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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제안 (1) (33/204)

#33. 제안 (1)2020.12.16.

따지고 보면 별일 아니다. 기껏해야 국 한 그릇 문제일 뿐. 이게 그렇게 큰일인가 물으면 백이면 백 웃으면서 고개를 내젓고 말 터다. 하지만 지금 방 안에는 차갑다 못해서 서리가 낄 정도로 시린 공기가 흐르고 있었다. 물론 이해는 간다. 삼한그룹 정도면 옛날로 치면 하나의 왕국이나 마찬가지고, 그렇게 따지면 장희경 장관은 왕비라고 할 수 있었으니까. 그래도 이건 좀 아니다 싶었지만, 상대방이 권력에 대한 심각한 위협이라고 생각하면 그걸로 끝이라 할 수 있다. 어쩌면 예전부터 김진호 셰프를 못마땅해하던 장희경 장관이 이걸 꼬투리로 그를 내보내고 싶었던 걸지도 모르고. 모르긴 몰라도 고윤수 주방장도 눈엣가시일 게 뻔하다. 마음 같아선 싹 다 내보내고 주방을 자기 사람으로 채우고 싶겠지. 어디 주방만 그럴까. 집안 곳곳에 자기 입김이 닿는 사람으로 채워 넣고 싶을 테다. 그래도 설마 겨우 소고기뭇국으로 이런 사달을 일으킬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당연히 말도 안 되는 억지고, 고윤수 주방장을 생각해서라도 어지간하면 버티고 싶었지만…….

“삼한그룹 내 누구도 그런 불측한 마음을 먹은 사람은 없을 겁니다. 혹여 저 때문에 마음이 상하셨다면 제가 그만두면 될 일. 그걸로 마음을 푸시지요.”

더러워서 이젠 못 해 먹겠다는 생각으로 이렇게 얘기한 건 아니었다. 자신이야 여길 나가도 오라고 하는 데가 많은 데다가, 그게 아니라도 따로 레스토랑 하나쯤 여는 건 일도 아니니까. 하지만, 나머지 주방 식구들은 다르다. 이제껏 자신을 믿고 따라와 준 준석이나 요리사는 아니지만 여태 함께 일해 온 안성댁과 혜순이는 다르다. 특히 안성댁과 혜순이는 사실상 강 회장의 죽은 전처인 마나님 사람이라고 할 수 있으니, 장희경 관장으로선 내보내고 싶은 사람 일 순위라고 할 수도 있었다. 거기에 더해 이번 일을 벌인 거나 다름없는 서진영은 이제 막 주방에 들어와 자리를 잡고 서서히 날개를 펴기 시작한 터였다. 무엇보다도 고윤수 주방장에게까지 여파가 미치는 게 두려웠다. 물론 고윤수 주방장으로선 여기가 아니라도 발붙일 곳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강 회장과의 관계를 생각했을 때 이런 식으로 이곳을 떠나면 불명예도 그런 불명예가 없으니까 말이다. 이 모든 사람을 자기 한 명 그만두는 거로 지킬 수 있다면……. 장희경 관장도 이 정도까지가 이번 일로 몰아붙일 수 있는 한계임을 알 것이다. 그러니까 저런 말을 하는 거겠지.

“그래요? 그럼 그렇게 하세요.”

후처라곤 하지만, 그래도 재벌가인 금마 그룹의 방계인 제도 철강의 차녀라 그런지 결단이 대단하다. 어지간한 사람이면, 이 정도로 고개를 숙였으면 다른 사람들 눈치를 봐서라도 아량을 베풀 만도 한데.

“다시 한번…… 죄송합니다.”

그래서 김진호 셰프도 담담히 받아들였다. 자신의 선에서 이번 일을 깔끔하게 매듭짓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오늘부로…….”

문밖이 살짝 소란스러워지는가 싶더니, 노크 소리가 들려온 것도 그때였다.

“무슨 일이지?”

장희경 관장은 자기 비서이거나 집에서 부리는 하인쯤이라고 여기곤 당연한 듯 물었다. 하지만, 들려온 말은 생각과 달랐다.

“큼, 고윤수입네다.”

장희경 관장의 한쪽 눈썹이 꿈틀하는 듯 보였다가 이내 제자리를 찾는 걸 보면서 김진호 셰프는 눈을 감았다.

“들어오세요.”

문이 열리고 고윤수 주방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곤 김진호 셰프에겐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장희경 관장에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잘 오셨네요. 안 그래도 말씀드려야 했는데.”

장희경 관장의 입가엔 어쩐지 비웃는 듯한 미소가 살짝 걸려 있었다. 그걸 보았는지 어쨌는지는 몰라도 고윤수 주방장은 그저 고개만 주억거리며 대꾸했을 뿐이다.

“그렇습네까? 기럼 말씀해 보시라요.”

“그전에, 고 주방장님께서 여기엔 어쩐 일로 오셨는지?”

장희경 관장에 대해선 재벌가들의 속사정을 알 리 없는 일반인들이야 그저 조용히 남편을 내조하는 여자로 인식하고 있었지만, 재계에선 후처임에도 불구하고 꽤나 콧대 높기로 유명했다. 그런 그녀가 이나마라도 고윤수 주방장에게 공대 아닌 공대를 하는 건 다 강 회장과의 관계 때문이었다. 이제껏 눈엣가시처럼 여기면서도 쫓아내지 못한 이유와 일맥상통한다고 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혹시라도 자신이 놓치는 게 있나 싶어서 본격적으로 몰아붙이기 전에 물어본 거였다. 달리 다른 이유가 있어서 이곳을 찾았나 해서.

“내래 주방일이 아니면 여기 올 이유가 있갔습네까? 듣자 하니 아침에 나간 국이 정해딘 것과 달랐다고 해서 사모님께서 화가 많이 나셨겠구나 해서 이렇게 달려온 거이 아니겠습네까?”

“호호호. 찾으시는 데가 워낙 많아 주방에도 거의 못 나오시는 분께서 저까지 신경 써 주신다니, 그것참 감사할 일이네요.”

“회장님께서 주방을 맡길 때는 가족들 건강을 신경 써달라는 거 아니겠습네까? 마땅히 해야 할 일이디요.”

“그래요? 그럼 이제 어쩌실 생각이신가요? 아랫사람이 잘못을 저질렀으니 윗사람으로서 책임을 지시겠다는 얘긴가요? 어떻게요? 설마 옷이라도 벗으시겠다는 건가요?”

그럴 가능성이라곤 1%도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제법 강하게 나오는 장희경 관장이었다. 한데, 고윤수 주방장의 생각은 또 달랐던 모양이다.

“기걸로 이번 일이 없던 일이 된다면야, 내래 기렇게 못할 것도 없디요.”

“주방장님!”

국 하나 바뀐 게 뭐 그리 큰일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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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진호 셰프는 안 그래도 속으로 웃기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차였는데, 일이 이렇게까지 되고 나니 절로 목청이 커지고 말았다. 그러든가 말든가, 장희경 관장이나 고윤수 주방장은 서로를 빤히 응시하며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딱히 신경전을 벌이는 것 같지도 않았지만, 방 안에 무겁게 내려앉은 정적은 오래갔다. 그 깨질 것 같지 않던 정적을 깨뜨린 것은 고윤수 주방장이었다. 여전히 평온한 얼굴로 장희경 관장을 바라보던 고윤수 주방장이 특유의 평안도 사투리로 말했던 것이다.

“관장님도 아시디 않습네까? 내래 회장님께 갚디 않으면 안 될 은혜를 입은디라 이러고 있디만, 솔딕히 말하믄 회사가 망하든 집안이 엉망이 되든 관심없습네다. 막말로 이 나이에 뭐이 아쉬울 게 있겠습니까? 일 없습네다. 관장님……. 아니 사모님께서 원하시는 게 뭔디야 이 무지렁이 늙은이가 뭘 알겠습네까만 이 정도 했으면 그만 봐주시라요. 아새끼들이야 천지 분간 못 하는 간나들 아니겠습네까. 기러니끼니 마음 넓은 사모님께서 이 늙은이 모가지 하나만으로 만족하시디요?”

옆에서 얘기를 듣고 있는 내내 김진호 셰프의 얼굴이 일그러진 채 펼칠 줄을 몰랐다. 평소에 어지간한 경우가 아니면 표정이 잘 바뀌지 않는 그로서는 참 보기 드문 일이라 할 수 있었다. 그에 반해 장희경 관장의 얼굴은 시시각각 바뀌고 있었다. 때론 웃는 것 같기도 했다가 또 때론 날카롭게 눈을 빛내는 것 같기도 했다가, 또 어떤 땐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살짝 비웃는 듯한 느낌도 들었다. 그러길 몇 번이나 반복하다 고윤수 주방장의 말이 다 끝나자, 깍지를 낀 손을 까닥거리며 가만히 상대방을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장희경 관장이 툭 하고 내뱉듯 말했다.

“좋아요. 다른 분도 아니고 주방장님인데 그 정돈 들어드려야죠. 이러고저러고 할 것 없이 오늘 일은 없던 일로 하지요.”

더 이상은 오늘 있었던 일을 가지고 왈가왈부하지 않겠다는 얘기. 다시 말해 고윤수 주방장도, 김진호 셰프도 그만둘 필요가 없다는 말이었다. 결과적으로 보자면 좋은 일이지만, 한국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아는 일이었다.

“뭐, 아실 만큼 아시는 분이시니, 앞으로 이런 일이 또 일어나지 않게 해주실 거라 믿고요. 단, 그전에 제게도 좀 알려주셨으면 좋겠네요. 주방에서 국을 끓이든 죽을 끓이든 마음대로들 하되, 적어도 오늘 반찬이 뭐가 나오는지 쌀독은 비지 않았는지 정도는 알아야겠어요. 이래 봬도 제가 한 집안의 살림을 관리해야 하는 안사람이니까요?”

고윤수 주방장의 표정은 크게 바뀌지 않았지만, 김진호 셰프의 얼굴은 다시 한번 무너지고 있었다. 장희경 관장의 말인즉 주방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작은 것 하나까지 보고하라는 얘기였다. 강 회장이 고윤수 주방장을 거의 모셔오다시피 한 까닭에 이제껏 주방의 문제에 관해서 누구도 터치하지 않아 왔는데, 그 말대라면 주방은 형식상으로나마 이제 장희경 관장의 손아귀에 있게 되는 셈이었다. 변화치곤 너무 큰 변화였는지라 김진호 셰프로서는 좀처럼 받아들이기 어려울지 모른다. 하지만 고윤수 주방장은 담담하기까지 한 태도로 받아들였다.

“기러디요.”

짝!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장희경 관장이 손뼉을 부딪쳤다. 그러곤 당연한 걸 당연하게 처리했다는 듯 얘기했다.

“좋아요. 두 분 다 나가들 보세요.”

말을 마치기 무섭게 돌아가는 회전의자. 창밖으로 펼쳐진 정원으로 시선을 던진 채 더 이상 두 사람에겐 관심이 없다는 걸 노골적으로 표시하는 장희경 관장을 두고 두 사람은 방을 나올 수밖에 없었다. *** 아 진짜, 개떡 같네. 뭐 이런 경우가 다 있냐? 국에 고춧가루 좀 뿌렸다고 이런다는 게 말이나 되나? 황당해서 말도 잘 나오지 않는다.

“형! 진짜 너무한 거 아니에요?”

아니 말은 잘 나온다. 욕이 나오지 않는 거지.

“기다려봐. 아직 무슨 일인지 모르잖아.”

모르긴 개뿔. 아까 아침 식사시간에 사모님의 눈빛을 못 봐서 저런 얘기를 하지. 진짜, 이 형은 낙천적인 건지 아니면 둔감한 건지. 난 주먹을 들어 이빨로 물어뜯으며 초조한 심정을 달랬다. 그리고 주방 문 쪽으로 시선을 거두지 않은 채 김진호 셰프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조용히 미끄러지며 문이 열린 것도 그때였다. 한데, 열린 문 사이로 들어온 것은 기다리던 사람이 아니었다.

“뭣들 하는 거이네? 식사 준비 안 하네?”

고윤수 주방장님이셨다. 그 뒤로는 김진호 셰프가 서 계셨고.

“지, 지금 하고 있습니다!”

준석이 형이 외치곤 내 팔뚝을 잡아당겨 안쪽으로 끌고 들어갔지만, 여전히 내 눈은 김진호 셰프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그러든가 말든가 김진호 요리장은 평상시처럼 저녁 메뉴를 검토하고 계셨지만. 별일 없었던 건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이내 사모님의 얼굴을 떠올리곤 몸을 떨었다. 어우씨, 진짜 꿈에 나올까 무서운 눈빛이었는데……. *** 혹시라도 무슨 일이 벌어질까 전전긍긍하면서 저녁 식사를 준비했다.

“왜 그래? 설마 아까 일 아직도 신경 쓰는 거야?”

이럴 땐 눈치가 빠른 준석이 형. 아니, 그냥 내가 너무 티가 많이 나는 건가? 그렇지만, 그게……. 차라리 내가 혼이 나는 거라면 상관없는데, 혹여 나 때문에 김진호 셰프가 불이익을 당했다면 그땐 진짜 참을 수 없을 거 같으니.

“좀 마음에 걸리네요.”

“아유, 이 쫌팽아. 내가 말했잖아. 그냥 사모님께서 셰프하고 할 얘기가 있어서 불렀을 거래도. 이번에 할 김장 규모라든가, 연말에 있을 파티 얘기라도 했겠지. 그러다가 오늘 아침 국이 맛있었다고 한마디 했을지도 모르고.”

“그럼 다행이지만.”

저녁 국인 도미 매운탕을 끓이면서 슬쩍 바라보니 김진호 셰프의 모습은 평상시와 다른 바 없다. 고윤수 주방장님은 어딘가로 가셨는지 보이질 않으셨고. 진짜 별일 없는 건가? 아, 모르겠다. 언제 내가 그런 것까지 신경 썼다고. 쯧, 바닥을 박박 기기도 벅찬 판에 무슨. 내 할 일이나 잘하자고 생각했을 때였다.

“어?”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동안 국이 끓어서 넘치려 하고 있었다. 화들짝 놀란 나는 서둘러 불을 줄이곤 국자를 들었다. 그러곤 국을 조금 떠서 접시에 옮겨 맛을 보았다. 음, 괜찮은 건가? 비린내는 확실히 잡힌 거 같긴 한데, 대신 살짝 짠 거 같기도 하고.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준석이 형을 불렀다.

“형, 맛 좀 봐주면 안 돼요?”

“자식이! 맛이야 항상 네가 봐왔잖아?”

“그래도요.”

“줘봐.”

빙글거리며 간을 봐주는 준석이 형.

“캬! 쥑이네!”

“괜찮아요?”

“고럼. 누가 끓인 건데.”

다행이란 생각을 하며 국자를 들었을 때, 앞치마에 넣어둔 핸드폰이 진동했다. 부르르르. 괜히 눈치가 보여서 안 받고 있으니까, 준석이 형이 툭 하고 어깨를 밀었다.

“잠시 담배라도 한 대 피우고 와.”

“어, 나 담배 안 피우는…….”

“바람 좀 쐬고 오라고.”

눈짓으로 앞치마를 가리키는 준석이 형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곤 얼떨결에 주방을 나왔다. 후아, 바람 차네. 그런데 가슴은 뻥 뚫리는 기분이다.

“여보세요?”

- 나다.

이따위로 건방지게 통화를 시작할 사람은 세상천지에 한 사람밖에 없었다.

“무슨 일인데?”

강형식이었다.

- 와아, 이러기야? 친구라곤 하나밖에 없는데, 손가락 다 민망하게 연결되자마자 끊으란 투네?

“통화버튼 누르는 게 뭐 그리 힘들다고. 하아, 진짜 바빠서 그래. 그리고 인마! 너나 친구가 나밖에 없지.”

- 얼씨구. 너 나 말고 제대로 된 친구가 있기나 하냐?

대꾸도 안 했는데, 코웃음이 들려온다.

- 내가 인마, 그래도 삼한그룹 제품기획실장이다. 그런데 사람 한 명…….

“뭐야? 내 뒷조사라도 한 거야?”

- 뒷조사는 무슨. 제대로 된 SNS 계정 하나 없고, 평소 자주 통화하는 사람도 없는 것 같고. 중학교 때부터 일만 한 놈이면 뻔할 뻔 자지.

헐. 듣고 보니까 그럴 법도 한데. 괜히 열 받네. 그래서인지 통화는 목소리가 한층 거칠어졌다.

“그래서 무슨 일로 전화한 거야? 날 얼른 들어가 봐야 하니까, 얼른 말해.”

- 새끼, 까칠하긴. 마! 나도 바쁘거든? 조금 있다가 임원들하고 룸살롱도 가야 하고, 어쩌면 2차로 바에 가서 밤새 술 마실지도 몰라.

“그걸 말이라고. 술 마시는 게 일이냐?”

- 그럼 나랑 바꾸든가?

미쳤냐? 그런 가시방석으로 자청해서 올라가게. 그냥 말이 그렇다는 거지.

“일하다 말고 나온 거야. 얼른 할 말이나 해.”

어디선가 찬바람이 확 불어와서 옷깃을 여미며 말하자, 그제야 강형식이 본론을 꺼내놓는다. 근데, 이게 또……. 사람 당황하게 만들고 있다.

- 너 나랑 일 한번 안 해볼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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