 감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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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진숙 회장 역시 자신의 집무실 소파에 편안히 앉아 TV를 보는 중이었다. 다만, 버릇은 어딜 가지 않는지 잘 다듬어진 손가락 끝의 길고 단단한 손톱이 연신 대리석 테이블을 두드리고 있었다.

“양쪽 모두 관심이 있는 듯 보인다?”

이제 막 시작된 예능 프로를 보면서 묻는 그녀의 질문에 박 실장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그만큼 철저하게 파헤쳤다는 얘기일 터.

“예. 두 분 다 이번 일에 깊이 관련된 듯합니다.”

김진숙 회장이 피식하고 웃는다. 그러곤 이내 입꼬리를 살짝 추켜올린 채 말했다.

“깊이는 무슨. 그냥 늙은 여우들의 여흥이겠지. 진 회장이야 그저 이 기회에 방송국 쪽에 생색이나 좀 내보려는 걸 테고. 아, 강 회장은 좀 다르려나? 하긴, 금쪽같은 손자가 얽혀있으니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닐 테지. 아니면 아예 밀어주기로 작정한 걸까?”

“그런 거 같진 않습니다. 그저 진 회장 측에 정보만 넘긴 거로 압니다.”

“그게 그거지. 그 노친네, 무심한 듯 보여도 속이 펄펄 끓는 용광로거든. 그걸 드러내기 싫으니까, 늘 뒤에서 움직이는 거고. 그러니……. 아, 나왔네.”

재밌다는 듯 웃으며 말하던 김진숙 회장은 류승렬이 나오는 장면에서 눈을 반짝였다. 그러면서도 할 말은 다 한다.

“그래. 저쪽 반응은 어때?”

언제나 그렇듯 대명사 남발이었지만, 박 실장은 찰떡같이 알아들었다.

“SBC에선 꽤 신경 쓰는 눈치입니다만, 오히려 담당 피디는 상대할 가치도 없다는 반응입니다.”

“그럴 만도 하지. 방송국에서야 노경환을 철석같이 믿는다곤 해도 신경 쓰지 않을 순 없겠지. 광고로 먹고사는 처지에선 시청률이 왕이니까. 그렇지만, 노경환이 어디 초출한테 당할 만큼 호락호락한 위인이던가? 적어도 예능 바닥에선 그야말로 제왕인데. 하여간 대단한 사람이야. 토끼 한마디 잡는 데도 최선을 다한다라……. 말은 쉬어도 행동으로 옮기는 건 정말 어려운데 말이야.”

“그러니 케이블에서 시작해 정상까지 오른 거 아니겠습니까?”

“그렇지? 어디에서건 탑을 찍은 사람에겐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거지. 그래서? 견제는 어떻게 하고 있나? 설마 치졸하게 싸우기도 전부터 언론 쪽을 동원하진 않았을 거고.”

“저쪽에 합류하기로 되어 있던 여가수 한 명을 빼돌린 거 말고는 딱히 움직인 게 없습니다. 대신…….”

“한 주 먼저 방송을 시작했고 말이지?”

“예.”

돌아가는 양상이 재밌다는 듯 TV를 바라보던 김진숙 회장이 리모컨을 들어 채널을 바꿨다. 그러자 얼굴만 봐도 이름이 절로 떠오르는 연예인들이 대거 나와 화면을 화려하게 수놓는다. SBC에서 이번에 새로 선보인 예능 프로 ‘혼저왕 먹읍서’다. 묘하게 입에서 겉돌지만, 틀림없이 한글이 분명한 말로 지어진 프로그램명. 제주도 말로 ‘어서와 먹으십시오’라고 했던가. 프로그램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세 명의 고정 패널들과 게스트 한 명이 제주도 바닷가에 있는 집 한 채를 빌려놓고 갖가지 해산물들을 요리해 먹으면서 동시에 제작진이 지시한 미션을 클리어하는, 일종의 서바이벌 예능이었다. 이미 일주일 전에 첫방을 내보냈고, 예상대로 뜨거운 관심을 불러모았다. 당연히 기자들은 오늘 방송을 시작하는 ‘네 마음의 요리를 들어봐!’와 치열한 접전을 기대하는 듯 온갖 자극적인 문구들은 다 가져다 써대며 열을 올리고 있었지만, 대부분은 ‘혼저왕 먹읍서’의 손을 들어주고 있었다. 한마디로 싸움이 붙기도 전에 한쪽의 일방적인 승리라고나 할까. MBS 방송국에선 두 집안의 싸움엔 끼어들 생각 따윈 하지 않고 그저 강 건너 불구경하듯 말없이 지켜만 보는 중이었고. 어쨌든 두 방송국, KBC와 SBC가 금요일 황금시간대에 어딘지 비슷해 보이는, 그러나 추구하는 바가 명확히 다른 예능 프로를 내세워 격돌한 셈이었다.

“누가 이길 거 같아?”

김진숙 회장의 물음에 박 실장은 대답을 잠시 미룬 채 안경을 추어올렸다. 그런 채로 TV를 한차례 바라보았다. 화면 가득 펼쳐진 제주도의 푸른 바다와 함께 언덕 위에 지어진 집을 중심으로 패널들과 게스트가 몸빼바지를 입고 뛰어다니는 모습이 우스꽝스러우면서도 마음을 푸근하게 만들어 준다.

“오늘 말씀이십니까?”

되묻는 박 실장을 김진숙 회장이 얄밉다는 듯 쳐다보았다.

“됐어.”

“예.”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던 김진숙 회장은 싱긋 웃더니 채널을 돌리기에 앞서 중얼거렸다.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잘들 노네. 노경환이가 잘 찍긴 해. 뭐, 그래 봐야…….”

리모컨 버튼을 눌러 원래 보던 프로로 돌아온 뒤, 그녀의 눈동자가 화면 속에서 한 명의 남자를 찾아 헤맨다. 그러곤 곧바로 찾던 이를 찾아내곤 입가에 아까보다 한층 더 짙은 미소를 베어 물었다.

“우리 서 셰프만 하겠느냐마는.”

  *** 원래 케이블 쪽에서 경력을 쌓아온 노경환 피디는 SBC로 적을 옮긴 후 몇 년 지나지 않아 명실상부 대한민국 최고의 예능 피디가 되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가 기획하고 만들어낸 프로는 방송을 타는 족족 대히트를 쳤고, 이젠 그의 이름을 내세우는 것만으로도 시청자들이 TV 앞으로 몰려드는 판국이었으니까. 그만큼 그의 이름값은 높았고, 그 실력은 더 뛰어났다. 때문에 SBC 방송국에선 한도 없는 지원을 약속함으로써 그를 얼마나 신뢰하고 있는지 보여주었다. 그로 인해 이번 방송에 섭외한 이들의 몸값은 말할 것도 없고, 촬영에 들어가는 비용 자체가 어지간한 예능 프로 서너 개는 만들어도 될 정도로 어마어마했다. 이 정도면 부담스러울 만도 할 텐데, 노경환 피디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마치 이쯤은 당연한 일이란 듯이. 지금도 그렇다. 그는 옆 동네에서 지진이 나건 폭풍이 불건 신경조차 쓰지 않는 눈치다. 한데, 웃긴 건……. 그러면서도 모니터를 두 대 나란히 붙여놓고, 자신이 연출한 방송과 함께 오늘 첫방을 내보내고 있는 KBC의 ‘네 마음의 요리를 들어봐!’를 보고 있다는 거다. 스텝들은 굳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 하는 얼굴들이었다. 그들 생각엔 이미 이긴 거나 다름없는 싸움이었으니까. 하긴 그럴 수밖에. 다른 건 둘째치고 출연자들의 급이 달랐다. 할리우드까지 진출한 역대급 배우, 잘나가는 정도가 아니라 아시아를 씹어먹다시피 한 가수, 거기에 한때 군통령이라고까지 불리던 걸그룹 스피너스 출신의 헤나가 패널로 합류했다. 그리고 첫방부터 게스트는 무려 블랙아머였다. 국내 팬만 100만에 육박한다는 4인조 보이그룹. 그들까지 합세해 7명이나 되는 이들이 방송 시작부터 각각의 매력을 뿜어대고 있으니 뭐 싸움이 될 턱이 있나. 촬영 때도 그랬지만, 지난주 첫방이 나가고 난 뒤 스텝들의 얼굴에 자부심이 가득한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저 친구 누군가?”

노경환 피디의 물음에 조연출이 대답했다.

“류승렬 말씀이십니까?”

“아니, 그 옆에. 요리사.”

“아! 정확히는 저도 잘…….”

조연출의 안절부절못하는 태도 따윈 아랑곳하지 않고 노경환 피디는 눈을 가늘게 해 보였다. 그러곤 중얼거렸다.

“마스크는 그럭저럭 봐줄 만한데, 남들 앞에 서기엔 간이 좀 작아 보이는데…….”

고개를 갸웃거린 노경환 피디는 떠올렸다. 신현정 피디를. 본격적으로 방송물을 먹기도 전, 고등학교 시절부터 이래저래 얽히고 엮여 속속들이 잘 알고 있던 여자였다. 그녀는 비록 말수가 적고 시종일관 부드러웠지만 그 속에 담아둔 열정은 보통 이상, 아니 어쩌면 자신을 넘어설지도 모른다는 게 그의 평가였다. 그만큼 실력도 뛰어났고. 그런 여자가 저런 남자를 섭외했다? 그것도 프로그램의 사활을 좌지우지할지도 모르는 메인 셰프에? 이해하기 어렵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욱더 관심이 간다. 누군가? 대체 누군데, 신현정 피디의 눈에 든 것일까? 납득하기 어려운 상황에 노경환 피디가 화면 속 한편에 가만히 앉아 벌써 10여 분째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던 서진영을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저어…….”

“……?”

“듣기로는 낙하산이라고…….”

“낙하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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