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칼은 도마 위에서만 (2)2020.11.27.
식자재를 꺼내는 것도 잊은 채 멍한 눈빛이 되고 말았다. 뭐 이런 개 같은 경우가 다 있지? 그러니까 뭐야? 눈앞에 앉아 있는 박유나……. 이 바의 주인이 강형식과 관련이 있다는 얘기? 뿐만 아니라 임신상태라고?
그것도 당뇨란다. 아니, 근데 그걸 왜 몰라? 하긴……. 그럴 수도 있지. 우리 외삼촌이 그랬거든. 쓰러지고 나서야 알게 되셨으니까. 뭐, 그전에 전조는 있었지만. 그건 그렇다 치고 방금 임신 3주차라고 하지 않았나? 흠, 아무리 봐도 임신한 사람 같아 보이지 않는데? 아직 초기라서 티가 나지 않는 걸까? 내 물음에 답이라도 주듯 나레이션이 말한 것도 그때였다. - 결혼은커녕 성인이 된 후론 여자 손 한 번 제대로 잡아보지 못한 연애 고자는 모르겠지만, 임신 3주차가 틀림없다. 원래 이 시기엔 배도 나오지 않아서 티가 나지 않으니 민감한 체질이 아니면 본인조차 모르기 십상인 것이다. 그렇긴 하지만, 오히려 이 시기는 무척 위험하다. 열도 나고 무기력한 게 꼭 감기몸살 같아서 자칫 감기약을 먹는 수가 있는데, 그조차도 위험한 시기다. 당연히 술이나 담배뿐만 아니라 커피와 같은 카페인 음료도 조심해야 한다. 유산될 위험도 있거니와 뱃속의 태아에도 영향을 끼치게 되므로……. 유, 유산? 협박도 아니고, 갑자기 무서운 얘기를 듣게 돼서 흠칫하고 있을 때였다.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와 바라보니 박유나가 핸드백에서 뭔가를 꺼내고 있었다. 어? 박유나가 꺼내든 담배를 입에 물고 막 라이터로 불을 붙이려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정신을 차려보니 무의식중에 뻗은 손에 담배가 들려 있었다. 순간 바 안에 흐르는 정적. 박유나는 물론이거니와 세 여자의 눈동자가 일제히 내게로 향해 있었다. 정확히는 박유나의 입에서 뽑듯이 낚아채 내 손에 들고 있는 담배에 시선이 박혀 있다. 나도 모르게 탄식을 내뱉었다.
“아!”
제, 제기랄! 이 어색함 어쩔 거냐고. 난 내 손에 쥐어져 있는 담배를 보며 눈살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하아……. 한숨이 나올 지경이다. 어떻게 생각보다 손이 먼저 움직이는 건지. 뭐, 그만큼 당황했다는 거겠지만. 그렇다고 이제 와서 다시 박유나의 입에 담배를 물려줄 수도 없는 노릇이고. 진짜 어쩐다? 그때, 뒤늦게 사태를 파악했는지 응? 하는 눈빛으로 날 바라보는 박유나. 그러더니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린다. 그러면서 한다는 말이.
“보기보다 보수적인가 봐요?”
그녀의 말에 신현정 역시 날 바라본다. 내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궁금해하는 눈빛이다. 나도 모르게 이하연에게로 시선이 옮겨갔다. 다행히 그녀는 얼떨떨해하긴 하지만, 이렇다 할 감정을 내비치진 않고 있었다. 그렇다곤 하지만……. 기분? 당연히 좋지만은 않다. 딱히 내가 개방적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담배를 두고 남녀를 구분할 정도로 머저리는 아니니까. 물론 내가 담배를 피우지 않아서 그런지는 몰라도 흡연 자체에 부정적인 편이긴 해도. 그렇다곤 해도 저런 눈빛을 받는 건 좀……. 후우……. 임신과 담배. 어디까지나 태아에게 미칠 악영향 때문에 그랬을 뿐인데. 문제는 나도 모르게 손이 나가버린 거라서 이제 와서 변명을 하려 해도 쉽지가 않다는 것이다. 그냥 확 말해버릴까? 박유나 씨, 당신 임신했다고요. ……라고 했다간 이상한 사람 취급받겠지, 아마. 미치겠네. 어떻게든 납득은 시켜야겠는데, 어디서부터 얘기를 시작할지 막막하기만 하다. 당연히 이런 사정을 알 리 없는 이하연으로선 내게 실망할는지도…….
“언니. 진영 씨 그런 사람 아니야. 그리고 담배가 몸에 안 좋은 건 틀림없는 사실이잖아?”
음, 이것 참. 정론이라면 정론인데, 솔직히 말해서 적잖이 놀랐다. 혹시나 하는 기대가 전혀 없었던 건 아니지만, 지금 같은 경우까지 날 편들어 주리라곤 생각지도 못했으니까. 아, 다시 생각하니 좀 유치하네. 이런 일에 편을 들고 말고가 어디 있다고. 추임새라도 넣듯 더듬더듬 말을 보태본다.
“그, 그렇죠. 담배는 몸에 무척 해로우니까요.”
따라라라, 라라……. 나레이션이 들려온 것도 그때였다. - 서진영, 진짜 말 못 한다. 망할! 그렇게 말 잘하면, 네가 하든가. 따라라라, 라라……. - 그래도 서진영이 자신의 능력이 부족한 걸 남의 탓으로 돌리는 사람은 또 아니다. 쳇, 알았다고. 어떻게든 해볼 테니, 그만 좀 해라. 어제오늘 나레이션한테 팩폭 아닌 팩폭을 하도 맞아서 그런가, 심장이 다 아플 지경이니까.
“음, 담배는 식욕 저하의 원인이기도 하거든요. 아시겠지만, 자극 때문에 미뢰가 마비된달까. 하하하. 아무튼 애써 음식을 만들었는데, 맛을 제대로 느끼지 못하면 안타깝잖아요?”
경련이라도 일어날 것 같은 기분이었지만, 억지로 웃기까지 하며 은근슬쩍 담배를 돌려주었다. 그러자 이하연이 도와주려는 듯 얘기했다.
“맞아, 언니. 이왕이면 맛있게 먹으면 좋잖아? 그리고 담배 그만 끊으라니까.”
“어머, 얘 봐? 벌써부터 편드는 거야? 아주 푹 빠졌네. 빠졌어. 알았어, 계집애야. 안 피우면 되잖아.”
피식거리며 내게서 받아든 담배를 한쪽에 놓인 재떨이에 보란 듯이 구겨 넣는 박유나. 그러면서도 한마디 덧붙인다.
“참네. 내 가게에서 내 마음대로 담배도 못 피우네. 자, 됐죠? 근데? 그쪽은 담배 안 하네 보네요? 설마 술도 못하거나 하는 건 아니죠?”
오해가 깊어지는 느낌. 담배는 물론이거니와 술도 못하는, 어떻게 보면 건강한 생활 습관이라고 말해도 되겠지만, 이 상황에선 어째 좀스러운 인간이라는 말처럼 들려온다. 변명 같긴 해도 할 말은 해야겠지.
“아뇨. 술은 좀 합니다. 아, 그리고 혹시나 오해하실까 봐 말씀드리는 건데…… 딱히 여자라서 피우면 안 된다고 생각진 않습니다. 그냥 몸 생각해서 안 피우셨으면 하는 거지.”
다시 한번 픽하고 웃는 모습이 그리 믿는 눈치는 아니지만. 그래도 다행이라면 다행. 어찌 되었든 박유나가 담배 피우는 걸 막긴 했으니. 따라라라, 라라……. - 서진영 진짜 애쓴다. 그래도 역부족이다. 100 만점에 50점. 좀 더 노력이 필요하다는 걸 스스로도 알고 있을 터다. 아, 쫌! 그렇게 닦달하지 않아도 노력한다니까. 후우……. 그래서 인제 어쩌지? 아무래도 박유나는 자신이 임신한 사실을 모르고 있는 거 같은데. 그렇지 않다면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담배를 피울 리가 없지. 말하는 걸 들어보니 아마 모르긴 몰라도 술도 마실 모양이다. 물론 그녀를 탓할 생각은 없다. 설사 자신이 임신했단 사실을 알고서도 그런다 해도 말이다. 타인이 간섭할 문제도 아니거니와, 애당초 임신 자체를 달가워하지 않을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으니까. 그렇다곤 해도, 여전히 고민은 된다. 모르고 있었으면 몰라도, 이미 알게 됐는데 골치 아프다는 이유만으로 문제 자체를 회피하는 건 비겁하잖아? 게다가 만일에 하나라도 박유나에게 문제가 생긴다면 나레이션의 경고처럼 강형식에게도 여파가 미칠지 모르고. 아니 아니. 다른 건 다 차치하더라도 역시 생명은 소중하지 않은가. 비록 태아라지만, 어떻게 보면 한 사람의 목숨이 달린 일인데. 단순히 지금 이 자리에서 박유나가 담배를 피우고 안 피우고의 문제가 아니란 얘기다. 그녀가 아이를 낳길 원한다는 전제 하의 얘기긴 하지만, 아이를 가진 걸 모른 채로 계속해서 술·담배를 한다면? 설혹 그게 아니라도 과격한 운동이라도 해서 아이가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아우, 상상만으로도 아찔하다. 속으로 한숨을 삼키곤 어울리지도 않는 너스레를 떨어본다.
“걱정 마십시오. 식후땡……이라고 하죠? 밥 먹고 나서도 담배 생각이 안 날 정도로 맛있게 만들어 드릴 테니.”
과장되게 팔까지 쓱쓱 걷어붙이며 말하자, 다행히 당사자인 박유나는 기분이 상하진 않았는지 까르르 웃고 있다. 내친김에 살짝 오버해본다.
“어? 진짜라니까요. 셋이 먹다 셋 다 죽어도 전 모릅니다.”
타다다다다다다다. 나름 리듬을 타며 칼로 파를 썰면서 도마를 두드리자, 박유나뿐만 아니라 이하연까지 어깨를 살짝살짝 들썩이며 흥겨워한다. 이쯤에서 예전에 일할 때 손님들과 주고받던 농담 한마디 던져볼까?
“파 중에 제일 인기 많은 파가 뭔지 아세요?”
마침 파를 썰고 있던 참에 던진 아재 개그였다. 흠, 여기서 안 먹히면 진짜 큰일인데. 괜히 말했나 후회하고 있을 때, 이하연이 고개를 갸웃하다가 묻는다.
“그런 파도 있어요?”
대답하지 않고 그저 미소만 보여주자, 이번엔 신현정이 골똘히 생각하는지 꽤 심각한 표정을 지어 보인다. 그러더니 진지하게 묻는다.
“그럼 꽤 비싸겠네요?”
내 쪽이 먼저 터질 뻔했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어서 답을 말했다. 썰어놓은 파를 그릇에 담으면서.
“파-스타……요.”
순간 공기가 얼어붙는 듯한 착각이……. 제길, 내 이럴 줄 알았지. 한숨이 나오려는 찰나였다.
“푸웁! 파하하하! 진짜 웃긴다! 파스타래, 파스타!”
박유나뿐만 아니라 신현정도 조용히 웃고 있었고, 이하연도 입을 가린 채 흡끅거린다. 후우, 십년감수 했네. 다시는 하지 말아야지. 이게 뭐라고 긴장이 되는지. 아재 개그는 삽질을 자초해 내 무덤을 파는 짓이라는 걸 뒤늦게 깨닫고, 남몰래 식은땀을 훔치고 있을 때였다. 박유나가 여전히 웃음기가 남은 음성으로 물었다.
“정말 요리사 맞아요? 무슨 요리사가 개그맨 같아!”
생각보다 더 활달한 성격인 게 다행이네. 아, 그렇다고 해서 벌써부터 안심한 건 아니다. 당연하지만, 아무리 분위기가 풀어졌다고 해도 갑자기 고백 타임으로 들어가지도 않았다. 겨우 3주차에 불과해 티도 나지 않는 상황에서 대뜸 임신했냐고 묻는 멍청한 짓은 하지 않는단 얘기다. 무슨 미아리 작두 도령도 아니고, 진짜 그랬다간 이상한 사람이라고 의심받아도 할 말이 없을 테니까. 지난번에 이하연의 소화 기능이 좋지 않은 걸 맞춘 거랑은 질적으로 다른 얘기란 거다.
“근데, 담배 피우면 스트레스에 도움이 된다고 하던데, 사실인가요?”
일단 핵심을 피해 가면서 주변부터 빙빙 도는 게 낫겠지.
“뭐, 짜증 나거나 할 때 담배 한 대 피우면 좀 낫긴 하죠.”
“그래요? 음, 저로선 모르겠네요. 차라리 그럴 땐 단 걸 먹는 게 낫지 않나요? 아니면 초콜릿 같은 것도 좋겠고.”
“그럴 수도 있겠네요. 음, 그래서 요리사들은 담배를 피우지 않나 보죠? 아, 미각이랑 후각이 예민해서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저도 그런 얘기 들어본 것도 같아요.”
박유나의 얘기에 이하연까지 나서서 맞장구쳐주고 있긴 하지만. 글쎄다. 그것도 다 케이스 바이 케이스 아닐까. 남자라고 다 담배를 피우지 않는 것처럼, 요리사라고 다 담배를 피우지 않는 건 아니니까. 그건 그렇고. 운도 띄웠겠다, 이제부턴 어떻게 말을 해야 하나? 아! 굳이 임신 얘기부터 할 필요는 없잖아. 모로 가도 서울만 가랬다고. 조금 더 쉬운 쪽으로 접근하는 게 좋겠다 싶었다. 대충 머릿속으로 상황을 정리하곤 불쑥 물었다. 식자재를 정리하며, 마치 별일 아니란 듯이.
“혹시 요즘 살이 좀 빠지시지 않으셨어요?”
일단 당뇨 얘기부터. 그나마 다행인 건 내가 당뇨에 대해 조금이나마 알고 있다는 점이랄까. 몇 년 전부터 외숙부께서 당뇨 때문에 고생하시는 걸 옆에서 봐왔기 때문이다. 다행스럽게도 이하연이 장단을 맞춰준다.
“그러고 보니까 언니 좀 마른 거 같기도 하네.”
내 의도를 파악한 것만은 아닌 듯하다. 진짜로 그렇게 느끼고 있는 거 같았다. 하긴 그럴 수밖에. 설사 박유나가 당뇨란 걸 모른다고 하더라도, 그녀의 현재 모습은 얼굴이 살짝 핼쑥해 보이는 게 어떻게 봐도 보기 좋다고 하긴 어려웠으니까. 그래서 그런지 신현정도 한마디 거든다.
“그러게. 유나 너 얼굴에 살이 좀 빠졌다?”
이럴 때 뭔가 결정적인 얘기를 던지면 딱인데. 안타깝게도 정보는 앞서 들려왔던 게 다다. 망할 놈의 나레이션. 대뜸 화두만 던져주곤 입 다무는 거 봐라. 이왕이면 솔루션도 좀 제시해줄 일이지. 하다못해 정보라도 더 주든가. 참네, 쓸데없이 점수는 잘도 매기면서 말이야. 그래도 박유나의 관심을 끄는 건 성공한 모양.
“호호호. 막 던지시는 거 아녜요? 처음 본 사이에?”
“무슨! 딱 봐도 감이 오는데요. 요즘 예뻐졌다는 소리 많이 듣죠?”
“어머! 작업 치시는 거예요? 지금?”
“어허! 큰일 날 소리 하시네.”
난 일부러 과장되게 이하연 쪽을 힐끔거리며 큼큼거렸다.
“괜히 말 돌리지 마시고요. 살 빠지셨죠? 턱선 살아 있는 게 누가 보면 미인 대회라도 나갈 준비하시는 줄 알겠네. 것도 아니면 런웨이에라도 서실 생각이신가?”
또다시 까르르 울리는 웃음소리. 원래부터 웃음이 헤픈 건지, 밝게 웃고 있는 박유나만큼이나 이하연이나 신현정조차 즐거운 듯 보였다. 하아, 진짜……. 나레이션 말처럼 서진영…… 애쓴다, 애써. 솔직히 말해서 손발이 오글거리고 심장이 다 쪼그라들 거 같아 미칠 거 같다. 그래도 다행스러운 점은 이 유치하고 한심한 전략이 먹혀들어 가는 것 같다는 거다. 그 증거로 박유나의 표정이 달라져 있었다. 뭐랄까. 눈동자에 어린 빛이 흥미 반, 호기심 반이랄까. 그녀가 장난처럼 물어오고 있었다.
“저기 작두 타세요?”
“웬 작두?”
“근데 어떻게 아셨을까? 원래 내 모습을 본 것도 아니고. 혹시 우리 예전에 만난 적 있나요?”
뜨끔하지 않을 수 없다. 만난 적은커녕 댁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도 오늘 알았습니다만. 그나저나 작두라……. 신 내리는 건 아니지만, 그에 필적하는 나레이션이 있긴 하지. 난 비닐봉지에서 꺼낸 식재료 중에서 샐러드용으로 사 온 채소들을 다듬으며 대답 아닌 대답을 했다. 급한 마음에 너무 훅치고 들어간 건 아닌가 하는 생각에 슬쩍 돌아가기로 한 것이다. 간신히 단추를 끼웠는데, 잘못해서 경계심이 들게 하면 안 될 테니까.
“그건 아니지만, 좀 놀라긴 했네요.”
“왜요?”
대화가 의도한 대로 흘러가는 걸 보니 절로 웃음이 나온다. 씨익 웃은 뒤 말했다. 이제부턴 정신없이 몰아칠 때란 생각과 함께. 물론 그 와중에도 내 손은 쉬지 않았고, 요리는 착착 진행 중이었다. 자꾸 작두 타령들을 해대는데. 누가 뭐래도 난 요리사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