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9. 방송 촬영 (1) (39/204)

#39. 방송 촬영 (1)2020.12.30.

진 회장의 호출을 받은 김명기 부장은 하던 일도 집어치우고 부리나케 회장실로 달려갔다.

“왔나?”

“예. 회장님!”

군기가 바짝 든 신병처럼, 한편으로는 연신 눈알을 굴리고 있는 김명기 부장을 진 회장은 재밌다는 듯 쳐다보았다. 확실히 머리가 비상한 놈이다. 그러면서도 눈치도 빠르다. 그래서 그런가 생각만큼이나 행동력도 탁월하다. 여기까지 보면 인재도 이런 인재가 없다. 문제는 그게 오로지 자신의 안위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것. 그 때문에 중책을 맡기긴 어려울 터다. 그래도 이번 일처럼 드러내지 않고 해야 하는 일에는 그만한 적임자가 없었다. 워낙 입안의 혀처럼 구는 치라서, 몇 마디 하지 않아도 다 알아듣고 재깍재깍 움직이니까.

“그래서 만나보니 어떤가?”

봐라, 이렇게만 말해도 알아듣는다. 그저 눈알을 한차례 또르르 굴리더니 바로 대답하고 있다.

“알아보니 연줄로 강 회장님 댁 주방에 들어간 모양입니다. 그 전까지는 여기저길 떠돌며 어깨너머로 요리를 배워온 거 같고요. 부모님은 중학교 때 교통사고로 사망.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진 외삼촌 손에 자랐습니다. 그게 답니다. 다만, 특이한 점은 어쩌다가 강형식하고 친해진 모양인데…….”

“잠깐.”

“…….”

“강형식이라면 강 회장 손자?”

“예. 어릴 때 큰 아드님 내외가 돌아가시고 난 후…….”

“아아, 기억나네. 그러니까, 자네 말은 강형식이랑 서…….”

“서진영입니다.”

“그래. 서진영이 강형식이랑 양친이 없다는 공통분모로 친해졌다는 건가?”

“그렇습니다.”

“그 외에 특이점은?”

“아, 한 가지 더 있습니다. 대현 그룹의 이하연 실장과 친하게 지내는 것 같습니다.”

“그래? 거참 별난 일이네. 집도 절도 없이 떠도는 천애 고아가 어쩌다가 대현의 금지옥엽이랑……. 헛참. 아무튼, 자네 얘기론 이번 방송도 그런 연줄들로 만들어진 자리란 결론이군. 아닌가?”

“제가 내린 결론은 그렇습니다. 솔직히 그자 정도 되는 실력의 요리사들을 한 줄로 세우면 여의도를 몇 바퀴 돌릴 수도 있을 겁니다. 때문에 곧 프로그램에서도 하차하게 되지 않을까 예상됩니다.”

잠시 생각에 잠기던 진 회장이 눈을 빛냈다.

“합리적인 결론이네만. 그래도 사람 일이라는 게 꼭 그렇지만 않지.”

“아, 죄송합니다!”

“아니, 아니. 자네가 고개를 숙일 일이 아니지. 세상엔 종종 범인의 눈으로는 쉬이 재단하기 어려운 종자들이 있다는 얘기를 한 것뿐이니까. 그게 서……뭐시기란 보장도 없고. 그렇긴 해도 혹시 모르는 일이니, 좀 더 주시하도록 해. 아, 김동하 국장이 밀고 있다는 그 요리 프로도 관심 있게 지켜보고.”

“예!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대답과 함께 허리를 깊이 숙이곤 나가는 김명기 부장. 그가 나간 문 쪽에서 창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진 회장은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우리 금쪽같은 내 새끼한테 전화나 해볼까?”

이미 그의 머릿속에선 서진영의 존재 자체가 자취를 감춘 지 오래였던 것이다. *** 톡톡톡. 손가락을 따라 책상을 두드리는 손톱에서 규칙적인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러니까, 서진영이 그 집에 들어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강형식이 사람이 바뀐 것처럼 달라졌단 말이지? 게다가 강 회장이 전처 생일에 국밥을 먹은 것도 알고 보면 서진영이 때문이다? 그리고 이하연, 고 앙큼한 계집이 서진영한테 푹 빠져 있는 거 같다고? 뿐만 아니라 김동하 국장이 지시를 내리기 전에 서진영을 자기 프로그램 메인 세프로 내정했던 게 다름 아닌 신현정 피디다?”

“그렇습니다.”

박 실장의 대답에 김진숙 회장은 헛웃음을 흘렸다.

“이게 지금 말이 된다고 생각해?”

“…….”

“그렇지. 말이 안 되지. 그러니까, 재밌는 거고.”

톡톡톡. 다시금 울리기 시작한 소리.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김진숙 회장의 입이 다시 열렸다.

“일단 광고 하나 넣어봐.”

“예? 광고를요?”

“그래. C 마트로.”

박 실장은 순간 할 말을 잃고 말았다. C 마트 계열사 중 하나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C 마트 자체의 광고를 넣으라고 할 줄 생각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반론은 하지 않았다. 그럴 이유도, 필요도 없었으니까. 그만큼 그는 김진숙 회장의 역량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애당초 능력이 없었다면 여자 몸으로 저 자리까지 오르지도 못했을 테니. 대한민국 재계에서 여자들이 갖는 위상이란 게 그랬으니까. 아무리 재벌가의 핏줄을 타고났어도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늘 한직으로 물러날 수밖에 없는 운명이랄까. 그런 가운데 유통업계의 1위 자리를 꿰찬 게 바로 김진숙 회장 아니던가. 그런 김진숙 회장의 능력 중에 가장 발군인 건 바로 인재를 알아보는 눈. 그런 만큼 이번에도 믿을 수밖에 없었다.

“우선 찔러보고, 저쪽 반응이랑 상황 봐가면서 좀 더 접근해보자고.”

“서진영에게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가치?”

“…….”

“가치는 모르겠고, 냄새가 난다니까. 그것도 달콤한 냄새가. 서진영을 중심으로 퍼져나가고 있달까. 그러니, 우리도 가만있을 순 없잖아? 투자라고 해봐야 쥐꼬리만큼밖에 안 하겠지만, 혹시 알아? 돌아올 땐 엄청나게 불어 있을지?”

박 실장으로선 할 말이 없었기에 그저 가만히 있었다. 자신의 역할을 정보를 취합하고, 가능한 경우의 수를 모두 동원해 회장이 취할 수 있는 선택지를 마련한 것일 뿐이므로. 이번에도 마찬가지. 정보도 모아왔고, 선택지도 마련했다. 결정은 김진숙 회장의 몫일 따름이었다.

“아, 촬영 스텝 중 한두 명 구워삶아 봐.”

“그렇게 하겠습니다.”

“좋아. 어디 한번 지켜보자고. 대체 서진영에게서 나는 냄새가 뭔지.”

입가에 야릇한 미소를 머금는 김진숙 회장. 어느새 책상을 두드리던 손길은 멈춰 있었다. 부르르르르. 전화 한 통이 걸려온 것도 그때였다. 일이 끝난 걸 어찌 알았는지 기막힌 타이밍이었다. 다만 반가운 전화가 아니었을 뿐. 아니, 반갑기는 세상 누구보다 반갑지만,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아프다고나 할까.

“그래, 어디니? 휴가는 잘 보냈…….”

- 고모. 나 지금 LA인데, 돈 좀 보내줘.

“갑자기? 얼마나 필요한데?”

- 한 장만 보내주면 돼.

“그 한 장이 겨우 공이 7개 붙은 건 아니겠지?”

수화기 너머가 조용해진다. 자신의 조카가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상상돼, 김진숙 회장은 이맛살을 살짝 찌푸렸다. 무표정한 얼굴로 눈썹만 아주 살짝 치켜세우고 있겠지. 그리고 곧 한층 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해올 터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아니나 다를까. 수화기를 통해 나직한 음성이 들려왔다. 속내를 알 수 없는 목소리였다.

- 그냥 알아보려고 왔는데, 급히 계약을 해야 할 상황이야. 경쟁자가 붙어서.

“어, 그러니? 근데 대체 뭘 사는데 그래?”

- 스튜디오.

“스튜…… 사진? 그게 왜 필요한데?”

- 영화사야. 소규모이긴 하지만.

재계에서도 제법 손이 큰 거로 소문이 자자한 김진숙 회장이었지만,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 한 일주일 쉬다 온다고 떠나더니만, 갑자기 웬 영화사? 게다가 LA라는 걸 보니 할리우드인 거 같은데. 그렇다는 건……. 한숨을 나오려는 걸 참으며 물었다.

“서연아. 고모가 좀 헷갈려서 그러는데……. 그럼, 아까 네가 필요하단 돈이 일 억은 아니겠다, 그치?”

천만 원이라고 하려다가 얼른 일 억으로 바꿨지만, 그것조차도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짐작은 여지없이 들어맞았다.

- 당장 10억 필요하고, 추가로 또 들어갈 거야.

“후우…….”

그럼 그렇지. 얘가 천만 원, 아니 1억이 없어서 내게 전화를 했겠는가?

“오빠한텐 말하지 말아야겠지?”

- 해도 상관은 없는데, 그래 주면 나야 고맙지.

“그, 그래. 계좌 보내……. 아니다. 내가 법무팀이랑 꾸려서 사람 보낼 테니까…….”

- 법무팀은 현지에서 고용했어. 그러니까, 그냥 돈만 보내주면 돼. 6개월 안에 갚을 테니까. 오늘 일자로 환율이랑 이자가…….

“됐어, 얘. 가족끼리 무슨. 내가 사채업자니?”

그런 뜻은 아니었어. 아무리 피붙이라도 돈 계산은 정확히 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그런 것일 뿐.

“그래. 알아. 금방 조치해줄 테니까, 조심해서 귀국하고.”

- 응. 새벽 비행기로 돌아가니까, 가서 봐.

전화를 끊은 뒤, 김진숙 회장이 참았던 한숨을 토해냈다. 무슨 얼음장, 아니 얼음벽을 보고 얘기하는 기분이었다. 그러면서도 그 속에는 또 얼마나 뜨거운 욕망이 이글거리는지 전해져 온다. 그러니, 조카라도 조심스럽기만 하다. 어릴 때부터 자신을 많이 닮았다는 소리를 듣고 자라온 아이지만, 그게 아니란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김진숙 회장이었다. 자신은 그래도 때때로 감정적으로 일을 처리하기라도 하지. 녀석은 냉철한 계산하게 철저한 준비와 빈틈없는 행동으로 일을 추진하는 스타일이었다. 그래서 더 겁난다. 이렇게 지 아빠한테, 아니 가족들한테 말도 하지 않고 사고를 쳐댈 때마다. 그렇다고 뭐라 할 수만도 없는 게, 물어오는 것마다 대박이었다. 그러다 보니 다들 아무 소리도 못 하는 거겠지만.

“……들었지?”

“예.”

김진숙 회장은 손을 훠이훠이 내저으며 말했다.

“조치해.”

“그렇게 하겠습니다.”

10억이란 돈이 움직이다 보니 자칫 세금 문제가 불거질 수도 있었지만, 두 사람 다 걱정은 없었다. 이럴 때를 대비해 외국에 마련해놓은 페이퍼컴퍼니가 한두 군데가 아니니까. 박 실장이 물러가고 나서, 김진숙 회장이 골치가 지끈거린다는 듯 얼굴로 중얼거렸다.

“너무 오냐오냐하는 걸까? 무슨 애가 갈수록 더해? 저래서야 시집이나 갈는지. 하아, 누군지는 몰라도 데려가겠다고 나서는 사람 있으면 무조건 절부터 해야지 싶네.”

끙, 하며 이마를 짚는 김진숙 회장이었다. *** 고윤수 주방장님께 말씀드리자, 열심히 해보라고 하셨다. 촬영 날짜에 맞춰서 시간은 비울 수 있게 해 주신다는 얘기였다. 괜히 나 때문에 주방의 다른 사람들이 피해 보는 거 아니냐고 걱정하자, 혹시라도 바빠지면 사람을 한 명 더 구하면 된다 하셔서 한시름 놨다. 김진호 셰프가 혹시라도 화를 내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오히려 깔끔하게 시간까지 조정해서 촬영 날은 아예 주방에 나오지 않아도 된다고 했고, 여차하면 다음 날도 오전 근무는 빼도 된다고 했다. 그러면서 조금 망설이시는가 싶더니, 자신이 방송에 출연했을 때의 일을 간단하게 얘기해주기도 하셨다. 나로서는 솔직히 뜻밖이었지만,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준석이 형도 매우 기뻐했고, 심지어 형수한테 전화해서 자랑하기까지. 이상한 건 안성댁이었는데, 별말도 그렇다고 이렇다 할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혜순이 누나야 수줍은 미소와 함께 눈짓으로 축하를 보내주었고. 그러는 사이 주말이 되어 주방 식구들은 김장에 매달렸다. 당연히 안 나오실 거라 생각했던 고윤수 주방장님이 직접 나와서 손수 배추를 절이는 모습이 의외이긴 했지만, 일 자체는 별 탈 없이 굴러갔다. 재벌가의 김장이라고 해서 기대 반 걱정 반이었는데, 생각보다 양도 종류도 그다지 많지 않았다. 서른 포기 정도는 배추김치에 총각무로 담은 열무김치, 동치미와 깍두기 그리고 갓김치 정도였다. 고윤수 주방장님까지 포함해도 여섯 명이 하루 만에 하기엔 좀 벅차서 따로 사람을 부르지 않을까 했는데, 일요일까지 이틀에 걸쳐서 하는 거로 해결했다. 대신 수당이 주어졌고, 나중에 통장을 확인해보니 예상했던 것보다 액수가 커서 조금 놀랐다. 하지만 며칠 뒤 더 놀라고 말았다. 신현정 피디와 만나러 방송국으로 갔고, 거기서 간단한 계약을 했다. 계약금 같은 걸 받은 건 아니고, 출연료를 책정하고 우선은 3개월 동안 방영할 촬영을 2주에 한 번씩 찍기로 했다. 만일 시청자들 반응이 좋으면 연장하기로 했고. 한데 출연료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많아서 놀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계약까지 마치고 나서 휴가를 받았다. 일부러 외숙모의 생일에 맞춰서 신청했던 거였다. 겨우 하루에 불과했지만, 기쁜 마음으로 저택을 나섰다. 습관처럼 꼭두새벽부터 일어나 준비하고 시흥시로 떠났다. 첫차로 일을 나가는지, 지하철 안엔 허름한 복장에 여기저기 닳은 등산화를 신은 아저씨들이 많이 보였다. 그 사이에 끼어 양손으로 가족들에게 줄 선물이 담긴 쇼핑백을 끌어안고 있었다. - 다음 정류장은 오이도 역입니다. 기다리고 있던 방송에 몸을 일으켰다. 여름에 한 번 들르고 지금 가는 거니까, 거의 반년 만의 귀향이었다. *** 오이도 역에서도 15분 정도 걸어가야 나오는 허름한 빌라촌. 그 사이에 공단들이 보였고, 여기저기 새로 올라간 아파트들도 보인다. 언제고 저런 아파트에서 살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하는 동안 집에 도착했다. 빌라 3층. 지어진 지 20년도 더 된 빌라답게 엘리베이터는 당연히 없었고 계단도 좁고 낡았다. 하긴 계단만 그런가. 벽도 언제 칠하고 안 칠한 건지 페인트가 벗겨져 있어서 보기가 좀 그렇다. 지금 머물고 있는 저택 안 숙소와 비교하면 그야말로 천양지차다. 괜스레 가족들한테 미안해져서 얼른 걸음을 빨리했다. 초인종을 누르자, 안쪽에서 익숙한 음성이 들려왔다.

“오빠야?”

기다렸다는 듯 문이 열리고, 녹슨 경첩 소리와 함께 동그랗고 하얀 얼굴이 튀어나왔다. 그러더니 앞뒤 볼 것 없다는 듯 날 와락 껴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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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언제 이렇게 컸담. 지난여름에 봤을 때만 해도 허리에서 조금 위에 있었는데, 그새 머리가 배꼽 위로 쑥 올라와 있다. 날 껴안고 얼굴을 부비고 있는 수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집 안으로 들어가자, 외숙모가 눈앞에 서 계신다. 참 사람이란 이상하다. 딱히 이유가 없는데도 괜히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있었다. 그래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는데, 외숙모가 환하게 웃으시며 반기신다.

“왔니?”

“예.”

“밥 안 먹었지?”

고개를 끄덕이자, 외숙모가 앞치마에 물기를 닦으며 주방 쪽으로 향하신다.

“외삼촌은요?”

“아빤 출근.”

“넌 학교 안 가?”

외숙모 대신 대답하는 수아한테 물어보니, 녀석의 입이 댓 발 튀어나온다.

“웅. 안 가고 싶은데…….”

그때 안방 건너편의 문이 열리며 뾰족한 음성이 날아들었다.

“야! 이수아! 빨리 학교 갈 준비 안 해?”

“벌써 다 했거든! 히잉! 가기 싫당.”

나한테서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는 수아를 보면서 흐뭇한 미소를 지어 보일 때, 수연이 누나가 혀를 끌끌 차고 있었다.

“네가 다 받아주니까, 너만 보면 저러는 거잖아.”

“귀엽잖아.”

“하이고. 야, 네가 뭘 몰라서 그렇지. 저것이 얼마나 여시인데. 학교에서도 쟤 때문에 남자애들이 서로 싸우고 난리도 아니라니까.”

응? 싸워?

“왜?”

“왜긴 왜야? 벌써 발랑 까져가지고. 초딩들 주제에 연애는 무슨.”

“아냐, 오빠! 난 관심 없는데, 걔들이…….”

“그게 다 네가 여지를 주니까 그러는 거 아냐, 여지를!”

“히잉. 난 진짜 그런 적 없단 말이양.”

부끄러운 건지, 아니면 억울한 건지. 수아가 내 품에 얼굴을 묻고 어깨를 들썩이려고 한다. 그런 수아를 꼭 안아주곤 토닥거렸다. 뭐, 내가 이런 말 하는 게 좀 이상할는지 모르지만 두 자매가 외숙모를 닮아 그런지 꽤나 미인이다. 수연이 누나는 집안을 일으켜보겠다고 죽자고 공부만 하느라고 대충 하고 다녀서 그렇지, 제대로 꾸미고 나가면 어지간한 연예인의 뺨을 후려갈기고도 남을 정도다. 아직 어리긴 해도 엄마한테 물려받은 미모가 어디 가지 않는지, 수아도 벌써부터 이쁘다고 인근에서 소문이 자자하단다. 이하연이 화려하게 이쁜 편이라면, 이쪽은 청초하단 표현이 잘 어울리는 미인들이었다. 뭐, 아직 청소년이라고 부르기도 어려운 수아한테 그런 말을 하기는 좀 그렇지만.

“자, 이거.”

학교 다녀와서 줘도 좋지만, 이왕이면 조금이라도 일찍 기쁘게 해주고 싶어서 쇼핑백에서 꺼내 주었다. 수아가 내가 내민 걸 받아들더니 눈이 초롱초롱해져서 얼른 풀어본다. 그게 라미 샤프라는 걸 알고는 활짝 피어난 미소로 또다시 내게 달려들었다.

“꺄아! 오빠아아아아아!”

“하아, 진짜. 네가 매번 이러니까……. 됐다, 내가 말을 말지. 뭐해? 와서 앉지. 수아 너, 진영이 그만 놔주지 못해? 그리고 너도 얼른 학교 가야지!”

“흥! 잔소리 대마왕!”

“저게!”

수연이 누나가 주먹을 치켜들자, 수아가 쪼르르 자기 방으로 달려간다. 그 뒤를 눈으로 좇다가 괜히 씁쓸해졌다. 20평도 안 되는 빌라지만, 그나마 방은 세 개였다. 안방 하나, 그것도 조금 작은 방 하나, 그리고 부엌 옆에 딸린 방 하나. 여길 나갈 때까지 내가 쓰던 방이 바로 그 주방 옆의 방이었다. 당연히 자매는 방 하나를 함께 썼고. 어떻게 보면 군식구인 나 때문에 두 사람이 손해를 본 셈이었지만, 가족들 누구 하나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나만 빼고는. 그게 늘 미안했고, 또 고마웠다. 내가 나가기로 한 후 수아도 자기 방을 가지게 됐다며 기뻐했지만, 대신 나랑 함께 살지 못한다는 걸 깨닫곤 얼마나 울던지…….

“찌개 끓이세요?”

도와드릴 심산으로 쇼핑백을 한쪽에 내려놓고 외투를 벗으며 주방으로 향하자, 수연이 누나가 얼른 달려와 내 팔을 붙든다.

“아파.”

“아, 미안.”

“이거 좀 놓고.”

얼른 내 팔뚝에서 손을 뗀 누나가 툴툴거린다.

“그러니까 누가 주방에 들어가래?”

“참 내. 주방에 들어가는 게 어때서?”

“남자가 주방에 들어가면…….”

“그럼 뭐?”

살짝 얼굴을 붉히는 걸 보니, 대충 알 만하다. 와, 진짜! 보수적이라고 해야 할지, 가부장적이라고 해야 할지. 근데 여자한테 이런 말 써도 되나? 아무튼, 진짜 지금이 무슨 조선 시대도 아니고…….

“안 떨어져, 안 떨어져.”

“누, 누가 뭐래?”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걸음을 옮겼다. 그러면서 중얼거렸다.

“누가 데려갈지 몰라도, 매형 될 사람은 정말…….”

복 받은 건지, 아니면 애석해해야 하는 건지.

“두부 넣으실 거죠?”

“응? 네가 하려고?”

“제가 이래 봬도 요리사잖아요.”

너스레를 떨자, 외숙모가 옅게 웃으시며 눈짓으로 냉장고를 가리키셨다.

“돼지고기 녹여놨으니까, 그것도 좀 썰어 넣자.”

“예.”

“그럼 난 양파 썰까?”

“수연이 네가 웬일로?”

윽! 누나가 다른 건 다 잘하는데, 음식만은 정말 젬병인데.

“누난 그냥 TV나 보……. 으헉!”

“이게! 어디서 까불고 있어. 꼬꼬마였던 걸 업어 키운 게 나거든!”

꼬집힌 팔뚝을 문지르며 냉장고를 열다가 어제까지 잊고 있었던 감각이 떠올라 나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이제야 진짜 집에 온 거 같은 느낌이 들었다. *** 아침 식사를 마치고 수아가 학교를 간 후, 수연이 누나도 수업이 있다며 나갔다.

“미안해서 어쩌지?”

“괜찮아요. 바쁘신 거 잘 아는데요.”

“그럼 수아 방에서 좀 쉬고 있어.”

“예. 걱정 말고 다녀오세요.”

외숙모가 인근 아파트단지에서 청소를 한다는 건 이미 알고 있는 일이었다. 마음 같아선 그만두게 하고 집에서 편히 쉬게 해드리고 싶었지만, 아직은 그럴 만한 여력이 없었다. 하지만 그것도 이제 머지않았다. 이번에 방송 출연하고 난 뒤, 돈 좀 모이면 그땐 제일 먼저 외숙모부터 일을 그만두게 해드릴 참이다. 그다음은 당연히 집이고.

“근데, 삼촌은 요새도 일찍 나갔다가 늦게나 돼서야 들어오세요?”

“아니. 일찍 나가긴 하지만, 가끔은 일찍 오기도 해. 오히려 요즘은 공장에도 일거리가 줄어서 예전처럼 야간근무하는 날이 거의 없다고 봐야 해.”

“흠, 그쪽도 되게 힘드나 보네요.”

“요즘 어렵지 않은 데가 있나.”

“그렇긴 하죠.”

“문 잘 잠그고. 그럼 다녀올게.”

외숙모가 걱정이 되는지, 아니면 미안한지 몇 번이나 뒤돌아보다가 집을 나섰다. 그 후 난 수아가 사용하는, 예전엔 내가 사용했던 방에서 한숨 잤다. *** 꿈속에서 부모님을 만난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어쩌면 그동안 내가 의도적으로 피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웠지만, 그런 마음이 들수록 현실의 무게를 견뎌내지 못하고 무너질까 봐 겁이 났던 걸지도.

“후우.”

잠에서 깨어난 난 아련한 눈빛이 되어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요즘 흔히 쓰는 말처럼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잘사는 축에 들었었다. 덕분에 어릴 때부터 엄마 등쌀에 못 이겨 이 학원 저 학원을 전전하며 한시도 쉴 수 없었더랬다. 오죽하면 보다 못한 할아버지께서 애 잡을 거냐고 난리를 치셨을까. 그 후로 조금이나마 학습량이 줄기는 했다. 그것도 얼마 지나지 않아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시며 도로아미타불이 되었지만 말이다. 아무튼 그 시절의 난 거의 저녁 8시까지 스케줄이 꽉 짜여 있었고, 덕분에 중학교에 올라가선 거의 3년 내내 전교 1등을 놓쳐본 적이 없었다. 뿐만 아니라 어릴 때부터 운동 삼아 해온 야구 덕택에 남자아이들뿐만 아니라 여자아이들에게도 꽤 인기가 많은 편이었다. 하지만 그런 건 정말이지 한순간에 무너져 내렸다. 부모님께서 교통사고로 돌아가시고 난 뒤, 집이 풍비박산이 나는 순간 여태껏 누리던 풍요로움은 고사하고 내가 있을 곳조차 사라져버렸으니까. 생각해보면 그때…… 엄마는 아마도 내 장래를 걱정하며 어떻게든 길을 닦아주고 싶으셨던 거 같다. 너무 어려서 생각이 짧았던 난 엄마를 원망하기도 했지만, 이제는 그런 생각은 하지 않는다. 부모님의 품이 얼마나 따스한지는 지난 세월 동안 뼈에 사무치도록 느꼈으니까. 정말이지 외삼촌 내외 그리고 수연이 누나와 수아가 아니었다면 지금의 난 없었을 거다.

“슬슬 나갔다가 올까?”

오랜만에 왔으니, 친구들이라도 만날 법하지만 내게 친구는 없었다. 이곳에서 고등학교를 다니긴 했지만 학교에선 대부분의 시간 잠만 잤고, 하교 후엔 아르바이트하느라 밤늦게나 돼서야 집에 왔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여자 친구는커녕 그냥 친구도 한 명 사귀지 못했다. 그래서 그런지, 어쩌다 한 번씩 동창회에 나오란 연락을 받아도 나갈 마음이 들지 않는다. 가봐야 괜스레 어색하기만 할 것 같았고, 그동안 먹고 사느라 바빠서 그럴 여유도 없었다. 어떻게 이 동네에 내가 추억이 될 만한 장소가 거의 없는 듯하지만, 그래도 전혀 없는 건 아니었다. 어찌 되었든 다니던 학교도 그대로 있고, 대부분 없어졌지만 아르바이트하던 가게들 중에 남아 있는 곳도 있었으니까.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려던 순간이었다. 철컥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어? 너 어디가?”

수연이 누나였다. 빨리도 왔네.

“오후에도 수업 있다고 하지 않았어?”

“그런 말 한 적 없는데? 요즘 시험 기간이라서 널널해.”

“그래?”

“근데 넌 왜 나와? 아, 거기 가보려고?”

난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 내 옆에 왜 누나가 있는지 의아해하진 않는다. 집에 올 때마다 종종 들르는 곳이었고, 가끔은 누나랑도 함께 오곤 했으니까. 지금은 공원으로 바뀌어 있는 자리. 한때는 좁다란 길목이 거미줄처럼 늘어서 있던 거리였는데, 근처에 아파트단지가 들어서며 이렇게 변했다. 어떨 땐 신기하기도 하다. 큰길은 그대로인데, 샛길들은 미묘하게 달라지거나 사라져버려서 그때와 닮은 듯 다르다. 그중 사라져 이제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 된 곳 중 한 곳이 바로 여기다.

“이 자리였지, 아마?”

공원 한쪽, 나무들이 서 있는 자리를 누나가 가리키며 물었고 난 고개를 끄덕였다.

“너 고3 때였나? 그때가?”

“아니. 고2 겨울 방학.”

“와, 세월 진짜 빠르네.”

아닌 게 아니라 정말 그렇다. 그때는 얼른 졸업하고 싶어서 미칠 것 같았는데…….

“진짜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 그때 손이 이만큼 부어가지고…….”

“아 쫌.”

“너 그날 깨 먹은 접시 때문에 반 달치 월급 날렸었지?”

“어? 어떻게 알았어?”

“흐응. 다 아는 수가 있지.”

잘난 척 고개를 쳐드는 누나를 보면서 눈을 가늘게 해 보였을 때, 누나가 픽하고 웃었다.

“실은 학원에서 내가 가르치는 학생 중에 학부모 한 분이 그때…… 너 일하던 레스토랑 사장의 친동생이라더라. 너한테는 작은 사모님쯤 되려나? 그분이 널 기억하시더라고. 그땐 시집가기 전이었다는데, 그맘때쯤 거기서 알바하셨다고 하던데 기억 안 나?”

“어? 혹시…… 보경이 누나?”

“호호호. 여자 이름이라서 그런 걸까? 아직 기억하고 있네?”

“그럼. 꽤 친했는걸. 많이 도와주기도 했고. 그때 나…… 되게 어설펐거든.”

“응? 그때부터 요리했던 거야?”

“그럴 리가. 기껏 고2짜리가 뭘 할 줄 알겠어. 그냥 서빙이지. 그렇긴 한데, 가끔 아저씨가 시간 날 때마다 이런저런 걸 알려주시긴 했지.”

말이 가끔이고, 이런저런 거지 실제론 꽤 많은 걸 배웠었다. 굳이 얘기하면 요리의 기본적인 걸 거기서 다 배웠다고 해도 무리가 아니다. 그렇게 1년 동안 틈틈이 거기서 알바를 하면서 요리사의 꿈을 키운 것도 전부 아저씨 덕분이었고.

“좋은 분이셨는데.”

누나의 말에 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이제 세상에 없는 분인데, 이제 와서 무슨 말을 할까. 그저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리고 조금은 싸구려 감상으로 가끔 와볼 뿐이다. 그러면서 속으로 아저씨한테 이런저런 보고를 하고, 또 한편으로는 마음을 다잡고 간다.

“이만 돌아갈까?”

“응.”

“근데, 아빠가 케이크 사 오려나?”

“그냥 우리가 가면서 사지 뭐.”

“그래? 그럼 아빠한테 연락해야겠다. 혹시라도 사 오면 안 되니까. 근데, 저녁 식사는 어디서 하지? 요 앞에 근사한 레스토랑 생겼다던데…….”

“누나.”

“응?”

“우리 오늘은 고기 먹을까?”

“고기?”

“응. 고기……. 한우로다가.”

입을 떡 벌리는 누나를 보며 덧붙였다. 조금 느닷없는 고백이었다.

“돈 좀 벌었거든.”

“그게 무슨…….”

“파티도 가고, 이런저런 수당까지 해서 꽤 받았어.”

“야! 그런 건 모아서 너 나중에 장가갈 때 써!”

“장가는 무슨. 그리고 다음 주부터는 또 버는데 뭐.”

“……?”

“나, TV 출연하기로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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