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네 마음의 요리를 들어봐! (3)2021.01.10.
사실대로 말하자면……. 신현정은 조금은 의심하고 있었다. 서진영이 재료들을 챙기기 위해 움직일 때만 해도 그런가 보다 했지만, 그 재료들이 별거 아니란 걸 알게 되는 순간 그녀는 실망감을 감출 수 없었다. 겨우 햄과 김치라니. 저래서는 시청자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다. 그것이 그녀의 솔직한 속내였다. 그래서 한숨을 쉬고 말았다. 옆에 있던 카메라 감독이 그녀를 흘깃 쳐다봐서 금세 표정을 고쳤지만. 그러나 그것은 너무 이른 판단이었다. 그간의 경력도, 선배인 고민준 본부장의 신뢰도, 김동하 국장의 기대도, 그리고 앞으로 나아갈 힘까지 이번 방송에 모든 걸 건 그녀. 신현정은 눈에 핏발이라도 서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쳐다보고 있었던 덕분에 알아챌 수 있었다. 서진영이 마가린을 집어 드는 순간, 류승렬이 벌떡 일어난 건 시작에 불과했다. 아니, 그전에…… 재료들을 하나하나 챙길 때마다 류승렬의 눈빛이 변하고 있었다. 처음엔 실망감 때문에 미처 알아채지 못했을 뿐. 손이 저절로 말리며 주먹이 쥐어졌다. 서진영을 노려보다 못해 달려들어 멱살이라도 잡을 것처럼 보이던 류승렬이 탄성인지 탄식인지 모를 소리를 내지르는 순간.
“……!”
느낌이 왔다. 이건 통한다! 쉴 새 없이 지시를 내렸고, 그때마다 카메라들이 서진영과 류승렬을 담아냈다. 그들의 상반된 표정과 손짓, 몸짓 그리고 눈빛. 거기에 의도한 건지 어떤 건지 한진석이 멘트를 치며 자칫 급속히 가라앉을 수 있는 상황에 구명줄 역할을 하고 있었다. 어떻게 편집해야 할지 감이 섰다. 천천히, 마치 드리블하듯……. 그러나 시선을 뗄 수 없도록. 모르긴 몰라도 한번 보기 시작한 시청자들은 절대로 채널을 돌릴 수 없으리라. 여기서 극적인 장면으로 이어지기만 하면 더할 나위 없이 없을 거였다. 그리고 서진영은 그녀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바라마지 않은 장면이 터진 것이다.
‘아!’
그녀는 볼 수 있었다. 80년대에나 썼을 법한, 그야말로 투박하기 짝이 없는 철재 도시락통에 밥과 모든 반찬을 쏟아 넣는 걸 보는 순간, 류승렬의 어깨가 떨리고 있는 것을. 꾸욱. 움켜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됐다! 움직이기 시작한다. 사람의 마음이. 류승렬의 마음이. 그렇게 그의 마음이 움직이면, 그건 고스란히 시청자들에게 전해질 터. 그리되면 시청자들의 마음도 움직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이 방송의 모토다. 단순히 말로만 주고받는 힐링이 아닌, 단 한 끼의 식사만으로도 가슴 깊은 곳의 애달픈 상처를 핥아주고 때론 차갑게 식어버린 마음마저 따듯하게 보듬어줄 수 있는, 그런 방송.
‘가!’
그래서 응원했다. 어째선지 모르지만, 콧날이 시큰해졌고 어느샌가 신현정은 식탁을 향해 움직이는 류승렬에게 속으로 소리치고 있었다. 그 소리를 들었는지, 다행히 류승렬이 멈추는 일은 없었다. 그리고 터졌다. 감정이. 울음이란 형태로. 이내 번져나간 서글픔을, 그동안 못내 담아둘 수밖에 없었던 설움을 터뜨리며 숟가락을 놓치기도 했지만, 오열 끝에 입안에 밥을 넣는 데까지 성공했다. 주르륵. 왜일까? 그 순간, 신현정의 볼 위로 눈물이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 언제나 그렇다. 의문은 갑자기 떠오르고, 좀처럼 풀리지 않는다. 하지만 풀리는 건 또 한순간이다. 그것이 지금이란 걸 신현정 피디는 물론이고 스텝들과 한진석까지 알아챈 것 같다.
“……찬승이는 욕심이 많았어요. 저랑은 달랐거든요. 자신이 가지지 못한 걸 언젠가는 갖고 싶어 했어요. 더 이상 굶지 않게 만들어 줄 돈도. 자신을 아껴줄 가족을, 특히 자길 버리고 집을 나간 엄마와는 다른, 자신만을 사랑해줄 여자를 만나서 그 여자랑 똑같이 생긴 아이를 낳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어요. 뿐만 아니라 그 녀석은 모두에게 사랑받고 싶어 했어요. 아마 애정 결핍 뭐 그런 거 아닐까 해요. 그래서였을 거예요, 연극반에 들어간 것도. 예. 처음엔 분명 그랬어요. 그게 동기였어요.”
여기까지 말하고 나서 류승렬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아직 마르지 않은 눈가를 채 닦지 못하고 또 이를 악물고 있다. 저 모습을 보면서 무슨 말을 할까. 입에 모터라도 달린 듯 쉴 새 없이 말을 쏟아내던 한진석도 침묵했다. MC인 그가 그럴 정도이니, 다른 사람들이야 뭐. 잠시간의 침묵 후에 류승렬의 말이 이어졌다.
“교통사고였어요. 빌어먹을 트럭. 그날…… 그, 그날…… 내가 같이 갔어야 했는데. 오르막길에서…… 오르…… 7살 난 아이였어요. 브레이크가 고장 난 트럭이 덮치려는 순간, 그 새끼가 아이를 밀쳐내곤……. 미친…… 새끼! 지가 뭐라고! 흑……!”
순화되지 않은 말이 흘러나오고 있었지만, 이 순간 뭐라고 하는 이는 없었다. 과연 방송에 그대로 나갈는지는 나로선 알 수 없다. 그런 건 내가 어쩔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신현정 피디가 어련히 알아서 잘 하겠냐고. 고개를 숙인 채 어깨를 들썩이는 20대 후반의 남자. 그 모습을 먹먹한 심정으로 바라보다가 말했다.
“그 친구분이 품으셨다던 욕심……. 류승렬 씨가 가지셔야 할 거 같은데요.”
“끄흑……. 그, 그래도 될까요?”
끄덕.
“정말……로요? 나, 나 같은 놈도…… 그래도 되나요?”
대체 나 같은 놈이라는 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걸 자기가 감당하기 어려운 욕심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만은 분명했다. 그게 참 안쓰러웠지만, 그래서 더 이상 피하지 말고 맞서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
“그게 뭐가 나빠서요?”
그새 퉁퉁 부은 눈으로 나를 쳐다보는 그에게 웃어주었다. *** 스텝들의 반응도 갖가지였다. 어떤 이는 활짝 웃고 있었고, 또 어떤 이는 손가락으로 눈물을 찍고 있었다. 개중에는 눈시울이 빨개져서 급히 화장실로 달려간 이도 있었다. 특히 조강운 FD는 아직까지도 저만치에 쪼그리고 앉아 꺼이꺼이 울고 있다. 누가 보면 나라라도 잃은 줄 알겠다. 하지만 그 마음을 모르는 이는 이곳에 아무도 없을 터. 누구도 뭐라 하지 않았다. 어쩌면 누군가는 ‘친구가 뭐? 가족이라도 돼?’하고 말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람인 이상 알 수밖에 없다. 때론 단 한 명의 친구가 수백 수천 명보다 나을 때가 있고, 어떨 땐 가족보다 소중할 수 있음을. 누구나 한 명쯤은 그런 친구가 있기 마련이니까. 물론 정상적인 성장 과정을 겪었다는 전제 하의 얘기지만.
“대박! 피디님! 우리 완전 노난 거 같아요!”
사람의 감정을 수치화시키고 그걸 시청률로 연결짓는 건 차마 못할 짓이지만, 안타깝게도 방송국이란 그런 곳이다. 눈물을 흘리든 콧물을 흘리든 감정은 감정이고, 이성적인 눈으로 보고서 이게 시청자들의 마음을 옴직…… 아니, 홀릴 수 있는지 정확하게 판단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이번 방송은 말 그대로 대박각이었다.
“다들 끝까지 집중하시고, 1번 카메라! 류승렬 얼굴 집중해서 잡고, 2번 카메라 서 셰프 손이랑 표정 잡아!”
그럼에도 신현정 피디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지휘봉을 휘두르고 있었다. 하지만 실상은 달랐다. 그녀의 마음속에서도 어김없이 격정이 일고 있었다. 그러면서 자신이 얼마나 운이 좋았는지 깨닫는 중이었다. 그날…… 바에 가지 않았으면. 거기서 서진영을 만나지 않았다면. 그리고 박유나의 몸 상태를 꿰뚫어 보고 거기에 맞는 조언과 음식을 해주는, 도저히 믿기 어려운 광경을 보지 못했더라면. 오늘은 없었다. 그걸 알기에 그녀는 감사했다. 세상이 그녀에게 내려준 기회들을. 또한, 자신을 믿어준 선배에게도. 물론 가장 고마워해야 할 사람은 따로 있었다. 하지만 말 몇 마디로 때울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신현정 피디는 스텝을 하나하나 통제해 마지막까지 촬영을 이어가면서도 서진영에게서 눈길을 떼지 못했다. 그르면서 어째서인지, 그와 함께 만들어갈 무수한 콘텐츠들이 자꾸만 머리를 어지럽히고 있었다. 그 때문인지 스텝들 중 일부가 핸드폰으로 남들 모르게 찍은 동영상을 어디론가 전송하는 걸 눈치채지 못했는지 모른다. 신현정 피디는 말할 것도 없고 다른 스텝들 또한 한차례 감정의 변화를 겪느라 주위를 돌아볼 여유가 없어서 벌어진 일이었다. *** 동영상을 전송받은 즉시 플레이해본 김진숙 회장은 한참이나 멍하니 화면을 보다가 참았던 숨을 몰아쉬었다.
“얘, 뭐니?”
그녀가 물었지만, 박 실장이라곤 대답할 수 있을 턱이 없었다.
“뭐야? 지가 박수무당이라도 돼? 아니면, 작가들이 탁월한 거야?”
“미리 조사해서 연출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그래. 그렇다 쳐. 그렇다고 아무나 저렇게 할 수 있는 건 아니지.”
혀를 내두르며 멈춰져 있는 동영상을 바라보던 김진숙 회장은 급기야 메모장을 꺼내 뭔가를 끄적이기 시작했다. 거기에는 몇 개의 회사 이름이 적혀 있었다.
“이건 이미 잘나가고 있으니 지우고……. 요새 드림온 실적이 부진하지, 아마? 그럼 넣는 거로…….”
한참을 그렇게 쓰고 지우기를 반복하더니, 그걸 박 실장에게 내밀었다. 박 실장이 받아서 바라보니, 거의 낙서나 다름없다. 그런데도 그는 알아보았다. 그중에 딱 두 군데의 회사만이 온전히 글자를 유지하고 있었으니까.
“알지?”
“바로 조치하겠습니다.”
박 실장이 나가고 난 뒤, 김진숙 회장이 다시 한번 혀를 찼다.
“방송이 대박 조짐이 있으니, 먼저 가서 자리를 까는 거야 당연한 거고……. 문제는 이놈인데.”
톡톡톡. 손톱 끝이 멈춰진 동영상 속 한 인물을 짚고 있었다. 다름 아닌 서진영. 류승렬과 한차례 포옹을 하고 떨어져 담담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의 모습 어디에서도 특별한 점은 찾을 수 없었다.
“근데, 자꾸 갖고 싶단 마음이 든단 말이야.”
한숨을 폭 내쉬면서 그녀가 중얼거렸다.
“설마 이 나이에 콩깍지가 씐 것은 아닐 테고.”
흐음…… 하는 기묘한 소리를 내고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 갖고 싶으면 가져야지. 그래야 안 늙지.”
어느새 그녀의 입매가 살짝 비틀려 있었다. *** 촬영이 끝나고 돌아가기 위해 대기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있을 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신현정 피디인가 싶어서 외쳤다.
“잠시만요.”
서둘러 옷을 챙겨 입고는 문을 열었다가 놀랐다. 뜻밖의 얼굴이 보여서.
“아, 들어오세요.”
슬쩍 비켜나자, 류승렬은 담담한 얼굴로 날 보다가 서슴없이 들어왔다. 그러더니 대기실을 한차례 휙 둘러보곤 말했다.
“대단한 셰프라고 해서 대기실로 대단한 줄 알았더니. 아, 혼잣말이었어요.”
예, 예. 그 성격이 어디 가겠냐고요. 그래서 여긴 왜 왔는데?
“무슨 일…… 있습니까?”
“아뇨. 그런 건 아니고. 사과도 할 겸. 겸사겸사.”
사과? 나한테 사과할 일을 했었나?
“휴우.”
한숨부터 내뱉는 걸 보니 어째 불안…….
“제가 좀 그래요.”
좀 그래? 뭐가 그런데? 맥락 없는 말에 고개를 갸우뚱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날 보다가 류승렬이 한 손을 번쩍 쳐든다. 흠칫. 놀라서 뒤로 물러나려다가 순간 멈췄다. 이래서야 내가 겁먹은 거 같으니까. 그때, 류승렬이 멋쩍게 손을 멈추더니 이내 ‘에이, 씨!’ 하며 자기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렸다. 헐. 누가 보면 머리카락 쥐 뜯는 줄 알겠네. 성격답게 자학도 정말 거칠구나.
“역시 이런 건 나랑 안 맞는다니까.”
“…….”
“……요.”
끝에 ‘요’자를 붙이는 그를 보다가 픽하고 웃고 말았다. 그런 내게 류승렬이 씨익 하고 웃는데, 그렇게 멋질 수가 없다. 젠장. 남자가 봐도 멋진 웃음이라니. 부러우면 지는 건데, 무지 부럽다.
“그래서 할 말이 뭔데요?”
“……27살이라면서요?”
또 그러네. 맥락 없는 대화가 주특기인가?
“예. 맞습니다만.”
“그럼 형이네. 저, 26살이거든요.”
“……사회에서 한두 살 차이쯤이야.”
그냥 하는 말이 아니거든. 강형식도 나보다 한 살 어린데 그냥 친구로 지내잖아?
“에이, 그럴 수야 없죠. 한 살이면 밥이 몇 그릇인데?”
뭘 또 그렇게까지. 밥 좀 더 먹은 게 뭐 그리 자랑이라고. 내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자, 류승렬이 또다시 성질이 뻗치는지 손을 들어 올렸다. 이번엔 나도 흠칫하거나 하진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류승렬은 손으로 머리를 쥐어뜯듯 헝클더니 툭 하고 내뱉었다.
“그냥 형이라고 부를게.”
응? 형이라고 부르는 건 그렇다 치고. 원래 이런 장면에선 형 쪽이 말을 놓는 거 아닌가? 뭔가 묘해서 고개를 천천히 모로 기울이곤 눈을 가늘게 해 보이자, 류승렬이 슬쩍 붙였다.
“……요.”
어딘지 모르게 귀여운 구석이 있는 녀석이다.
*** 왠지 상기된 얼굴로 날 배웅하는 신현정에게 멋쩍게 인사를 하곤 방송국을 빠져나왔다. 류승렬과 한진석이 차례로 인사하러 왔다가 입이라도 맞춘 것처럼 자기들이 타고 온 차로 데려다주겠다는 걸 거절한 후였다. 그랬던 어쨌든, 마음은 가볍다. 그동안 말은 안 했지만 방송에 대한 부담감이 있었던 모양인지, 촬영을 끝내고 나자 온몸이 기운이 쫙 빠지며 힘이 들어가질 않는달까. 그 탓에 무척추 생물처럼 흐느적거리려는 몸을 간신히 세워가며 지하철역으로 향하고 있을 때였다. - 어딜 쳐다봐∼ 네 눈앞에 내가 있는데∼ 예에∼
“응?”
아니 왜 벨 소리로 돼 있지? 매너 모드에서 다시 평소처럼 돌려놓은 것뿐인데. 뭘 잘못 만졌나? 부리나케 받으며 이름부터 살폈다. 대충 촬영 끝날 시간이란 걸 알고 있었겠지만……. 그래도 가장 먼저 걸려온 게 녀석의 전화일 줄이야.
“어, 그래.”
- 뭐야? 왜 목소리에 힘이 하나도 없어? 혹시…… 잘 안 된 거야?
강형식이었다.
“뭐가?”
- 뭐긴. 방송 말이지. 만일 그런 거면, 신경 쓰지 말라고 하고 싶군. 그런 거 별거 아니라고. 애초에 연예인도 아니고.
“제법 잘됐다고 말하고 싶군. 그리고 내게도 별거 맞거든? 연예인은 아니지만.”
- 진짜, 한마디도 안 진다니까. 너 사실은 최 씨지?
“최 씨?”
- 고집하면 최 씨라던데?
“어디 가서 그런 말 하지 마라. 고소당한다?”
- 큭큭큭. 오케이. 접수했다.
염병. 접수 같은 소리하고 앉았네.
“걱정돼서 전화한 거 같은데, 그만 끊자. 나 힘이 하나도 없어서 전화 받기도 힘들어.”
- 뭐야? 촬영 얼마나 했다고 힘들어? 설마 거기서 막 집기 같은 거 나르라고 한 거냐?
“그런 거 아니고. 왠지 그러네. 남자의 눈물을 봐서 그런가. 남의 일 같지 않은 것 같기도 하고.”
- 뭔데 그래? 내가 갈까? 어딘데?
“야야! 네가 내 남친이냐? 응?”
- 쿠륵.
아쭈, 웃는 꼬라지하곤. 어째 내 주위엔 웃음소리가 평범한 사람이 없어?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진짜 끊어야 해. 표 사야 하거든.”
- 표? 카드로 찍으면 되는 거 아냐?
“나 카드 없어.”
- 아……. 그래라. 나중에 집에서 보자.
“그러…….”
야이, 씨! 사람이 아직 말하는 중인데 끊고 있어. 하, 진짜 이런 걸 친구라고. 한숨을 내쉬곤 지하철 역사로 내려갔다. 그런 내 입꼬리에 한줄기 미소가 걸려 있었다. *** 지하철을 타고 가는 내내 촬영하면서 보았던 류승렬의 눈물을 떠올렸다. 가슴이 먹먹한 것은 가셨지만, 어쩐지 서글펐다. 그리고 선 채로 쳐다본 차창 유리에 비친 내 얼굴은 묘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그걸 봤는지, 내 앞에 앉아 있는 여고생들이 인상을 팍 구기며 자기들끼리 속닥거리는 게 보였다.
“큼.”
헛기침을 하곤 자리를 피하려고 하는데 사람들 때문에 좀처럼 움직이기 어려웠다. 하필 러시아워에 딱 걸려서는. 할 수만 있다면 머리를 긁적였을 만한 상황. 하지만 그럴 수조차 없다. 앞뒤 아니 사방으로 사람들이 둘러싸 있어서. 그래도 여기 계속 있긴 좀 거시기 하지. 난 끙 소리까지 내가며 움직여 기어코 자리를 옮겼다. 그때였다. - 어딜 쳐다봐∼ 네 눈앞에 내가 있는데∼ 예에∼ 바지 주머니에 넣어둔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린 것은. 누군지는 모르지만 타이밍 한번 기가 막히네. 아씨, 얼른 받든지 아니면 끄기라도 해야 하는데. 여기저기서 날 쳐다보며 수군거리는 게 들려온다. 젠장. 얼굴을 들지 못하겠다.
“끙!”
손을 어떻게든 움직여 주머니에 꽂아 넣었다. 후회가 밀려들었지만, 어쩌겠는가. 벨 소리에서 진동으로 바꾸는 걸 까먹은 나인데.
“잠시만요.”
결국, 주위에 양해를 구하곤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그 순간, 벨 소리가 거짓말처럼 멈췄다. 그리고 안심하기도 전에 날아든 소리. 까똑! 윽. 또다시 날아드는 눈길들. 하지만,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까똑! 까똑! 까똑! 까똑! 까똑! 까똑! 까똑! 연거푸 울리는 7연타. 누군지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하아, 진짜 집착의 여왕 아니랄까 봐. 한숨을 푹 내쉬며 얼른 핸드폰을 조작해 무음 모드로 바꿔버렸다. 당연히 톡을 확인할 엄두는 내지 못했다. 그저 벌서듯 핸드폰을 한 손으로 높이 쳐들고 문 쪽으로 조금씩 움직였을 뿐. ***
“푸하!”
파도에 휩쓸리면 이런 기분일까? 지하철이 토하듯 쏟아내는 인파에 밀려 간신히 승강장으로 튀어나와 숨을 몰아쉬었다.
“와씨, 진짜!”
그런 뒤, 기가 막혀 하면서 핸드폰을 눈앞으로 가져왔다. 물론 이하연에게 화가 난 것은 아니다. 상황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져 벌어진 일일 뿐, 원인을 따져보면 결국 핸드폰을 진동으로 바꿔놓지 않은 내 잘못이니까. 다만, 그 절묘한 상황이 뭣 같아서 한소리 내뱉었을 뿐이다. 쯧, 그건 그렇고. 얼른 답톡을 하든가, 아니면 전화라도 해야겠다. 그렇게 생각하곤 핸드폰을 켜려는 순간이었다. 화면이 깜빡거리기 시작한다. 누군가 전화를 건 모양인데……. 모르는 번호다. 나한테 전화할 사람은 몇 안 되는데? 준석이 형이나 형식이……. 아, 녀석은 아까 통화했고. 그럼 이하연? 아니 그녀가 자기 번호 말고 다른 번호로 전화할 이유가 있나? 그럼 다른 주방 식구……는 아닐 거 같고. 수연이 누나? 아, 수아인가? 모르겠고, 일단 받자.
“여보세요?”
- 아! 받네요.
“누구……세요?”
수화기 너머로 나직하게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한데, 어째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음성인데……. 진짜 누구지?
- 나, 김진숙이에요.
어? 어? 어? 누구? 김……진숙? 설마 그 김진숙?
“아, 예……. 회장님.”
워낙 뜻밖의 전화인지라, 나도 모르게 한 템포 늦게 반응해 얘기하자 김진숙 회장이 말했다. 그 또한 생각지도 못한 말이었다.
- 잠시 저 좀 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