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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대박 냄새 (1) (27/204)

#27. 대박 냄새 (1)2020.12.02.

어디선가 쌀 한 톨에는 햇살 한 줌이 녹아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지금 먹는 밥에는 세 여자의 웃음이 듬뿍 담겨 있었다. 그렇게 다 함께 웃다가 울다가를 반복하며 막 식사를 끝냈을 때, 남자 한 명이 허겁지겁 문을 열고 들어오는 게 보였다. 살짝 과장해서 덩치가 나보다 두 배는 돼 보이는 남자였다. 그는 박유나에게 미친 듯이 돌진하는가 싶더니, 막상 앞에 당도해선 깨지기라도 할 듯 조심스럽게 자신의 아내를 안아주었다. 그러곤 또다시 눈물바다. 그 후에야 그는 신현정과 이하연을 알아보곤 인사했다. 그러다가 날 발견하곤 물어온다.

“이분은?”

“아, 하연이 남자 친…….”

“어, 언니……. 그런 거 아니라니까.”

“아유, 이 요망한 것. 아니긴 뭐가 아냐. 아무튼, 자갸, 이분 덕택에 내가 임신한 거 알게 됐거든.”

“아! 그래?”

남자는 내게 다가오더니 손을 내밀었다. 덩치만큼이나 호쾌한 것이 무척이나 거침없었다. 남자인 내가 봐도 호감이 가는 인상인 데다가 행동까지 저러니 기분이 나쁠 이유가 없었다. 손을 맞잡는 순간, 남자가 먼저 말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김주형입니다.”

“아, 예. 서진영이라고 합니다.”

간단한 인사와 소개가 끝나자마자 김주형은 허리를 접으며 외쳤다.

“감사합니다!”

어찌나 목청이 큰지. 절로 뭐 하는 사람일까 하는 궁금증을 불러일으킬 정도였다. 연예인인 거 같지는 않고. 느낌상 운동선수 쪽인 거 같은데.

“아뇨. 제가 뭘 한 게 있다고요.”

“아녜요. 덕분에 제가 임신한 것도 알게 되었고, 무엇보다 그 담배도…….”

무슨 소린가 하는 얼굴이 된 김주형에게 박유나가 자초지종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덕분에 난 도망가지도 못하고 그걸 듣는 내내 얼굴이 뜨겁게 달아올랐고, 시종일관 시선을 어디다 둬야 할지 몰라서 안절부절못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이하연과 눈이 마주쳤는데, 그녀가 입을 가리고 웃고 있는 게 아닌가. 하아……. 진짜, 너무하네. 누군 쪽팔리다 못해서 조만간 구운 오징어가 될 판인데, 이게 웃깁니까? 그때, 이하연이 입술만 방긋거리는 게 보인다.

‘고마워요.’

음, 이건 또 이거대로 기분이 나쁘지…….

‘그리고…… 넘 귀여워.’

아씨! 이러는 거 반칙 아닌가? 아직 마음의 준비도 안 됐는데……. 부끄럽기도 하고,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뭔가 가슴속 한구석에서 뿌듯함이 느껴져 손가락으로 코끝을 문지르고 있을 때였다. 박유나에게서 얘기를 전부 들은 김주형이 갑자기 내 손을 다시 한번 잡아 왔다. 그것도 두 손으로 덥석.

“아!”

“고맙습니다!”

긴말을 하지 않는 타입인가 보다. 그런데도 어째선지 많은 얘기를 들은 것처럼 느껴지는 건 날 보는 이 남자의 눈빛 때문인 듯하다. 민망한 기분에 말했다. 물론 진심으로.

“……늦었지만, 축하드립니다.”

따라라라, 라라……. 익숙하다 못해서 귀에 못이 박일 지경이 된 BGM과 함께 나레이션이 들려온 것도 그때였다. - 서진영치곤 잘했다. 작업 멘트가 저렴한 게 좀 아쉽지만. 100점 만점에 80점. 짜기도 하지. 이 정도 했으면 됐지. 그렇게 안간힘을 썼는데, 겨우 80점이라니. 그리고 작업 멘트 아니거든! 나름 자연스럽게 임신 얘기 꺼내려고 몸부림을 친 거구만. 따라라라, 라라……. - 그렇다. 이날, 서진영은 몸으로 울었던 것이다. 야이, 말을 해도 꼭. 나레이션이 살아 있는 생명체고, 만일 눈앞에 있다면 머리라도 한 대 콱 쥐어박고 싶은 심정이 되었을 때, 두 남녀는 모두에게 인사를 하곤 가게에서 떠나갔다. 물론 우리 역시 뒤따라 계단을 올랐다. 식사도 끝마친 후였고, 주인이라고 할 수 있는 박유나가 떠난 마당에 더 이상 가게에 머물 이유가 없었으니까.

“커피는 제가 살게요.”

기분이 더할 나위 없이 좋은지, 이하연이 활짝 웃으며 얘기하고 있었다. 시계를 볼 필요는 없었다. 정오가 조금 넘은 시간. 어제의 피로가 살짝 남아 있기는 했지만, 간만에 만났는데 밥만 먹고 헤어지기는 그녀에게 미안하기도 하고, 나로서도 조금은 아쉽기도 했으니까. 그래서 고개를 끄덕이자, 이하연은 신현정의 팔짱을 끼며 물었다.

“언니도 갈 거지?”

옅은 미소를 베어 문 신현정. 그녀는 나와 이하연을 한차례 바라보다가 고개를 내저었다.

“미안해서 어쩌지? 난 먼저 가봐야겠는데.”

“앙? 그런 게 어딨어! 오랜만에 만났는데 벌써 간다고?”

“그러게. 근데 어쩌지?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요즘 잠잘 시간도 부족할 정도야.”

저렇게까지 얘기하는데 아무리 이하연이라도 떼를 쓸 수야 없을 터였다. 살짝 시무룩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이하연이었다.

“죄송해요. 아, 그리고 덕분에 오늘 즐거웠어요. 밥도 정말 맛있었고요.”

“민망하네요.”

“진짜예요. 아, 그리고…….”

“예?”

뭔가 싶어서 바라보니, 신현정이 날 빤히 쳐다보며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했다. 그러더니 조용히 미소지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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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뇨. 잘 먹었다고요.”

뭔가 깔끔하지 않은 끝맺음. 뭐지 싶었지만, 그냥 그런가 보다 했다. 아무튼, 신현정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인 뒤 돌아서고 있었다. 또각거리며 걸음을 옮기는 그녀의 뒤태는 어딘지 모르게 카리스마가 넘치고 그러면서도 사람을 안심하게 만드는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그렇게 그녀는 끝까지 고아한 모습으로 매너 좋게 떠나갔다. *** 이하연과 헤어져 돌아가는 길, 신현정은 운전석에서 주말임에도 막히는 도로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요리사라…….’

그녀는 서진영을 머릿속에 떠올리며 손가락 끝으로 핸들을 톡톡 두드렸다. 이하연에게 구체적으로 말하진 않았지만, 그녀가 바쁘다는 건 사실이었다. 반쯤은 두 사람의 데이트를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이기도 했지만. 아무튼, 요즘의 그녀는 말 그대로 눈코 뜰 새 없을 정도였다. 신규 프로그램 기획. 예능국으로 자리를 옮긴 후 처음 맡는 일이었다. 당연한 일이지만, 성공하고 싶었다. 자신을 믿고 이끌어준 선배를 위해서라도. 그래서 준비한 컨셉이 몇 개 있었는데, 하나같이 마음이 차지 않은 상태였다. 덕분에 요즘은 밤에 잠도 잘 오지 않아서 수면제라도 처방받아 먹어야 하나 고민하던 차였다. 한데, 오늘 뭔가 실마리를 잡은 듯하다. 얼마 전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이하연도 오랜만에 볼 겸 바람이나 쐰다는 기분으로 나온 자리였는데.

‘사람의 마음을 읽고 그에 맞춰 음식을 내놓는 요리사.’

생각만으로도 소름 끼치는 느낌. 뿐만 아니라 서진영이 바에서 보여준 모습은…….

‘다정해. 배려심도 깊고. 그러면서도 유쾌하고. 그런데도…….’

가볍기만 한 건 또 아니다. 거기에 더해 마치 쇼라도 진행하듯 상대방의 관심을 끌어내 대화를 이어가는 솜씨가 여간 매끄러운 게 아니었다. 뿐만 아니라 양념 치듯 설명해준 음식 얘기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들어도 절로 고개가 끄덕여질 정도로 쉽고 재밌다. 속된 말로 대박각이라 할 수 있었다.

‘일단은 기획부터.’

헤어지기 전까지 출연해보지 않겠냐는 말이 몇 번이나 목구멍까지 올라왔었지만, 간신히 참았더랬다. 아직 아무런 윤곽도 정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섣부르게 제안할 수는 없으니까. 그래도 이미 머릿속으론 확정한 거나 다름없었다. 자신의 감각은 말하고 있었으니까. 컨셉도 컨셉이지만, 서진영이 고정 MC, 아니 하다못해 패널로라만 출연해 준다면 프로그램은 성공할 수밖에 없다고.

‘최대한 빠른 시간 안에 정리해서 선배한테 보고하고, 바로 연락하자.’

신현정을 마음을 굳히며 다짐하듯 핸들을 꽉 쥐었다. 핸드폰이 울린 것도 그때였다. 화면에 떠오른 이름을 확인하곤 핸즈프리로 전화를 받는 순간이었다. 어디지 모르게 흥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음성이 젖어 있었다.

- 현정아!

“어, 유나야. 병원은 가봤…….”

- 임신 맞대!

테스터기를 의심한 건 아니지만, 병원에서 초음파로 확인한 것과는 다를 수밖에 없을 터다. 아직 임신은커녕 결혼조차 하지 않은 신현정으로선 100% 공감할 수 없는 일이지만, 스피커를 통해 전해져 오는 목소리에 실린 감정만으로도 절절히 느껴졌다. 베프라고도 할 수 있는 박유나가 얼마나 기뻐하고 있는지가. 저절로 신현정의 음성도 떨릴 지경이었다. 아까도 한 말이지만, 다시 한번 말했다.

“축하해.”

박유나가 그동안 아이가 들어서지 않아서 얼마나 마음고생을 했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에.

- 흑…… 흑…… 흐어어어어엉.

서럽게 운다. 너무 기뻐서 울고 있다. 자신도 모르게 촉촉하게 젖어오는 눈가를 손등으로 슬쩍 훔치며 신현정은 물었다.

“몸은? 너는 괜찮은 거지?”

- 응.

울먹이면서 말하는 박유나.

- 당뇨라곤 하는데, 관리만 잘하면 우리 아기한텐 괜찮대. 흑흑. 그런 줄도 모르고 엄마라는 년이 막…… 흑…… 막 담배나 피우고…….

“…….”

울다 웃다 하며 계속해서 얘기를 늘어놓는 박유나였지만, 염려했던 것보단 괜찮은 듯했다. 그렇다고 해서 안전하다곤 말하기 어려울 터다. 당뇨라는 게 임신이 아니라도 한번 발병한 이상 앞으로 계속해서 신경 써 관리해야 할 일이고. 그렇기에 지금은 더더욱 엄마나 아기 둘 모두를 생각해서라도 식단관리와 운동에 힘을 쏟아야 한다. 그렇다곤 해도 쉴 새 없이 쏟아내는 수많은 계획과 함께 잔뜩 들뜬 목소리에는 희망이 가득했다. 그렇게 대화가 이어지는 가운데, 박유나의 음성에선 점차 물기가 사라져간다. 대신 그 자리엔 웃음이 들어서 있다.

- 아까 설거지하려고 하는데, 그이가 기겁하면서 막 달려드는 거야. 호호호. 얼굴이 새파래져선…….

헤어진 지 몇 시간 되지도 않았는데 수화기를 통해 전해지는 분위기는 듣는 이까지 설렐 정도다.

- 근데, 진짜 신기한 거 있지? 그 남자는 내가 임신한 걸 어떻게 알았대?

어느새 울음기가 완전히 가신 목소리는 서진영에 관해 얘기하고 있었다. 화제가 그리로 옮겨가자, 박유나는 연신 탄성을 내지르느라 바쁘다.

- 오빠한테 아까 있었던 일 얘기하니까 그러더라고. 내가 담배를 피우려고 할 때부터 알고 있었던 것 같다고.

“그런 거 같더라.”

- 역시. 아하, 이하연, 그 기집애. 어디서 그런 남자를 물었대? 하여간 고년이 눈 하난 높다니까.

“그러게.”

- 참 내. 남자라곤 길바닥에 굴러다니는 돌보듯 하던 애가 갑자기 연애 타령을 하면서 목을 매길래, 대체 누군데 그러나 싶었는데……. 그나저나 집안에서 허락할지 모르겠네. 오늘도 보니까 하연이 걘 단순히 연애로 끝낼 생각이 없어 보이던데.

오늘 처음 만난 남자는 그녀들에게 호기심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문제는 그 호기심 중 일부가 걱정이란 거였지만. 당연한 일이다. 이하연의 집안이 어떤 집안인가. 대한민국에서 내로라하는 재벌들 중에서도 첫손가락에 꼽히는 그룹. 한때 재계 1위였던 대현이다. 비록 지금은 예전에 비할 바가 아니었지만, 한국 사회에 끼치는 영향력으로 보나 보유한 재산으로 보나 여전히 대단한 성세다. 만약 이하연이 그 남자와의 관계를 단순하게 생각하고 있지 않다면 앞으로 얼마나 높은 장벽이 기다리고 있을지는 말할 필요도 없다.

- 저번에 하연이 얘기 듣고 걱정돼서 알아보니까 고아라고 하더라고.

언뜻 들으면 무시하는 듯한 말투였지만, 박유나의 음성에 염려 어린 기색이 깃들어 있다는 걸 알아채지 못할 신현정이 아니었다. 그만큼 오늘 보여준 모습이 인상적, 아니 호의적이었다는 거겠지. 처음 듣는 얘기에 살짝 놀란 표정이 되었던 신현정이 담담한 목소리를 토해냈다.

“애도 아니고, 하연이도 생각하는 게 있겠지.”

- 그야 그렇지만……. 어? 현정이. 알았어, 오빠. 현정아, 미안. 시부모님께서 지금 도착하셨다고 하네. 나중에 다시 통화하자.

아닌 게 아니라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작은 소란에 신현정은 미소를 머금었다. 전화를 끊고 나서 이하연과 서진영, 그들 두 사람에 대한 걱정은 이제 신현정만의 몫으로만 남았다. 물론 그 와중에도 서진영을 섭외하고 싶다는 사심이 많은 부분을 차지하긴 했지만. 박유나와의 통화를 통해 다시 한번 욕심에 불이 붙은 그녀는 잠시 입술을 잘근 씹다가 핸들을 꺾었다. 원래는 집으로 돌아가 오늘 느낀 걸 바탕으로 기획서를 정리할 생각이었는데, 마음이 바뀐 것이다.

“선배랑 얘기부터 해봐야겠네.”

머릿속으로 빠르게 앞으로 어떻게 할지, 일의 수순을 짚어가며 방송국 쪽으로 차를 몰기 시작했다. 전화가 걸려온 것도 그때였다.

“아, 선배!”

그도 양반은 못될 모양이다. 예능국의 고민준 본부장. 시사교양국에서 나름 커리어를 쌓으며 탄탄대로를 걷던 자신을 꼬드긴 당사자. 개인적으론 고등학교 때부터 끈질기게 이어진 인연. 대학교마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같은 곳에 입학해 벌써 10년도 넘게 선후배 관계로 지내는 중이었다.

- 현정아. 지금 어디냐?

“방송국 가는 길인데. 선배는?”

- 나? 난 험난한 후배 앞길을 밝혀주는 등불이 되기 위해 밤낮으로…….

“낮술?”

- 허허허. 어뜨케 알았을까나? 우리 현정이는 천리안인가 보네. 흐흐, 국장님 보십쇼. 우리 현정이가 이렇게 센스가 좋다니까요. 척하면 척이라는 거 아닙니까.

“……구, 국장님?”

고민준 본부장의 입에서 느닷없이 튀어나온 국장님이란 소리에 신현정이 조심스럽게 물었지만, 대답 따윈 없었다. 대신 묻고 있다.

- 어떻게? 올래?

잠시 고민하던 신현정이 오케이했다.

“어딘데?”

- 거기 있잖아. 우리 자주 가는 곳.

쯧, 우리가 아니라 선배겠지. 신현정은 목구멍까지 넘어오는 말을 삼키곤 알겠다며 전화를 끊었다.

“지금 바로 갈게.”

곧바로 고민준 본부장이 얘기하는 주소를 내비에 찍는 신현정의 눈이 살짝 빛나고 있었다. 김동하 국장. 방송국이란 거대 조직의 최상위에 자리한 국장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대체 무슨 얘기가 어떻게 오가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신현정은 마음을 다잡았다. 동시에 머릿속에선 서진영의 얼굴이 떠오르고. 꾹 하고 핸들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가며, 신현정의 눈빛이 한층 더 깊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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