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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의심 (2) (22/204)

#22. 의심 (2)2020.11.20.

순간 말문이 막혔다. 갑자기 그건 왜 물으시지? 아니, 그전에 어떻게 아셨을까? 뭐라 대답할까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가끔 술잔을 나눌 정도는 됩니다.”

조심스러운 얘기에 주방장님이 툭 하고 받아치셨다.

“아새끼래, 죄졌네? 내래 순사도 아닌데 뭘 그리 웅크리네? 쯧, 덩치는 산만 한 게 새가슴도 아니고…….”

어쩐지 죄송스러워져서 눈을 내리자, 주방장님은 고개를 몇 번 내저으시더니 말씀하셨다. 뜻밖의 얘기였다.

“야, 좋구나. 젊은것들끼리 술도 마시고. 내래 기생오라비 같은 상판 본 지 하두 오래돼서래 기억이 다 가물가물한데 말이야. 쌍간나 새끼. 전화 한 통 하면 어드래 손가락이라도 부러진다던? 고 간나한테 전하라우. 이 늙은이래 아주 안 볼 생각 아니면 날래 찾아오라고. 알았네?”

“……예.”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을 때, 주방장님은 이미 돌아서고 계셨다. 한데……. 어쩐지 입매가 슬쩍 올라가는 거 같던데. 잘못 본 건가?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을 때였다. 주방장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수고들 했다. 힘들 텐데 어서들 돌아가서 푹 쉬라우.”

대답 대신 고개를 숙여 보이며 돌아서는 요리사들. 그들 사이에서 나 역시 고개를 숙인 뒤 막 돌아서려는데, 고윤수 주방장님의 눈길이 내게서 떨어지지 않고 있다. 응? 뭔가 더 하실 말씀이 있는 듯 보였다. 한데, 그저 날 지긋이 쳐다보기만 하실 뿐 더는 말하지 않으신다. 그저 고개만 끄덕거리실 뿐. 그 옆에선 김진호 셰프가 담담한 눈빛으로 날 보고 계셨다. 뭐지? 어째 아침에 봤을 때랑 느낌이 좀 다른데?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라 까닭 없이 부담스럽게 느껴지는 건 왜일까? 뭐랄까. 어딘지 모르게 열기가 느껴지는 시선을 마주하고 있으려니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게 괜스레 몸이 떨려온다. 혹시 하실 말씀이라도 있나? 아니면 내가 뭐 실수라도 했나? 헉! 설마……. 내가 김진숙 회장에게 명함을 요구한 걸 들킨 거 아냐? 정말 그랬다면……. 꿀꺽. 침이 절로 넘어간다. 그것만으로도 모자라 진짜 뭐 됐다는 생각에 급격히 마르는 입술을 살짝 짓씹었다. 젠장. 너무 나댔나? 대놓고 묻지도 못하고 속으로만 않고 있을 때였다. 김진호 셰프의 입술이 달싹였다.

“저녁에는 나올 것 없다. 내일까지 푹 쉬고, 월요일에 나와라.”

어? 이건 또 무슨 시추에이션? 아니, 그 전에……. 그래도 되나? 아무리 오늘이 토요일이라지만 저녁 식사를 나 없이 준비한다고? 아, 이러니까 내가 무슨 대단한 사람이 된 것 같은 착각이 들긴 하는데, 주방 일이라는 게 요리하는 사람도 중요하지만 밑준비를 해주는, 속된말로 시다바리가 없으면 무지 고단하기 때문이다. 고윤수 주방장님은 출장이 있던 날에는 언제나 그렇듯 안 나오실 게 분명하고. 실제 음식이야 김진호 셰프가 하겠지만, 준석이 형 혼자서 뒤를 받쳐주긴 어려울 텐데. 한마디로 내가 쉬면 주방 안에 애로사항이 활짝 꽃핀다는 얘기다. 그만큼 생각지도 못했던 얘기인지라 고개를 갸웃거리자, 고윤수 주방장님이 옅은 미소와 함께 말씀하셨다.

“뭘 그리 놀라네? 그럼 온종일 일한 아새끼한테 저녁밥까지 지으라고 할 줄 알았네?”

“그, 그런 건 아니지만.”

무슨 말씀인지는 알겠는데.

“그래도 되겠습니까?”

“니래 없으면 주방이 안 돌아갈 것 같네?”

“아, 아뇨.”

원래 이런 건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눈을 깜빡거리고 있자, 고윤수 주방장님이 씨익 웃으며 얘기하셨다.

“처음이라 모르겠디만, 잘 들으라우.”

“…….”

“내래 강 회장님께 갚아야 할 빚이 있기는 하디만, 애초에 약속이 기랬디. 이 늙은이가 짓는 밥이 뭐이 기래 입에 맞는디는 몰라도 다들 나만 찾는 걸 어찌하겠니? 무슨 말인지디 알간? 앞으로도 종종 니래 날 도와주어야 한다는 거이디. 아니믄 힘이라곤 없는 이 늙은이래 혼자 밥솥을 드는 걸 보고만 있을 거이네?”

“아뇨. 그런 건 아니지만, 그래도…… 제가 빠지면 주방 식구들이 힘들 텐…….”

“일 없다 야. 니래 아직 살 만한가 본데, 가다가 주저앉디나 말라우. 쯧, 기렇게 비리비리 해가지고 닭 모가지나 비틀 수 있갔니?”

하아, 아닌 게 아니라 온몸 구석구석이 안 쑤신 곳이 없다. 농담이 아니라 이대로라면 오늘은 어찌어찌 견딘다고 하더라도 내일쯤엔 앓아누울는지도 모르겠다. 쯧, 준석이 형한테 듣기는 했지만, 출장이라는 게 이렇게 힘들 줄 몰랐던 것이다. 하기야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 고윤수 주방장님의 유명세 때문인지 아니면 진 회장에게 잘 보이려는 사람들이 많아서인지는 몰라도, 워낙 손님이 많이 몰려드는 데다가 음식 하나하나에 쏟는 정성도 장난이 아니라서 일반적인 케이터링 뷔페와는 비교가 불가했으니까. 게다가 생각해보면, 고윤수 주방장님께 여기저기에서 오퍼가 들어오는 게 어제오늘 일도 아니고. 그럴 때마다 강 회장댁 주방일까지 함께 하려면 몸이 견뎌내질 못하겠지. 한마디로 말해서 효율적으로 일하잔 얘기. 나중엔 좀 더 요령이 생겨서 또 어떨지 모르지만, 모르긴 몰라도 몇 차례에 걸쳐 출장에 익숙해질 때까진 오늘과 크게 다르지 않을 거 같다. 그렇긴 한데 좀 자존심이 상하네. 지난번에 선상에서 파티가 있었을 때, 준석이 형은 쉬지 않고…….

“아새끼래. 뭔 생각을 하기에 기래 눈알을 굴리고 자빠졌네? 쯧, 쓸데없는 생각은 집어치우고 하라는 대로 하라우. 아, 그리고 수당 말인데……. 오늘 일한 거이래 입금해놓을 테니 나중에 확인해보라.”

저렇게까지 말씀하시는데 무슨 말이 필요할까?

“……그렇게 하겠습니다.”

이 시점에선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대답이었다. *** 집으로 돌아간 뒤, 고윤수 주방장님의 얘기대로 난 주방이 아닌 숙소 쪽으로 향했다.

“예. 형. 그럼, 고생하세요. 예? 데, 데이트요? 아휴, 그게 무슨……. 저, 여자친구 없……. 큼, 여자고 뭐고, 솔직히 지금 너무 힘들어서, 가만있어도 절인 배추처럼 축축 늘어진다니까요. 예, 예. 그럴게요. 내일모레 봬요.”

그래도 미안한 마음에 준석이 형과 통화를 하기는 했다. 뭐, 형은 괜찮다고 하는데……. 여전히 마음 한편엔 껄끄러운 느낌이 남았지만 애써 무시하기로 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이제야 고윤수 주방장님의 말씀이 이해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몸이 천근만근 무거웠다. 팔다리에 한 5kg짜리 추를 하나씩 매단 것만 같았고, 기분 탓인지는 몰라도 아까부터 이마에 식은땀이 맺히는 거로도 모자라 등줄기가 뻐근한 게 축축해져 있다. 노가다판을 구르며 체력 하나만은 누구한테도 지지 않을 거라고 자신하고 있었지만……. 개뿔. 뒤늦게 밀려드는 피로감이 장난 아니다. 물먹은 솜이 따로 없달까. 숙소가 있는 건물까지 당도해서도 계단을 오를 생각에 한숨이 나올 정도였다. 카톡이 날아든 것도 그때였다. 살짝 귀찮은 마음에 확인할까 말까 하다가 핸드폰을 켰다.

- 아직도 일하는 중이에요?

참, 묘한 일이다. 몸은 여전히 힘든데, 방금까지 귀찮던 마음이 싹 날아간다. 물론 아까 준석이 형이 했던 말처럼 지금 당장 데이트하러 나갈 생각까진 없었고. 음, 지금 우리 두 사람의 관계가 데이트라는 단어를 써도 좋을지도 의심스럽지만. 여하튼 이하연의 아이디를 보고 입가에 미소를 베어 무는 동안에도 톡은 쉴 새 없이 날아들었다.

- 전 오늘도 밤샐 듯.

- 자기가 끓여준다는 된장찌개 생각하며 버티는 중.

- 설마 이제 와서 발뺌하는 건 아니겠죠?

- 앙! 그럼 확 물어버릴 거양!

큭큭큭. 물긴 뭘 물어. 언젠가 강형식이 얘기했던 그녀의 별명이 떠올랐다. 레오파드라고 했던가? 나도 모르게 입술 사이로 웃음이 흘러나온다. 그땐 별명이 뭐 그따윈가 싶었는데, 이제 와선 어쩐지 묘하게 어울린다는 생각이 든다. 살짝 귀엽다는 느낌과 함께 웃기기도 하고. 킥킥대며 계단을 올랐다. 신기하게도 어느새 무겁기만 하던 발걸음이 가벼워져 있었다.

---- 이제 막 일 끝내고 들어가는 중입니다.

기다렸다는 듯 답톡이 날아들었다.

- 되게 피곤했나 봐요.

응? 그게 톡으로 느껴지나?

--- 오늘은 너무 피곤해서 일찍 자려고요.

희한하단 생각에 고개를 갸웃거릴 때 톡이 연달아 날아든다.

- 어뜩해.

- 피곤한 게 여기까지 막 느껴져.

- 얼른 씻고 푹 자요.

- 아, 오늘은 내 꿈 꾸지 않아도 안 삐칠게요.

- 내일 봐요.

평소처럼 대화가 좀 더 길어질 줄 알았는데, 더 이상 톡은 날아들지 않았다. 거참. 센스가 좋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배려심이 깊은 건가? 어느 쪽이든 나쁘지 않다.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방문을 열고 숙소로 들어갔다. 그리고 침대로 몸을 던졌다.

“아, 씻어야 하는데…….”

중얼거려 보지만, 가라앉듯 점차 감각이 둔해진다. 그러다가 팟하고 의식이 날아가 버렸다. *** 어젯밤. 어찌나 피곤한지 몸이 돌덩이처럼 느껴졌었다. 아니 물먹은 솜인가? 아무튼, 밥도 안 먹고 침대에 쓰러져 눈을 감았더랬다. 그걸로 끝이었다. 전구의 필라멘트 끊어지듯 의식이 끊겼다가 눈을 떠보니 새벽 4시다. 젠장! 망했네. 하필이면 제일 어중간한 때에 눈이 떠지다니. 이게 다 그놈의 머랭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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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걸 치겠다고 지난주 내내 이 시간대에 일어나다 보니 어느새 몸이 기억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하아, 어쩐다? 오늘은 쉬라고 했는데, 주방에 나가기도 뭐하고. 그렇다고 이 시간에 이하연한테 전화해서 만나자고 할 수도 없고. 강형식이나 깨워서 괴롭힐까? 새벽까지 집에 못 들어갈 거라고 했었지, 아마? 어제 보니까 스트레스 좀 받았겠던데, 모르긴 몰라도 지금쯤 시체처럼 쓰러져 자고 있을 거다. 진짜 전화 한번 해봐? 크큭. 진짜 그랬다간 욕부터 날리지 않을까 생각하곤 픽 웃고 말았다. 어? 근데 핸드폰을 확인해 보니, 강형식한테서 온 전화가 왔었던 모양이다. 부재중 전화가 한두 통이 아니라 열 통이 넘는다. 뿐만 아니라 톡도 남겨놓았다. 아, 어제 피곤하긴 진짜 피곤했나 보다. 아무리 진동으로 해놨다지만, 전화 온 걸 전혀 몰랐네. 고개를 내저으며 톡을 확인했다.

- ㅊ:ᅟᅵᆫ궁ㅑ 자ㅏ냐?

- ㅊㅟ하당ᅟᅠᆼᅟᅠᆼ

- 자냐고ㅗ?

- 아 ㅏ 기ㅂㅜᅟᅠᆫ 조따

- ㄴ ᄌᅠᆫ다

뭐야? 이건? 외계어도 아니고. 어떻게 맞춤법이 맞는 게 하나도 없다. 아니, 그전에 한국어 맞아? 근데 다 알아보는 나는 무엇? 헐. 한글이 이래서 위대하단 거다. 초성만 늘어놔도 뭔 소리를 하는지 다 알 수가 있으니. 영문 자음을 백날 늘어놔 봐라 알아볼 수 있나. 그런 위대한 글자를 만드신 세종대왕님과 선조들은 더 위대한 거고. 아무튼, 핸드폰을 거꾸로 들고 보나 제대로 보나 가독성은 비슷한 톡을 읽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지간히 취했었나 보다. 거참. 긴장하면 안 취한다는데……. 강 회장님이 먼저 들어가시고, 남아서 더 마신 건가? 뭐, 딱히 할 말이 있어서 톡한 거 같진 않고. 그저 술 마시고 내가 떠오른 듯하다. 이거 좋아해야 하는 건지 어쩐 건지 알쏭달쏭하네. 지금이라도 톡을 날려? 아니면 전화할까? 잠시 고민하다가 일단 전화하는 건 관두기로 했다. 톡이 날아온 시간을 보니 새벽 2시경. 한창 꿀잠 자고 있을 시간인데, 괜히 깨울 필요 없겠지. 흠, 톡이나 한 통 남겨놓을까?

- 한국말도 못 하냐?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네. 이거 보면 전화해. 얘기할 것도 있으니까.

이 정도면 됐겠지? 한데 명함은 언제 주는 게 나으려나? 오늘 나갔다 와서 줘? 아니면 상황 봐서 필요하다 싶을 때 줄까? 참네, 내가 그걸 어떻게 알고? 사업은 녀석이 하는 건데, 명함이 필요할 때가 언제인지 내가 어떻게 아냐고. 아, 생각해보니……. 강형식이 김진숙 회장과 이미 아는 사이인 거 아냐? 그럼 진짜 뻘짓한 건데. 에라 모르겠다. 혼자 북 치고 장구 치는 것도 정도껏 해야지. 이따 물어보면 될 거를. 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몸을 일으켰다. 집안에 앉아서 잡생각이나 하고 있느니, 차라리 산책이라도 좀 하고 올까 싶어서. 음, 오늘부터 날씨가 많이 추워진다고 하던데……. 조금 망설이긴 했지만, 이내 결정을 내리곤 샤워부터 했다. 그리고 가벼운 차림에 오리털 파카를 꺼내 입곤 밖으로 나갔다. 지이이이잉. CCTV 카메라가 이쪽을 향해 움직였다가 다시 돌아가는 게 보인다. 저택 내 도로를 비롯해 산책로까지. 사람들이 오가는 길목에는 CCTV가 촘촘히 깔렸다. 심지어 사람이 오가지 않는 사각지대까지도. 이정도면 가히 철통 보안이라고 해도 되지 않을……. 어? 난 어둠 속에서 옅게 빛나는 가로등 불빛 사이로 흔들리는 그림자에 눈을 크게 떴다. 저거 사람 아닌가? 게다가 뭐라고 설명하긴 어려운데, 어쩐지 눈에 익은 듯…….

“아!”

그때 그 남자! 강형식과 함께 차를 몰고 나가기 전날 밤 보았던 남자를 떠올리곤 달리기 시작했다. 앞뒤를 생각하기도 전에 몸이 먼저 움직인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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