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7. 부업 (2) (37/204)

#37. 부업 (2)2020.12.25.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고 최대한 깔끔하게 차려입은 뒤 약속장소로 향했다. 아직 차가 없기 때문에 지하철로 움직였다. 택시라도 타고 갈까 하다가 이내 고개를 내젓곤 걸음을 빨리했다. 통장에 돈 좀 들었다고 마음이 해이해지다니. 속으로 혀를 차면서도 한편으로는 이럴 땐 차가 한 대 있으면 정말 편하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뭐, 이러니저러니 해도 별로 나갈 일은 없지만, 만일에 하나라도 일이 잘 풀려서 TV에 고정적으로 나가게 되면 정말 차가 필요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된다면 중고차라도 한 대 사야 하겠지만. 하긴 이하연 만날 때마다 차를 얻어타는 것도 좀 그렇고. 아! 그러고 보니 이하연한테 아직 얘기를 안 했는데……. 말해주면 놀라겠지? 뭐, 어쩌다 보니 신현정 피디 쪽보다 먼저 제안을 수락하게 된 셈이지만, 그녀 생각에 그렇다고 섭섭해하진 않을 거다. 오히려 기뻐하면 기뻐할 테지. 그녀가 놀라면서 꺅꺅거리며 좋아라할 모습이 떠올라 나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확 그냥 신현정 피디 쪽도 수락해? 와, 그럼 나……. 프로그램을 두 개나 하는 거네? 이러다가 막 유명해지고 그러는 거 아냐? 즐거운 상상에 피식거리며 지하철 안에 서 있자 앞쪽에 앉아 있던 승객 몇이 힐끔거리며 날 쳐다본다. 민망해서 얼른 표정을 고치곤 속으로 스스로를 욕했다. 아직 쌀도 안 씻었는데 숟가락부터 빠는 꼴이다. 하필이면 약속 시각이 출퇴근 시간과 겹쳐서 꽉꽉 들어찬 지하철인지라 앉을 곳은 없었다. 탈 때부터 콩나물시루 같던 전철 안에서 사람들 사이에 끼어 가길 얼마간. 시청역에 도착했다는 방송을 듣고 얼른 내렸다.

“후아!”

답답한 차내에서 벗어나 그나마 탁 트인 공간으로 나오니 살 것 같았다. 잠시 후 부지런히 걸어 도착한 곳은 고구려 호텔 앞. 시간을 확인해보니 아직 여유롭다. 그래도 괜히 늑장 부리다가 늦으면 안 되니까 조금 일찍 올라가는 게 좋겠지. 호텔 로비에 들어서 간만에 사람들 구경을 하면서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그때였다. 저만치서 누군가가 내 쪽으로 다가온다.

“저 혹시 서진영 셰프님 되십니까?”

셰프님은 아니지만, 서진영인 건 맞는데. 한 손에 사진까지 들고 있는 걸 봐선 여태 날 기다린 거 같았다. 정장으로 쫙 빼입은, 멀끔한 차림새에 꽤 인텔리한 인상이라서 한 번만 봐도 잊기 어려운 타입이다. 그런데도 기억에 남지 않는다는 건 처음 봤다는 것.

“누구시죠?”

“맞으시죠?”

“예. 맞긴 합니다만.”

“아! 자, 잠시만.”

뭐야? 지가 누군지는 말도 안 해주고 내빼? 나참, 어이가 없…….

“서진영 씨?”

어? 방금 로비 쪽으로 달아났던 남자가 돌아왔다. 한데, 혼자가 아니다. 뒤에 두 명의 남자를 매달고 왔다. 그중 한 명, 어떻게 봐도 높은 지위일 거라고 예상되는 중년 남자 쪽이 날 부르고 있었다.

“예?”

“처음 뵙죠? 김명기라고 합니다.”

내게 내미는 명함을 받아보곤 놀랐다. (주)KS 대외홍보부 부장 김명기. 아니, 요즘 왜 이래? 만나는 사람마다 다 한 자리씩 해? 그래서, 이 높은 양반은 왜 날 찾는 거람?

“반가워요.”

“아, 예. 한데……. 무슨 일이신지?”

“얘기 못 들으셨겠군요.”

가족한테나 지을 법한 웃음을 지으면서 한 발짝 물러나자, 이번에는 다른 사람이 나섰다. 바통 터치인가?

“나, 김동하일세.”

김…동…하? 그게 누구더라? 김동하, 김동하, 김동……. 아! 기억났다. KBC 방송국장. 얼굴은 몰랐지만, 인연이 아주 없다고 할 수는 없는 사람. 진 회장 팔순 잔치에서 직접 요리법을 짰던 사람이었다. 그 덕인지 이번 방송 섭외를 제안해온 인물이기도 하고. 한마디로 내겐 고마운 사람이란 얘기다.

“아, 몰라 봬서 죄송합니다.”

“괜찮네. 그럴 수도 있지. 우리 초면이잖아?”

“……예.”

“자,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올라가지. 우리 예쁜 피디님이 자넬 목이 빠져라 기다려요.”

갑작스러운 상황이었지만, 세 사람 아니 처음에 내게 접근했던 남자는 어째서인지 뒤쪽으로 빠져서 허리를 폴더폰처럼 접고 있었고, 나머지 두 사람과 함께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잠시 후, 띵 하는 소리가 들리며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그리고 막 타려다가 흠칫 놀라고 말았다. 두 명의 남녀가 타고 있었는데, 황당하게도 그중 하나가 낯이 익었던 것이다. 남자 쪽은 잘 모르겠는데, 여자 쪽은 확실히 알고 있는 얼굴. 만난 건 딱 한 번이지만, 확실히 눈도장을 찍어놨던 사람이랄까.

“어머, 이게 누구야?”

내가 인사를 하기도 전에 저쪽에서 먼저 아는 척을 해왔다.

“안녕하세요.”

입가에 미소를 머금으며 내 쪽을 보는 이는 다름 아닌 C 마트 김진숙 회장. 중년의 아줌마지만 아직 40대인 걸로 알고 있고, 결혼도 안 해서 그런지 겉으로만 보기엔 그렇게까지 보이지도 않았다. 흔한 말로 몸매나 피부가 20대에 꿀리지 않을 정도다. 다만 얼굴에서 약간 세월의 흔적이 보이고 내뿜는 카리스마가 장난이 아닐 뿐. 특히 눈에서 흘러나오는 빛은 연륜이란 이런 거다라는 걸 보여주려는 듯 깊으면서도 날카로웠다. 그렇긴 해도 이런 식으로 우연히 만나서 그런지 김진숙 회장은 얼굴에서 미소를 지우지 않고 있었다.

“사복 입은 모습도 괜찮네. 호호호. 자긴, 체구가 좋아서 모델 해도 되겠어.”

“말씀 감사합니다.”

“뭐야? 왜 이렇게 딱딱해요?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기쁘지 않아?”

글쎄다. 기쁘고 자시고, 일단 부담스럽습니다만.

“회장님, 그동안 건강하셨습니까?”

거기에 김명기 부장이 수저 하나를 더 얹는다. 아니 기름을 부른 건가?

“그래요. 김 과장도 잘 지냈어요?”

“흐흐흐. 지금은 부장입니다.”

“훗. 당신 같은 재간꾼이라면 조만간 승진할 줄 알았지.”

서로 구면인지 아는 척을 하더니, 이번엔 김동하 국장도 합세한다.

“아이고, 회장님. 이런 곳에서 만나다니, 우연치곤 참 운이 좋습니다. 이거 오늘 횡재를 연거푸 하게 되네요.”

“글쎄요. 날 만난 게 횡재가 될지 횡액이 될지는 모르겠고……. 연거푸라는 말이 묘하게 거슬리네?”

“아, 그러셨습니까?”

“혼잣말이니까 신경 쓸 거 없어요.”

그렇게 말하면서 날 힐끔거리는 김진숙 회장의 눈길을 따라 김동하 국장이 시선을 돌렸다가 씨익 웃는다.

“비즈니스 얘기니까, 혹여 기분 상하셨다면 푸시길 바랍니다. 언제 제대로 식사 한 끼 대접하겠습니다.”

“그래요? 기대할게요, 그럼. 그리고 비즈니스……. 열심히 하시고요. 근데, 박 실장.”

김진숙 회장은 옆에 서 있는 안경 낀 남자에게 말을 건넸다.

“예. 회장님.”

“우리도 식사할 때 되지 않았어?”

별걸 다 묻는다 싶었다. 밥때 되면 그냥 밥 먹으면 될걸. ……하고 생각했지만, 내 생각이 짧았다.

“오늘은 저녁 약속이 따로 없으십니다.”

스케줄 확인하는 거였구나.

“그래? 그럼……. 함께 식사할래요? 여기 레스토랑, 스테이크 괜찮은데.”

어? 지금 나한테 묻는 건가? 황당하기도 하고 당황스럽기도 하다. 김동하 국장의 눈치를 보면서 얼른 대답했다.

“아뇨. 제가 선약이 있어서요.”

“흐음. 데이트? 아니면 비즈니스인가? 뭐, 내가 신경 쓸 건 아니지. 우리도 이제 막 스쿼시 끝내고 올라온 터라 배고프다기보단 좀 쉬고 싶을 뿐이니까, 잘됐네요. 그럼 다음에 언제 밥 한 끼 하는 건 괜찮지?”

묘하게 반말과 공대를 섞어 쓰고 있는데도 기분 나쁘거나 하진 않았다. 원래 그런 타입인지 자연스럽기도 하고. 그 이전에 한 회사의 주인인지라 솔직히 기분 나빠할 상황도 아니다.

“기회가 된다면요.”

다만 요리사와 CEO라는 어떻게 봐도 연관성이라곤 1도 보이지 않는 관계인지라 나도 모르게 거리를 두게 될 뿐이다.

“호호호. 긴장했나 보네. 얼굴 좀 풀어요. 그러다가 뒤틀리겠다.”

잠시 얘기를 나누는 사이에 엘리베이터가 멈춰섰다. 호텔이라 그런지, 아니면 그냥 운이 좋았던 건지 레스토랑까지 한 번도 멈춰 서지 않고 올라온 셈이다.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그래요.”

허리를 살짝 숙이자, 김진숙 회장이 고개를 끄덕거린다. 그러면서도 엘리베이터에 내리는 두 사람. 아깐 배 안 고프다며? 어쩐지 우리, 정확히는 날 뒤따라오는 듯한 느낌이 들지만…… 자의식 과잉이다 싶어서 신경을 꺼버렸다. 그리고 도심이 내려다보이는 창으로 둘러싸인 레스토랑 안을 둘러보며 이제 어찌해야 하나 고민할 때, 김동하 국장이 씨익 웃으며 손을 쳐들었다. 그 순간, 멈칫하고 말았다. 왼쪽 구석진 창가 자리에 익숙한 얼굴 하나가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 레스토랑 한쪽에 앉아 있는 신현정은 기분이 좋지만은 않았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불쾌하다. 아직 출연진을 확정 지었다는 얘기를 한 건 아니지만, 내심으론 이미 서진영을 섭외하기로 마음먹은 터였기에 더 그렇다. 신현정은 평소 PD라는 직업이 권위적일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오늘 같아선 그 한 줌도 안 되는 권위를 내세우고 싶다는 욕구에 사로잡힌다.

‘선배만 아니면 진짜.’

절대로 안 나왔을 거다. 낙하산도 아니고, 무슨 출연진을 국장이 직접 나서서 꽂는지도 이해가 안 가고, 무엇보다도 이렇게 따로 담당 PD를 불러내 만나자고 하는 것도 기분 나쁘다.

‘뭐야, 지가 재벌 3세라도 돼?’

설사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렇지. 만날 거면 방송국으로 찾아오든가. 인사까진 바라지도 않는다. 그래도 바쁜 사람을 이런 식으로 불러내는 건 좀 건방지지 않나? 안 그래도 지금 상황이 그다지 내키지 않는데. 신현정은 언짢은 기색을 숨기지 않은 채 차가운 유리잔을 들어 올렸다. 상대가 누구든 간에 함께 밥 먹을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아서 먼저 커피부터 시켜놓은 터였다. 빨대를 통해 빨아들인 차가운 아이스커피가 입안에 담겼다가 이내 목구멍으로 넘어가자 시원한 청량감에 그나마 속이 좀 풀리는 듯했다. 신현정은 마음을 다잡았다. 누가 오든지 간에 분명히 말하기로. 이미 섭외해 놓은 요리사가 있다고. 설혹 서진영이 거절한다고 해도, 그건 그때 가서의 일. 어떤 식으로든 그를 설득할 자신도 있었고, 만일에 하나가 실패한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적어도 오늘 이런 식으로 자신을 방송국 밖으로 불러내 만나는, 무례하다 못해 건방진 사람만 아니라면 된다는 생각이었다. 그렇게 그녀가 창밖을 바라보며 머릿속을 정리하고 있을 때였다. 입구 쪽에서 누군가 손을 들어 올리고 있다. 그 순간, 그녀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손을 든 건 익히 아는 얼굴이었지만, 외려 그녀의 시선을 사로잡은 건 따로 있었다.

‘아니, 왜?’

머릿속에서 생각지도 의문이 회오리치고 있을 때, 김동하 국장이 다가왔다. 그리고 당연하다는 듯 또 한 사람도 딸려왔고. 게다가 오늘 처음 본 남자까지 합하면 세 명이 와 있다. 부르긴 한 명을 불렀는데, 그새 새끼를 친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설마하니 김동하 국장이 직접 나오리라곤……. 아니,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지.

‘서, 설마? 김동하 국장이 말한 요리사라는 게?’

나름 합리적인 결론에 다다랐을 때, 김동하 국장과 나머지 두 사람이 눈앞까지 와있었다.

“히야! 이거 이거, 선남선녀가 같이 있으니까 무슨 선이라도 보는 거 같군그래.”

시시껄렁한 농담부터 던지는 김동하 국장이 흐뭇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보다가 김명기 부장에게 말했다.

“자, 견우와 직녀가 만나게 오작교 역할을 다한 셈이니, 우린 이만 자리를 옮길까요?”

“좋죠. 어디로 모실까요? 그때 갔던 거기로 하실까요?”

“오, 거기 애들…큼. 그럽시다.”

“가시죠, 그럼. 아, 피디님. 우리 셰프님, 잘 좀 부탁드립니다.”

“아이고, 여기까지 판을 벌여줬는데, 당사자들이 어련히들 할까. 걱정은 그만 붙들어 매고, 가십시다. 우리 같은 꼰대들이 빠져주는 게 도와주는 거래도 그러네.”

“아! 그런가요? 그럼, 두 분. 다음에 뵙도록 하지요.”

대꾸할 틈도 없이 자기들끼리 주고받더니 휭하니 사라지는 두 사람. 그들을 보지도 않은 채 신현정 피디는 눈앞에 서 있는 남자의 이름을 불렀다.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서진영 씨?”

  ***

“재밌네.”

아무 말 없이 지켜만 보다가 김진숙 회장이 처음 한 말이었다. 박 실장도 같은 생각이었다. 네 사람이 모이는가 싶더니, 김동하 국장과 김명기 부장이 뒤로 빠졌다. 그리고 남은 건 두 명의 남녀. 건너편 자리에 앉아 있는 두 명을 보면서 김진숙 회장은 옅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다가 와인 잔을 빙빙 돌리며 물었다.

“사귀는 사이는 아닌 거 같고. 박 실장은 어떻게 생각해?”

타인에 대해 어지간하면 관심을 두지 않는, 평소의 그녀답지 않은 모습이었지만 박 실장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자신이 알고 있는 김 회장이라면, 분명 나름의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마시던 와인 잔을 내려놓으며 손가락 끝으로 안경을 살짝 추어올렸다.

“신현정 피디라고 방송가에선 꽤 유명한 여자입니다. 시사교양 프로그램에선 거의 원탑이라고 보셔도 될 겁니다.”

아무리 C 마트 정도 되는 대기업의 비서실장이라지만, 사소하다면 사소한 정보. 그런 것까지 알고 있다는 게 이상할 만도 하지만 김진숙 회장은 그저 빙그레 웃을 뿐이었다. 짐작 가는 바가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박 실장이 이어서 말하고 있었다.

“이하연이라고 대현 그룹 계열사인 대현 어페럴의 기획 이사가 있는데, 현재 서진영에게 관심이 있는지 계속해서 만남을 이어가는 중입니다. 그리고 신현정은 이하연의 오랜 선후배 관계로 친분이 무척 깊은 편인데, 얼마 전 만나는 자리에서 처음으로 서진영을 보게 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서진영한테 반하기라도 한 거래? 설마 삼각관계?”

김진숙 회장이 재밌다는 듯 물었지만, 박 실장은 여전히 진지한 어조로 대답할 따름이었다.

“삼각관계는 아니지만 비슷합니다.”

“응? 그건 또 무슨 소리야?”

“그날 서진영이 요리를 해준 것 같은데, 신현정 피디가 욕심이 생긴 것 같습니다.”

“출연 섭외?”

“그렇습니다.”

고개를 갸웃거린 김진숙 회장이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아깐 신현정이가 시사교양 쪽 피디라고 하지 않았나?”

“맞습니다. 두 달 전까진 그랬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예능국 쪽으로 옮겨가서 신규 프로그램을 기획 중인 걸로 알고 있습니다.”

“아하! 그러니까, 신현정이 우연히 만나게 된 서진영한테 꽂혀서 자신의 신규 프로그램에 섭외할 욕심을 가지게 됐다는 거네?”

묘한 눈초리가 되어 건너편 자리의 두 남녀를 바라보는 김진숙 회장이었다. 그러다가 진심으로 즐겁다는 듯 웃었다.

“호호호. 굉장히 적극적인 여자네. 우리도 저런 인재가 필요한데 말이야. 그래도 그렇지, 서진영에게서 뭘 봤기에 저렇게 따로 불러서 만나고 있는 걸까?”

그녀의 의문은 박 실장이 곧바로 풀어주었다.

“삼한그룹에서 끼어든 거 같습니다. KBC 김동하 국장의 요청에 의해 자리가 만들어진 거 같구요.”

“아, 그래서 김동하 국장이 직접?”

얼굴에서 웃음기가 걷히고 조금은 심각해진 얼굴론 건너편 좌석의 서진영을 빤히 쳐다보던 김진숙 회장이 피식 웃었다.

“그래도 그렇지. 직접 올 정도라고? 게다가 그치는 뭐야? 그 삽살이는 왜 여기 나타난 거지? 진 회장의 입김이라도 닿은 거야 뭐……. 아! 팔순 잔치!”

“예. 제 생각에도…….”

김진숙 회장이 급히 손을 들어 올렸다.

“잠깐만.”

한참 생각에 잠기던 김진숙 회장이 불쑥 내뱉었다.

“냄새가 나는데?”

톡. 톡. 톡. 테이블을 손톱 끝으로 두드리면서 김진숙 회장이 입꼬리를 서서히 끌어올렸다.

“그것도 달콤한 냄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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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더니 박 실장에게 시선을 던졌다.

“그래서 뭐? 아까 하려던 얘기가 뭐야?”

“아, 그게…….”

“됐어. 됐고. 근데, 참 많이도 알고 있네. 설마 시키지도 않았는데 뒤를 캔 거야?”

“회장님께서 궁금해하실 거 같아서요.”

“흐음, 딱히 그 정도는 아니었는데……. 지금은 좀 관심이 생기네. 아니, 그 이상이랄까.”

그녀는 와인 잔을 손가락으로 쓰다듬듯 만지며 중얼거렸다.

“뭘까? 대체 뭐가 그에게 사람들이 몰려들게 만드는 걸까?”

한참을 그렇게 생각에 잠겨 있던 그녀가 눈을 가늘게 해 보였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 지금으로선 ‘왜?’가 문제가 아니라 몰려들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한 거겠지?”

그녀가 박 실장에게 불쑥 물었다.

“그래서 그 프로그램이 뭐라고?”

“아직 확정된 건 사실상 없고, 윤곽만 드러난 상태입니다. 요리 쪽 프로인 걸로 확인됐습니다.”

“요리? 먹방……. 그런 건가? 아님 쿡방?”

이번에야말로 재밌다는 얼굴로 만면에 웃음을 지어 보이던 김진숙 회장이 박 실장에게 지시했다.

“한번 제대로 파봐. 뭐 하는 프로그램인지. 서진영에 대해서도 좀 더 알아보고.”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박 실장이 당장에 움직이려는지 핸드폰을 들고 잠시 자리를 뜨는 사이, 김진숙 회장이 중얼거렸다. 무척이나 재밌다는 듯이.

“스쿼시 한판 하려 왔다가 좋은 걸 찾았네. 뭐, 다이아몬드 원석인지 아니면 그냥 탄소 덩어리인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눈빛은 마치 마음에 드는 장난감을 발견한 꼬마의 그것을 닮아 있었다. *** 며칠 만에 만난 신현정 피디는 좀 어이없어하는 것 같은 눈치였지만, 그렇게 따지면 나는? 나야말로 황당하기 그지없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모르겠지만, 무슨 수수께끼라도 푸는 기분이다. 시간차가 있기는 했어도 양쪽에서 TV 출연을 제안해온 게 희한하다고 생각하긴 했는데, 그게 사실은 한군데였다니 웃기지 않냐고. 왜 이렇게 복잡하게 일을 하는 걸까 싶었지만, 일단 그 문제는 짚고 넘어갈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다.

“무슨 프로그램인지는 모르겠지만, 솔직히 제가 어울리기나 할지 의문입니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진심이었다. 그걸 또 짐작했는지, 저쪽에선 그럴 줄 알았다는 반응이었고.

“알아요. 서진영 씨 입장에선 당연할 겁니다. 그래도 저희 입장으로는 서진영 씨만큼 적합한 사람도 없다는 결론이에요.”

왜 하필 나인지는 묻지 않았다. 여기 나온 이상 그런 질문은 이미 의미가 없을 테니까. 대신 물었다.

“그래서 제가 뭘 해야 하는 겁니까?”

“그전에 먼저 드릴 말씀이 있어요.”

“예?”

잠시 머뭇거리던 신현정 피디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일단 사죄부터 드려야겠네요.”

“그게 무슨……. 말씀하는 의미를 모르겠습니다.”

“그러실 거예요.”

한 템포 쉬고 나서, 신현정 피디는 뭔가 초탈한 듯한 표정이 되어 털어놓았다.

“저번에도 말씀드렸다시피 원래 제가 책정할 수 있었던 서진영 씨의 출연료는 100만 원 정도였어요. 많아 봐야 200 정도일 테고요. 물론 상황을 봐가면서 조금씩 높여드릴 생각이긴 했지만……. 그럴 필요가 없어졌달까. 그래요. 속 시원히 말씀드릴게요. 여기 나오기 전 국장님과 잠시 얘길 나눴는데, 이번에 섭외하게 될 요리사의 출연료 협상을 400부터 시작하라고 하더군요. 상한선은 600이고요. 앞으로 또 어떻게 바뀔지 모르겠지만, 일단은 그래요.”

400만 원까진 예상했었다. 한데, 그새 또 뛰었다. 600만 원? 아니, 돈 벌기가 이렇게 쉬웠어? 것보다…….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어디 키다리 아저씨라도 있는 건가? 설마 강형식? 에이, 그럴 놈이 아니……지가 않지. 녀석이라면 그러고도 남아. 그렇긴 하지만, 지금 제 코가 석 자인 놈이 이렇게까지 움직였을 거 같지도 않고, 아직은 그런 인맥도 갖추지 못한 거로 안다. 아, 물론 사내에서 유일하게 강형식 편이라고 할 수 있는 장동일 상무를 통하면 못할 것도 없지만. 예감 상 그건 아닌 듯하다. 그럼 뭐냐고? 대체 누가 어떤 압력을 넣었기에……. 그러고 보니, 김동하 국장은 왜 나를 그렇게까지 섭외하려고 하는 걸까? 혹시 나한테 해설을 들을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걸 알아차린 걸까? 그건 기각. 어떻게 생각해도 불가능하니까. 하면 뭐지? 대체 왜? 신현정 피디의 말대로라면, 말 그대로 낙하산인 셈인데. 그러니까, 왜냐고? 머릿속이 헝클어지며 수많은 의문이 떠올라 어지러울 지경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후우, 그래. 어차피 마음먹고 나온 참이다. 결정이 이미 내렸고, 밀고 나가는 일만 남은 셈. 이제 와서 물러날 수도 없고, 그럴 이유도 없다. 돈에 눈이 먼 건 아니지만, 그게 돈이 싫다는 얘기는 또 아니니까. 생각이 정리된 건 아니지만, 그래도 나름 결론을 내리곤 신현정 피디를 바라보았다. 그러곤 웃으면서 물었다. 반쯤은 농담인 듯.

“그래서 얼마 주실 거죠?”

느긋한 목소리 때문이었을까? 한껏 긴장한 듯 보이던 신현정 피디 또한 한결 풀어진 표정이 되어 대답했다.

“우선 400으로 가면 어떨까 싶어요.”

아, 무슨 얘긴지 알겠다. 말이 상한선이지 600만 원을 받았다가 자칫 프로가 쪽박을 차거나 문제가 생기면 가장 먼저 날아가는 게 내 목이 될 게 뻔하다.

“다른 출연진들 출연료가 생각보다 짠 모양이네요.”

“구체적인 금액을 제 입으로 말씀드리긴 좀 뭐하지만, 대충 생각하시는 게 맞을 거예요.”

역시 생각대로다. 가장 안전한 쪽으로 가는 게 낫겠다는 판단이었다.

“그럼 역시…….”

“예. 현명한 결정이라고 생각해요. 어차피 몸값이야 시청률만 잘 나오면 알아서 올라가는 법이니까. 거기다, 광고가 어떤 게 붙느냐도 영향을 미칠 테고요.”

끝에 덧붙인 광고 얘기는 내가 모르는 의미가 있는 건가? 아, 복잡하다 복잡해. 돈 얘긴 여기까지만 하자.

“좋습니다. 그럼 그렇게 결정하죠.”

“잘 생각하셨어요.”

둘의 합치가 끝났으니, 이젠 본격적으로 일 얘기를 할 차례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미뤄질 수밖에 없었다. 까똑. 신현정 피디의 핸드폰으로 톡이 날아든 것이다. 한데, 톡을 확인하는 그녀의 입가에 미소가 어린다. 그러더니 날 한차례 쳐다보곤 핸드폰 자판을 두드린다. 뭐지? 일 얘기 하다말고 웬 톡을? 그렇게 안 봤는데, 공과 사를 구별하지 못하는 건가? 고개를 갸웃거릴 때, 신현정 피디는 핸드폰을 내려놓고 있었다. 한데, 아무 말도 없이 그저 웃으며 커피만 마시고 있다. 뭔가 하고 의아해할 때였다. 부르르르. 전화가 걸려왔다. 확인해보고야 이제까지 신현정 피디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신현정 피디가 눈짓으로 얼른 받아보라는 신호를 보내길래 조심스럽게 통화버튼을 누른 순간이었다.

- 꺄아아아아아아아아악!

흐억! 귀청이 떨어질 듯 터져 나온 비명……. 아니, 환호인가? 어느 쪽이 되었든 핸드폰을 귀에서 떨어뜨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다 들렸다.

- 어뜩해! 어뜩해! 완전 잘됐다아아아앙!

흥분한 건가? 나도 모르게 미소가 떠오르고 이내 번져나간다.

“하연씨?”

- 앙! 축하해요!!!

“고마워요.”

- 우리 이번 주말에 맛있는 거 먹으러 가요!

큭. 이번 주말에는 일해야 하는데.

“그건 좀…….”

- 아앙. 당신 너무 비싸. 대체 얼마면 살 수 있는뎅?

뭐야? 이거 어디서 들었던 거 같은데? 드라마에서였나?

“저 싸구렵니다.”

여기까지 말하곤 신현정 피디의 눈치가 보여서 고개를 돌리곤 속닥였다.

“하연 씨 하는 거 봐선 공짜로도 줄 수 있는데요.”

순간 수화기 너머가 조용해졌다. 그러더니, 또다시 터지는 비명.

- 꺄아아아아아아아아!

“큭.”

다시금 급습할 줄 몰랐기에 직방으로 고막을 때리고 말았다.

- 그 말 잊으면 안 돼! 저얼대! 절대! 잊으면 안 돼요! 알았죠! 앙! 자기는 잊어도 난 죽을 때까지 안 까먹을 테니……. 아우, 녹음해놓을걸!

“예, 예. 알았으니까, 그만 흥분하시고…….”

- 아 나 좀 봐. 지금 일하는 중이었죠. 나중에 저녁에 전화할게요. 그럼, 계약 잘하시고요.

그렇게 전화를 끊고 나서 시선을 들어보니, 맞은편에서 신현정 피디가 싱긋이 웃고 있다. 아, 쪽팔려. 이럴 땐 얼른 일 얘기로 돌아가는 게 좋겠다 싶어서 물었다.

“그래서, 큼……. 제가 뭘 하면 되는 거죠?”

신현정 피디는 다 안다는 얼굴로 대답했다.

“크게 어렵진 않아요. 굳이 말하자면, 평소 하던 대로 하면 된달까. 지난번에 바에서 보여주셨던 모습만 그대로 방송에 나가도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게 될 거예요.”

“일단 요리 프로인 건 맞는 거죠?”

“예.”

“그렇다는 건 요리만 열심히 하면 된다는 거고요?”

“글쎄요. 그건…….”

씨익 웃으며 신현정 피디가 대답했다.

“서진영 씨에게 달렸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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