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 의심 (1) (21/204)

#21. 의심 (1)2020.11.18.

역시 예상대로다. 날 쳐다보는 김진숙 회장의 얼굴에는 황당하다는 표정이 역력하다. 하긴, 욕심이 화를 부른다는 건 알고 있지? 하고 경고 아닌 경고를 한 게 조금 전인데, 대뜸 내가 명함을 요구했으니 그럴 수밖에. 명함이라는 게 원래부터도 그 사람의 얼굴이나 마찬가지. 하물며 한 그룹의 회장이야 말할 것도 없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무려 C 마트 회장의 명함이다. 그걸 아무렇지도 않게 달라고 했으니 대놓고 혀를 차지 않는 것만 해도 다행이다. 그렇긴 해도 역시 김진숙 회장은 기가 막힌 모양이다. 착 가라앉은 눈빛으로 물어왔다.

“그깟 종이쪼가리로 되겠어요?”

비아냥거리는 말투는 아니었지만, 어떻게 들어도 반어적인 표현이다. 얼굴에 떠오른 표정만 봐도 확실하다. 쓴웃음이 나오려는 걸 참았다. 대기업 회장의 명함이 종이쪼가리면, 한국은행에서 발행하는 오만 원권 지폐도 종이쪼가리겠네. 난 담담한 표정으로 답했다. 듣기에 따라선 대답이라고 하기에 어려운 얘기였다.

“제가 전화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김진숙 회장의 표정이 또다시 변하는 게 느껴진다.

16561216971288.jpg

  조금 전 살짝 경멸 어린 조소를 머금고 있었다면, 지금은 호기심이 가득한 얼굴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상관없었지만.

“연락할 생각도 없으면서 명함은 받아서 뭐하려고요?”

소문이 사실인 듯. 결코 목소리를 높이는 법이 없지만, 대신 돌려 말하는 법도 없다고 하더니만.

“줄 사람이 있어서 그럽니다.”

김진숙 회장의 눈이 빛났다. 마치 잘 벼려진 칼날 같은 날카로움이 깃들어 있었다. 그러더니 이내 고개를 살짝 기울인다. 흠, 그렇게나 뜻밖의 대답이었던가. 하긴 누구라도 그러긴 하겠지. 속으로 납득하며 바라보니, 대한민국 유통업계를 떡 주무르듯 하는 중년 여자의 얼굴에는 이제 호기심 대신에 의아함이 떠올랐다. 그러면서도 더는 묻지 않는다. 아니, 눈빛으로 묻고 있었다. 그래서 명함을 주려고 하는 사람이 누구냐고. 느낌이 온다. 여기가 특이점이란 걸. 이를테면 승부처. 어떻게 대답하느냐에 따라서 명함을 받을 수도 있고, 못 받을 수도 있다. 그게 아니라도 내가 던진 승부수가 먹히지 않는다면, 설사 명함을 받더라도 원하는 결과는 얻기 어려울 게 분명하다. 그땐 정말이지 종이쪼가리에 불과한 게 되겠지. 이쯤이면 말하겠지 싶은 타이밍에서 한 발 더 빼며 시간을 끌었다. 예상대로라면 상대방의 주의력은 이미 극에 이르렀을 거다. 동시에 참을성도 한계에 다다랐겠지만. 조금만 더 늦게 말하면 당장 멱살을 잡아 와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내가 들어도 놀랄 정도로 거침없는 언사가 튀어나갔다.

“회장님께도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닐 겁니다.”

날 빤히 쳐다보는 김진숙 회장. 담담하기만 한 눈빛인데……. 젠장. 내 속을 들여다보다 못해 후벼 파는 듯한 느낌에 등골이 다 찌르르하다. 절로 침이 넘어가는 걸 들키지 않으려 애쓰고 있을 때 김진숙 회장이 웃는다. 비릿한 음성이 들려왔다.

“장사?”

“듣기 거북하셨다면 죄송합니다.”

고개를 꾸벅 숙여 보이곤 정정했다.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얘기가 오갈 거라고 확신합니다.”

진심이었다. 내가 아는 강형식이라면, 분명 그럴 거라고 믿었으니까. 애당초 제대로 된 거래가 아니면 연락조차 안 할 게 틀림없다. 다른 사촌들이 어떻게든 강 회장의 눈에 들려고 발악할 때도 쉽사리 고개를 숙이지 않던 그 자존심이라면. 녀석이 김진숙 회장에게 전화를 한다는 시점에서 이미 딜을 할 준비가 끝났다는 얘기일 터다. 만일 전화를 하지 않는다면, 그건 그것대로 나쁘지 않다. 서로에게 아무런 접점도 없다는 얘기일 테니.

“모르는 전화는 안 받는데…….”

몇 번이나 질문에서 살짝 벗어난 대답이 이어졌지만, 김진숙 회장은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다. 대신 이번엔 묘한 눈빛으로 날 바라보고 있다. 그러더니 불쑥 묻는다.

“보아하니 누구냐고 물어도 대답해줄 거 같지 않고. 그럼 난 계속 기다리고 있어야겠네?”

고개를 끄덕이진 않았지만, 부정하지도 않았다. 전화할지 말지를 결정하는 게 내가 아니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당장에 김진숙 회장이 화를 내며 고함을 질러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으니까. 나라고 해서 지금 내가 벌이고 있는 짓거리가 얼마나 황당하고 또 무례한 짓인지 모르진 않는다. 무려 대기업 회장한테 얼굴은커녕 이름 석 자도 모르는 사람이 언제 전화할지도 모르니 대기 타고 있으라는 말이나 다름없는 셈. 여기가 미국도 아니고 대한민국, 아니 설사 미국이라고 해도 사회적 격차를 고려하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뭐, 나로선 최악의 경우 명함을 안 받아도 그만이니 상관없지만. 나아가 설사 김진숙 회장이 불같이 화를 낸다고 해도 그깟 쓴소리 한번 듣는 게 뭐가 대수겠냐고. 다만……. 말없이 날 가만히 바라보는 김진숙 회장의 눈빛은 고요한 가운데 깊기만 하다. 그 눈빛은 포식자. 그중에서도 정점에 선 맹수가 먹잇감을 앞에 두고서 보이는 그것이었다. 후우, 살 떨린다는 게 어떤 기분인지 오늘에서야 알 것 같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곤 있지만, 저 눈빛을 대하고 있으니 나도 모르게 시선을 돌리고만 싶다. 몸 안의 장기란 장기는 다 꿈틀거리면서 금방이라도 제자리를 이탈할 것만 같은 느낌이라서. 그러거나 말거나 조금의 흔들림도 없는 눈동자로 날 바라보는 김진숙 회장. 그러다 말고, 한순간 눈빛을 풀더니 다리를 한차례 꼬며 입꼬리를 살짝 추켜올렸다. 김진숙 회장은 온몸으로 말하고 있었다. 흥미롭다고. 그 태도는 마치 내가 한 그 터무니없을 정도로 당찬 요구가 정말 자신을 재밌게 해줄 수 있느냐고 묻고 있는 듯했다. 그렇게 잠시 날 응시하던 김진숙 회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스스로 묻고 스스로 납득한 건가? 아니면 이쯤에서 넘어가겠다는 건가? 그것도 아니라면……. 시험? 뭔지는 몰라도 김진숙 회장은 핸드백에서 명함지갑을 꺼내 손바닥보다도 작은 종이쪼가리를 꺼내 내밀었다. 그러면서 떠보듯 슬쩍 물었다.

“힌트라도 주지?”

난 옅은 미소를 베어 물었다. 죽은 힘을 다해.

“선물상자는 마지막에 푸는 법이라지요. 그러니…… 저따위가 회장님의 즐거움을 뺏을 순 없지 않겠습니까?”

응? 하는 얼굴이 되더니, 김진숙 회장이 웃음을 터뜨렸다. 재미있다는 듯 한참을 웃더니, 명함을 갈무리하는 날 바라보며 한마디 덧붙였다.

“그래요. 기대하고 있을게요.”

그녀에게서 명함을 받고, 90년대 대한민국을 휩쓸었던 폴더폰처럼 허리를 반으로 접어 감사를 표한 뒤 돌아섰다. 후아, 더럽게 떨리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내 딴엔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게 보이려 안간힘을 쓰며 그 자리를 벗어났다. 강형식. 너 진짜 이 형한테 잘해라. 아니, 아니. 나한테는 둘째치고 나중에 김진숙 회장이나 실망 시키지 않길 바랄 뿐이다. *** 잔치가 완전히 끝나기도 전에 호텔을 빠져나온 김진숙 회장은 차가 출발하고도 한참이 지나도록 아무런 말이 없었다. 뭘 그리 생각하는지 창밖을 바라보며 눈을 빛내고 있던 김진숙 회장이 느닷없이 물었다.

“어떻게 생각해?”

말 그대로 밑도 끝도 없는 질문이었지만, 김 회장을 모셔온 지도 벌써 10여 년.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할 박 실장이 아니었다. 그녀의 질문에 앞쪽 보조석에 앉아 있던 박 실장이 안경을 추어올리며 대답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금테 안경 속에서 그의 눈이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건방져 보였습니다.”

틀린 말도 아니었던지라 김진숙 회장은 딱히 부정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녀는 말없이 기다렸다. 그녀가 아는 박 실장이라면 이걸로 얘기를 끝낼 리 없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아니나 다를까. 박 실장이 특유의 낮고 느린 어투로 말을 잇고 있었다.

“그렇긴 해도, 돈 몇 푼에 흔들릴 사람 같진 않더군요.”

잠시 생각에 잠기던 김진숙 회장이 입꼬리를 슬며시 끌어올렸다.

“스물은 넘었을 테고. 서연이 나이쯤 되어 보이던데. 후후, 제법 강단이 있어.”

“알아볼까요?”

인재 욕심이 끝이 없는 김진숙 회장인지라 그렇게 물은 터인데, 대답은 없었다. 대신 다시 한번 낮게 웃는 소리가 들려오고, 김진숙 회장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어느새 그녀의 목소리는 살짝 풀린 채 나른함마저 느껴지고 있었다.

“선물상자라고 했던가? 그것부터 뜯고 나서.”

더 이상은 관심 없다는 듯 눈을 감고 좌석 등받이에 몸을 묻는 그녀. 김진숙 회장의 귓가로 박 실장의 음성이 다시금 들려온 것도 그때였다.

“유쾌해 보이십니다.”

“그러게. 늙은 너구리의 생일잔치라서 지겨울 줄 알았는데 말이지. 호호호. 이래서 세상이 재밌는 거라니까.”

그러더니 한차례 기지개를 켜며 졸린 듯 얘기했다.

“나른한 오후네. 회의 들어가기 전에 잠도 좀 깰 겸, 간만에 스쿼시 어때?”

“회의 때까진 두 시간 정도 여유가 있습니다.”

“그럼 가는 거로?”

“예. 그렇게 하죠.”

박 실장이 옆자리, 운전석에서 핸들을 잡고 있는 남자에게 말했다.

“김 기사님, 항상 가던 곳으로 부탁드립니다.”

언제까지나 예의를 잃지 않고 말하는 박 실장의 얘기를 들으며 김진숙 회장은 슬며시 눈을 감았다. 겨울이 코앞인지라 이상하게도 따뜻한 차 안에만 들어오면 졸음이 쏟아졌기 때문이다. *** 잔치는 끝났다. 그럼에도 강형식을 만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그를 보지 못했다는 건 아니다. 강 회장을 따라 호텔을 떠나며 내게 눈짓으로나마 인사를 나누는 게 다였을 뿐. 어쩔 수 없지. 명함 한 장 손에 들려주자고 강 회장 앞을 막아설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 물론 그전에 그를 따로 불러낼 만큼 내가 배포가 큰 것도 아니었고. 뭐, 굳이 지금 꼭 만나야 하는 건 아니잖아?

- 지루해 미치겠다.

꼭 명함 때문이 아니라도 말 한마디 제대로 나누지 못하고 보내는 게 아쉬워서 강형식이 멀어지는 걸 지켜보다가 돌아서고 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날아온 톡이었다.

- 숨도 턱턱 막히고.

강 회장과 함께 움직이는 모양인데, 굳이 보지 않아도 대충 어떤 상황인지 알겠다.

--- ㅋㅋ 왜? 안 하던 짓 하려니까 몸이 배배 꼬이냐?

짐작이 가니 웃지 않을 수 없다. 강 회장 옆에 다소곳이 앉아서 갓 시집온 새색시처럼 얌전을 떨고 있는 녀석의 모습이 그려져서.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웃겨 킥킥거리자, 저만치서 김진호 셰프가 묘한 눈길로 날 바라보는 게 느껴진다. 괜스레 멋쩍어져서 돌아섰을 때 다시금 톡이 날아들었다.

- 그러니까. 안 하던 짓 하려니까, 돌겠다.

--- 자식하곤. 그것도 다 투자라고 생각해.

부모·자식 간에 투자 운운하는 것도 웃기긴 한데, 지금으로선 아주 틀린 얘기도 아니다. 바닥까지 떨어지다 못해 지하까지 파고든 불신을 끌어올리는 일은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니니까 말이다.

- 와, 남의 일이라고 너무 쉽게 말하는 거 아냐?

--- 그럼 뭐 어쩌라고?

- 후! 그래. 격려 고맙다, 이 자식아.

--- 아무튼 애써라. 내가 좀 바빠서. 아, 나중에 시간 날 때 연락하고.

- 응? 무슨 일 있어?

하여간 눈치 하난……. 혀를 차며 답톡을 날렸다.

--- 그런 게 있어. 저녁에 들어가면 얘기해줄게.

궁금한지 득달같이 날아드는 톡.

- ㅋ 분위기로 봐선 새벽이나 돼야 들어갈 거 같은데? 대체 뭔데 그래?

명함을 주긴 해야 할 테지만, 그렇다고 그런 거로 생색내고 싶진 않았다. 벌써부터 설레발 치고 싶은 마음도 없었고.

--- 별일 아냐. 뭐, 오늘만 날이 아니니까 나중에 보면 돼지.

한참 답톡이 안 오길래 알겠다는 얘긴가 보다 했는데……. 난데없이 날아든 톡이 묘했다.

- 내가 말했던가?

응? 이건 또 무슨? 뭔가 중요한 얘기라도 있는 건가?

--- 뭘?

- ㅎㅎㅎ 이제부턴 할아버지랑 같이 밥 먹을까 해서.

무슨 뜻인가 싶어서 잠시 생각하다가, 아침저녁으로 식탁에서 보이지 않던 녀석이 생각나서 미소지었다.

--- 그거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 잘 생각했다. 가족들이랑 잘 지낸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이지.

- 아직 그렇게까진 아니고.

--- 우선 한 걸음 내디뎠다는 게 중요한 거지.

- 그런가?

--- 그래. 파이팅이다.

- ㅋㅋㅋ 땡큐다.

역시 무슨 일이든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말은 조금도 틀리지 않은가 보다. 어떤 식으로든 강형식이 변해가고 있다는 걸 느끼며 미소지었을 때, 고윤수 주방장님의 음성이 들렸다.

“서진영이.”

“예, 예?”

얼른 핸드폰을 치우며 대답하자, 고윤수 주방장님이 물으셨다.

“니래 강형식이랑 친하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