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6. 부업 (1) (36/204)

#36. 부업 (1)2020.12.23.

조금 늦은 시간이긴 한데, 아직 자고 있지는 않을 거란 생각에 전화를 했다.

“뭐하냐?”

- 이제 막 들어왔다. 와아……. 진짜 피곤해 죽을 거 같아.

강형식의 목소리에선 농담이 아니라 피곤이 뚝뚝 떨어지는 것 같았다.

“무슨 일을 무식하게 그렇게 해? 너 그러다 클난다.”

- 그동안 많이 놀았으니까, 이제라도 해야지.

“그렇게 말하면야.”

- 근데 왜? 아, 혹시 엊그제 말한 거 때문에?

“그래.”

- 내가 갈까? 아님 올래?

“피곤할 텐데, 뭘 그래? 그냥 전화로 얘기하면 되지.”

- 스톱! 말하지 마!

“…….”

뭘 또 저렇게 다급해 하는 건지. 아주 그냥 숨넘어가겠다. 그러더니 한다는 소리가…….

- 내가 지금 네 얘길 들으면, 이제 막 피어나려던 의욕이 확 꺾일 거 같은 예감이 들거든. 그러니까, 얼굴 보고 얘기하자. 오케이?

“참네. 그럼 뭐가 달라지냐?”

- 달라져. 그러니까, 내가 갈 테니까 나와.

“됐고. 차라리 내가 갈게. 어차피 나 아직 밖이거든. 그래 봐야 저택 안이지만.”

- 잘됐네. 그럼 차고로 와. 안 그래도 오늘 간만에 차들 좀 만져주려던 참이거든.

어이가 없어서 한마디 했다.

“미친. 간만에 일찍 끝났으면 쉴 일이지.”

- 흐흐흐. 나한텐 이게 쉬는 거거든. 어쨌든 글로 와라. 알았지?

전화를 끊고 나서 혀를 내둘렀다. 죽을 것 같다는 놈이 차를 뜯고 기름칠하면서 쉰다고? 일종의 장난감인 건가? 흠, 장난감치곤 좀 비싼데. 아니 많이 비싼데……. 고개를 내저으며 차고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 치이익! 셔터가 내려갔다곤 하나 난방시설이 되어 있지 않은 차고에서 맥주를 따는 소리가 울려 퍼지자 괜히 몸이 으슬으슬 춥다.

“여기 한데나 마찬가지인데, 꼭 여기서 마셔야겠냐?”

녀석이 건네주는 맥주캔을 받으며 묻자, 강형식은 그런가 하는 눈빛이 되더니 갑자기 눈을 반짝였다. 그러곤 벌떡 일어나 한쪽으로 갔다가 목장갑을 들고 나타난다.

“나 참, 이거 끼고 마시라고?”

“적어도 손은 안 시릴 거 아냐.”

“야이 씨. 손만 안 시리면 뭐해? 차가운 맥주가 몸속에 들어가면……. 됐다, 그냥 마시지 뭐. 차리리 후딱 마셔버리면 알콜 때문에 몸에 열나겠지.”

“크크큭. 그건 또 그렇네.”

좋단다. 난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맥주를 홀짝거렸다. 크으! 추운데 시원하다. 맥주를 연거푸 마시곤 몸을 부르르 떨기를 몇 차례. 그냥 했던 말인데 정말 몸이 후끈거리는 느낌이 들었을 때 녀석을 불렀다.

“형식아.”

“야야, 말투 왜 그래? 무섭잖아, 인마! 그냥 평소대로 해. 괜히 여린 사람 마음 후빌 생각 말고.”

너스레 떨기는. 아마 녀석은 내 대답을 예상…… 아니 확신하고 있을 거다. 그러니 저러는 거겠지. 하아, 대체 나한테 뭘 기대하는 건지. 정말 저 녀석 눈에는 내가 같이 일해도 될 정도로 능력이 있는 거로 보이는 걸까?

“길게 말 안 한다.”

“…….”

“제안은 고마워.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내 평생 이렇게 좋은 제안이 있을까 싶을 정도여서 너무 고맙다. 무엇보다도 그만큼 네가 날 생각해줬다는 게 기쁘기도 하고.”

이미 이정도 했으면 대답을 들은 거나 진배없기에 녀석은 어딘지 모르게 실망한 기색이었다. 그래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다. 사람은 누구나 그에 걸맞은 물이라는 게 있으니까. 자기 처지나 능력도 생각하지 않고 아무 곳에나 뛰어들면 헤엄도 치기 전에 잡아먹히거나 숨도 못 쉬고 가라앉는 수가 있다. 내가 아무리 모지리라도 그 정도는 알고 있다.

“그래도 역시 안 된다고 생각해.”

“그러냐?”

“응. 속상하긴 한데, 인정할 건 인정해야지. 너랑 난 노는 물이 달라.”

“……인정하고 싶지 않다고 하면?”

“욕심이라고 말해주고 싶다. 너한테나 나한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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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없이 날 쳐다보기만 하는 강형식이 어쩐지 쓸쓸해 보였다. 그래서 확실히 말해줬다.

“마! 내가 어디 가냐? 같이 일하는 건 좀 그렇다는 거지.”

“그래.”

“그리고 혹시 아냐? 나중엔 또 어떻게 될지.”

“……?”

“어디까지나 지, 지금…… 그렇다는 거지.”

할까 말까 하다가 덧붙였더니 녀석이 눈에서 레이저라도 쏠 기세다. 나 참, 가능성이라곤 1%? 아니 0.5%나 될까 말까 한 얘긴데 저런다.

“그래, 뭐! 살다 보면 그런 날도 오겠지! 오케이.”

캔맥주를 부딪쳐오는 강형식을 보다가 웃고 말았다. 그나저나 뭔 사업을 하기에 나까지 끌어들일 생각을 한 거람? 순수하게 궁금해져서 물었다. 그랬더니 녀석은 기다렸다는 듯이 얘기 보따리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아놔, 안 물어봤으면 어쩔 뻔 했냐? 아주 그냥 폭우에 댐 방류하듯이 콸콸 쏟아내는구나.

“……일단 브랜드는 따로 가져가기로 했고, 그 때문에 요즘 시장 조사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빠. 조만간 중국 쪽으로 넘어갔다 올지도 모르겠고.”

“잘됐네.”

솔직히 들어도 알아들을 수 있는 얘기가 10분의 1 아니 100분의 1도 안 돼서,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이 없었다. 그저 맞장구나 쳐주는 게 다였다.

“너는 요즘 어떤데? 주방장 할아버지가 막 괴롭히고 그러지 않아?”

고윤수 주방장님과는 내가 모르는 사정이 있는지, 가끔 저렇게 친밀하게 부르는 강형식이었다.

“주방장님이 좀 괴팍한 부분이 있긴 하지. 그래도 잘해주신다.”

죽을 때까지 다 갚아도 갚을 수 있을지 모를 정도지만, 그런 말은 하지 않았다. 그랬다간 왠지 손발이 오그라들 거 같기도 하고. 솔직히 아까 녀석의 제안을 거절할 때도……. 으으, 돌이켜 생각하니까 얼굴이 다 화끈 달아오른다. 아, 이건 맥주 때문인가?

“힘든 건 없고?”

“전혀.”

고개를 내젓다가 고민했다. 고윤수 주방장님이 제안하셨던 일……. 얘기할까 말까. 자기가 제안한 건 거절했으면서 TV 출연은 받아들인 걸 알면 혹여 서운해하진 않을까?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녀석도 다 털어놓는 마당에 나만 숨기는 건 왠지 좀 음흉스럽잖아.

“어쩌면 조만간 TV에 출연하게 될지도 몰라.”

순간 신현정 피디가 떠오르는 건 또 무슨 까닭일까. 그쪽도 TV 출연 문제로 만나자고 했으니…… 이러다가 두 군데 출연하게 되는 거 아냐?

“오오! 서진영! 방송 탄다 이거지? 그러다 스타 되고 그러는 거 아냐?”

“스타는 무슨.”

“그래서 어떤 프론데?”

“아직 몰라.”

“그래? 야, 그러지 말고 내가 아는 동생이 있는데 한번 만나볼래?”

“응? 아는 동생?”

“그 녀석, 어릴 때부터 알던 사이거든. 요 몇 년 잘나가던 아이돌인데…….”

나하곤 전혀 상관없는 세상의 얘기. 아무리 내가 TV에 출연하게 된다고 해도 만에 하나라도 마주칠 가능성은 전혀 없는 그런 사람의 얘기였지만, 그래도 웃으면서 들었다. 어떻게든 나한테 도움이 될까 싶어서 저러는 걸 아니까. 그렇게 강형식과 함께 떠들며 서로의 근황, 그리고 장래에 관해서 대화를 나누는 동안 바닥에는 비어버린 맥주캔이 하나둘 쌓여갔다. *** 미쳤다, 진짜.

“어우, 머리야.”

어젯밤 대체 얼마나 마신 건지. 필름이 끊긴 건 아니고, 드문드문 기억이 나는 거로 봐선 한계치까지 마신 건 아닌 것 같고.

“끙.”

강형식이 그냥 자기 방에 가서 자자고 하는 걸 뿌리치고 어찌어찌 숙소로 돌아온 것까진 기억나는데.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기도 쉽지가 않다. 숙취 때문에 욱신거리는 머리통은 둘째치고 삭신이 다 쑤신다. 오늘 근무를 어떻게 하려고 그런 건지. 진짜 대책 없네. 그나마 다행인 건 워낙 습관이 들어서 그런지 새벽 5시에 잠이 깼다는 점이랄까.

“뭐야, 뭐 이렇게 많아?”

핸드폰을 확인해보곤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부재중 통화만 십여 통이고, 쌓여있는 톡은 스무 개가 넘는다. 일단 톡부터 확인했다.

- 뭐해요?

- 일 아직 안 끝났어요?

- 톡 아직 확인 안 했네?

- 지금 뭐죠?

- 앙, 왜 읽지도 않앙!

- 톡 안 되면 전화라도 주든가!

- 생각해보니까, 목소리 들은 지도 좀 됐당.

- 전화해용∼

- 아앙, 목소리 듣고 싶은뎅.

- 저기 서진영 씨?

- 서진영?

- 야!

- 서진영, 전화해!

- 아앙∼ 전화줘요오오오.

- 헐. 술 마신다며?

- 진짜 이 남자들이!

- 치사하게 나만 빼놓고 그러기예요?

- 엄청 마신 거 같던데 피곤할 테니, 내일 일어나면 연락 줘요.

- 꼭 줘요.

- 잘 자요.

내가 헐이다. 아주 그냥 폭탄을 날리셨구만. 큭큭. 그 와중에 톡 안 되면 전화하란 건 뭐임? 보통은 반대 아닌가? 아무래도 나랑 연락이 안 되니까 형식이한테 전화를 걸었던 모양인데. 음, 근데 왜 나한테 안 하고……. 어라? 부재중 전화에 온통 이하연 이름이 찍……. 응? 이건 또 무슨! 이하연 말고 또 하나, 익숙한 이름을 발견하고 놀라서 눈을 깜빡거리고 있을 때였다. 부르르르. 어우 야, 놀래라! 들고 있던 핸드폰이 강하게 진동하는 바람에 놀라서 떨어뜨릴 뻔했다. 이렇게 세게 울리는데 어떻게 어젠 그렇게 못 받았을까? 혀를 차면서 얼른 통화버튼을 눌렀다.

“여보…….”

- 야! 서진영!

아이고, 기차 화통이라도 삶아 먹었나. 뭔 목소리가 이렇게 크담.

“누나가 웬일로 이 시간에 다 연락해? 그리고 어젠 왜 전화했어? 무슨 일이라도 있…….”

- 미친! 지금 장난해? 먼저 전화한 게 누군데!

수연이 누나가 쏘아대는 목소리에 기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윽, 어제 내가 전화를 했던 모양인데.

- 그래 놓고선, 응! 말하다가 끊어? 그것도 막 울면서 싸랑해, 싸랑해! 돌았지, 너? 내가 걱정이 돼, 안 돼?

눈앞이 하얘진다. 도대체 어제 내가 무슨 짓을 한 거냐고. 다른 건 다 기억이 나는데, 이건 또 왜 기억이 안 나는 건지. 그런데도 막 그려진다. 머릿속에선 최하 10년짜리 이불킥 감. 어쩌면 내 이십 대 최후의 흑역사일지 모를 장면들이 펼쳐지고 있었다.

- 잘못했어, 안 했어? 하아, 내가 진짜 밤새 걱정하면서 전화를 몇 번이나 한 줄 알아? 아씨, 곧 있으면 애들 시험인데……. 너 때문에 우리 애들 죄다 시험 망치면 진짜 죽을 줄 알아!

“미……안.”

- ……응? 그, 그래. 미안하다니까, 뭐. 내가 봐준다.

순순히 잘못을 시인하자, 그게 또 낯설었던 걸까. 수연이 누나의 목소리가 한결 부드럽고 낮아진다. 그러더니 물어왔다.

- 모레가 엄마 생일인 건 알지?

“당연하지.”

- 그때 올 수 있어?

“갈 거야.”

- 진짜?

“그렇다니까.”

- ……꼭 와.

아, 미치겠다. 딱 두 글자다. 근데 저 말을 듣는 순간 울컥한다. 저 말 안에 다 들어 있는 거 같아서. 수연이 누나가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리고 미안하다. 밤새 얼마나 걱정했을까. 내가 누나라도 그랬을 거다. 만일 수아가 술 취해서 전화하다가 끊고서 더 이상 연락이 안 된다면? 당장에 뛰쳐나가 밤새도록 거리를 헤매며 수아를 찾아다니겠지. 어쩌면 누나도 그랬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차마 물어볼 용기가 나질 않았다. 대신 얘기했다.

“다신 안 그럴게.”

이미 다 끝낸 얘기를 다시 꺼내서일까. 수연이 누난 멋쩍게 대꾸했다.

- 그래. 그러지 마. 진짜 얼마나 걱정했는데.

목소리 끝이 살짝 떨리는 게 어젯밤의 감정이 남아있는 모양이다. 그래서 더 미안해졌을 때, 누나가 덧붙였다.

- 그래도 엄마랑은 모르니까, 걱정하지 말고.

“응.”

- 출근할 거지?

“그래야지.”

- 끊어. 전화비 많이 나와.

“응.”

- 나 이제 잘 거니까, 얼른 씻고 나가봐. 근데 밥은 잘……. 아니다. 나중에 또 전화해.

그걸로 통화는 끝이었다. 아마도 밥 잘 챙겨 먹고 다니라고 말하려다가 내가 지금 어디서 일하는지 떠올리곤 말을 삼킨 걸 테지.

“아우, 내가 진짜…….”

뭔 생각으로 그런 건지. 한 손으로 머리통을 붙잡고 끙끙거리다가 침대를 벗어났다. 그러면서도 몇 번이나 고개를 내저었다. 몇 걸음 되지도 않는 거리에 있는 화장실까지. *** 좀처럼 가시지 않는 두통 때문에 점심 식사 때까지 고생하고 난 후였다.

“그러니까 뭔 술을 그렇게 마셨냐?”

나한테서 사정을 들은 준석이 형이 혀를 끌끌 차고 있었다. 물론 구체적인 얘기는 하지 않았다. 대충 강형식이랑 밤새 술 마셨다는 정도로만 말했을 뿐. 당연한 일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어젯밤 일은 내 평생 쌓아 올릴 흑역사 중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들 테니까. 다행히 김진호 셰프도 어느 정도는 눈치챈 거 같은데, 별 얘기는 하지 않았다. 어제 만취 상태까지 술을 마셨다곤 해도 일을 어수룩하게 하진 않았기 때문이지만. 그래서 안심하고 있었는데…….

“서진영.”

“예?”

점심 식사가 끝나고 잠깐이라도 쉴까 싶어서 숙소로 향하려던 차에 김진호 셰프가 다가왔다.

“받아라.”

건네주는 쪽지를 받고 보니 딱 봐도 전화번호로 보이는 숫자들이 적혀 있다. 그 밑에는 ‘고구려 호텔 스카이라운지 7시’라고 쓰여 있었고. 뭔가 해서 김진호 셰프를 바라보니, 전해주신다.

“주방장님이 바쁘셔서 대신 전해달라고 하시더라.”

“……?”

“오늘 저녁엔 빠져도 된다. 약속된 시간에 가면 담당 PD를 만날 수 있을 거라고 하더군.”

“아!”

무슨 말인지 알아들은 난 김진호 셰프에게 고개를 숙이곤 돌아섰다. 하필 오늘이냐? 어우, 머리야. 음주 후에 두통약은 안 좋다고 하던데, 아무래도 오늘은 그렇게라도 해야겠다. 이 상태로 나가면 될 일도 안 될 거 같아서. 음, 근데 이 번호……. 어째 본 듯한데. 아, 몰라. 머리도 아파죽겠는데. 나가보면 알겠지. 숙소로 향하는 내 입에서 절로 앓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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