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8. 부업 (3) (38/204)

#38. 부업 (3)2020.12.27.

  신현정 피디의 얘기를 들으면서 몇 번이나 물었는지 모른다. 스스로에게. 진짜 할 수 있을까? 솔직히 아직도 신현정 피디가 어째서 날 선택한 건지 의아하기만 하다. 뿐만 아니라 고윤수 주방장님이 믿어주시는 것도 그렇고. 물론 안다. 나레이션 덕분이라는 걸. 어디 이것뿐일까? 따지고 보면 강형식과 친해진 것도, 이하연과 가까워진 것도, 방금까지 날 지켜보듯이 저만치 떨어진 데서 와인을 홀짝거리다가 돌아간 김진숙 회장에게 명함을 받을 수 있었던 것도 다 나레이션 덕분이었다. 고윤수 주방장님께 인정받게 된 것 역시 마찬가지고, 어쩌면 요새 날 대하는 김진호 셰프의 태도가 달라진 것도 그 때문이 아닐까 싶다. 결국, 이러니저러니 해도 나레이션이 들리기 시작하면서 인생이 바뀌기 시작한 셈이다. 그렇다 보니 살짝 겁이 나기도 한다. 순수하게 내 능력으로 잡은 기회가 아니란 것도 찝찝하긴 하지만, 것보다는 어느 날 갑자기 나레이션이 들려오지 않게 되면 어쩌나 해서. 그것도 한창 방송 출연 중일 때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앞에선 신현정 피디가 내가 출연할 프로에 대해 개괄적인 설명과 함께 출연진까지 언급하고 있었지만, 머릿속은 복잡하기만 했다. 그러나 고민은 길지 않았다. 나레이션이 왜 날 선택했는지 따윈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기회임은 분명한 사실. 어떻게 보면 내게 주어진 능력이라 할 수 있는데, 그 능력을 사용하지 않을 까닭이 없으니까. 뭐, 따지고 보면 여태껏 활용해온 것도 사실이고. 처음엔 수동적이었다고 해도 점점 적극적으로 이용하고 있기도 하고 말이다. 마음속으로 결심을 굳힌 난 고개를 끄덕였다.

“계약하죠.”

신현정 피디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좋네요.”

그러더니 척하고 손부터 내민다.

“진영 씨만 믿을게요.”

“저야말로 부탁드립니다.”

악수를 하자, 신현정 피디는 한층 더 밝은 얼굴이 되었다. 얼굴엔 고혹적인 미소가 떠나지 않고 있었고.

“앞으로 잘해봐요, 우리.”

“열심히 하겠습니다.”

“아, 오늘은 그저 얼굴만 볼 생각에 계약서는 챙겨오지 않았는데 어쩌죠?”

“상관없습니다.”

“그럼 이렇게 해요. 언제 약속 잡고 방송국으로 한번 오세요. 그때 계약도 하고, 스텝들이랑도 인사하시죠. 언제가 좋겠어요?”

“지금 말씀드려야 하나요?”

마음 같아선 바로 얘기하고 싶었지만, 그럴 순 없는 일이었다. 주방장님께도 여쭤봐야 하고, 김진호 셰프와도 얘기를 나눠봐야 하기 때문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TV에 출연하게 된다고 해도 난 여전히 삼한그룹 재벌가의 주방에서 소속된 요리사니까. 나중엔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적어도 지금으로선 본업이 따로 있다는 얘기다. 이런 내 사정을 이해하는지, 신현정 피디는 조금도 불쾌해하지 않았다. 오히려 곧바로 고개를 내저으며 다시 한번 미소를 머금었다.

“아뇨.”

그러곤 스케줄을 확인하는지 핸드폰을 몇 번 터치하다가 얘기했다.

“모레까지만 말씀해주시면 될 거 같아요. 시간을 더 드리고 싶은데…… 첫 촬영을 2주 후로 잡아놔서요. 적어도 다음 주 안으로 모든 세팅을 끝내고 싶거든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대화는 여기까지였다.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게 레스토랑을 떠나려던 순간, 신현정 피디가 멈칫하더니 내게 물었다. 매우 조심스럽게.

“저어. KS랑은 어떤 관계이신지…….”

“예? KS요?”

“KS 그룹 말이에요.”

응? 뜬금없이 웬 KS? 아, 그러고 보니 아까 그 사람…… 김명기 부장도 KS에서 나왔다고 했었지. 의아해서 고개를 갸웃하다가 며칠 전 팔순 잔치를 했었던 진 회장의 얼굴을 떠올렸다.

“아뇨. KS라면 지난 주말에 진 회장님 생신 파티에 출장 나간 게 답니다.”

“그래요?”

되물으며 이상하다는 표정이 역력하다. 하긴, 오늘만 해도 김동하 국장과 KS 대외홍보부 부장이 함께 왔다 갔으니. 그것도 날 서포트하듯이.

“그럼 우리 국장님……. 아까 함께 오시던데, 원래 아는 사이세요?”

“아뇨. 그분도 진 회장님 팔순 때 뵙고는……. 아, 그땐 뵙지도 못했네요. 그렇게 따지면 오늘 처음 뵌 게 되는군요.”

그녀의 말에 KBC 방송국의 김동하 국장을 다시 한번 떠올렸을 때, 신현정 피디가 씁쓸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무슨 일인가 싶어서 물어봤다.

“뭐 잘못된 거라도 있습니까?”

“아뇨. 그냥 못들은 걸로 하세요.”

표정을 보니……. 흠, 아무래도 김동하 국장이 입김이 있었나 본데. 어? 그러고 보니까, 신현정 피디가 따로 만나자고 했던 것도……. 이제야 대충 윤곽이 잡힌다. 일이 어떻게 돌아갔는지. 한마디로 양쪽으로 딜이 들어온 셈인가? 바에서 만난 인연으로 신현정 피디가 날 눈여겨보던 중에 김동하 국장이 압력 아닌 압력을 넣었다는 거네. 참 묘하다 싶었다. 김동하 국장이 왜 저러는 거냐고 물으면 대답하기 어렵지만, 어떤 상황인지는 알겠다. 특히 중간에서 곤란해했을 신현정 피디를 생각하니 웃음이 나려고 한다. 그걸 애써 참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죠. 전 못 들은 거로 하겠습니다.”

“그래요. 이 얘긴 안 나눈 거로 하는 게 좋겠어요.”

보면 볼수록 현명한 여자다. 자신이 일찌감치 찜해놓은 사람인데도, 윗선에서 콕 찍어 밀어 넣은 거로 하겠다는 얘기 아닌가. 큭. 이로써 김동하 국장은 설사 나 때문에 문제가 생겨도 아무 말도 못 하게 됐다. 뿐만 아니라 신현정 피디로선 고유 권한인 섭외 문제에 있어 위쪽의 부탁을 들어줌으로써 김동하 국장에게 일종의 빚을 지운 셈이고.

“보니까 갑자기 연락받고 나오신 거 같은데, 피곤하겠어요.”

눈치도 빠른 거 같다. 엘리베이터로 향하면서 신현정 피디는 나직하면서도 매혹적인 음성으로 얘기하고 있었다.

“점심때 들었습니다. 그래도 덕분에 저녁 식사 준비는 빠지게 됐네요.”

이미 이하연으로부터 내가 어디서 무슨 일을 하는지 들어서 알고 있을 테니 굳이 사정을 얘기할 필요가 없었다.

“그럼 들어가 보겠습니다.”

엘리베이터에 탄 후 로비에서 내리면서 말하자, 신현정 피디가 불쑥 물어왔다.

“차 안 가져오셨어요? 그럼, 댁까지 태워다 드릴…….”

“아닙니다. 지하철 타고 가면 됩니다.”

“아까부터 비도 오는 거 같던데. 그러지 마시고…….”

“괜찮습니다. 편의점에서 비닐우산 하나 사면 되는데요, 뭘.”

“그럼, 역까지라도 태워드릴게요.”

“진짜 괜찮습니다.”

아무리 엘리베이터에 신현정 피디만 타고 있다고 해도 너무 오랫동안 문을 열고 있는 거 같아서 손사래까지 치며 멀찍이 물러났다. 그제야 신현정 피디가 열림 버튼에 손을 떼는 거 같았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고 층수 표시판에 숫자가 바뀌는 걸 보면서 돌아섰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과연 신현정이 이하연과 친한 사이가 아니라고 해도 날 태워다주겠다고 했을까? 뭐, 상관없나? 어깨를 으쓱해 보이곤 로비를 가로질러 호텔을 빠져나왔다. ***

“아, 하연 씨.”

이하연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온 것은 저택에 거의 다 와서였다. 지하철역에서 내려 저택으로 향하면서 통화했다.

- 축하해요!

“그 얘긴 아까도 했잖아요.”

- 힛. 그래도 또 할래요.

음, 수화기 너머에서 전해지는 건 단순히 음성만이 아니다. 어째 나보다 더 좋아하는 거 같다? 그래서 그런지 안 그래도 멋쩍었는데, 한층 더 민망해진다.

“별거 아닙니다. 그냥 부업일 뿐이에요.”

- 별거 아니긴요, 얼마나 많은 사람이 진영 씨를 볼 건데요.

“그렇게 생각하면 좀 걱정되긴 하네요.”

- 어머 왜요?

“아시잖아요. 제가 어디 가서 내세울 만한 얼굴도 아니잖아요. 그렇다고 굉장히 뛰어난 실력을 갖춘 것도 아니고요.”

- 앙! 진짜 무슨 소리양. 진영 씨가 얼마나 멋진데! 그런 소리 하지 말아요! 진영 씬 잘할 거에요! 두고 보라니까요, 전 국민이 진영 씨 매력에 푹 빠지고 말걸요?

“글쎄요. 꿔다놓은 보릿자루나 되지 않을는지.”

- 절대 그럴 일 없으니까, 마음 푹 놓으시죠 선생님. 난 진영 씨가 막 유명해지고 그래서……. 하……. 진짜, 현정 언니는 왜 쓸데없는 짓을 해가지고.

잘 들리지도 않는 목소리로 투덜대는 이하연. 그녀의 음성을 들으며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를 머금는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의아하기만 하다. 어째서 이 여자는 내게 이처럼 호감을 가지는 걸까? 나한테 뭐가 있다고. 돈도, 명예도 그렇다고 이렇다 할 실력이 있는 것도 아닌데. 물론 앞으론 지금보다 실력이 나아질 거고, 어쩌면 진짜 유명한 요리사가 될는지도 모를 일이지만 적어도 지금은 아니잖아. 얼굴이라도 잘생겼으면 또 모르겠는데, 내가 보는 난……. 딱 평균치다. 음, 그것도 어디까지나 주관적인 의견이고 어쩌면 평균 이하일지도 모른다. 그나마 봐줄 만한 게 덩치인데, 이 정도야 뭐. 요즘은 고등학생만 되도 180 넘는 애들이 쌔고 쌨는데.

“그래도 고맙죠. 신현정 피디도……. 신경 많이 쓰신 모양이던데.”

- 아! 근데 계약은 했어요?

“서류 준비를 안 해오셨다고, 다음에 하자고 하시던데요?

- 언니도 참. 계약하러 가서 계약서도 안 가져가면 어떡해? 판을 엎을 작정도 아니었을 텐데.”

이번엔 신현정 피디를 향해 툴툴거리는 이하연. 그럼에도 그녀와 통화가 즐겁기만 했지만, 이제 그만 끊어야 할 때였다.

“거의 다 왔네요.”

- 응응. 피곤할 텐데, 얼른 들어가서 뜨거운 물로 씻고 얼른 자요.

전화를 끊고 나서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당연히 씻고 나오면 이하연으로부터 톡이 날아와 있을 줄 알았는데, 이날 밤엔 희한하게 톡을 보내지 않았다. 잠이 들 때까지도 이하연은커녕 어디서도 톡은 없었다. *** 저녁 9시가 조금 넘은 시간, 이하연은 책상 한쪽에 올려둔 탁상시계의 숫자를 확인하며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아앙!”

그러다가 핸드폰을 저만치 밀어 치웠다. 그러곤 그쪽으론 쳐다보지도 않고 한참 동안 서류를 정리하던 그녀였지만, 어느 순간 시선이 자꾸만 핸드폰을 향하고 있었다.

“자겠지?”

한숨이 섞인 음성을 내뱉고는 시간을 확인한 이하연이 어이없다는 듯 실소를 짓고 말았다. 뭐야? 10분 지났어?

“하아, 진짜 뭐양!”

통화하고 싶은 거야 말할 것도 없고, 하다못해 톡이라도 보내고 싶지만 꾹꾹 참고 있으려니 속이 다 근질거려서 못 참을 지경이었다. 여러 가지 협상을 포함해 계약에 이르기까지 그 과정이 얼마나 사람 피를 말리는 건지 잘 아는 그녀로서는 오늘 하루만은 서진영이 편히 쉬었으면 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그와 대화를 나누고 싶다는 이율배반적인 마음이 들었던 것이다.

“커피라도 마셔야지.”

안 되겠다 싶었던 그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자신의 사무실에서 벗어났다. 문이 열리고 그녀가 나오자, 사무실은 마치 북새통 같은 모습이었다. 아니 것보다는 전쟁터랄까. 아무튼, 십수 명의 사람들이 뒤엉켜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정신없이 뛰어다니는 게 어디 불이라도 난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아, 실장님!”

워낙 일이 많아서 퇴근할 때까지, 아니 지금처럼 야근 중일 때조차 어지간하면 자신의 방을 나서지 않는 이하연이었기에 조금 놀랐던 모양이다. 하긴, 시킬 일이 있으면 직접 나서지 않고 대부분 사람을 불러서 처리하는 타입이었으니 의아할 만도 할 테다. 그래서 그런지 앞머리가 살짝 벗겨진 40대 중반의 과장이 매우 조심스럽게 물어오고 있었다.

“호……혹시 따로 지시하실 일이 있으신 건지요?”

어찌나 굽실대는지 누가 보면 갑질이라도 하는지 알겠다. 이러려고 나온 게 아니었지만, 마침 궁금한 게 있기도 해서 이하연이 물었다. 한데, 그녀의 태도도 그렇고 목소리도 아까 그녀의 방에 있을 때와는 사뭇 다르다. 어딘지 모르게 차갑다고나 할까. 한층 사무적인 모습이었다. 그럼에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게 전형적인 커리어우먼, 아니 사업가의 모습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었다.

“상하이 쪽 런칭 예상 지점 말인데요. 정말 시장성이 있는 건가요? 아무리 따져 봐도 2년 내로는 흑자 전환하기 어려울 거 같아 보이던데요?”

“예상되는 수, 수익 분기점만 보자면 그럴 게 생각하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건 단일 지역의 매출과 수익이…….”

“김 과장님.”

“예? 예!”

“지금 어디 강의 나왔어요? 김 과장님 눈에는 제가 학생으로 보여요?”

“아, 아닙니다! 절대 그런 의도로 말씀드린 게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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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과장님. 제가 들으려는 건 그런 정론이 아니란 거 아실 거 아닙니까? 숫자가 모든 걸 말해주는 게 아니란 것쯤이야 여기 있는 사람들 다 알아요. 문제는 다른 지역과 연계한 마케팅이 예상했던 만큼이나 효과가 있을지, 해당 지역 주무관청에서 얼마나 지원을 약속받았는지, 경쟁 업체로부터 들어올 견제와 산짜이가 얼마나……. 됐어요. 됐고. 이번에 런칭하기로 한 5개 도시 지점의 마케팅 전략 기획서 가지고 오세요.”

“알겠습니다!”

그다지 큰소리가 아닌데도 한순간에 가라앉은 사무실 분위기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김 과장이 직원들에게 지시하자 사무실 안이 아까보다 더 정신없이 돌아가기 시작한다. 사방팔방 튀어 오르는 메뚜기 떼를 보는 듯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이하연은 그 모습을 본체만체한 채 탕비실로 들어가 원두커피를 갈아 내렸다.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커피잔을 들고 다시금 방안으로 들어온 이하연은 자신의 의자에 털썩 앉았다. 그러곤 시계 쪽으로 시선을 던지곤 한숨을 푹 내쉬었다. 9시 20분. 시간 참 느리게 간다고 생각하면서 커피잔을 입으로 가져가고 있을 때였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리고 김 과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품에는 정말 한가득이란 말이 무언지 알려주려는 듯 서류가 가득 안겨 있었다. 그걸 보면서 이하연이 눈을 빛냈다.

“놓고 나가세요. 아, 직원들은 퇴근시키시고.”

“예? 런칭 때까진 계속 야근 체제로…….”

“그러다 퍼지면요? 김 과장님, 우리 길게 보죠. 크리스마스 전후해서 런칭하기로 했죠? 그럼 한 달 조금 더 남았네요? 그 시간이면 충분하지 않아요?”

“날짜상으로 보면 그렇긴 합니다만, 그래도 만일에 하나라는 게 있지 않습니까? 그렇게 생각하면 불안해서 말입니다.”

“후우, 전에는 어땠는지 모르겠는데요. 보여주기식으로 일하는 거 저는 용납 못 해요. 다른 직원들도 그렇고 과장님이나 저나 그런 식으로 갈아 넣은들 효율은 오히려 떨어지지 않겠어요?”

“…….”

안절부절못하는 김 과장. 그를 빤히 보던 이하연의 목소리가 누그러졌다.

“김 과장님 가족들이 지금 캐나다에 있다고 했나요?”

“……예.”

“그래요. 김 과장님은 어떠신지 모르겠는데, 제가 보기엔 지금도 그리 이른 시간은 아닌 거 같네요.”

이하연은 두 손으로 깍지를 끼고 부드럽게 얘기했다.

“앞으로는 야근을 하더라도 8시 이전에는 퇴근하는 거로 하죠. 주말엔 당연히 쉬고요.”

“그, 그래도 되겠습니까?”

대체 여태껏 어떻게 굴렸기에 이런 반응인지, 이하연은 속으로 혀를 차지 않을 수 없었다. 대대적인 브랜드 런칭에 앞서서 사운을 거는 마당에 이러는 게 아주 이해가 가지 않는 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이건 좀 아니다 싶었다. 인간적인 처우야 둘째치더라도 이래선 오히려 효율이 떨어질 거란 생각이었다. 며칠만 일하고 관둘 것도 아닌 바에야, 이런 식으론 한 달은커녕 보름도 못 버틸 게 뻔했다. 아니, 버틴다고 해도 그때부턴 그저 관성적으로 일하게 될 가능성이 컸다. 피로가 누적되다 못해서 자칫 큰 실수라도 하거나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걸 놓치는 잘못도 할 수 있었고.

“제가 다 책임질 테니, 걱정 마세요. 솔직히 직원들도 그렇지만, 김 과장님이나 저도 숨을 쉬어가면서 일해야 하지 않겠어요?”

“그렇긴 합니다만.”

“좋아요. 그럼 그렇게 알고 나가 보세요.”

“예, 그럼.”

바짝 군기든 신병처럼 절도 있게 고개를 숙여 보인 뒤 밖으로 나가는 김 과장을 바라보다가 이하연이 자연스럽게 커피잔을 들어 올렸다. 그렇게 입가로 커피잔을 가져가는 이하연의 눈에 핸드폰이 비친다.

“그래. 진영 씨라면 잘 해낼 거야. 씨이, 현정이 언니는 괜한 일을 벌여가지고.”

만일에 하나라도 일이 틀어져서 서진영이 마음이 상처라도 받게 될까 봐 조마조마한 그녀였다. 또다시 떠올려서 그런가, 핸드폰 쪽으로 시선이 가고 자꾸만 손이 근질근질하다.

“아, 그만 그만. 일하자, 일.”

시선을 돌려 방금 김 과장이 한 아름 들고 들어와 책상 위에 놓고 간 서류들을 쳐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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