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대박 냄새 (3)2020.12.06.
느닷없다고 말할 수만은 없다. 누구나 그렇지 않을까. 핸드폰 안에 저장된 이름 중에는 일 년에 한 번 통화할까 말까 싶은 이들도 있는 반면, 하루가 멀다고 연락하는 이들도 있게 마련이니까.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이하연이 지금 신현정과 통화를 하고 있는 것도 이상한 일이라고만은 할 수 없는 것이다. 다만……. 오랜만에 만났다고 하지 않았나? 이하연이 유학을 다녀오고 난 뒤 처음 만난 거라고 들었던 거 같은데. 아까 바에서 얘기를 나누던 걸 되짚어보면 통화도 자주 하던 사이가 아닌 거 같고. 그런데 헤어진 지 몇 시간도 되지 않아서 다시 또 전화가 왔다? 그게 박유나라면 이해가 가지만, 신현정이라는 게 좀 의아하긴 하다. 뭐, 어느 쪽이든 간에 내가 신경 쓸 일은 아니지만. 괜한 오지랖이란 생각에 관심을 거두고 이하연 쪽에서 시선을 떼려던 순간이었다. 응? 이하연이 날 바라보며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게 아닌가. 그러곤 핸드폰에 대고 묻고 있었다.
“진영 씨하고?”
어째서 여기서 내 이름이 나오는 걸까? 대체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 거지? 궁금했지만, 가만히 기다렸다. 아직 통화가 끝나지 않았으니까. 잠시 후, 통화를 마친 이하연이 내게 물었다.
“현정 언니인데요. 진영 씨랑 한번 만났으면 한다고 하네요. 연락처도 알려달라고 했는데, 제가 그건 물어봐야 한다고 했구요.”
자리 한번 마련해 달란 얘기 같은데. 그걸 왜 하필 지금? 그런 일이 있었으면 아까 헤어지기 전에 말했으면 됐을걸. 그건 그렇고. 뭣 때문에 그러는 거지?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을 때, 이하연이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내 속내를 읽은 모양이었다.
“현정 언니 말로는 방송 출연 문제 때문인 거 같더라고요.”
“방송……이요?”
“예. 진영 씨를 섭외하고 싶다는 뉘앙스던데, 자세한 건 잘 모르겠어요.”
음……. 좀 뜻밖인데? 나로선 생각지도 못한 얘기라고나 할까. 잠시 고민하다가 물었다. 아무래도 이런 문제에 관해선 나보단 그녀가 더 잘 알 거란 생각에.
“하연 씨 생각엔 제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곧바로 대답하지 않고 생각에 잠겼던 이하연이 말했다.
“잠깐만요.”
그녀는 내게 양해를 구하곤 자리를 떴다. 내가 보이는, 그러면서도 들리지는 않을 만큼 딱 그런 거리에서 어디론가 전화를 하는 모습이었다. 아마, 신현정 피디한테 거는 게 아닐까? 아니나 다를까. 잠시 후 전화를 끊고 돌아온 그녀는 조금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얘기했다.
“촬영 스케줄은 진영 씨한테 최대한 맞춰주겠다고 하는데요.”
“그래요?”
그건 나쁘지 않네.
“근데…….”
“편하게 얘기하세요.”
“예.”
대답하고 나서도 내 눈치를 보다가 이하연은 한층 낮아진 음성으로 말했다.
“출연료는 많이 주기 어려울 거 같데요.”
“아, 그렇군요.”
당연한 얘기다. 연예인도 아니고, 그렇다고 인지도가 있는 것도 아니니까.
“그, 그래도 회당 100은 넘을 거라네요.”
음, 그게 많은 건가? 적은 건가? 그리고 100만 원을 넘는다는 건, 100만 원일 수도 있지만 199만 원일 수도 있다는 얘기. 지금처럼 쪼들리는 상황에선 사실 어느 쪽이든 감지덕지할 일이다. 다만, 저 정도 돈에 한창 자리를 잡기 시작한 상황에서 무리하게 주방에서 빠지게 된다는 거다. 자칫하면 아예 거길 나와야 할는지도 모르고. 어디든 시킨 일은 하지 않고 자꾸 딴짓만 하려 드는 사람을 좋아하라 할 곳은 없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면……. 현재 형식이네 집에서 받는 게 250만 원인데, 비교해 볼 것도 없이 손해다. 어느 쪽이든 장단점이 있으니 단순히 금전적인 손익만 따질 문제가 아니라서 문제지. 게다가 잘 풀리면 두 마리의 토끼를 잡을 수도 있고.
“고민이네요.”
턱을 만지며 심각한 표정을 지어 보이자, 이하연이 조심스럽게 자신의 의견을 표했다.
“일단은 만나보고 판단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그렇군요.”
“그럼 어떻게 할까요? 현정 언니한테 연락할까요?”
바로 고개를 끄덕이진 않고 그녀를 바라보다가 얘기했다.
“글쎄요. 하연 씨 얘기처럼 한번 만나보긴 해야 할 것 같긴 한데. 오늘은 좀 그렇네요.”
“……?”
“조금 있으면 들어가야 하는데, 그런 일로 시간 뺏기기도 싫고. 솔직히 얘기하면 어제 무리를 해서 그런가 좀 피곤하거든요.”
“아!”
“급한 거 아니면 조만간 시간 약속을 하고 뵙는 거로 했으면 좋겠네요. 뭐, 무슨 얘기를 하실지는 모르겠지만요.”
과연 신현정이 그렇게까지 해서 날 만나야 할 필요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로서는 그야말로 천금 같은 주말을 이렇다 할 이유도 없이 생판 남이나 다름없는 그녀를 만나는 데 할애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물론 방송 얘기에 혹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전혀 실감이 나지도 않는 데다가 어쩐지 괜스레 들떠서 쓸데없이 내 소중한 시간만 공으로 날릴 거 같은 기분이라서 말이다. 게다가 데이트라고 하긴 뭐하지만, 어찌 되었든 오늘 하루는 이하연과 함께 보내기로 했는데 이런 식으로 시간을 뺏기고 싶지 않기도 했고. 그런 내 마음을 눈치챈 건지, 이하연이 살짝 흔들리는 눈빛이 되어 날 보다가 한줄기 미소와 함께 핸드폰을 들었다. 그러곤 톡이 오가는 소리가 연거푸 들리는가 싶더니 그녀가 말했다.
“진영 씨 스케줄에 최대한 맞춘다고 하니까, 일정 확인 후에 연락 주시면 제가 현정 언니한테 연락하기로 했어요. 아, 혹시라도 제가 중간에 끼는 게 불편하시면 직접 연락하셔도 괜찮구요.”
“아뇨. 전혀 불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연 씨를 귀찮게 하는 게 아닌가 싶어서 죄송할 따름이죠.”
“아이참. 말했잖아요. 저 이런 거 좋아한다구. 막 참견하고 집착하는 거.”
웃음이 난다. 참 한결같다고나 할까.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자꾸만 이 여자 앞에선 무방비 상태가 되는 느낌이다. 쯧, 그러면 안 되는데……. 숨을 한차례 크게 들이마시며 말했다.
“그럼 이제 밥 먹으러 가볼까요?”
“앗! 그러고 보니 시간이……. 앙! 줄 엄청 섰겠당. 이러다 못 먹겠어요! 빨리 가요, 우리.”
팔짱을 끼곤 날 잡아당기는 그녀에게 이끌려 중국집으로 향했다. ***
“앙! 진짜 못됐엉! 왜 맨날 나만 이래야 하는 건데! 일요일날 안 되면 토요일 보자는 건데, 그것도 안 되나?”
한 시간이나 기다려 짜장면과 짬뽕, 그리고 탕수육. 거기에 계획에도 없던 물만두까지 시켜 국물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먹고 나온 건 물론이고, 그 후에 카페에 들어가 커피까지 마셨다. 크크큭. 은근슬쩍 말을 놓으며 툴툴대는 모습에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다음 주 토요일엔 근무가 있어서요. 일요일은…….”
“그건 아까 들었잖아요. 출장 있다고.”
그녀는 한숨을 푹 내쉬며 중얼거렸다.
“뭔 요리사가 사업가보다 더 바빠? 칫 우리 아빠도 그러진 않겠다.”
실소가 나온다. 어디 비교할 데가 없어서 대기업, 그것도 우리나라 재계의 정점에 서 있는 굴지의 그룹 사장이랑 비교한단 말인가. 까놓고 말해서 바빠도 그쪽이 더 바쁠 거고, 시간당 페이를 생각하면 아예 비교 불가일 텐데. 나 같은 놈을 한 트럭 가져와도 부족할 게 뻔할 뻔 자. 난 쓰게 웃으며 그녀를 달랬다. 뭐, 내가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까닭을 아직도 찾지 못했지만.
“주말이 그날만 있는 것도 아니잖습니까?”
이하연은 눈이 게슴츠레해져서 물었다.
“음……. 혹시 나 피하는 거 아니죠?”
“그런 건 아닙니다.”
“맹세할 수 있어요?”
난 가만히 이하연을 바라보았다. 초롱초롱한 눈……. 크다. 얼마나 큰지 입김을 불어 닦아주고 싶을 정도로 크다. 속눈썹은 또 어찌나 긴지, 조금 과장하면 연필을 올려놔도 될 정도다. 그런 눈을 깜박거리며 날 쳐다보는 그녀를 보다 보니 괜스레 심장이 두근거린다. 하아, 이러면 안 되는데. 만나는 것도 좋고, 이렇게 함께 하는 것도 좋지만. 뭐든 적당히 해야 한다. 지금이 신분제도가 존재하는 중세시대는 아니지만, 누가 뭐래도 그녀와 나 사이엔 넘을 수 없는 벽이 있는 것만은 분명하니까. 속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언젠가 보았던 기사……. 대기업 회장의 막내딸이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평사원과 결혼했다가 끝내는 파탄이 나고 말았다는 기사가 머릿속에 떠오르고 있었으니까. 무슨 일이든 케바케이긴 하지만, 내가 그 평사원보다 잘났다고는 손톱만큼도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특히 지금처럼 맹세 운운할 때는.
“큼. 자랑은 아니지만, 그렇게까지 잔머리 굴리는 성격은 못됩니다. 싫으면 나오지도 않았겠죠.”
어떤 부분에서 기분이 좋아진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하연의 입이 3자를 그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럴 거 같으면 현정 씨 문제도 상의하지 않았겠죠.”
“흐음, 그런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모습이 어째 사람이라기보단 강아지 같은 느낌이다. 웃음이 나올 것 같은 걸 참으며 얘기했다.
“이제 슬슬 가죠.”
벌써 밤 9시가 가까운 시간. 이하연에게 통금시간이 있는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내일부터 또다시 빡센 일주일을 시작해야 하는 나로서는 얼른 들어가서 쉬고 싶었다. 그녀는 아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지만, 그래도 내 처지를 이해하는 건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인다. 잠시 후, 그녀가 모는 차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 물론 여기서 집이란 숙소가 있는 저택을 말한다.
“오늘 즐거웠습니다.”
차에서 내리기 전 그녀에게 말하자, 그녀가 아무 대꾸 없이 날 보다가 고개를 숙여 보였다. 뜻밖의 상황에 내가 눈을 가늘게 해 보였을 때, 이하연이 말했다.
“고마워요.”
“……뭐가요?”
“담배.”
“예?”
“유나 언니가 담배 못 피우도록 막은 거……. 임신한 거 알고 그런 거잖아요.”
참 내, 눈치는 또 어찌나 빠른지. 나레이션의 보정을 받고 움직이는데도 당해낼 수가 없네. 하아, 역시 세상은 넓고 똑똑한 사람은 많다.
“그건 그냥…… 손이 무의식으로 나간 겁니다. 그때 얘기했다시피 밥 먹기 전에 담배 피우면 좀 그렇잖아요?”
“지금 겸손 떠는 거?”
피식.
“그렇다고 해두죠. 조심해서 가요.”
내려서 차 문을 닫았다. 그리고 말했다.
“아, 일정 확인 후에 말씀드릴게요. 근데 이러는 거 뭔가 건방 떠는 거 같아서 좀 그렇네요. 혹여라도 오해 없도록 현정 씨한텐 잘 좀 말씀드려 주시고요.”
“걱정 말아요. 그런 언니 아니니까. 그리고 일은 일이잖아요? 뭐든 정확히 하는 게 맞는 거죠.”
이럴 때 보면 확실히 커리어우먼이란 생각이 든다. 아까도 느낀 거지만 평소에 내게 대할 때와는 또 다른 모습. 그게 어쩐지 싫지만은 않았다. 저러다가도 일 얘기가 끝나면……. 봐라. 눈빛 바뀌는 거. 하여간 못 말린다니까. 내게 한차례 묘한 눈빛을 보내던 이하연이 길고 가는 손가락을 가볍게 펴고 살살 흔들었다. 별거 아닌 저런 모습조차 그림 같다고 느꼈을 때, 그녀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벙긋거렸다.
‘도착해서 연락할게요.’
그러곤 차를 몰고 사라졌다. 그녀가 떠나고 난 자리에 서서 멍하니 바라보다가 돌아섰다. 후우, 어째 어제보다 더 빡셌던 거 같은데?
“서진영입니다.”
삐익! 덜컹! 은근 긴장했던 모양인지, 보안팀이 열어주는 문틈으로 몸을 들여놓기 무섭게 쌓였던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들었다. 젠장. 이래서야 어디 일주일을 견딜 수 있을는지 모르겠다. *** 샤워를 하고 나오니 이하연으로부터 톡이 와 있었다.
- 지금 막 도착.
언제나 그렇듯, 한 통이 아니다. 근데 궁금한 게, 어째서 사람들은 왜 한꺼번에 안 쓰고 이렇게 줄줄이 날리는 걸까?
- 다시 한번, 고마워요.
- 근데, 아깐 말 안 했는데, 유나 언니 임신 테스터기 확인할 땐 소름이!
- 말해 봐요. 요리사 아니죠?
- 미아리 박수무당?
- ㅋㅋㅋ 그 컨셉으로 음식점 내도 되겠당.
- 진짜 낸다고 하면 내가 투자한당.
- 7대3 어때요? 당연히 내가 7.
- 싫음?
- 그럼 6대4?
- 5대5?
- 좋아요. 내가 선심 썼다. 4대6. 더는 안 됨. 나도 남는 게 있어야지. ㅋㅋ
- 자요?
- 씻나?
- 앙! 왜 답이 없엉!
- 씨이, 진짜 이럴 거야?
- 서진영 씨?
- 서진영!
- 야!
크크크크크. 집착 쩐다. 그런데 밉지가 않으니……. 밉긴커녕 귀엽다. 참 신기하기도 하지. 이런 스타일은 좀 더 귀찮게 느껴질 줄 알았는데.
--- 지금 씻고 나왔어요.
- 아, 그랬구나.
- 난 또…….
난 또 뭐?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을 때, 톡이 다시 날아들었다.
- 오늘 진짜 즐거웠어요.
- 밥도 맛있고.
- 호호호.
- 얘기도 잘 통하고.
- 우리 은근 잘 어울리는 거 같앙.
잠시 오늘 있었던 일들을 쭈욱 돌이켜본다. 어떤 부분에서 그렇게 느낀 걸까? 아니 그전에, 박유나랑 신현정 때문에 얘기를 그리 많이 나눈 거 같진 않은데? 그렇긴 하지만, 여기선 아무래도 장단을 맞춰주는 게 나으려나? 고민하고 있을 때, 저쪽에서 먼저 알아서 정리한다.
- 아앙. 피곤하당.
- 나도 얼른 씻고 자야겠다.
그러라고 대답하려는데, 다시 날아드는 톡.
- 몸도 찌뿌드드한데 간만에 거품 목욕이나 할까나?
- 욕조에 몸 푹 담그면 피곤이 싹 풀릴 것도 같고.
그러더니 더 이상 날아오질 않는다. 어딘지 모르게 중간에 끊겨버린 듯한 톡이었다. 뭐지 싶어서 한참을 기다리다가 잘 자라고 답톡을 날리려던 순간이었다. 한 장의 사진이 날아든다.
헤어밴드로 머리를 틀어 올려 고정한 채 찍은 셀카. 딱 봐도 욕실. 거품 사이로 어깨가 슬쩍 드러나는 모습에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아까부터 자꾸 씻네 마네 하면서 묘한 얘기를 늘어놓더니만. 그 속이 훤히 보여서 웃음을 그칠 수가 없었다. 웃음을 참지 못한 채 화상 키보드를 터치했다. 물론 건조하기 이를 데 없는 말투로.
--- 피곤할 텐데, 얼른 씻고 자요.
--- 욕조 안에 너무 오래 있으면 감기 걸려요.
--- 잘 자요.
그러곤 어쩌나 보려고 기다리고 있는데……. 까똑!
- 앙! 얄미웡!
예상했던 반응이라 다시 한번 웃고 말았다. 진짜, 이 여자……. 여러모로 사람을 들었다 놨다 한다. 짐짓 모르는 체 물었다.
--- 뭐가 또 불만이에요?
- 몰라서 물어요?
--- ?
- 앙! 앙!
-- ㅋㅋㅋ
- 진짜!
--- 그러다 감기 들어요. 날도 추운데…….
- 나 걱정해주는 거?
--- 그러니까, 대충 씻고 자요. 괜히 사람 걱정시키지 말고.
톡 대신 날아든 토끼 한 마리가 오도방정을 떨며 춤춘다. 입꼬리를 살짝 올린 채 톡을 날렸다. 장난은 이쯤 해두고, 마지막으로 저쪽에 원하는 말 한마디쯤은 해주자 싶었다. 아니, 실제로도 그녀는 충분히 아름다웠다.
--- 근데, 씻는다면서 화장은 왜 안 지워요?
- 응? 지웠는데?
- 애초에 화장 진하게 안 하는 편이고.
- 기초만 바르는데.
--- 아 그래요? 난 또…….
- 난 또?
잠시 텀을 두고 나서 톡을 날려준다. 어느새 내 입가엔 미소가 지어져 있었다.
--- 예쁘길래, 화장 안 지운 줄 알았죠.
별거 아니란 듯 툭툭 던진 말이었는데……. 잠시 반응이 없다 싶더니, 또다시 날아든 토끼가 격렬히 춤을 춘다. 이건 뭐 비보이, 아니 비걸이 따로 없다. 그녀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떠올라 미소를 짓고 말았다. 그때, 이하연이 톡을 날려왔다. 충분히 만족했는지, 더 이상의 도발은 없었다.
- 자기도 피곤할 텐데, 얼른 자요.
자, 자기? 눈을 깜빡거리다가 피식 웃었다.
--- 예. 하연 씨도 잘 자요.
- ㅇㅇ 내 꿈 꾸고. 굿나잇∼∼∼∼
오랜만이다. 누군가와 이렇게 오랫동안 전화로 대화를 나눈 것은. 뭐, 숙소에서 빵빵하게 터지는 와이파이를 믿고 톡으로 나눈 것이긴 하지만. 아무튼, 간만에 나눈 즐거운 대화에 만족하며 시간을 확인했다. 10시가 조금 안 된 시간. 일찍 일어나서 그런가. 것도 아니면 이틀 연장 빡세게 보내서 그런가. 졸음이 쏟아진다. 무거운 눈꺼풀을 어떻게든 들어 올리려고 하다 보니 눈 안에 꼭 모래가 굴러다니는 느낌이었다. 아이씨, 이럴 줄 알았으면 오늘 만나자는 약속을 하지 않는 건데. 녀석한테 전화해서 그냥 내일 보자고 할까? 진심으로 갈등하고 있을 때였다. 핸드폰이 진동했다. 뭔가 해서 보니, 익숙한 이름이 떠 있다. 기다리던 이름이기도 했다. 강형식이었다. 김진숙 회장에게 받은 명함을 어디다 두었더라.
“어, 그래.”
- 오올. 브라더. 뭔 전화를 걸자마자 재깍 받아? 혹시 대기 중이었던 거?
“뭔 소리야?”
- 뭔 소리긴. 반가워서 그러지.
“시답지 않긴.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어디야?”
- 나와라.
숙소 앞인가 본데. 조금 귀찮다.
“그냥 네가 올라오면 안 되냐?”
- 방은 답답해서 싫다. 맥주 들고 왔으니까, 밖에서 한 캔씩만 하자.
“후우, 피곤한데…….”
- 뭘 또 그렇게 앓는 소리야?
“인마, 넌 어떤지 몰라도 난 얼른 자야 내일 일할 수 있어.”
- 나도 인마, 내일 일찍 나가봐야 해.
하는 수 없나? 한숨을 푹 내쉬었다.
“금방 나갈게.”
핸드폰을 끊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외투를 걸치곤 지갑을 뒤져 확인했다. 체크카드와 통신사 멤버십 카드 사이에 난 공간으로 김진숙 회장이 건네준 명함이 빼꼼히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지갑을 챙긴 후 방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