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출장 (3)2020.11.15.
요리도, 서빙도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그렇게 손님들이 식사를 하는 동안 진 회장의 여든 번째 생신을 축하하는 각계각층의 인사가 이어졌고. 그 뒤론 진 회장의 자녀들이 고맙다고 화답했으며, 이어서 손주들이 나와 재롱 수준을 넘어선 재주를 펼쳐 보였다. 와, 무슨 콩쿠르도 아니고. 다들 수준이 장난 아니다. 영국에서 유학 중에 잠시 들어왔다는 손녀가 피아노를 칠 때는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진짜 무슨 공연장에라도 온줄 알았다니까. 취미로 배운 거라며? 근데 무슨……. 지금 영국에서 배우고 있는 건 화학 계통이라고 하던데. 과연 재벌집이라 그런지, 제대로 가르친 모양이다. 그래서 그런지 손님들도 즐거운 모양이었다. 진 회장이 자랑스러워하는 동안, 몇몇 회장들은 기분 좋게 술잔을 들어 올리며 부럽다는 말까지 한다. 뭐, 대부분 빈말이겠지만. 그들 중에는 대현 그룹 회장도 보였는데……. 이하연은 안 온 모양이지? 능력이 뛰어날지는 몰라도 나이에 걸맞지 않은, 기획이사라는 그녀의 직책을 보자면, 대현 그룹 회장이 할아버지인지 아닌지는 몰라도 혈연관계인 것만은 분명한데. 톡이라도 보내볼까? 피식 웃고 말았다. 됐다. 지금 그럴 때냐? 안 온 거면 다 이유가 있겠지. 그건 그렇고. 이제야 좀 살 것 같네. 아우 씨. 아까까지만 해도 계속해서 머릿속에서 나레이션이 울려대는 탓에 어찌나 정신이 없던지. 같은 말들을 계속해서 듣고 있자니, 속이 다 울렁거릴 정도였다. 그래도 다행히 나레이션이 말한 세 사람은 만족한 표정인 듯했다. 당연히 맛 때문은 아니었다. 하긴 누군들 안 그러겠냐고. 결과적으론 손님들의 건강과 현재 몸 상태를 파악해서 음식을 따로 준비해둘 정도로 세심하게 배려한 셈이니. 감동을 안 하는 게 더 어려울 테지. 만족한 얼굴로 홀 쪽을 바라보다가 돌아서던 나는 멈칫하고 말았다. 김진호 셰프와 눈이 마주쳤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곧바로 돌아서는 김진호 셰프를 보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침에 보았을 때랑 날 보는 눈빛이 조금 다른 듯한데. 뭘까? 설마 나레이션의 비밀에 대해 아는 건 아닐 테고. 어휴. 모르겠다. 그쪽으론 이제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 않다. 그랬다가는 진짜 두통이라도 생길 거 같아서. 난 한숨을 내쉬곤 제자리로 돌아갔다. 한고비 넘겼으니, 이젠 내게 주워진 일에 몰두해야 할 시점이었으니까. *** 진 회장은 기분이 좋았다. 아들딸들이며, 지인들이 건네는 인사가 반쯤은 겉치레에 불과하다는 걸 모르진 않지만, 개중엔 진심 어린 말들도 있어서 그를 즐겁게 해주었던 것이다. 특히 손주들의 재롱은 말 그대로 재롱이었다. 역시 사람은 돈이 많든 적든 가정을 이루어야 한다. 늙으면 남는 건 사람, 특히 가족밖에 없는 법이니. 그리고 돈이 일정 수준에 다다르면 권력과 명예에 목을 맨다는 말도 실감한다. 봐라. 지금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금쪽같은 토요일에 굳이 여기까지 와서 자신의 생일을 축하해주고 있느냐 말이다.
“축하드립니다. 회장님.”
“어이구, 이게 누군가? 김 국장 아닌가. 그래, 요즘 KBC는 어떤가? 전생황후……라고 했던가? 며칠 전에 끝난 드라마가 초대박을 쳤다던데?”
“전부 회장님 덕분이지요.”
“예끼, 사람하곤. 입에 침이나 바르시게. 드라마가 대박을 친 게 감독이랑 작가 그리고 배우들 덕분인 거지. 그게 왜 나 때문인가?”
“아이고. 섭섭한 말씀을. KS 그룹에서 도와주지 않았으면 드라마 제작이 가당키나 하겠습니까?”
무슨 말인지 모를 진 회장이 아니다. 사실이기도 하고. 방송사나 신문사나 결국 수익구조는 간단하다. 다른 수익처가 아주 없는 건 아니지만, 광고가 절반을 넘어간다. 아니, 대부분이라고 해도 전혀 무리가 아닌 것이다. 드라마 역시 광고가 붙지 않으면 예산이 모자랄 수밖에 없고, 그러면 자연스럽게 퀄리티가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드라마에 전폭적으로 PPL을 주고 방송 시작 전후에 광고를 때려 넣은 KS 그룹 전생황후의 대박에 많은 부분 기여했다는 걸 부정할 수만은 없으리라.
“허허허. 그래, 그래. 그리 생각해주면 나야 고맙지.”
“저야말로 감사드리죠. 늘 신경 써주시니. 하하하. 솔직히 감동했습니다. 제가 당뇨 때문에 고생하는지는 어떻게 아시고, 음식까지 신경 써줄 거라곤 정말 몰랐습니다.”
“어? 그……야 당연히 그래야지. 김 국장은 내게 식구 같은 사람 아닌가?”
KBC의 김동하 국장이 물러가고 난 뒤, 진 회장은 턱을 쓰다듬다가 비서실장을 불렀다. 그러곤 몇 가지 묻고는 잠시 기다렸다. 얼마 후 돌아온 비서실장이 그의 귀에 대고 자신이 알아온 바를 속닥이자, 진 회장이 한차례 눈을 빛내더니 주방 쪽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
“고맙소. 덕분에 내 생일이 더욱 뜻깊은 자리가 된 것 같소.”
지위고하를 떠나서 한길을 우직하게 걸어온 장인에게 보내는 감사였다.
“별말씀을 하십네다. 내래 할 일을 했을 뿐이디요.”
“참, 언제 봐도 한결같소이다. 그래서 더 믿음이 가는 거지만. 그래도 그런 일이 있으면 미리 언질도 주고 할 것이지. 허허허. 아무튼, 김 국장도 그렇고, 최홍태 부사장도 그렇고. 고맙다고 하더이다.”
“기렇다니 다행입네다.”
진 회장은 고윤수 주방장님의 손을 잡고선 몇 번이나 손등을 두드리다 돌아갔다. 얼굴에는 만면 가득 웃음을 잃지 않고 있었고. 여기까지 바란 건 아니었는데, 어쨌든 다행이다. 나중에라도 문제가 될 여지는 없어 보여서. 그렇긴 한데……. 아씨. 아까부터 날 바라보는 김진호 셰프의 눈빛이 예사롭지가 않다. 아무래도 너무 나댔다고 생각하시는 게 아닐지. 때문에 난 되도록 김진호 셰프와 눈이 마주치지 않으려 노력하며 괜스레 밧드의 고기들만 뒤집고 있었다. 그러던 참이었다.
“에?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서빙 보는 직원 한 명이 와서는 조심스럽게 얘기하고 있었다.
“김진숙 회장님께서 찾으십니다.”
헐! 그분이 왜 날? 당황해서 고윤수 주방장님께 눈길을 돌렸다가 이번엔 황당해지고 말았다. 묘한 웃음을 흘리시며 손짓을 하시는 게 아닌가. 안쪽이 아니라 바깥쪽으로 내저으시며. 가보란 얘기. 나 참. 영문이 알고 보내시든가 하실 일이지. 내심 짐작되는 바가 아주 없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혹시 몰라 설레발치거나 하지는 않았다. 솔직히 온전히 내 능력과 노력으로 인정받는 것도 아니고, 나레이션의 능력을 빌린 것에 불과하기도 하고 말이다. 게다가 요리사가 요리를 잘해야지, 딴 걸 잘한다고 칭찬받아봐야 얻다 쓰겠냐고.
“그럼, 잠시 다녀오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여 보이는 주방장님. 그리고 뭔가 묘한 눈빛으로 날 바라보는 김진호 셰프였다. ***
“저 친구 뭡니까?”
서진영이 주방을 나가는 모습을 보다가 김진호가 물었다.
“니래 눈이 없네?”
“희한해서 그럽니다. 솔직히 저 나이 땐 제 앞가림하기도 바쁠 텐데, 당장 눈앞에 있는 일들보다 사람 먼저 챙긴다는 게……. 성실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건 너무 뜻밖이군요.”
“기거이 뭐가 그리 뜻밖이가? 요리사는 사람 아니가? 사람이 사람부터 챙기는 거이야 당연한 일이디.”
“그걸 알 만한 나이가 아니니까 하는 얘기 아닙니까? 그리고 안다고 해서 실제로 그렇게 하긴 더 어려운 일이고요.”
“기렇기야 하디.”
기분 좋게 웃으며 얘기하던 고윤수 주방장이 단단히 못을 박았다.
“명심하라우. 저 아새끼래 기럴 놈이 아니란 건 알지만, 기래도 사람이니까 모르는 거이야. 기러니까, 너무 띄워주디 말고, 지금껏 하던 대로만 하라우.”
알 것 같았다. 조금 전 진 회장이 와서 고맙다고 하는데도 그 공을 서진영에게 넘기지 않은 것도 그런 맥락일 터였다. 사람이란 너무 잘나도 질투와 시기를 받는 법. 그래선 한창 커야 할 시기에 자칫 부러지거나 짓밟힐 수도 있다. 그게 아니라도 제 딴에 잘났다는 자만심에 스스로를 망가뜨릴 수도 있고. 그걸 가능성 자체를 애초에 차단하겠다는 게 고윤수 주방장의 생각일 터다.
“한데 서진영이 저런 녀석이란 건 또 어떻게 아셨습니까?”
고윤수 주방은 빙그레 웃더니 대답 대신 되물었다.
“지난번에 회장님께 국밥 올린 일도 모르겠구만?”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더 이상 말없이 고개만 주억거리는 고윤수 주방장을 보다가 김진호 셰프가 홀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러면서 중얼거렸다.
“이제 조금은…… 알겠군요. 주방장님이 왜 저 녀석을 신경 쓰시는지.”
주방 밖을 바라보며 은근히 눈을 빛내고 있는 김진호를 보다가 고윤수 주방장이 툭 하고 내뱉었다.
“그거이 다 타고난 성품 아니겠니.”
피식.
“그건 그렇죠. 그런 게 가르친다고 되겠습니까?”
홀을 가로지르고 있는 서진영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는 김진호였다.
*** 김진숙 회장이 앉아 있는 테이블 앞에 서서 공손히 인사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서진영입니다.”
“그래요. 반가워요.”
TV에서 보았던 대로 부드러운 인상을 지닌 여자였다. 나이는 사십 대. 비교적 젊은 나이로 회사를 물려받아 국내 제일의 마트로 성장시킨 엄청난 사람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가만히 날 올려다보고 있는데도 그 자체로 카리스마가 느껴진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지, 시간이 길어지자 슬슬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다행히 오래가진 않았다.
“샐러드 맛있었어요.”
“맛있게 드셨다니 다행입니다.”
톡톡톡. 장단 맞추듯 유난히 길고 가는 손으로 테이블을 두드리던 김진숙 회장은 내가 그쪽으로 시선을 던지자, 입가에 기분 좋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고등학교 때까지 피아노를 했던지라. 혹, 불쾌했다면 미안해요.”
“아, 아닙니다.”
한층 더 미소가 진해진 얼굴. 김진숙 회장의 볼에 우물처럼 보조개가 살짝 파여 있었다.
“그래서…….”
“…….”
“제가 근래 들어서 채식한다는 건 어떻게 알았죠?”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다. 또 뻥을 쳐야 하나? 어쩐다? 그냥 뉴스에 봤다고 해야 할…….
“제 측근들 외에는 아무도 모르는 사실인데. 그쪽은 어떻게 알았을까?”
고개를 모로 기울인 채 김진숙 회장은 여전히 미소를 잃지 않고 있었다. 음……. 이것 참. 뭐라 대답할지 몰라서 한참을 머뭇거렸다. 그런데도 김진숙 회장은 조금도 재촉하지 않고 기다려주었다. 그렇긴 하지만, 그건 곧 대답을 듣지 않고선 그냥 넘어가지 않겠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결국, 난 생각 끝에 얘기했다.
“누구라고 말씀드리긴 좀 그렇고요. 제가 아는 분이 C마트 쪽에서 일하고 계셔서요. 며칠 전 운 좋게 흘려들은 얘기가 다행히 머릿속에 남아있었던 덕분입니다.”
조금은 궁색한 대답이었지만, 그렇다고 더는 캐묻긴 어려울 거라 믿었다. 대외비도 아니고, 그저 식습관에 대한, 정보라고 하기에도 뭐한 얘기였을 뿐이니까. 그리고 다행히도 내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잠시 날 바라보던 김진숙 회장이 빙그레 웃더니 고개를 끄덕인 것이다.
“그래요. 그렇다 치죠.”
그러곤 내게 물었다.
“솔직히 방금까진 반반이었어요.”
“……?”
“대체 어떻게 알았을까 싶어서 살짝 불쾌하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이 정도까지 관심을 가지고 배려해준 사람이 누군지는 몰라도 기분이 나쁘진 않았어요. 그래서 보고 싶었고요.”
톡톡톡……. 또다시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가볍게 치고 있는 김진숙 회장. 그녀는 날 향해 물었다.
“말해봐요. 보답으로 뭘 바라는지.”
보답이라……. 이게 그럴 만한 일인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나에겐 의미가 없더라도 강형식에겐 의미가 있는 일임은 확실하다. 그렇지 않으면 그렇게까지 나레이션이 반복해서 들려왔을 리 없으니까. 그럼 어떻게 할까? 나라면 굳이 보답 따위 받지 않을 테고, 설사 받는다고 해도 내게 큰 도움이 되지도 않을 거다. 뭐, 돈이라도 준다면 또 모를까. 변죽이 아무리 좋은들 지금 같은 상황에서 돈을 달라고 할 수도 없으니까. 그렇지만, 강형식의 입장에선 분명 도움이 될 만한 게 있을 거다. 나는 강형식이 되어 생각했다. 앞으로 일 년 뒤 독립하겠다던 그의 말이 떠올랐다. 그게 아니라도 당장 그가 하고 있는 일들을 생각하면……. 결심을 굳힌 나는 김진숙 회장에게 물었다.
“어디까지 됩니까?”
일순 눈이 커지는 김진숙 회장. 그녀는 너무 뜻밖이었던지 말없이 날 바라본다. 그러다가 천천히 입꼬리를 끌어올린다.
“아직 서른도 안 됐죠?”
“예. 스물일곱입니다.”
“배포가 크네요.”
“배포가 큰 겁니까?”
“배포가 작은 사람은 그렇게 되묻지도 않아요.”
“워낙 험하게 살아와 그럴 겁니다.”
“험하게 살았다라……. 그렇게 보이진 않는데?”
“부모님께서 미인들이셨습니다. 그 덕분이죠.”
김진숙 회장이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그 탓에 다른 사람들이 무슨 일인가 싶어서 이쪽을 바라보았지만, 김진숙 회장은 전혀 개의치 않고 계속해서 깔깔 웃더니 한참 지난 뒤에야 진정하곤 손등으로 눈가를 훔쳤다. 아니, 방금 그 말이 그렇게 웃겼나? 나 참. 여자들이란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단 말이야. 대체 어느 부분이 그렇게 웃겼다는 건지. 나도 모르게 고개를 내저으려다가 멈칫하곤 애써 마음을 다스렸다. 그때, 김진숙 회장이 말했다.
“욕심이 화를 부른다는 건 알죠?”
“알고 있습니다.”
“그래요. 험하게 살아왔다니, 그 정도는 알겠죠.”
김진숙 회장은 와인잔을 들어 올려 천천히 돌리면서 다리를 꼬았다. 그런 채로 다시 말했다.
“그럼 어디 한번 말해봐요. 제가 뭘 줬으면 하죠?”
난 심호흡을 한 후 대답했다.
“명함 한 장만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