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무지 부담스럽습니다만. (3)2021.01.17.
미쳤다, 진짜! 귀가 터져라 꽝꽝거리는 음악 소리는 그렇다 치고. 뭔 여자들이 하나같이 반쯤 벗고 있다냐? 그런데도 전혀 춥지 않다. 겨울이 코앞임에도 불구하고 실내는 따듯한 정도를 넘어서 뜨겁다. 것도 아주.
“쿡! 너 코피 나.”
“어? 저, 정말?”
슥. 얼른 손등으로 코밑을 문지르고 바라보는데…….
“그걸 또 믿네.”
“야이, 씨!”
“가자.”
“응? 그……그래.”
근데, 이런 곳에 오는데 이런 차림으로 괜찮나? 단순히 가게라고 하기엔 너무 큰 클럽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통로를 빠져나가다, 양쪽 벽면에 붙어있는 흑경에 비친 내 모습을 살필 수밖에 없었다. 절대 두툼하다곤 말할 수 없는 점퍼 안에는 몸에 딱 달라붙는 긴 팔 티 한 장이 다다. 아래쪽은 당연히 청바지고. 신발? 그냥 시장에 가면 살 수 있는 브랜드를 알 수 없는 운동화였다. 내 꼴을 한차례 살피곤 주위를 둘러보는데, 어딜 봐도 나같이 차려입은…… 걸친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여자들이야 입은 건지 벗은 건지 모를 정도로 노출이 심하니 그렇다 치더라도, 남자들은 하나같이 무슨 모델들 같다. 모르긴 몰라도 대충 몇 장 찍어서 잡지에 실어도 통할 것 같다. 옷이 날개라 그런지, 얼굴들도 하나같이 잘 생긴 것 같고.
“왜 그렇게 움츠려? 너답지 않게?”
“그거야…….”
내가 입고 있는 옷들을 눈으로 훑어 보이자, 녀석이 주먹을 들어 내 가슴을 툭 친다.
“다 별 볼 일 없는 것들이야. 그래서 저렇게 돈으로 처바른 거고.”
“…….”
“장담하는데, 여기에 너보다 멋진 놈은 없다.”
헐. 이 새끼가 누굴 바보천치로 아나. 하도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을 흘리고 있을 때, 강형식이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널 그렇게 못 믿어?”
“그만해.”
“뭘 그만해? 사실인데.”
녀석답지 않게 정색을 하더니,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본다. 나 역시 녀석의 눈빛을 고스란히 받았고.
“서진영. 널 못 믿는 건 좋은데. 그럼 믿어봐, 널 믿는 날.”
하아……. 뭐 이런 자식이 다 있냐? 그렇게 말하면 내가 감동이라도 받을 줄 아나 보지?
“……씨, 씨벌 놈.”
슬쩍 고개를 돌리며 손가락 끝으로 코끝을 문질렀다. 그때였다.
“엄머! 옵-빠!”
“어어어어! 이게 누구야? 하하하! 삼한그룹의 황태자께서 여긴 어쩐 일로 납시셨나?”
“이 자식! 돌아왔다는 얘기는 들었는데, 어디서 뭘 한 거야? 그동안 코빼기도 안 보이고!”
“아앙. 너무해! 연락해도 받지도 안…….”
“엉? 보경이 너!”
“아이잉. 그냥 궁금해서 그랬지? 오빠, 질투하는 거야?”
“큼. 지, 질투는 무슨. 아무튼, 잘 왔다! 하하하. 오늘 안 올까 했는데, 그랬으면 큰일 날 뻔했네!”
사방에서 몰려든 남녀 십수 명이 강형식을 둘러싸고 한마디씩 던져대니 난리도 이런 난리가 없다. 그리고 난……. 후우, 또 보릿자루인가? 한쪽으로 밀려난 나는 거의 벽에 붙다시피 해서 눈썹을 긁적였다. 물론 강형식이 날 내팽개친 건 아니다. 자신을 둘러싼 사람들 속에서 녀석이 날 찾는지 고개를 두리번거리는 게 보였지만, 선뜻 나서기가 힘들었다. 동창회도 나가본 적 없는데, 이런 데서 관심이 집중된다? 상상만으로도 몸이 떨린다.
“그거 알아요?”
그때, 갑자기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 음악 소리가 워낙 커서 잘 들리진 않았지만, 내게 건넨 말이란 건 알 수 있었다. 나도 모르게 돌아간 시선에 한 명의 여자가 들어왔다. 입이 절로 벌어진다. 뭐지? 여기 클럽이라며? 근데……. 정장? 그것도 단정하다 못해 답답해 보일 지경이다. 점퍼 차림의 나도 나지만, 열기로 가득한 이 공간에는 전혀 어울리는 옷차림이 아니다. 치마도 아닌 긴바지에 블라우스 위로 걸친 마이. 그나마 목 아래쪽으로 단추 풀어놔 다행이지, 안 그랬으면 보는 내가 다 숨 막혀 죽을 뻔했다.
“뭘 말인가요?”
누구냐고 물으려다가 일단 대답했다. 아니, 되물었다. 그러자, 여자는 귀밑머리를 쓸어올리며 날 빤히 쳐다본다. 그제야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가늘고 긴, 그러면서도 살짝 치켜 올라간 눈꼬리가 인상 깊다. 일부러 저런 표정을 짓는 건가? 눈을 크게 뜨면 꽤 어울릴 거 같은데. 어째서인지는 모르지만, 눈을 저러고 있어서 그런가 차갑게 느껴진다.
“댁이 두 번째에요. 여기랑 어울리지 않는 사람은.”
“…….”
헐. 이게 무슨 개소리야? 지금 시비 거임? 뭐, 내가 지금 형편없는 옷을 걸치고 있다는 것쯤은 나도 잘 알고…….
“설마 그 옷차림 때문에 그런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죠?”
“…….”
또다시 할 말을 잃었다. 독심술이라도 쓰는 건가? 설마 나처럼 나레이션이……. 피식 웃고 말았다. 말도 안 되는 상상에.
“압니다. 내가 겉돈다는 건.”
툭 던지고 시선을 돌리려는데, 여자가 다시 말했다.
“그럼 첫 번째가 누군지도 알겠네요.”
음, 알 것도 같은데? 난 손가락을 들어 내 가슴을 한차례 가리키곤 이내 그녀를 가리켰다. 여자의 입꼬리가 살며시 올라간다. 어라? 웃으면 좀 나을 줄 알았더니. 차가워 보이지 않는데, 대신 도도하게 느껴진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죠?”
“그냥 그렇다고요.”
대답 같지도 않은 말을 던지곤 시선을 돌려 클럽 안쪽으로 눈길을 던지고 있다. 뭐야? 이 기묘한 시추에이션은? 어이가 없었지만, 나 역시 시선을 돌렸다. 그러면서도 생각한다. 저곳에서 춤추고 마시고 고래고래 소리치는 이들. 저들과 한데 어울리지 못하는 것처럼 말하고 있지만, 강형식이 주차장에 차를 세우며 했던 말에 따르자면 이 여자도 필시 어디 재벌가의 핏줄일 터다. 분기에 한 번씩 그들끼리만 모여서 장소 한군데를 통째로 빌려서, 말이 빌리는 거지, 대개 일원 중의 한 명이 소유한 거라고도 했었지 아마? 어찌 되었든, 그렇게 모여 그동안 밀린 얘기도 하고, 나름 스트레스도 풀면서 친목을 다진다나 어쩐다나. 당연히 내가 올 곳은 아니었기에, 돌아가겠다고 하자 강형식은 괜찮다고 했더랬다. 다들 한두 명씩 아는 사람을 데려온다고. 그 얘기를 듣고 가장 먼저 떠오른 사람은 우습게도 이하연이었다. 솔직히 두근거렸다. 뜻하지 않은 장소에서, 갑자기 마주치는 장면을 머릿속에 그린 것도 어찌 보면 무리도 아니다. 강형식과 이하연이 꽤 친하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그래서 따라왔었다. 혹여라도 만날 수 있을까 싶어서. 물론 그전에 전화를 해서 산통을 깨는 짓은 하지 않았고. 한데, 만나지 못하는 건가? 그래도 조금 실망이네. 지금이라도 전화를 걸어볼까 가볍게 생각했을 때, 옆에서 들려왔다. 예의 그 차가운 듯하면서도 도도한 목소리가.
“저러고들 노는 게 즐거운가?”
진짜로 이해할 수 없다는 건지, 못 봐주겠다고 비아냥거리는 건지 도통 구분이 안 간다. 그래도 한마디 안 할 수 없다. 어느 쪽이든 나랑은 좀 생각이 다른 거 같아서.
“글쎄요. 저렇게 살아본 적이 없어서 잘은 모르겠지만, 언젠가 이런 말을 들은 게 기억나네요.”
날 쳐다보는 눈길이 느껴졌지만, 굳이 눈을 마주치진 않았다. 대신 계속해서 얘기했다.
“때론 재가 되도록 태워버려야 다시 타오를 수 있는 법이라고.”
한참 동안 아무런 말도 안 들려온다 싶었을 때였다. 저만치서 날 찾는지 두리번거리던 강형식과 눈이 마주쳤다. 손을 쳐들고 이쪽으로 오던 녀석이 흠칫하는 모습. 왜 저러는 건데? 난 고개를 갸웃거리며 한 발 내디뎠다. 그때, 등 뒤에서 들려왔다.
“처음이네.”
“예?”
“아뇨. 혼잣말이었어요.”
거참, 희한한 여자네. 한차례 어깨를 으쓱해 보이곤 다시 돌아섰다. 그리고 강형식을 향해 다가가는데, 어라? 녀석이 슬금슬금 뒷걸음질 치더니 쓰게 웃고 있다. 눈은 내가 아닌 내 뒤쪽을 바라보면서. 뭐지? 싶어서 돌아보곤 실소를 흘리고 말았다. 여자가 날 따라오고 있었던 것이다.
“왜……?”
내가 묻자, 여자가 덤덤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태우라면서요?”
“…….”
“그래야 다시 타오를 수 있다고 하지 않았나요?”
“그야…… 분명 제가 한 말이긴 하지만…….”
“그래서 저도 한번 해보려고요.”
씨익. 이번에야말로 확연히 웃는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활짝 웃는 그녀였다.
“하얗게 재가 되도록요.”
하아, 미치겠네. 설마 함께 불태우자는 건 아니겠지? 이마를 짚고 말았다. 그러니까, 제 입장에선…… 무지 부담스럽습니다만? ***
“끙!”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건, 다른 이유가 아니었다. 머리가 지끈거려서였다. 아우, 두개골이 빠개지는 거 같다. 끙끙거리며 눈을 떴다. 그러면서 한 손으로는 머리통을 지압하듯 꾹꾹 누르며 어둠 속을 살폈다. 어라? 여긴…… 어디? 모르는 곳이다. 당연히 집은 아니고, 그렇다고 형식이 집도 아니다. 혹시 내가 모르는 집이 또 있나? 하긴, 재벌 3세인데 그럴 수도 있겠다 싶어서 금세 수긍하고 한숨과 함께 주위를 살폈…….
“……!”
여자? 가슴이 쿵쿵 뛰기 시작한다. 다행히 옷을 벗고 있진 않다. 아니 이게 다행인 건가? 아, 그건 모르겠고. 난 조심스럽게 움직여 돌아누워 있는 여자의 얼굴을 확인하고자 했다. 삐걱. 아씨, 이놈의 침대. 흠칫해서 가만히 있었다. 그렇게 한참 있다가 여자가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는 걸 확인하곤 다시금 움직였다. 그리고…….
“뭐, 뭐야! 얘가 왜……. 흡!”
놀라서 소리치다가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젠장! 여기서 고함을 치다니. 내가 미치지 않고서야. 그건 그렇고, 이 여자가 왜 여기 있는 거냐고? 머릿속에서 어젯밤 일들이 떠오르는가 싶더니 말 그대로 주마등처럼 흘러가기 시작했다. 처음엔 귀찮게 따라붙는, 사실 거의 가만히 앉아 술만 마셔서 그렇게까지 귀찮지는 않았지만, 아무튼 함께 술을 마시며 다른 사람들이 노는 걸 구경하다가 나중에는 강형식과 다른 이들도 합석. 그 후엔 쉴 새 없이 마시다가……. 강형식이 토하고……. 아우, 난장판이 따로 없었다. 여기까진 기억이 나는데……. 그 후론 필름이 끊겨서 모르겠고. 한데, 잠에서 깨어보니, 여기다. 그것도 이 여자와 함께. 아, 미쳐. 내가 지금 무슨……. 설마! 난 서둘러 내 몸을 살폈다.
“휴우!”
제대로 입고 있다. 뿐만 아니라 주위를 둘러봐도 별다른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확실치는 않지만, 별일 없었던 거 같다. 다행이란 생각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다가 혀를 내둘렀다. 둘 다 대체 얼마나 술을 마셨길래? 그렇지 않았다면 여기까지 와서…… 사실,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겠지만…… 그냥 잠만 잤겠냐고. 스륵. 조심조심 몸을 일으키자, 이불이 스치며 소리를 낸다. 그 소리가 내 귀에는 천둥처럼 들렸다. 시계를 보진 않았지만, 새벽 5시쯤 됐겠지. 요즘 들어 어지간하면 4시에서 5시 사이에 일어나는 게 습관이 되어버렸으니까. 아우씨! 근데 양말은 왜 벗은 거야? 난 바닥에 내려선 뒤, 발에 채는 양말 한 짝을 신고는 나머지 한 짝을 찾아 바닥을 기어 다녔다. 창문으로 달빛이 은은하게 들이치고 있었지만, 불을 켜지 않은 실내에서, 그것도 무늬가 잔뜩 들어간 카펫 위 어딘가에 처박혀 있을 양말을 찾는 일은 쉽지 않았다. 어? 그러다 찾아냈다. 양말이 아니라…….
“뭐, 뭐야? 얜 또 여기서 왜 이러고 있어?”
어둠 속이지만, 알 수 있다. 바닥에 대자로 뻗어 있는 녀석은……. 강형식이 분명하다. 그러고 보니, 어스름하게 비치는 것들…… 아니, 사람으로 추정되는 덩어리들이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물귀신처럼 긴 머리칼로 바닥을 쓸고 있는 여자도 보였고, 덩치가 산만 한 남자도 이리저리 굴러다닌다. 그러면서 이까지 간다. 아, 이제야 기억난다. 쟨 여진이고, 저 녀석은 양수 그리고 저놈은 제원이. 두 명은 이른바 재벌 3세고, 나머지 한 놈은 자칭 잘나가는 예술가라 하던데 무슨 일을 하는진 정확히 모르겠다. 흐음, 어쩌다 보니 재벌 3세들하고 형·동생, 아니 오빠·동생인가? 아무튼, 인연이란 게 참 신묘하기도 하지. 어제까지만 해도 이렇게 될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는데……. 그건 그렇고. 저놈은 덩치가 커서 그런가? 잠버릇 참 고약하네. 그나마 코를 안 고는 게 다행이랄까. 뭐, 한번 잠들면 좀처럼 깨지 않는 나랑은 상관없는 일이지만. 시선을 거두곤 강형식을 흔들었다.
“얀마.”
하지만, 녀석은 움찔거리기만 할 뿐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 대체 얼마나 마신 거야? 설마 토하고 또 마신 건 아니겠지? 서너 번 더 흔들어보다가 포기했다. 이건 안 된다. 그냥 죽었다고 생각하면 될 듯. 그나저나 장관이네. 다들 재벌 3세 아니면 나름 잘나가는 이들일 텐데. 무슨 해표들도 아니고……. 쯧, 그 사이에 어둠이 눈에 익은 건지, 바닥에 굴러다니는 커다란 술병들도 여러 개 보인다. 기다란 목을 한 유리잔들도 보이고. 와인인가? 2차인지, 아니면 또 다른 곳을 거쳐 여기까지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아주 활활 태웠구만.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곤 찾던 양말 한 짝을 마저 찾았다. 누군지는 몰라도 손에 꼭 쥐고 놓지 않으려는 여자한테서 억지로 빼앗곤 혀를 끌끌 찼다. 그런 뒤, 다시 강형식에게 기어가 속닥였다. 들을 거라곤 생각지 않았지만.
“나 먼저 간다.”
역시나 반응이 없다. 난 다시 한번 고개를 내저으며 밖으로 나가는 길을 찾았다. 그 와중에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신발과 점퍼를 거둬들인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게 소리 없이 문까지 당도해 문을 열었다. 삐빅! 아우, 깜짝이야! 소리한 번 더럽게 크네.
“간 떨어지는 줄 알았네.”
하도 조용해서 그런가, 별 게 다 사람 놀래킨다. 가슴을 쓸어내리며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삐빅! 문이 닫히며 또다시 울리는 소리가 뒤에서 들려왔지만, 이젠 상관없는 일이다. 난 이제 해표가 아니니까. 방안에 펼쳐져 있는 풍경이 떠올라 헛바람 소리를 내곤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 삐빅! 소리가 두 번째로 나고 난 뒤, 약간의 시간이 지난 후에야 서연은 눈을 떴다. 그러곤 가만히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침대 아래쪽,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반쯤은 시체 꼴이 되어 있는 이들을 보다가 천천히 손을 들어 머리를 쓸어내렸다. 그러면서 지난밤부터 지금까지의 일들을 떠올렸다.
‘이 정도면 재가 된 건가?’
이렇게까지 마신 건 난생처음이었다. 살면서 의식을 잃은 것도 처음이었고. 끝까지 경계심을 풀지 않으려 했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 남자와 편하게 얘기를 주고받았던 걸 기억한다. 술기운 덕분이겠지만, 꽤나 참신한 경험이었다.
‘강형식과 제법 친해 보이던데…….’
그럼, 삼한그룹? 아니 꼭 그렇다고 할 순 없지. 이름이…… 서진영이라고 했지, 아마? 전화번호라도 물어볼걸 그랬나? 상관없지. 언젠가는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다. 어차피 대한민국 재계야 거기서 거기니까. 한차례 어깨를 으쓱거린 서연은 침대 한쪽에 놓인 자신의 백에서 핸드폰을 꺼내 전원을 켰다.
“…….”
부재중 통화가 꽤 많다. 반은 아버지고, 반은 고모였다. 시간은 새벽 5시 15분을 막 지나고 있었고. 옅게 미소를 지어 보인 그녀는 소리 없이 침대를 벗어났다. 그러곤 옷매무시를 단정히 한 후, 마이를 찾아 걸쳤다. 지금쯤이면 그 남자도 돌아갔을 테니, 나가도 괜찮겠지. 서연은 다른 사람들을 밟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천천히 방을 벗어났다. *** 인사를 꾸벅해 보이는 벨맨 아저씨에게 맞절하듯 멋쩍게 고개를 숙이곤 고개를 들어 호텔을 보았다.
“…….”
할 말이 없다. 지금 이 상황도 그렇지만…….
“아우, 미쳤지. 미쳤어!”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혀를 찼다.
“야생이야, 뭐야?!”
아무리 술을 많이 마셨다고 해도 그렇지, 어떻게 그렇게 떼거리로 널브러져 잠을 자냐고. 요즘은 대학생들도 MT 가서 그러진 않겠다.
“아, 뭐……. 대학은 못 가봤지만.”
난 금싸라기 같은 서울 한복판에 떡하니 자리 잡은 호텔을 다시 한차례 바라보다 돌아섰다. 형식을 깨워서 같이 나올까 싶기도 했지만, 고윤수 주방장님이 시키신 일이 있으니 어쩔 수 없다. 뭐, 어차피 다 아는 사이일 테니 상관없겠지. 노상에서 신문지 깔고 자는 것도 아니고. 가는 길에 문자나 한 통 넣어놓으면 되겠지. 그렇긴 한데 진짜 문제는 문제다. 녀석……. 사업한다는 놈이 술이 너무 약한 거 아냐? 고개를 내저으며 핸드폰을 꺼냈다가 흠칫 놀라고 말았다. 서른 개도 넘는 톡과 몇 통의 부재중 전화. 누구한테 온 건지는 말할 필요도 없다. 시간을 확인하며 대화창을 열었다.
- 어젠 밤새워 마셨네요. 덕분에 죽을 거 같아요. 지금 출장 가는 길인데, 기차에서 한숨 자고 나서 전화할게요.
혹여 이상하게 생각할 만한 말은 없나 다시 한번 확인하곤 톡을 날렸다. 까똑! 아, 깜짝이야!
--- 안 잤어요?
뭐야? 깨 있었던 거야? 황당해서 대화창을 빤히 쳐다봤다. 그러다가 정신을 차리곤 톡을 보냈다.
- 잤죠. 조금밖에 못 자서 그러지.
--- 그럼, 지금 형식이 오빠만 남겨두고 나온 거?
이건 또 무슨? 아, 대충 알 만하다. 강형식…… 이 자식! 어젯밤에 이하연한테 전화를 했었나 보네? 나참, 그럼 나한테도 좀 말해줄 일이지.
- 그렇죠.
- 녀석만 있는 건 아니고.
- 네다섯? 널브러져 있는 게 무슨 물개들 같더라고요.
--- ㅎㅎㅎ 형식이 오빤 술도 약하면서.
- 그럼, 전 이제 차 타러 가야 해서.
--- 이렇게 일찍?
- 오늘 갔다가 오늘 오려면 그편이 낫겠죠.
--- 힘들겠당.
- 근데, 야근 중이었어요?
--- 막 끝내고 들어가려던 참이었어요.
이러다간 계속해서 톡만 하고 있을 거 같아서 얼른 마무리지었다. 데이터가 얼마 없어서 말이야.
- 진짜 이만 가볼게요.
--- 넹. 조심히 다녀와용.
마지막으로 날아온 톡을 보면서 미소 지었다. 그리고 서울역으로 가기 위해 지하철역을 찾았다. 근데, 무슨 칼을 강원도까지 받아오는 거지? 의문이 머릿속에 떠올랐지만, 이내 머리를 내저어 털어버렸다. 다 생각이 있으신 거겠지. 나야 그저 시키는 일만 하면 되는……. 따라라라라, 라라……. 응? 이 타이밍에 웬 해설? - 서진영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의 앞에 얼마나 험난한 길이 펼쳐져 있는지. 그래서 웃을 수 있는 걸 테다.
“어?”
이게 무슨 소리야, 지금? 겨우 칼 한 자루 받으러 가는 건데, 험난한 길? 눈을 동그랗게 뜨고 껌벅이고 있을 때 나레이션이 다시 들려왔다. - 서진영은 바보다. 울컥해서 소리쳤다.
“그래, 나 바보다! 그래서, 뭐 보태준 거 있냐?”
- 그래도 서진영은 많은 걸 얻을 수 있을지 모른다. 고윤수 주방장도 그걸 바라고 시킨 일일 터이고. 그러니, 서진영은 비록 바보지만 최선을 다해야 한다. 솔직히 모르겠다. 나레이션이 지금 하는 말에 담긴 의미를. 하지만, 한 가진 확실해졌다. 주방장님이 그냥 시킨 일이 아니란 것. 그렇다면……. 난 주먹을 살짝 움켜쥐고 눈을 빛냈다. 칼이라……. 속으로 되뇌며 걸음을 내딛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