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1. 방송 촬영 (3) (41/204)

#41. 방송 촬영 (3)2021.01.03.

예감은 들어맞았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대본들은 다 읽어보셨을 테고.”

지금 이 공간, 마흔 평 남짓한 스튜디오 안은 사람들과 기계들이 뿜어내는 열기로 후끈후끈하다. 그래서 그런지 아까부터 온몸에 땀이 흘러 속옷 속까지 끈적거리는 느낌이다. 원래 이런 거겠지? 다들 잘도 견딘다 싶었다.

“서 셰프님?”

큼, 저 호칭……. 후우, 이런저런 명칭을 쭉 불러보다가 결국 저걸로 낙찰을 본 모양인지, 신현정 피디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아까부턴 나를 저렇게 부르고 있었다. 아, 진짜 민망하네.

“예.”

“조금 어색하긴 하시겠지만, 스텝들 지시에만 잘 따라주시면 촬영은 금방 끝날 겁니다.”

“풉!”

언제 왔는지 옆에서 종이컵에 든 커피를 마시고 있던 한진석이 뿜고 말았다.

“죄, 죄송해요!”

한진석이 어찌할 줄 몰라 하고 있다. 그냥 겉으로만 그렇게 보이려는 게 아니라, 얼굴까지 빨개져서 허둥거리는 게 진심으로 당황한 듯하다. 그래서 더 화낼 수가 없달까.

“괜찮습니다.”

난 별거 아니란 듯 스텝 한 명이 달려와 가져온 티슈로 상의를 닦다가 옅게 미소 지었다. 근데, 무슨 티슈를 뭉텅이로……. 살짝 기가 막혀서 스텝 쪽을 쳐다보는데, 한진석이 아예 티슈 상자를 옆구리에 끼고 팍팍 뽑아서 내 몸을 막…… 더듬는다.

“인제 그만하셔도 돼요.”

“아뇨, 아뇨. 이거 정말 죄송하게 됐습니다.”

아무리 내가 괜찮다고 말해도, 한진석은 여전한 태도였다. 뭔가 호들갑 떠는 느낌도 들 정도. 그 바람에 뭔가 설명할 태세였던 신현정 피디도, 한창 분주하게 촬영 준비를 이어가던 스텝들도 다들 행동을 멈추고 우릴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중에는 류승렬도 있었다.

“별거 아닌 거 가지고, 더럽게 까탈스럽게 구네.”

작지도 않다. 아예 들으라는 듯 말하는 그의 얘기가 누굴 향하고 있는지는 말하지 알 수 있는 일. 난 조금 어이가 없어져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러자, 류승렬이 입가를 살짝 끌어올리며 조소를 머금더니 그대로 홱 돌아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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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면서 덧붙이듯 한마디 툭 내뱉는다.

“새끼, 눈깔은.”

헐. 무슨 시정잡배도 아니고. 그동안 바빠서 혹은 돈이 없어서 영화관엔 얼씬도 못 했던 탓에 그가 출연한 영화를 본 적은 없지만, 그래도 쌍천만이란 금자탑을 세운 배우가 겨우 이십 대라고 해서 속으로 꽤 대단하다고 생각해 왔다. 그래서 그런지, 당연히 그에 대해 안 좋게 떠들어대는 가십들은 그냥 그렇게 생각했더랬다. 비교적 이른 나이에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는 누군가에 대한 시기심이나 질투라고. 하지만……. 이래서야 소문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 않다.

“하아…….”

나도 모르게 터져 나온 한숨에 내가 놀라서 급히 입을 틀어막는데, 현장에 있는 누구 하나 눈총을 주지 않는다. 다들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을 뿐. 아, 진짜 이거 좀 그러네. 하필 첫방에 게스트를 뭐 저런 놈으로 섭외한 거람? 난 신현정 피디를 원망 어린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짝! 그러나 그녀는 손뼉 한번 치는 거로 모든 이들의 시선을 단번에 사로잡고, 단숨에 주의를 환기 시킬 뿐이었다. 햐,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짐작하긴 했지만 꽤나 베테랑 아닌가. 황당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감탄도 나와서 입을 살짝 벌리고 있는데 신현정 피디가 말했다. 언제나처럼 낮게 깔리며 가슴으로 스며드는 고혹적인 음성으로.

“여벌로 준비해둔 조리복 있죠? 여기, 옷 좀 새로 가져다주시고. 옷 갈아입으시는 데로 바로 촬영 들어가죠. 나머진 상황 봐가면서 해결하는 거로 하겠습니다.”

그렇게 말한 뒤, 발걸음을 옮기기 전 내게 나직하고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그럼, 서 셰프님만 믿겠습니다.”

“아, 예. 예…….”

우아한 몸짓으로 고개를 살짝 숙여 보이는 신현정 피디에게 맞절하듯 허리를 깊이 숙일 수밖에 없었다. 아씨, 진짜 고단수네. 난 돌아서는 그녀를 보면서 머리를 긁적였다. 그때, 옆에서 한진석이 속닥였다.

“어우, 난 이상하게 저 피디님만 보면 몸이 굳더라.”

왜요? 하는 눈빛으로 쳐다보자, 한진석이 곧바로 알아듣곤 소리없이 웃는다.

“그런 거 있잖아요. 뱀이랑 마주친 개구리? 아니, 아니. 이건 좀 그렇다. 아! 사자랑 따악! 마주친 하이에나?”

하하……. 사자라고? 순간 머릿속에 레오파드란 단어가 떠올랐다. 당연히 이하연의 얼굴도 떠올랐고.

“가죠. 사자 앞으로.”

옅은 미소와 함께 말하자, 한진석이 씨익 웃어 보였다. 그러곤 날 뒤따르며 소리친다.

“따-악!”

  *** 카메라가 곳곳에서 비추고 있는 스튜디오의 안을 잠시 둘러보았다. 허공에 떠 있는 지미집 아래로 강렬한 조명이 빛나는 가운데 스튜디오는 두 영역으로 나누어져 있다. 한쪽은 어느 고급 레스토랑의 주방을 고스란히 옮겨온 듯한 조리 영역. 그리고 나머지 한쪽은 ‘ㄱ’자로 꺾인 커다란 가죽 소파와 유리 테이블. 그 옆에는 식탁으로 쓰일 예정일 대리석 테이블과 의자들도 보인다. 그러니까 집으로 치자면 부엌과 거실이 한 공간에 있는 셈이다. 다만 촬영하기 쉽도록, 혹은 방송을 보는 시청자들의 시야에 모든 상황이 잘 잡히도록 위치만 조금 조정되었을 뿐이다. 물론 요리사인 나는 언제든 내게 할당된 공간에서 나와 다른 곳으로 움직여도 된다. 아니, 대본을 읽어본 결과 애당초 소파 자리 역시 내 영역이라고 할 수 있었다. 단지 식탁에는 함께 앉지 않는다. 뭐, 그것도 그저 일단은……이라고 말하며 신현정 피디는 상황 봐가면서 하라고 했으니 사실상 이 스튜디오 자체가 내 영역인 셈이다. 아, 그리고 음식 재료는 주방에 있는 냉장고와는 별개로 또 다른 한쪽 벽면에 냉장고를 비롯해 커다란 선반에 차곡차곡 쌓여있었다. 제비집이라든가 철갑상어 알 혹은 트러플처럼 귀하고 비싼 걸 제외하곤 육해공을 망라해 어지간한 재료는 다 있었고, 그 외에도 필요하면 바로바로 구해다 준다나 어쩐다나. 그게 과연 가능한지는 지켜볼 일이지만, 일단은 그렇다는데 뭐라고 할까.

“자, 30분 뒤에 촬영 시작하겠습니다. 그동안 분장 마쳐주시고요. 의상 쪽도 다시 한번 신경 써 준비해주세요.”

옷도 이미 갈아입었고, 분장까지 꼼꼼히 마친 뒤라서 다른 사람 특히 류승렬이 몇 번이나 스타일리스트에게 짜증을 부리는 걸 구경하고 있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어느새 촬영시간이 되었다.

- 스탠바이, 큐!

신현정 피디의 신호와 함께 카메라가 돌기 시작했다. 중앙의 소파에 앉아 있던 두 사람. 나와 한진석이 서로 멋쩍게 바라보았다. 한번 눈이 마주치자 한진석은 입술만 달싹거릴 뿐 아무런 말도 못 하고 있었다. 나야 방송이 처음이기도 하고, 대본상 내가 먼저 나설 일도 아니라 말없이 쳐다만 볼 뿐이었고. 덕분에 침묵이 길어졌다. 그게 웃긴지, 한진석이 키득거렸다.

“크큭. 잠깐만요!”

NG를 낸 한진석이 미안한지, 사방으로 고개를 숙여 보이며 손까지 들어 올렸다.

“후우, 후우. 왜 이러지? 이상하게 긴장되네?”

“사자 앞이라 그런가 보죠.”

“쿱!”

“게다가 곧 있으면 늑대까지 들이닥칠 예정이니까요.”

“크크크크……. 아이, 씨! 진짜 왜 그러세요? 겨우 진정시켰는데. 자꾸 웃기고 그래요?”

“그럼 긴장이 풀렸단 건데?”

“어? 그런가?”

고개를 갸웃거리던 한진석이 다시 한차례 낄낄거리곤 손을 번쩍 쳐들었다.

“갈게요!”

다시 한번 카메라가 돌아가기 시작하고, 이번엔 한진석도 베테랑답게 실수 없이 멘트를 쳤다.

“시청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한진석입니다.”

간단한 인사와 함께 그는 마치 이 프로그램을 오랫동안 진행해온 것처럼 자연스럽게 말을 이어갔다.

“네 마음의 요리를 들어봐! 제목 좋죠? 예, 그렇습니다. 지금부터 한 분의 요리사, 셰에에-프를 모실 텐데요. 그럼, 이분이 오늘 모시게 될 게스트를 보곤, 따-악!”

아무래도 저건 틀림없다. 재미 들린 게. 괜히 나도 속으로 딱! 을 외치고 있을 때, 한진석이 프로그램에 대해 설명을 하고 있었다.

“……일종의 힐링입니다. 예, 예. 힐링이요. 그러니까, 음……. 여기가 사바나라면 저희가 모실 분들은 온갖 동물들로 비유할 수 있겠죠? 흐흐흐, 그럼 매번 오실 분이 어떤 동물일지 알 수 없다는 게 재밌지 않습니까? 어쩌면 사자, 특히 암사자일 수도 있고, 늑대일 수도 있단 거죠. 어? 사바나엔 늑대가 없어? 리카온? 하하하, 어쨌든 개과니까 늑대는 늑대 아닙니까? 아무튼…….”

한진석은 스텝이 보드에 적어 알려준 대로 말을 바꾸면서도 매끄럽게 진행했다. 가히 MC 10년 차다운 솜씨라 아니 할 수 없다. 그건 그렇고. 암사자 얘기를 할 때, 신현정 피디를 한차례 바라보는 게……. 크큭. 아무래도 지금 이 순간을 즐기고 있는 게 틀림없다. TV에서 봐왔던 대로 유쾌한 사람이다. 첫방임에도 불구하고 출연키로 한 게스트의 첫인상이 상당히 불쾌했는데, 그나마 한진석이 있어서 다행이랄까. 어차피 게스트야 지나가는 폭풍에 불과하니까. 그에 비하면 앞으로 쭉 함께 가야 할 MC가 햇살 같은 편이 좋다는 거야 두말할 필요도 없지. 근데 소파 자리가 너무 넓은 거 아닌가? 아, 원래 패널 한 명이 더 출연키로 했는데, 나오기로 했던 헤나가 막판에 캔슬하는 바람에 공석이 됐다고 했다던가? 속으로 잠시 딴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뭔가 장엄한 음악이 울려 퍼졌다. 무슨 일인가 싶어서 주변을 둘러보자, 한진석이 키득거렸다. 웃음소리는 음악이 그치기 전에는 멈추지 않을 거 같았다. 한진석은 여전히 웃음기를 머금은 채 말했다.

“갑자기 음악이 따악! 나오니까 놀라셨죠?”

“아, 예…….”

“그러니까, 소개할 때 저쪽에서 딱! 나오시라니까. 뭐, 쑥스럽다고 처음부터 여기 앉아 있겠다고 하셨으니, 누굴 원망하시진 마시고.”

쩝, 누가 이럴 줄 알았나? 미리 좀 말해주지. 살짝 원망스러운 눈길로 신현정 피디 쪽을 바라보는데, 한진석이 갑자기 크게 외쳤다. 여전히 웃으면서.

“크큭. 자, 그럼 이제 만나볼 시간입니다. 오늘부터 우릴 엄청난 맛의 향연으로 안내하고, 초대되는 게스트에겐 힐링을 선사할 셰프십니다. 모시겠습니다아아아아!”

짝짝짝짝짝짝짝짝! 방청객이라곤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지라, 박수 소리는 당연히 녹음이다. 원래라면 전혀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겠지만 지금처럼 소파에 나란히 앉은 채로 이런 상황을 맞으니 진짜 어색하다.

“하아.”

결국,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조금 창피해져서 고개를 살짝 숙인 채 한 손으로 이마를 문지르려는 찰나, 스텝…… 조강훈 FD가 보드를 치켜든 채 흔들고 있었다. - BB크림 지워짐. 예. 예……. 저건 또 언제 준비해 둔 거람? 설마 내 행동을 하나하나 주시하다가 그때그때 재빨리 써서 지시하는 건가? 저쪽은 저쪽대로 바쁘네. 새하얀 조리모를 한 손으로 고쳐 쓰고 몸을 곧추세워 앉았을 때였다.

“안녕하십니까, 셰프님! 소개 부탁드립니다.”

“서진영입니다.”

“…….”

“…….”

“그게 단가요?”

“예.”

“크큭.”

“좋습니다. 오늘도 맑은 날씨 되겠습니다.”

  *** 10분인가? 아니, 5분? 아무튼, 체감상으로는 30분도 더 지났을 거 같은 기분이었는데, 솔직히 한진석과 나눈 얘기들이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그가 내 이력에 대해 그리 자세히 말하지 않았다는 것만 떠올랐다. 그저 지금은 모 기업에 고용된 요리사이며 그 외는 별개로 케이터링을 하고 있다는 소개였다. 그러면서 한·중·일은 물론이고 전 세계 어지간한 음식은 다 할 수 있다는 구라를 쳤다.

“못하는데?”

“못해요? 그럼 안 되는데?”

“뭐가……?”

“저 여기 나올 때 매번 다른 음식들 먹을 수 있을 거라 기대했거든요. 그런 거 있잖아요? 매회 진행될 때마다 각국의 새로운 요리를 맛본다? 아, 생각만 해도……. 꿀꺽!”

대체 뭘 떠올리길래 침까지 삼키는 건지. 난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한마디 하려고 했다. 따라라라라, 라라……. 하지만, 느닷없이 들려온 나레이션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 나쁘지 않은 생각이다. 뭐가? 매번 촬영할 때마다 세계 각국의 온갖 음식들을 요리하는 거? 진짜 그렇게 된다면 난 돌아버릴지도 모른다. 솔직히 프로그램의 성격하고도 맞지 않고. 다행히 신현정 피디는 입가에 묘한 미소를 머금은 채 날 바로 보고만……. 음, 불안한데? - 서진영은 지금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알면 좀 가만있지? - 그도 그럴 것이, 자신의 능력으론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에 직면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그는 지금 한 가지 잊고 있는 게 있었다. 잊고 있는 게 있다? 그게 설마 해설을 말하는 건 아니겠지? - 다행히 서진영은 냉철한 편이었고, 뒤늦게나마 자신의 상황을 파악하곤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아직 안도의 한숨까진 내쉬고 있지 않은데? 까놓고 말해서 나레이션이 어떤 도움을 줄지도 감이 안 잡히고. 레시피라도 말해주려나? 아니면 요리하는 내내 맛을 봐준다거나. 상상만으로 웃기긴 하지만, 그만큼 지금 맞닥뜨린 상황이 당황스럽다는 얘기다. 그런 내 속내를 읽은 건지, 나레이션은 추가적으로 말하고 있었다. - 그는 이제라도 자신을 좀 더 믿으면 좋을 터다. 그렇게 하는 편이 자신을 위해서도, 또 강형식을 위해서도 좋을 테니까. 헐. 믿긴 뭘 믿어? 여기가 교회야? 그리고 지금도 충분히 날 믿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다만, 능력 이상으로 자만하거나 과욕을 부리지 않을 뿐이지. 흠, 그렇긴 한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나레이션이 저렇게 말해주니까 뭔가 확 믿음이 가긴 하네. 다시 한번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말없이 웃고 있을 때, 한진석이 말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여긴 지금 맑은 날씨 되겠습니다. 어떠십니까? 기분이?”

“예?”

“하하하. 기분이 나쁘진 않으시단 거죠?”

“그렇……죠.”

나쁠 게 뭐 있나? 고개를 갸웃거릴 때였다. 한진석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하지만, 이제 곧 먹구름이 몰려올 겁니다. 왜냐? 이 프로가 원래 그런 프로거든요. 시청자 여러분도 잊지 않으셨겠죠? 그렇-습니다! 네 마음의 요리를 들어봐! 쿡방을 표방하고 있지만, 사실은…… 따-악! 힐링 프로 아니겠습니까?”

“…….”

“크큭. 자아, 모시겠습니다. 류승렬 배우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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