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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칼은 도마 위에서만 (1) (24/204)

#24. 칼은 도마 위에서만 (1)2020.11.25.

도착했다는 연락을 받고 나가보니 저번에 봤던 차가 보인다.

“많이 기다렸어요?”

보조석 쪽 차 문을 열고 타자, 그녀가 환하게 웃으며 반긴다.

“기다린 건 아니고. 일찍 일어나서 좀 무료하긴 했죠.”

“그럼 전화라도 하지 그랬어요? 저도 일찍 일어났는데.”

“새벽 4시에요?”

“어머! 나도 그때쯤 자기 생각했는데!”

헐. 당황하라고 던진 농담이었는데 그걸 또 리얼로 받아친다. 내가 벙찐 얼굴을 하고 있자, 그녀가 코를 들이마시며 웃어젖혔다.

“흡끅!”

아……. 진짜! 뭐야? 놀린 거야? 당했다는 생각에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가 이내 차 문을 여는 척하며 말했다.

“생각해보니까, 해야 할 일이 있었네요. 아무래도 오늘은 안 되겠어요.”

당장 웃음을 그치고 얼른 날 붙잡는 그녀.

“뭐에요! 갑자기 그러는 게 어딨는데!”

“말했잖아요. 할 일이 있다고.”

“그 할 일이란 게 뭔데요?”

“음……. 빨래?”

헐 하는 눈빛으로 그녀가 되물었다.

“빠, 빨래요?”

“예.”

“겨우?”

“혼자 사는 남자한테 그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데요. 다른 건 몰라도 속옷이 없으면 출근도 못 해요.”

기가 막힌다는 듯 입을 딱 벌린 채 날 쳐다보던 그녀가 어이없어한다.

“뭐양! 내가 패, 팬ㅌ……한테 밀린 거양?”

쿡쿡. 황당하다는 듯 말하다 말고 얼굴을 붉히며 음성을 낮추는 그녀. 그 모습에 웃음을 참으며 나름 배려심 가득한 어투로 말했다.

“하연 씨도 일주일 내내 바쁘셨을 텐데, 오늘만이라도 좀 쉬셔야죠.”

“앙. 그런 배려 필요 없어요! 집착해달라니까.”

자꾸 집착집착하니까, 이젠 진짜 헷갈린다. 이것 참. 어디까지가 진담이고 어디까지가 농담인지 알 수가 있어야지. 난 몸을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흠칫. 한눈에도 긴장한 표정이다. 내가 의도한 분위기를 느꼈는지 눈까지 슬쩍 돌리며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그런 그녀에게 손을 뻗었다. 파르르. 엄한 운전대만 노려보고, 아니 뚫어져라 보고 있는 이하연의 모습은 뜻밖이었지만, 개의치 않고 계속해서 손을 뻗어갔다. 손이 가까워질수록 몸이 굳어지고 있는 게 확연히 느껴져 속으로 웃었다. 스윽. 어느 순간 눈을 질끈 감는 이하연에게 속닥였다.

“벨트 매야죠.”

눈을 뜬 그녀의 엉? 하는 얼굴. 입꼬리를 슬그머니 끌어올리자, 그녀의 눈동자에 실망한 빛이 스쳐 간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녀를 안다시피 하며 안전띠를 끌어당겼다. 이하연이 다시금 얼어붙는 게 느껴졌다. 숨까지 멈추고 어찌할 줄 몰라 하는 게 여실히 전해져 온다. 딸각. 안전벨트를 메주고 나서 자리를 바로 하자, 한 템포 느리게 이하연이 반응했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 보이고 싶은 모양인데, 마음 따로 몸 따로다. 어찌나 긴장했는지 한껏 굳은 게 여실히 보인다. 운전대를 꽉 잡은 두 손에 힘이 바짝 들어가 있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뿐만 아니라 두 볼엔 홍조도 떠올라 있었고. 거기다 대고 내가 말했다.

“갑시다.”

“예?”

“이제 출발해야죠.”

“지, 진짜…… 가요?”

큭큭큭. 그럼 안 가면? 여기서 뭐 하자고? 내가 장담하는데, 이 여자…… 모솔이 틀림없다. 그녀의 오른손을 덥석 잡자, 움찔하는 것만 봐도 분명하다.

“자, 기어 넣고.”

스륵하고 미끄러지며 기어가 올라가 달칵하는 느낌으로 D에 자리를 잡는다.

“액셀 밟으시고요. 아, 사고 안 나게 잘 부탁합니다.”

“다, 당연하죠!”

말은 그렇게 했지만, 차는 급출발. 끼익, 덜컹! 덜컥하며 브레이크를 밟았던 이하연이 얼굴이 빨개져서 더듬거렸다.

“차, 차가 왜 이러지?”

왜 이러긴?

“차도 긴장했나 보죠.”

내 말에 그녀가 날 빤히 쳐다보다가 이내 입술을 삐죽거렸다. 그러곤 주행을 시작했다. 오로지 앞만 보면서. 그런 채로 한동안 한마디 말도 없이 운전에만 열중하고 있는 모습. 그러면서도 이쪽을 신경 쓰느라 초긴장하는 모습이란……. 귀엽네. 흠, 지금쯤 그녀의 머릿속이 적어도 반쯤은 하얗게 물들어 있지 않을까 싶은데. 그런데도 운전 하나는 기가 막히게 하네. 일요일이라서 골목마다 길가에 불법으로 차들을 세워놔 거리가 온통 주차장 꼴이 되어 있는데도 잘만 빠져나간다. 운전 실력만 놓고 보면 강형식 저리 가라다.

“오늘도 마트부터 가요?”

“그래야죠.”

“형식 오빠네 주방에도 식재료 있을 거 아니에요?”

“그건 좀 아니죠. 거기 물건은 거기서 사용하는 거고, 우리가 먹을 건 우리가 사야 하는 거죠.”

날 빤히 쳐다보는 눈길이 느껴져 물었다.

“왜요? 제가 뭐 이상한 말 했어요?”

“아뇨.”

“근데 왜 그렇게 봐요.”

대답은 안 해주고 웃기만 한다. 뭔가 흐뭇한 표정이긴 한데……. 설마 기특하다거나 그런? 에이, 아니겠지. 내가 애도 아니고. 평범한 사고의 소유자라면 당연한 생각인 건데.

“근데 오늘 거기 일찍 문 연다고 했지 않았나?”

“아, 바요?”

“예. 전화로 그랬잖아요? 언니분께서…….”

“그래도 이렇게까지 일찍 열지는 않죠. 빨라야 오후 5시?”

“하긴, 저녁 장사니까.”

“그렇긴 한데, 아마 다들 와 있을걸요?”

에? 다들? 한 명이 아닌 건가? 흠……. 뭐 상관없나? 그나저나 지금 시간엔 문 열지 않는다며? 무슨 소린가 싶어서 막 물어보려는 찰나, 뒤쪽에서 빵빵거리고 난리도 아니다.

“어? 신호 바뀌었다!”

“아유, 일이 분 늦은 거 가지고 되게 뭐라 그러네. 이러니까 여자들이 무서워서 운전 안 하려고 하는 거예요.”

“저야 모르죠. 장롱 면허인데.”

“어머. 그럼 운전할 줄 몰라요?”

고개를 끄덕이자, 이하연이 아쉽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러더니 불쑥 말한다.

“남자들이 한 손으로 운전대 잡고 다른 손으로 보조석 잡으면서 뒤돌아보며 후진하는 거 엄청 멋지던데.”

그래서 뭘 어쩌라고? 뒤돌아보며 후진하긴커녕 두 손으로 운전대 잡고도 전진조차 못 하는 사람한테.

“아쉽게도 탈 줄 아는 건 자전거밖에 없네요.”

뭐가 또 웃긴 건지 한차례 까르르 웃은 이하연이 마무리로 흡끅거리며 말했다.

“그럼 자전거로 후진하면 되겠네.”

“응? 자전거는 후진 안 되는데?”

“그래요? 그건 몰랐네.”

“설마……?”

“자전거 못 타거든요.”

의외다 싶어서 그녀를 바라보자, 그녀는 혀를 쏙 내밀었다가 봐준다는 식으로 말하고 있었다.

“그럼 쌤쌤이네. 그쵸?”

쌤쌤은 무슨. 자전거하고 자동차가 비교가 되나? 막말로 자전거는 지금 당장 배우기 시작해도 한 시간이면 탈 수 있을 텐데. 어지간히 운동신경이 없지 않은 한. 그래도 기분이 나쁘진 않다. 혹여 내가 기라도 죽었을까 봐서 저러는 걸 아니까. 피식.

“그렇다 치죠.”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 사이 마트에 도착했다.

“마지막 기회니까, 말해봐요.”

“에? 마지막 기회요?”

“된장찌개 말고 다른 거 먹고 싶으면 솔직히…….”

“아뇨. 된장찌개 먹고 싶다니까요?”

“그렇다면야.”

어깨를 으쓱해 보이곤 카트를 밀어 마트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혹시 몰라 된장찌개 재료뿐만 아니라 몇 가지 야채와 과일, 간식으로 먹을 과자 등을 사고 바가 있는 신사동 쪽으로 향했다. 얼마 후 도착해 건물 지하로 내려가니 지난번과 다르게 문이 열려 있었다. 진짜네? 언니분이 와계신다고 하더니만.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해보니 벌써 11시다. 그렇다곤 해도 주말에 외출하기엔 좀 이른 시간인데. 참 부지런도 하지.

“들어가요.”

이하연을 따라 바로 들어섰다. 양손에 빵빵하게 부풀어 오른 비닐봉지를 들고서. 그렇게 약간은 볼품 사나운 모습으로 문턱을 넘어서는데 날 바라보는 여자들. 두 쌍의 눈동자가 반짝거리는 게 보인다. 역시 예상대로 한 명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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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웨이브 진 머리칼을 어깨까지 늘어뜨린 채 뚜렷한 이목구비만큼이나 화려한 복장을 하고 있는 여자와, 그와는 반대로 화장기 하나 없이 수수한 얼굴에 단정하다고 말하는 것조차 부족할 정도로 소탈해 보이는 여자. 청바지에 스웨터 한 장만 걸치고 있는 여자 쪽은 굵은 뿔테 안경 때문에 그런지, 어딘지 모르게 전문적인 일을 하는 사람의 냄새가 났다.

“막히지 않았나 봐? 일찍 왔네?”

외모가 화려한 쪽의 여자가 기다리기 지루했는지 하품을 하다말고 물어오고 있었다.

“오랜만이야. 잘 지냈지?”

그 옆에선 고혹적이라고 할 만큼 매력 넘치는 미소와 함께 이하연을 반겼고. 이하연 역시 반가웠는지 반색하며 외쳤다.

“현정 언니!”

수수한 차림의 여자 쪽이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달려드는 이하연을 껴안자, 옆에 앉아 있던 여자가 기가 막힌다는 듯 툴툴거렸다.

“와, 인생 확 허무해지네. 배은망덕한 것도 유분수지. 그동안 밥 사 먹여, 술 사줘, 그것도 모자라서 연애상담까지 해준 게 누군데……. 흡!”

“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화려한 쪽 여자의 입을 급히 틀어막으며 내 눈치를 살살 보고 있는 이하연을 보고 있자니, 대충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만하다. 눈웃음을 흘리며 날 의미심장하게 바라보는 언니란 분도 그렇고.

“처음 뵙겠습니다. 서진영입니다.”

“아, 예. 반가워요.”

이하연이 현정이라고 불렀던 여자, 즉 수수해 보이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커리어우먼 냄새를 풍기는 여자가 한차례 안경을 고쳐 쓰며 내게 명함을 내민다. 그 명함을 받아들고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KBC 예능국 PD 신현정. 예상대로네. 어딘지 모르게 프로페셔널한 분위기가 느껴지더니, 외모만 봐선 이하연이랑 친구라고 해도 믿을 정도인데, 실제론 나이 차가 좀 나나 보다.

“어우야, 뭐하다 왔는데 손이 이렇게 짜니? 너 손은 제대로 닦고 다니는…….”

“앙! 핥지 말…… 언니!”

“호호호. 발끈하기는. 안녕하세요. 이 칠칠치 못하고 반푼이 같은 녀석을 어언 20년이 다 되도록 물심양면으로 케어하고 있는 박유나예요.”

누군가에 대해서 알려면, 그 사람의 주변에 어떤 사람들이 있는지 보라고 했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확실히 이하연은 괜찮은 사람이다. 한쪽은 화려한 외모의 겉모습만큼이나 활달하고 유쾌한 반면, 또 한쪽은 역시나 보이는 외견대로 진중하고 다소곳하다. 무엇보다 둘 다 날 대함에 있어서 스스럼이 없다. 꼭 집어 뭣 때문이라고 말하긴 어렵지만, 한눈에도 귀티가 흐르고 있는 게 평범한 집안 출신 같아 보이지 않음에도. 여기까지 오는 동안, 혹시라도 무시당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던 게 우스워질 정도로 날 반겨주는 모습이었다. 뭐, 혹여 그런 대접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딱히 불만을 품지는 않았겠지만. 사람의 격을 층층이 나눠 피라미드 구조로 배치한다는 것 자체가 웃기는 일이지만, 엄연히 이놈의 사회는 그렇게 나누고 있다. 당연한 얘기지만, 굳이 말하면 난 피라미드에서 가장 아래쪽에 있다고 말할 수 있고. 실제로도 그동안 그런 취급을 받아온 것도 사실이었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저들은 별종이다. 이미 강형식에게서 어느 정도는 들었을 텐데도 고아에 무일푼, 고졸 출신의 요리사에게 관심을 두고 있는 이하연만큼이나. 나쁜 의미가 아니라 좋은 의미로…… 유유상종. 진짜 옛말, 하나도 틀린 게 없다는 거지.

“된장찌개 끓여 주신다고요? 하연이가 어찌나 자랑을 하던지. 기대해도 되겠죠?”

“언니 진짜!”

“뭐어? 네가 맛있다며? 그냥 맛있는 것도 아니고, 둘이 먹다가 둘 다 콱 죽어도 모를 정도라며? 그래서 아침도 안 먹고 나왔구만.”

“하아. 언니는 원래 아침 안 먹잖아?”

“어머? 무슨 말이니? 나도 아침 먹거든? 우리 오빠가 해주는 에그 베네딕트가 얼마나 맛있는데.”

이제는 포기했는지, 이하연이 한 손으로 이마를 짚고 있다가 한숨을 푹 내쉬며 돌아섰다.

“진영 씨, 신경 쓰지 마요. 나 참, 가게 좀 빌려달라고 했더니. 오지 말라니까 기어코 와서는……. 현정이 언니랑 유나 언니는 곧 갈 거니까 상관하지 말고…….”

“어머! 얘 좀 봐? 현정아, 우리 지금 저분한테 밀린 거 맞지? 와, 우리 하연이 많이 컸네. 언니 언니하면서 코 찔찔 흘리면서 쫓아다니던 게 엊그제 같은데. 하아, 내가 이런 대접 받으려고 가게를 빌려주고 밤새 졸린 눈을 부릅뜨고 연애상담을 해준…….”

“아 쫌!”

상황을 보니 화려한 쪽, 그러니까 현정이라는 분이 이 가게 주인인 거 같은데, 여전히 이하연과 투닥거리는 모습이 다툰다기보단 정다워 보인다는 게 내 솔직한 감상이었다. 아무튼, 난 신현정과 박유나를 한차례 바라보며 손을 내저었다.

“하연 씨, 괜찮아요.”

바 테이블 위로 비닐봉지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재료를 너무 많이 사 온 게 아닌가 걱정했는데, 오히려 잘됐네요.”

“어머 쿨하시기도 하지.”

“제가 좀 시원하긴 하죠.”

“호호호. 유머 감각까지. 키도 크고 훈남에다가. 괜찮다아∼. 햐아. 요년 요거. 그동안 무슨 결벽증이라도 걸린 듯 남자 곁엔 얼씬도 안 하더니만. 어디서 저런 멋진 남자를 만났대?”

“저희까진 신경 안 쓰셔도 되는데. 그냥 하연이 얼굴만 보고 갈 생각으로 온 거니까…….”

“아뇨. 숟가락 두 개만 더 올리면 되는 일인데요, 뭘.”

두 여자와 주거니 받거니 대화를 이어가며 바를 넘어 주방 쪽으로 옮겨갔다.

“그리고 밥은 원래 다 같이 먹어야 맛있는 거잖아요.”

그렇게 말한 뒤, 비닐봉지 안에서 식재료를 꺼내고 있을 때였다. 따라라라, 라라……. 갑자기 들려오는 음악 소리. 물론 그 소리는 귀로 들리는 소리가 아니라, 머릿속에서 울리는 소리였기 때문에 저들은 들을 수 없을 터였다. 아니나 다를까. 여자 셋이서 내 머릿속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는 상상도 못 한 채 각자의 개성대로 톤을 달리해 수다를 떨고 있을 때, 나레이션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한데, 뭐지? 이 타이밍에? 난 의아한 심정이 되어 나레이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따라라라, 라라……. - 이하연으로선 당황할 수밖에 없다. 그도 그럴 게, 그녀의 계획에 지금 같은 상황은 없었으니까. 물론 둘이서 오붓하게 데이트를 즐기려던 계획에 두 사람이 끼어들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것보다는 혹여라도 서진영이 부담스러워할까 봐 그게 더 걱정이었다.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슬그머니 올라간다. 좀 뜬금없는 타이밍에 들려온 나레이션이긴 했지만, 덕분에 이하연이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미소는 오래가지 않았다. - 그걸 알고 있는 서진영의 마음은 기껍기만 하다. 헐. 이젠 내 얘기를 아주 대놓고 하는구나. 웃긴다고 해야 할지. 다큐멘터리의 주인공도 아니고, 굳이 말하면 주인공인 강형식의 들러리 즉 서브 캐릭터에 불과한데 나까지 거론하는 걸 보니 그래도 내가 아주 비중이 없는 건 아닌가 보다. 그래. 다 좋은데, 바보 소리만 하지 마라.

“왜 그래요? 무슨 문제 있어요?”

쓴웃음을 짓고 있자, 날 쳐다보는 이하연이 은근히 걱정하는 눈치다. 얼른 멈췄던 손을 움직여 다시금 비닐봉지에서 식재료를 꺼내며 고개를 내저었다.

“문제는요. 어떻게 하면 맛있게 해줄까 생각했죠.”

싱긋 미소짓자, 그제야 안심했는지 이하연이 배시시 웃는다. 그 모습을 보며 비닐봉지를 뒤적거렸다. 어차피 나레이션은 귀로만 들으면 되니까. 몇 번 겪다 보니 어떤 얘기를 듣더라도 이젠 적어도 겉으론 내색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뭐, 바보 소리까지 들은 마당에 무슨…… 젠장. 근데 이 망할 놈의 나레이션은 내 평정심을 한방에 무너뜨리기로 작정했나 보다. - 그래도 서진영은 조심하는 게 좋을 거다. 현재 박유나는 임신 3주차. 그런 데다가 당뇨다. 임신성 당뇨는 아니지만, 임신 전에 진단되지 않아 본인은 당뇨인지도 모르는 상태. 그나마 다행인 건 초기라는 점이다. 어찌 되었든 위험한 상황임은 분명하다. 만일에 하나라도 서진영이 해준 음식을 먹고 탈이 나기라도 하면 이하연과의 관계에 적신호가 켜지는 건 물론이고, 자칫하면 강형식에게까지도 여파가 미칠 수 있다. 박유나의 아버지가 현재 강형식이 계획하고 있는 사업에 제법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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