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 출장 (2) (19/204)

#19. 출장 (2)2020.11.13.

미쳤네, 진짜. 지금 상황이 어떤 상황인지 알고나 있는 거냐고. 대한민국을 들었다 놨다 하는 한 그룹의 회장님 팔순 잔치다. 거기다가 그 잔치의 핵심인 요리를 책임지는 게 다름 아닌 고윤수 주방장님이시고. 한데, 여기서 나더러 메뉴에 대해 왈가왈부하라고? 제정신이 박혀있으면 그게 할 짓이냐고. 난 곧바로 고개를 내저었다. 때려죽여도 못한다. 고민하고 말고도 필요없는 일. 난 결정 아닌 결정을 내리곤 밖으로 나섰다. 강형식을 만나기 위해. 그렇게 머릿속에서 나레이션이 여전히 들려오는 가운데 주방을 벗어났다. 그러곤 홀을 가로질러 막 입구 쪽으로 다가설 때였다. 예상대로 강 회장이 들어서고 있었다. 그 뒤로 반가운 얼굴이 보였고.

“안녕하십니까?”

난 크지 않은 목소리로 인사했다. 이런 데서 괜스레 목청을 키웠다간 강 회장 눈 밖에 날 수도 있을 테니까.

“응? 자네는 누군가?”

강 회장이 날 빤히 쳐다보며 물었지만, 누구 하나 제대로 대답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의 옆에 서 있는 회사 중역들도, 강 회장의 아들인 강구철 사장도 내 얼굴을 모르는 모양이었다. 단 한 사람만 빼고서.

“우리 집 주방에서 일하는 요리삽니다, 할아버지.”

“그래? 그런데 난 왜 처음 보는 거 같지?”

“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러실 겁니다.”

강형식의 설명에 강 회장이 날 바라보다가 뭔가 생각나는 것이 있는지 눈을 빛냈다. 그러더니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음……. 이 친구였군, 이 친구.”

손가락으로 날 몇 번이나 가리키며 만면에 미소를 짓던 강 회장이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날 지나쳐갔다. 내 어깨를 한차례 가볍게 짚고서. 씨익. 그 모습이 뭐가 그리 좋은지, 강형식이 웃고 있었다. 자식이. 난 심장이 터지는 줄 알았구만. 응? 뭘 어쩌라고? 강형식이 강 회장을 뒤따르며 말없이 자신의 손목시계와 핸드폰을 들어 보이는 모습에 물어보았다. 입만 벙긋거려서. 이따가 연락한다고? 고개를 끄덕이곤 서둘러 홀 안으로 사라지는 강형식. 확실히 아까보다 눈에 띄게 밝아진 안색이었다. 반갑긴 한가 보네. 피식 웃으며 돌아섰다. 그러곤 홀 안을 천천히 둘러보는데……. 따라라라라, 라라……. 다시금 들려오는 BGM. - 참고로 C마트의 김진숙 회장은 샐러드를 중심으로 고기를 뺀 식단을, KBC 방송국의 김동하 국장은 에피타이저를 비롯해 나머지 요리는 전부 생략하고 샐러드와 스테이크만, 혈액순환이 잘되지 않는 신아 식품의 최홍태 부사장은 요즘 즐겨 먹고 있는 비트와 토마토를 샐러드에 추가해주는 걸 추천한다. 후우, 지난번에 레시피를 알려주더니 이젠 식단까지 정해주는구나. 그것도 딱 세 명. 하나하나 이름까지 대가며 제법 자세하게 설명해주고 있다. 아니 그러니까, 날 더러 어쩌라고? 황당해서 돌아버릴 지경이다. 그러면서도 나레이션이 언급한 세 명의 인물들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하나같이 범상치 않은 포스가 느껴진다. 쯧, 장난 아니네. 아무리 생각해도 나레이션의 얘기, 아니 요구는 얼토당토않다. 난 고개를 내저으며 주방으로 돌아갔다.

“니래 뭐 하는 거이가?”

갑자기 물어오시는 고윤수 주방장님을 보다가 찔끔하고 말았다. 그 뒤쪽에서 김진호 셰프 역시 날 주의 깊게 바라보고 계시는 모습에. 반면 고윤수 주방장님은 입가에 미소까지 머금고 날 바라보고 계셨다. 어째 손자를 바라보는 할아버지처럼 느껴지는데? 무슨 생각을 하시길래 저러시는 거람?

“아닙니다.”

“아니긴, 뭐가 아니가? 니래 지금 들어오기 전에 김진숙 회장을 보지 않았네?”

윽, 눈썰미도 좋으시지.

“그, 그냥 본 겁니다.”

“음, 기래? 알갔다. 일하라우.”

말은 그렇게 하시면서 묘한 표정이시다. 어딘지 모르게 궁금함이 묻어나는 눈길이었고. 뿐만 아니라 김진호 셰프까지 내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었다. 하아, 미친다 진짜. 안 그래도 돌 지경인데. 그도 그럴게……. - C마트의 김진숙 회장에겐 고기를 뺀 샐러드를, KBC 방송국의 김동하 국장은 샐러드와 스테이크만, 신아 식품의 최홍태 부사장은 비트와 토마토를 샐러드에 추가해주는 걸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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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씨, 어쩌라고! 계속해서 들려오는 나레이션에 심란해 미치겠다. - C마트의 김진숙 회장에겐 고기를 뺀 샐러드를, KBC 방송국의 김동하 국장은 샐러드와 스테이크만, 신아 식품의 최홍태 부사장은 비트와 토마토를 샐러드에 추가해주는 걸 추천한다. 것도 일 분에 한 번씩 반복하는 중. 아무래도 내가 함구하고 있는 동안, 계속할 모양이다. 그래, 어디 한번 해보자. 누가 이기나. 난 이를 북북 갈면서 숙였던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러고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얼굴로 고윤수 주방장님 옆에 섰다. - C마트의 김진숙 회장에겐 고기를 뺀 샐러드를, KBC 방송국의 김동하 국장은 샐러드와 스테이크만, 신아 식품의 최홍태 부사장은 비트와 토마토를 샐러드에 추가해주는 걸 추천한다.

“오븐 예열이 다 된 거 같은데, 어떻게 할까요?”

“어쩌긴. 슬슬 시작해야디. 긴데, 니래 할 말 없간?”

“예? 할 말이라뇨?”

  - C마트의 김진숙 회장에겐 고기를 뺀……. 하아, 지친다. 대체 왜 이러는 거지? 오늘따라 나레이션이 진짜 끈덕지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다. 거기다가 고윤수 주방장님도 어쩐 일인지 자꾸만 내게 할 말 없냐고 하시고. 뿐만 아니라 김진호 셰프는 아까부터 계속 나만 쳐다보고 있는 이 상황. 아, 진짜 어쩌란 말인지. 후우, 그래. 알겠다, 알겠어. 뭔가 사정이 있다는 거지? 그래서 그 사정이란 게 뭔데? 지금 나레이션이 말하고 있는 세 사람에게 스테이크를 주기라도 하면 무슨 큰일이 생기기라도 하는 건가? 것도 아니면 달리……. 어? 가만. 이거……. 나레이션이라는 게 사실 강형식을 만나게 되면서 시작되었지 아마? 그리고……. 분명 기억한다. 나레이션이 처음 들려왔을 때, 강형식을 주인공이라고 말했던 것을. 그 얘긴 곧……. 아, 저 세 사람이 강형식이랑 깊은 관계거나 아니면 앞으로 도움이 될 사람이란 건가?

“잠시만, 나갔다 오겠습니다.”

고윤수 주방장에게 급히 말하자, 흔쾌히 허락하신다.

“기러라우.”

이유도 묻지 않는 게 이상하긴 했지만, 일단은 밖으로 나왔다. 그러곤 강형식이 앉아 있는 곳을 바라보며 톡을 날렸다.

- 야, 너 김진숙 회장, 알아?

잠시 기다리자, 강형식이 핸드폰을 확인하는 모습이 보인다. 곧이어 이쪽을 바라보는 강형식. 톡이 날아든다.

- 아니.

-- 김동하 국장은?

- 몰라.

-- 최홍태 부사장도 몰라?

- 아, 그분은 알아. 왜? 무슨 일인데.

-- 아냐. 나중에 얘기해.

멀리서 날 보고 있는 강형식에게 고개를 끄덕여주곤 다시금 주방으로 돌아갔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그러니까, 뭐야? 세 사람 중 둘은 모른다? 그런데도 계속해서 나레이션이 들려오는 중이고? 지금 이 순간에도 나레이션은 마치 조르기라도 하듯 세 사람의 메뉴를 강요 중이었다. ……혹시 강형식이 앞으로 한다는 사업과 관련이 있는 거 아닐까? 그것도 아니면, 지금 회사에서 하는 업무랑 연관되어 있는, 아니 연관될 예정이든가. 그러지 않고서야 이렇게까지 줄기차게 요구해오는 게 이상하잖아? 게다가 따지고 보면 그렇다. 왜 하필 그 세 사람일까? 지금 이곳에 초대된 손님이 한둘이 아닌데. 그중에 사정상 여러 가지 이유로 스테이크를 먹으면 안 되거나 혹은 오늘 준비된 다른 음식들을 먹을 수 없는 사람이 또 없을까? 잠시 선 채로 상념에 잠겼다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쳐들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놀랐다. 고윤수 주방장님이 말없이 날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죄, 죄송합…….”

“뭐이가?”

“예?”

“이제 좀 견적이 나오네?”

무슨? 난 고윤수 주방장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선 잠시간 눈을 깜박거렸다. 그러다가 이해했다. 그러니까, 지금 고윤수 주방장님은……. 그러고 보니 얼마 전 강 회장님께 국밥을 드려야 한다고 준석이 형한테 말한 걸 들으시곤 날 따로 부르셨더랬지. 그 후로 계속해서 내게 신경을 써주시는 중이셨고. 난 입술을 잘끈 씹으며 주먹을 살짝 쥐었다.

“저기…….”

“말해 보라우.”

기대만빵의 표정. 고윤수 주방장님이 눈까지 빛내며 날 바라보고 계셨다. 아우, 부담스러워서 원. 지금이라도 그냥 확 모른 척해버릴까 싶었지만, 이왕 내친걸음이었다. 잘은 모르겠지만, 이번 일이 강형식에게 적잖은 도움이 될 거란 확신도 들었고.

“제가 좀 검색도 하고, 또 그동안 들었던 것도 있는데……. C마트의 김진숙 회장님이 얼마 전부터 채식만 한다고 하더라고요.”

“기래?”

의아해할 만도 한데, 전혀 그런 표정이 아니시다. 놀라긴커녕 입가에 미소까지 띠고 계셨다.

“기거이 다이가?”

“그건 아니고…….”

“계속 해보라우.”

이거 진짜 괜찮은 건가? 혹시 혼나는 거 아냐? 미심쩍긴 했지만, 눈을 질끈 감았다가 이내 말했다.

“김동하 KBC 국장님은 당뇨 때문에 평소 식이요법을 한다고 언젠가 인터뷰에서 본 거 같아요. 그러니까, 혈당이 올라가는 것들은 빼고 차라리 샐러드와 고기만 드리는 게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리고 신아 식품의 부사장님은 제가 알아보니까 혈액순환이 잘 안 돼서 요즘 다리가 좀 불편하신 모양이더라고요. 그러니까…….”

나레이션이 알려준 세 사람에 대해 얘기하는 동안 고윤수 주방장님은, 아니 김진호 셰프까지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어느샌가 주방 안의 모두가 손을 멈추고 내 얘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그러곤 모든 말을 마친 내가 민망한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눈을 어디에다 둬야 할지 모르는 체할 때, 고윤수 주방장님이 날 부르셨다.

“서진영이.”

“예. 주방장님.”

분위기가 무거운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까와는 전혀 딴판인지라 조심스럽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한 얘기 믿어도 되는 기야?”

확실하냐고 묻는 거라면……. 예스다. 그동안 나레이션이 알려준 정보 중에 틀린 것이 없었으니까. 만일에 하나라도 이번에는 맞지 않는다면……. 후우, 제대로 사고 치는 게 되겠지.

“확실합니다.”

“기래?”

주방장님은 날 가만히 바라보다가 김진호 셰프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진호야. 들었디?”

주방장님에게로 향하기 전 날 바라보고 있던 김진호 셰프의 눈이 살짝 빛나는 듯 느껴진 건 착각이었을까.

“들었습니다.”

“기럼 어떡할까?”

“저 녀석이 말한 게 사실이라면 무시할 수만은 없겠지요. 그렇다고 그 얘기만 믿고 함부로 메뉴를 바꿀 수는 없으니, 그분들께 따로 여쭙도록 하겠습니다.”

“한마디로 세 사람에게만 주문을 받자?”

고개를 끄덕이는 김진호 셰프를 보곤 주방장님이 입매를 활처럼 휘었다.

“두드려보고 다리를 건너자 이 말이디?”

김진호 셰프는 당연하다는 듯 얘기했다.

“솔직히 믿기 힘들지만, 조금은 알겠군요. 주방장님이 말씀하신 뜻을.”

대체 무슨 말들을 하는 건지. 궁금하기도 하고, 답답하기도 하지만 내가 나설 틈은 없었다.

“알갔다. 기럼 기렇게 하라우.”

“다들 들었지? 곧 회장님께서 오실 테니, 그때 맞춰서 식사 내가도록. 단, 지금 얘기한 세 사람에 대해서 따로 주문을 받을 테니 그렇게들 알도록.”

다들 알겠다고 대답했고, 그 모습을 차분한 시선으로 바라보던 김진호 셰프가 내게로 시선을 던졌다. 흠칫. 뭔지는 모르지만, 가슴을 쿡쿡 찌르는 기분이다. 아이씨, 뭐냐고. 나중에 진짜 한소리 듣는 거 아냐? 뒤늦게 후회도 해보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김진호 셰프가 이내 홀서빙을 담당하는 직원들을 몇 명 불렀고, 내가 알려준 명단과 식단을 말해주며 주문을 어떻게 받는 게 좋을지 말해주었다. 그로부터 십여 분 후, 홀 쪽이 소란스러워진다 싶더니 진 회장이 도착했다. 그리고 얼마 뒤, 잔치가 시작되었다. *** 김진숙 회장은 묘한 눈초리로 직원을 바라보았다. 노려보는 것도 아니건만 어찌할 줄 모르는 직원. 그에게 김진숙 회장이 확인차 물었다.

“방금 스테이크…… 괜찮냐고 물었나요?”

“……예.”

“오늘 메인 디시가 스테이크인 모양인데. 그런데도 내겐 따로 묻는다? 스테이크를 먹겠냐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직원을 보다가 김진숙 회장은 맞은편에 앉아 있는 박 실장에게 물었다.

“여기 레스토랑이야?”

“아닙니다. 진 회장님 팔순 잔치죠.”

“근데, 무슨 주문을 받아?”

“……회장님께서 채식으로 식단을 바꾼 걸 아는 거 같습니다.”

박 실장의 말에 김진숙 회장이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렇게 된 지 얼마나 됐다고?”

“그만큼 진 회장 측에서 회장님을 신경 쓰고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하! 그 욕심 많고 내세울 건 나이밖에 없는 늙은이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던 김진숙 회장이 다소 차가운 음성을 내뱉었다.

“우리 아버지 살아계실 때도 콧방귀조차 안 뀌던 인사야, 그 늙은이가. 근데 이제 와서 자기 손녀뻘이나 될까 말까 한 나를 신경 써?”

웃기지도 않는다는 듯 입꼬리를 말아 올리던 김진숙 회장이 일단 직원에게 말했다.

“호의를 받아들이도록 하지요. 스테이크는 빼고 샐러드와 채식 위주로 준비해두세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주문과 동시에 직원이 쏜살같이 사라지자, 김진숙 회장이 박 실장에게 지시했다.

“한번 알아봐. 내가 베지테리언이 되었다는 거…… 대체 누구 알고 이런 일을 벌인 건지.”

“그렇게까지 할 필요 있겠습니까?”

“글쎄.”

김진숙 회장은 와인잔을 살살 돌리며 빙글빙글 웃었다.

“재밌잖아. 그리고…….”

와인 한 모금을 입안에 흘려 넣고는 말했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기특하기도 하고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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