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어쩌라고! (3)2020.10.14.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나레이션은 사라져 있었다. 음악 역시 마찬가지였고. 뭐냐고! 나 지금 홀린 거지? 그치? 홀린 거 맞지?
“하아!”
이젠 레시피까지 알려준단 말이지. 아! 그러고 보니……. 돼지고기! 난 서둘러 일어나 주변을 살폈다. 그러곤 이내 발견할 수 있었다. 주방에 딸린 작은 발코니. 거기에 냉장고가 한 대 더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곳의 냉장칸 역시 텅텅 비어 있었다. 다만, 냉동고에는 고기와 생선들이 꽉꽉 들어차 있다. 헐. 아니 이걸 어떻게 아는 거냐고. 혹시 감시카메라 같은……. 정신없이 주위를 돌아보다가 한숨을 내뱉었다. 히유. 내가 지금 뭘 하는 건지. 조금 전에 미치겠다고 해서 그런가? 아 놔, 그렇다고 진짜로 미치면 어쩌냐고! 젠장! 아직 여자 손 한번 못 잡아봤……. 아, 그게 문제가 아니지. 후우, 어쩐다? 식탁 앞에 놓인 의자에 풀썩 주저앉아, 빨갛다 못해 노랗게 익어 윤기마저 흐르는 김치를 노려보았다.
“……아주 제대로 익었네.”
에라 모르겠다. 내가 미친 건지, 아니면 뭔가 나로선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 벌어진 건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끓이자. 그놈의 김치찌개……. 난 거실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나직이 내뱉었다.
“엄마라…….”
나도 모르게 입술을 잘근 씹고 말았다. *** 테이블 위에 올려놓는 동안에도 보글보글 끓고 있는 찌개를 보면서 강형식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이거 지금 김치찌개 맞지?”
“그럼 된장찌개겠냐……요?”
“뭐야? 그 어정쩡한 말투는?”
신분이나 다름없는 사회적 격차가 하루아침에 좁혀지지 않듯, 태도 역시 좀처럼 바뀌긴 어렵다. 어젠 술 덕분에 쉽게 나오던 반말도 어째 영 부담스러워서 그랬던 건데, 괜스레 민망하다. 쪽 팔리기도 하고.
“잔말 말고 먹기나 해.”
수저를 먼저 들었다. 픽하고 바람 새는 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강형식이 웃는 모양이다. 젠장. 이게 뭔지. 웬 팔자에도 없는 재벌집 도련님 친구냐고. 달그락달그락. 뭔가 기분이 묘해서 수저로 밥을 들쑤실 때였다.
“어!”
찌개 한 숟가락을 떠서 입에 넣은 강형식이 눈이 동그랗게 되더니 탄식인지 탄성인지 모를 소리를 토해내고 있다.
“왜? 맛없어?”
내가 물었지만,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시 한번 김치찌개를 한술 떠먹더니 한층 더 눈이 커졌다. 그 상태로 놀리던 숟가락도 멈춘 채 멍하니 날 쳐다본다. 그 눈빛이 살짝 흔들리는 게 느껴진다.
“왜 그러는데? 짜?”
그러게, 그놈의 레시피. 조금 의심스럽더라니. 강형식의 어머니께서 만들던 조리법대로인 거 같아서 시키는 대로 하긴 했는데. 그대로 하면 아무래도 짤 것 같아 망설이지 않은 건 아니다. 그랬는데……. 역시 내 식대로 끓일걸 그랬나? 난 살짝 인상을 쓰며 찌개로 수저를 가져간다. 일단 맛을 보고, 다시 끓이든가 해야지 싶어서. 한데……. 갑자기 강형식이 미친 듯이 찌개를 퍼먹기 시작한다.
“야, 야! 무슨 찌개를 국처럼 떠먹어?”
황당해서 소리쳤지만, 강형식은 듣는 둥 마는 둥이다. 그저 말없이 수저를 놀리고 있었다. 나 참. 잘도 먹네. 국처럼 떠먹는 국물. 김치를 건져내 밥 위에 척척 올려 입에 넣는 강형식. 입도 크기도 하지. 그게 들어가네. 가끔가다가 비계가 잔뜩 붙은 고기를 건져내 입에 넣고 우걱우걱 씹으며 미소까지 짓고 있다. 그렇게 정신없이 찌개와 밥뿐인 아침, 아니 점심을 먹고 있는 강형식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체하겠냐? 누가 쫓아오는 것도 아니…….”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강형식이 쉬지 않고 밥을 먹으면서 눈물 콧물 흘리고 있었으니까. 뭐, 뭐야? 왜 저러는 건데? 찌개가 맛이 없어서 그러는 것 같지는 않고. ……엄마 얼굴이라도 떠오른 걸까? 그렇게 생각했을 때였다. 따라라라라, 라라……. 또다시 들려오는 BGM. 놀랄 틈도 없이 나레이션이 뒤이어 들려왔다. - 강형식이 우는 이유는 다름이 아니다. 어릴 적 손수 밥을 차려주던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이 순간 누군가가 진정으로 자신을 챙겨주고 있다는 생각이 그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강형식은 생각했다. 지금 먹고 있는 김치찌개 맛을 평생 잊지 못할 거라고. 그럼에도, 그는 티 내고 싶지 않았다. 자신의 얼굴이 눈물 콧물로 엉망진창이 되어버렸다는 것도 모른 채로. 젠장! 손발 오그라드는 멘트가 분명한데……. 괜히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래서였을 거다. 딸각. 수저를 내려놓은 것은. 눈물을 흘리는지도 모르는지, 그때까지 정신없이 먹으면서 볼이 빵빵하도록 음식을 입에 넣고 있던 강형식이 날 쳐다보길래 말없이 티슈 상자를 한 손으로 밀었다. 스윽.
“……!”
녀석은 그제야 깨달은 모양이다. 자신이 울고 있었다는 걸. 흠칫한 강형식. 그런데도 자식은 얼굴을 닦을 생각은 하지도 않고 여전히 날 바라만 본다.
“뭐, 왜, 뭐?”
민망해져서 돌아섰다. 그러곤 중얼거렸다. 들으란 듯이.
“보리차……. 식었으려나?”
그때 들려온 목소리.
“나 생수만 먹는데?”
“나 먹으려고, 나!”
울컥해서 소리쳤을 때, 뒤에서 킥킥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돌아서 있던 내 입가에도 미소가 떠올랐다. *** 오피스텔을 나왔을 땐 이미 점심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어차피 지금 가봐야 도움이 될 거 같지도 않아서 준석이 형한테 문자 한 통만 남겨놓곤 출발했다.
“삼성동으로 가면 되는 거지?”
“벌써 그 질문만 세 번째란 건 아냐?”
“삼한그룹 본사가 어디 붙었는지 내가 어떻게 아냐고.”
“뉴스 안 봐? 맨날 나오잖아.”
“크큭. 뉴스 대신 가스 불을 봐야 해서 말이야.”
“염병. 누가 들으면 요리는 지가 혼자 다 하는 줄 알겠네.”
농담을 주고받고 있긴 하지만, 조금 놀란 게 강형식이 놀고먹는 백수라고 생각했던 것과 달리 버젓이 제품기획조사실장이란 직책을 달고 출근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보통은 이러면 잘리는데…….”
“뭐, 한직이긴 하지만, 대신 내 위론 아무도 없으니까.”
“와. 말하는 거 봐라. 진짜 재수 없다.”
“꼬우면 네가 실장 하든가.”
강형식의 말에 헛웃음을 흘리고 말았지만, 나도 안다. 어젯밤 취하기 전 나눈 얘기들이 있으니까. 사내 둘이 만나서 술잔을 기울인 시간이 한두 시간이 아니다. 당연히 오가는 말이 많았고, 취기가 오를수록 더 많이, 그리고 더 깊이 얘기를 나누었다. 물론 그것도 어느 순간부터는 혀가 꼬이고 했던 말을 또 하고 또 하는 수준으로 전락해버렸지만.
“어떻게? 지하주차장으로 가?”
“그렇게 해.”
간단히 고개만 끄덕이면서 창밖을 쳐다보는 강형식을 힐끔거렸다. 그는 지금 어떤 심정일까? 말이 좋아 제품기획조사실장이지. 직원이라곤 달랑 셋뿐인 한직. 하는 일도 그룹 전체에서 단종된 제품에 대한 분석과 시장 조사 그리고 대안을 준비하는 일이다. 문제는 그렇게 준비된 기획서가 여태껏 회장실까지 올라간 적이 단 한 번도 없다는 게 강형식의 얘기였고. 말하자면……. 그래도 가문의 일원인데, 유학까지 다녀와서 아무것도 안 하고 놀게 했다간 이래저래 구설수에 오를 테니 겉보기엔 그럴듯한, 그러나 실제론 아무런 권한도 없는 직책을 만들어서 떠맡긴 셈이다. 그래서 그런가. 강형식은 회사 일에 애착이라곤 1도 없어 보였다. 지금도 그렇다. 어제 술 마시면서 했던 얘기대로라면, 아마도 미치도록 가기 싫겠지. 하긴 나라도 그럴 테다. 출근해봐야 책상만 차지하고 앉아서 퇴근 시간까지 멍 때리고 있다가 오는 게 전부인데, 그것도 하루 이틀이지 좋을 턱이 있겠냐고. 대충 강형식의 심정이야 짐작되고 남는데, 그렇다고 함부로 뭐라고 하기에도 뭐하다. 물론 마음 같아선 그럴 바에는 차라리 전부 때려치우고 도로 미국으로 가든가! 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아버진 내가 할아버지께 칭찬받는 게 그렇게나 좋으셨던 모양이야.”
어릴 때 얘기를 하면서 씁쓸하게 웃던 그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젠장. 재벌가고 뭐고 간에 사람 사는 데는 다 똑같은 건가 보다. 나로선 받아들이기 어렵지만,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으니까. 부모님께서 돌아가시고 나서 내게 주어진 유산이라곤 안산 그것도 외곽이라고 할 수 있는 곳에 있던 아파트의 전세 보증금이 다였다. 한데, 그걸 어떻게든 해보겠다고 몰려든 친척들. 지금 생각해도 치가 떨린다. 일 년에 한 번, 아니 수년에 한 번 볼까 말까 한 인간들이 그때만은 어찌나 살갑게 굴던지. 그러면서 날 데려가겠다고 서로 다투던 모습이란. 끝내 친척들 간에 주먹다짐으로까지 번졌을 때 외삼촌이 나서지 않았더라면 난 어쩌면……. 그렇기에 나중에 장가갈 밑천이라며 숙모가 통장에 넣어둔 그 돈은 절대로 손대고 싶지 않다. 이제껏 날 자식처럼 보살펴주시고 키워주신 두 분께 드릴 거라곤 현재 그거밖에 없으니까. 물론 꼭 성공해서 두 분의 은혜를 갚고 싶은 거야 당연한 거고. 외삼촌과 외숙모의 얼굴을 떠올리자, 코끝이 찡해졌다. 지하주차장 한구석에 차를 세우곤 사이드브레이크를 올리면서, 보조석에 앉아 여전히 말없이 차창 밖으로 시선을 던지고 있는 강형식을 바라보았다. 어이구. 청승맞게……. 쯧, 저놈이나 나나. 아니 외삼촌 내외가 있는 내가 오히려 사정이 좋은 건가? 그가 한국에 돌아온 것까진 좋았다. 문제는 그의 할아버지, 그러니까 삼한그룹의 회장님을 제외하곤 가족들 중 누구 하나 그의 귀국을 반가워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아직 승계 구도가 확정되지 않은 시점인지라 더욱 그렇겠지만, 안 그래도 후계 다툼이 치열한 상황에서 또 한 명의 경쟁자가 생기는 게 반갑지 않았던 거겠지. 게다가 정작 그를 한국으로 불러들인 회장님께선 어찌 된 일인지 강형식과 관련된 문제에 대해선 일체 함구하고 계셨고. 어쨌든 매정하달까 냉정하달까, 가족들의 냉담하기 이를 데 없는 시선 속에서 강형식은 겉돌지 않을 수 없었던 거다. 뭐, 자기 말로는 그래도 처음 몇 달간은 어떻게든 참아보려고 했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자신을 가족으로 받아들여 주지 않는 분위기에 오히려 그가 먼저 넌덜머리가 났다나. 결국, 폭발했고 이젠 될 대로 되란 생각으로 지내고 있다고. 그러다 보니 어제처럼 그런 일들이 벌어지기도 하는 거였고 말이다. 얼굴 가득, 포기하면 편해요……라는 표정을 짓고 있는 강형식을 보다가 말했다.
“돌아갈래?”
픽하고 웃는다.
“차는 네가 가져가.”
“귀찮게 무슨. 지하철 타는 게 편해.”
“그럼, 택시라도 타고 가든가.”
주머니에 손을 넣고 있는 걸 보니, 지갑이라도 꺼낼 모양이다. 난 얼른 차 키를 뽑아 강형식에게 던지곤 차에서 내렸다. 그러곤 망설이다가 물었다.
“오늘…… 올 거냐?”
지갑을 쥔 채 움찔하는 강형식.
“……어딜?”
“어디긴, 집이지. 밥 먹으러 올 거냐고.”
“…….”
후우, 알 만하다. 오고는 싶은데, 그럴 용기는 없는 거겠지. 어제 그 난리를 쳐놨으니. 그래도 오늘이 할머니, 그러니까 마나님 생신이니 오면 좋을 텐데. 쯧, 됐다. 오지랖도 정도껏이다. 내 앞가림도 못 하는 마당에 누굴 신경 쓴다고.
“갈게.”
그가 말릴 새도 없이 손부터 흔들었다.
“얀마. 그냥 가면 어떡해?”
뭘 어떡해? 그럼 그 지갑 속에 있는 돈이라도 받을까? 천천히 걸어가며 생각했다. 친구라는 건 말이다. 일단 한쪽이 일방적으로 뭔가를 받기 시작하면 그때까지 유지되어오던 균형이 일시에 무너질 가능성이 크다. 그것이 비록 사소한 것일지라도. 늘 받던 것을 받지 못하게 되면 서운하게 느껴질 수 있다는 거지. 사실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다는 게 이미 두 사람 관계에 균열이 갔다는 증거겠지만. 아무튼, 내가 지금 그에게서 택시비를 받을 까닭은 없다. 다른 때라면 몰라도 이 순간 단돈 만 원이라도 받는다면, 그때부터 난 친구가 아니라 기사가 되는 거니까.
“얀마! 서진영! 기다려봐!”
뒤에서 강형식의 외침이 들려왔지만, 못 들은 척 무시했다. 둘 중 하나일 게 뻔하니까. 고맙네 어쩌네하는 속 간지러운 소리거나, 것도 아니면 기어코 내 손에 지폐 몇 장이라도 쥐여주려는 도련님의 고집일 테니. 난 웃으며 주차장을 빠져나와 햇살 속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겨울을 코앞에 둔 계절이라서인지 코끝이 살짝 시려 왔다. *** 돌아가면 곧바로 잘리는 건 아닐까 걱정했지만, 준석이 형 말대로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양파는?”
“준비해놨습니다.”
“고긴?”
“다져놨습니다.”
한창 저녁 식사 준비 중인 주방 안으로 들어섰지만, 누구 하나 날 신경 쓰지 않는다. 어떻게 할까 망설이다가 김진호 셰프께 다가섰다.
“다녀왔습니다.”
“어, 그래.”
끝? 김진호 셰프는 날 한차례 보며 고개를 끄덕이곤 돌아설 뿐이었다. 다다다다다다다닥. 준석이 형 역시 내게 눈짓 한번 주지 않고 채소를 써는 데 열중하고 있었고. 얼른 소매를 걷어붙였다. 옷은 이미 숙소에 들러서 갈아입고 왔기 때문에 일하는 데에는 문제가 없었다.
“진영아, 네가 국 간 좀 봐라.”
준석이 형이 날 힐끔 쳐다보곤 고갯짓을 해 보인다. 시선을 돌려보니 가스 불 위에 올려진 냄비가 부글부글 끓고 있다. 올라오는 냄새로 봐선 복 지리다. 맑은 국물을 보며 국자를 집어 들었다. 그러곤 냄비 안에 가득한 국을 휘휘 내젓고는 살짝 떠서 종지에 담았다. 캬! 냄새가……. 밤새 술을 먹어서 그런가, 침이 절로 넘어간다. 맛은 또 어찌나 기막힌지. 우와. 복 지리를 어떻게 이렇게 끓인다냐? 입에 흘려 넣기 무섭게 혀를 감싸며 맴도는 풍미와 함께 미뢰를 자극하면서도 부드럽게 목을 타고 넘어가는 국물맛이 그야말로 사람 혼을 쏙 빼놓을 지경이다. 김진호 셰프의 솜씨는 역시 명불허전. 백제 호텔 주방장 출신이라 그러신지, 국 하나를 끓여도 일품이다.
“으…….”
한 손에는 국자를, 또 다른 손에는 종지를 들고 나름 감격하며 진저리를 치고 있을 때였다. 따라라라라, 라라……. 어? 이 음악은? - 오늘 저녁 메뉴의 메인은 소갈비 구이다. 거기에 청어구이와 새우장이 곁들여지고 참나물을 비롯해 계절 나물이 올라가니 누구라도 입맛을 다시지 않을 수 없을 테다. 오오, 대충 들어도 나쁘지 않다. 수라상까진 아니지만, 집밥치고는 상당하달까.
“오늘 무슨 날…….”
묻다가 떠올랐다. 나레이션이 해주었던 얘기가. 그래도 모르니 일단 말은 끝냈다.
“……이에요?”
“아, 넌 모르겠구나.”
“…….”
대충 짐작이 가지만, 아니 거의 확신에 차 있었지만, 내색하진 않았다. 그러자 준석이 형은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하는지 바짝 붙으며 속닥였다.
“오늘이 마나님 생신이거든.”
“마나님 생신…….”
이 집에선 지금 회장님의 곁을 지키고 있는 여자를 사모님이라고 부르고, 몇 해 전 돌아가신 본처를 마나님이라고 부르고 있다. 역시 그렇구나. 그래서 이렇게……. 일테면 생신상이란 얘기다. 이미 죽고 없는 사람의.
“음……. 회장님께서 마나님을 엄청 사랑하셨…….”
“쉿!”
준석이 형이 손가락을 입술에 가져가며 주위를 둘러본다. 아닌 게 아니라 저만치서 안성댁이 못마땅하다는 듯 쳐다보고 있다. 쯧, 아무리 회장님 지시라지만, 지금 안주인은 따로 있으니 결국 사모님 눈치를 봐야 한다 이거네. 하기야 사모님 속도 말은 아니겠다. 얼른 입을 틀어막곤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때였다. 이젠 진짜 인간X극장의 아나운서 아닐까 싶은 목소리. 예의 그 나레이션이 머릿속을 울린 것은. - 하지만 지금 강 회장에겐 그 어떤 잔칫상도, 설사 수라상이라 해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이제 와 돌이켜보니, 생전에 아내에게 따스한 말 한마디 제대로 못 해준 게 그렇게 후회스러울 수가 없는 강 회장인 것이다. 무엇보다도 첫아이를 임신했을 때, 그렇게나 먹고 싶어 하던 국밥 한 그릇 사주지 못했던 게 못내 사무친다. 그래서 그런가 집으로 퇴근하는 길, 강 회장은 소고기국밥이 먹고 싶었다.
“으음…….”
절로 신음이 나왔다. 소고기국밥……. 조리대 위를 바라보니 이미 반쯤은 다듬어진 식재료들이 보인다. 김진호 셰프는 냉장고 옆에 있는 숙성고에서 소갈비를 꺼내고 계셨고.
“하아…….”
그래서 어쩌라고! 설마 이 분위기에서 나더러 소고기국밥 얘기를 하라는 건 아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