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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어쩌라고! (2) (5/204)

#5. 어쩌라고! (2)2020.10.11.

고함이 어찌나 큰지 진짜 거짓말 하나 안 보태고 귀가 먹을 정도였다.

“지금 뭐 하는 거야! 재밌을 거라고 하더니, 겨우 한다는 짓이 이거야?”

그것만 봐도 강형식이 얼마나 화가 났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 그게 아니고. 형식아, 내 말 좀 들어봐.”

남자 한 명이 강형식을 달래려는지 황급히 말했지만, 강형식은 이미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있었다. 그때였다. 드르륵. 뭔가 끌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를 따라가 보니, 하연이라고 했던가, 아무튼 그녀가 테이블을 거칠게 밀며 일어서고 있었다. 그 탓에 테이블 위에 있던 술병들이 쓰러지며 술을 쏟아내고 구르고…… 난리도 아니다. 그녀는 술잔을 거칠게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아무래도 돌아가는 상황을 알아챈 모양이었다. 그래서 그런가, 그녀는 차갑다 못해서 얼어붙을 것 같은 눈빛으로 말없이 남자들을 노려보았다. 당황한 세 명의 남자들이 어찌할 줄 모르고. 특히 그중 아까부터 그녀에게 은근한 눈빛을 보내고 있던, 진수라는 남자는 더욱 안절부절못했다.

“하, 하연아. 그게 아니라…….”

“더러운 새끼들.”

여자는 더 들을 것 없다는 듯 서슬이 퍼런 눈빛과 한없이 차가운 음성을 내뱉고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강형식은 이미 문 쪽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지만.

“가자.”

쭈뼛쭈뼛하는 내 등을 강형식이 밀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소리쳤다.

“좆같은 새끼들!”

그렇게 내뱉곤 방을 빠져나가는 강형식. 그에게 밀려서 나 역시 복도로 나갔을 때 뒤쪽에서 여자 특유의 날카로운 음성이 들려왔다. 잘 들리진 않았지만, 욕 같았다. *** 주차장으로 가는 길에 강형식은 물병을 따서 입을 헹구곤 몇 모금 마셨다. 나오면서 웨이터에게 받은 생수였다. 그걸 내게 주기엔 나 역시도 물을 들이켰다. 멱살을 잡혀서 그런가? 목이 안 팠던 것이다. 벌컥벌컥 마셔서 그런가, 얼마 안 지나 물병이 바닥을 드러냈다. 그때 강형식이 물었다.

“괜찮냐?”

술이 깬 건 아닌 거 같은데, 아까처럼 혀가 잔뜩 꼬인 말투는 아니다. 아직 화가 가라앉지 않아서 그런지도 모르지만. 난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목이 아파서는 아니다. 다만 말 놓으라고 성화를 부리던 강형식 때문이었다. 까란다고 까기엔 우리 사이가 그리 가깝진 않잖아? 내 속내를 읽기라도 한 걸까? 강형식은 픽하고 웃더니 말했다. 언제 꺼냈는지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물면서.

“만일…….”

“……?”

“내가 그랬으면 어쩌려고 그랬냐?”

아우씨. 내가 머리가 나쁜 거야? 아니면 난청이라도 있는 거야?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다. 의아해진 내가 강형식을 빤히 쳐다보고 있자, 그가 씁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약 말이야, 약. 그놈들이랑 한패였으면 어쩔 셈이었냐고.”

아, 이제야 이해했다. 그러니까, 강형식이 놈들이랑 같이 작당을 해서 이하연이란 여자를 오늘밤 어떻게 해보려고 했다면? 그랬다면 오늘 밤 내가 한 짓은 그야말로 무용한 아니 멍청한 짓이 되었을 터다. 어쩌면 강형식이 엄청 화를 냈을지도 모르지. 그놈들이 아니라 내게 말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난 같은 행동을 했겠지만.

“그럴 거 같진 않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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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인지는 나도 모른다. 그냥 느낌적인 느낌? 것도 아니면 아까 차 안에서 보았던 강형식의 눈빛 때문일지도. 하아, 나도 납득하지 못하는 이유. 강형식이라고 받아들이긴 어려울 테다. 하지만 그는 한참 동안 날 바라볼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의미를 알 수 없는 한숨을 담배 연기에 섞어 내뱉었을 때였다.

“오빠아아아!”

뒤통수에 꽂히는 목소리. 돌아보니 하연인지 뭔지 하는 여자가 달려오는 게 보인다. 거참, 춥지도 않나? 다리가 훤히 드러나 보이는 미니스커트가 섹시하기보단 춥게만 보였다. 뭐, 괜찮으려나? 그래도 위에는 밍크로 보이는 외투를 걸쳤으니. 근데 저건 저것대로 좀 그렇네. 아직 10월달인데, 허리까지밖에 오지 않는 짧은 외투라지만 밍크라니……. 속으로 혀를 차고 있는 동안 그녀는 이미 우리 앞에 다다라 있었다. 그녀가 헉헉거리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아우, 숨차. 물…… 물 없어?”

그녀의 물음에 강형식이 바닥에 뒹구는 생수병을 가리켰다. 괜히 미안해지네.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남겨놓을 걸 그랬나?

“쳇.”

혀를 짧게 차곤 그녀가 숨을 몰아쉬느라 숙였던 허리를 폈다.

“진짜 너무하네. 나 좀 챙겨주지. 자기들만 쏙 빠져나가냐?”

“귀찮으니까, 좀 가라.”

“와, 말하는 거 봐. 안 본 사이에 사람이 이렇게 바뀌네.”

“말 많네. 가라니까!”

“앙. 진짜! 못됐어!”

“간다.”

서슴없이 돌아서는 강형식을 그녀는 살짝 흘겨보다가 콧소리를 냈다. 음, 어째 아까랑 분위기가 좀 다른데? 원래 모습이 이런 거야? 아니면 강형식 앞이라서 그런 거야?

“흥! 나도 갈 거거든!”

그러더니 내게로 돌아서며 말했다. 흠칫. 눈웃음을 치며 내게 다가오는 그녀였다.

“그전에 이 오빠랑 잠시…….”

“이하연!”

“아, 왜애애! 내가 뭐 잡아먹는데?”

그렇게 외친 그녀는 내게 뭔가를 내밀었다. 얼결에 받아 보니 명함이다. 대현 어패럴 기획이사 이하연 헐. 이, 이사?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라, 대현이라면 그 대현? 한때 우리나라 재계 1위였다가 IMF와 왕자의 난을 거치며 그룹이 반 토막 나는 바람에 삼한그룹에 1위 자리를 내주고 만 그 대현그룹? 난 당황해서 명함과 이하연을 번갈아 쳐다보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런 나를 향해, 이하연은 아까 그 사람이랑 같은 사람인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상큼발랄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꼭 연락해요?”

말끝이 확연히 올라가는 게, 여기서 확답을 해주지 않으면 갈 것 같지가 않았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달까. 그제야 그녀는 만족했는지 다시 한번 미소를 머금으며 돌아섰다.

“나 갈께!”

그녀가 강형식한테 외쳤지만, 강형식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 눈치다. 그런 그를 못마땅하다는 듯 이하연이 외쳤다.

“아우, 저러니까 아직 애인 하나 없지. 확 고자나 돼라!”

강형식이 눈썹을 일그러뜨리며 인상을 쓰자, 그녀는 까르르 웃으니 멀어져갔다. 뭐지? 이 폭풍 같은 등장과 퇴장은? 근데, 아까 그 여자 맞아? 와, 여자가 요물은 요물이구나. 하아, 그건 그렇고. 정말 정신없는 하루다. 아니, 아직 끝나지 않았나?

“뭐해? 안 갈 거야?”

날 재촉하는 강형식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 음, 어쩌다 여기서 이러고 있는 걸까? 난 투명하고 작은 잔을 내려다보며 쓰게 웃고 말았다.

“뭐야? 너 왜 웃어?”

빛바랜 파란색 원형 탁자 너머로 강형식이 기분 나쁘다는 듯 날 보고 있다. 하아, 왜냐고? 너 때문이지. 난 떠올렸다. 나이트클럽을 나와서 차에 올랐을 때를. 아니 차를 몰고 집이 있는 청담동으로 향할 때, 강형식이 묻던 것을.

“설마 집으로 가자는 건 아니지?”

“……그럼?”

“아는 데 없어?”

“…….”

“너 잘 가는 데 있을 거 아냐?”

  그렇게 해서 오게 된 곳이 여기다. 노량진 골목, 허름한 천막을 두른 포장마차.

“아니, 이게 뭔 일인가 싶어서.”

“뭔 일은 무슨. 다 똑같지. 사람 사는 게. 살다 보면 이런 일도 있고, 저런 일도……. 쓰읍! 쓰긴 진짜 쓰네.”

픽하고 웃고 말았다. 쓰다면서도 다시금 술잔에 소주를 붓고 있는 강형식을 보면서.

“마시다 보면 달아져.”

어느새 말이 짧아져 있었다. 이유?

“크큭. 못 마신다고 빼더니, 잘만 마시네.”

“누가 못 마신다고 했나? 술 마시면 운전을 못 하니까 그러지.”

“걱정도 팔자다. 대리 부르면 되지.”

나 참. 저게 재벌 3세가 할 말이냐고. 에라, 나도 모르겠다. 먹고 죽은 귀신은 때깔도 좋다는데. 술 마시고 죽은 귀신이야 오죽하겠냐. 그리고 이제 와선 빼박이다. 이미 다섯 잔도……. 아니 여섯 잔인가? 아, 모르겠다. 테이블 위에 조신하게 올려져 있는 두 개의 빈 술병들. 술을 노가다판에서 배워서 그런가, 나도 어디 가서 주량이 딸린다는 소리는 듣지 않는지라 강형식이랑 주거니 받거니 하다 보니 30분도 안 돼서 이 모양이다. 모르긴 몰라도 저 중 반은 내가 마신 걸 테다. 그래서 그런지, 이미 머릿속은 곤죽이다. 한마디로 이성은 마비되고 사고회로가 단순해졌다는 거지. 여기서 조금만 더 마시면 아메바랑 형님 동생 하게 생겼는데, 존댓말은 개뿔. 내가 깐다고 한 것도 아니고, 저쪽에서 먼저 까라는데 뺄 이유가 없잖아? 게다가 내가 원래 깡이 좀 센 편이다. 고등학교 올라갈 무렵 부모님께서 돌아가신 후부터였던가. 아무튼, 그때부터 워낙 험하게 살았는지라.

“그래? 마시다 보면 달아진단 말이지?”

내게 그렇게 물은 강형식은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자작한다.

“아이, 씨! 더럽게!”

거기에 손가락을 넣자, 강형식이 인상을 팍 쓰면서도 거침없이 입가에 털어 넣고 있다.

“크으! 좋네. 네 말을 들어서 그런가 단 것도 같고. 쓰읍, 인생도 좀 이러면 오죽 좋냐? 어떻게 갈수록 시궁창이야.”

“그러게.”

픽하고 웃으며 나 역시도 잔을 꺾었다.

“여기 곱창 좋네. 이제 어지간한 데선 곱창 못 먹겠다.”

“그치? 어떻게 한 접시 더 시킬까?”

“그래, 씨발. 다 시켜! 아까 보니까, 아주머니 인상도 엄청 좋던데 매상 제대로 올려주자고!”

“흐흐흐. 돈은 네가 내는 거다?”

“크크큭. 그렇겐 또 안 되지. 이런 건 또 내기란 걸 해야 맛이란 거 아니냐.”

“와! 이 재벌집 도련님, 말하는 거 보소. 하여간 있는 것들이 더하다니까!”

“몰라, 몰라. 먼저 쓰러지는 놈이 내는 거야.”

“야이, 그런 게…….”

“시끄럽고! 얼른 시키기나 해.”

“이모! 여기 곱창 좀 더 주시고, 꼼장어도 몇 마리 구워주세요.”

“계란말이도.”

“계란말이도요!”

“자, 마셔 마셔! 오늘 먹고 죽는 거야!”

그렇게 둘이 얼마나 마셨는지 모르겠다. 눈꺼풀을 뚫고 들이치는 강렬한 햇살에 눈을 떴을 때야 내가 낯선 장소에 대자로 뻗어 있다는 걸 깨달았으니까. ***

“으으……. 머리……큭!”

깨질 것 같은 머리통을 붙잡고서 일어나면서 연신 신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아우, 두통은 그렇다 치고 어째서 온몸에 결리지 않은 곳이 없는 거냐고. 끙끙거리며 상체를 일으킨 뒤에도 난 인상을 펴지 못했다. 대체 얼마 만인지. 어제 아니, 오늘 새벽까지 둘이서 마신 술만 소주 9병이었다. 그것도 중간부터는 맥주랑 섞은 거로도 모자라 쉴 새 없이 들이부어서 그런지 어느 시점부턴 기억이 없다. 필름이 끊긴 것이다. 진짜 오랜만이네. 필름이 끊길 정도로 마신 건.

“끄응.”

뻐근하다 못해서 어느 한구석 아프지 않은 곳이 없는 몸을 주무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헛! 뭐, 뭐야? 농담이 아니라 머릿속에 이 말밖에 안 떠오른다. 여긴 누구? 아니 여긴 어디지? 일반적인 집보다 두 배는 높은 천장, 세련된 인테리어로 잘 치장되어 있는 너른 거실. 특히 벽 한쪽을 가득 메운 커다란 TV와 엄청 비싸 보이는 스피커가 압도적인 기세로 날 압박한다.

“크으윽!”

화들짝 놀라서 몸을 일으키던 난 허리를 짓누르는 통증에 신음을 내뱉었다.

“뭐, 뭐야?”

왜 강형식이……? 그제야 깨달았다. 여기가 어딘지. 배 언저리를 짓누르고 있는 강형식의 바위처럼 단단하고 두꺼운 다리를 보면서. 그러니까, 여긴 강형식의 집……이라고 하기엔 뭐하고 세컨드 하우스 즉 일종의 아지트쯤으로 생각하면 될 듯한데. 난 조심스럽게 강형식의 다리를 치운 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끄으…….”

간밤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다리 근육이 비명을 지른다. 특히 왼쪽 다리가. 혹시나 싶어서 바지를 걷어보곤 눈살을 찌푸리고 말았다. 시퍼런 멍. 뭐냐고. 설마 강형식이랑 싸운 건 아니겠지? 차마 손으로 건드리진 못하겠고, 눈으로만 강형식의 몸을 스캔했다. 상의가 말려 올라가며 초콜릿 복근이 드러나긴 했지만, 옷도 제대로 걸치고 있고 어떻게 봐도 이상이 있어 보이진 않는다. 하지만, 안심한 건 딱 거기까지였다.

“지금 몇 시…….”

손목을 확인하던 난, 어젯밤 나올 때 시계를 차고 있지 않았다는 걸 기억해내곤 이내 시선을 돌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다가 그대로 굳어버렸다. 거실 벽에 걸려 있는 세련미 철철 넘치는 전자시계. 토니 스타크가 만들었다고 해도 믿을 법한 시계 위로 동동 떠다니는 숫자는……. 10:18 이런 18……분! 황급히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었다. 다행히 핸드폰은 무사하다. 얼른 꺼내서 켜봤다. 부재중 통화가 다섯 통이나 와 있다. 전부 준석이 형한테 온 것이었다. 재빨리 통화 버튼을 눌렀다.

“아, 여보…….”

- 일찍도 전화한다. 설마 밤샌 거냐?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물어오는 준석이 형. 어떻게 말해야 좋을지 몰라서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아, 그게요. 어젯밤에…….”

중간에 필름이 끊겨서 전부 말할 수는 없었지만, 대강의 사정은 얘기할 수 있었다. 물론 술에 탄 약 얘기는 빼고.

- 알겠다. 일단 셰프께는 얘기해뒀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그래도 되도록이면 저녁에는 돌아오는 게 좋을 거야. 아침 점심이야 우리만으로도 충분하지만, 오늘 저녁은……. 암튼 늦지 않게 와.

“고마워요, 형.”

- 아아, 감사는 내가 아니고 셰프께 해야지.

계속해서 김진호 셰프 얘기만 하는 걸 봐선, 고윤수 주방장님은 오늘도 자리를 비우신 모양이다.

- 후우, 하긴 그 양반도 다른 사람도 아니고 도련님하고 관련된 일인데, 어쩔 수 없는 거겠지만. 아! 그래도 조심하는 게 좋아. 이 집에는 우리 같은 사람들만 있는 게 아니니까.

“예?”

- 점심 준비해야 해서 가야겠다. 너도 얼른 식사 준비하는 게 좋을걸? 비록 집에서 내놓은 자식이라 해도 무려 도련님이라고, 도련님. 자, 그럼 끊는다. 수고-!

제대로 설명도 안 해주고 끊어버리는 형이었다. 나 참, 그럴 거면 얘기를 꺼내지 말든가. 흐음, 어제저녁 집에서 보았던 강형식의 모습으로 미루어 생각해보면 짚이는 게 없는 것도 아니다. 쯧, 결국 미움받는 걸 넘어서 이참에 아예 밀어낼 생각이란 거네. 그게 삼촌이든 고모든, 혹은 사촌들이든 간에. 가족들이 그런다는 게 참……. 무슨 집안 꼴이……. 야생이냐? 먹고 먹히는 세렝게티냐고. 난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으며 아직도 잠에서 깨지 않고 있는 강형식을 바라보았다.

“아침밥이라……. 아, 점심인가?”

한차례 어깨를 으쓱거리곤 주방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디 보자. 오! 이건!”

싱크대를 뒤지다가 발견한 프랑스산 무쇠 냄비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와아! 좋네.”

무심한 듯 쌓여 있었지만, 웍을 비롯해 조리기구들이 하나같이 좋은 것들뿐이다. 나도 모르게 콧노래가 흘러올 정도였다. 슥슥슥!

“냉장고엔 뭐가 들었으려나?”

기대감에 넘쳐서 손바닥을 싹싹 비비며 냉장고 문을 열었다. 응? 이게 다인가?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공간, 아니 그 한가운데 덩그러니 놓여 있는 밀폐 용기. 설마 하는 마음으로 손을 뻗어 밀폐 용기를 꺼냈다. 달각, 달각……. 뚜껑을 열자 모습을 드러내는 포기김치. 코끝을 찔러오는 냄새와 누렇게 뜬 빛깔로 봐선 묵은지다. 헐! 이거 실화? 무려 900리터 용량의 냉장고에 달랑 김치밖에 없다고?

“미치겠네.”

이걸로 뭘 하라고? 안 그래도 새벽 내내 미친 듯이 술을 마셨는데, 해장국은 고사하고 콩나물국도 못 끓이게 생겼다. 아무리 김치가 한국인들에겐 거의 무적에 가까운 식재료라지만, 그래도 그렇지 저걸로 뭘 하냐고? 김치찌개라도 끓이면 모를까. 젠장, 쌀은 있는 거냐? 그때였다. 귓가를 울리는 음악. 따라라라라, 라라……. 아, 왜 또! 내가 진짜 미친 건지, 아니면 정말로 내게 생겨난 능력인지는 몰라도 시도 때도 없이 들려오는 음악에 울컥하고 말았다. 그 순간, 익숙한 음성이 들려왔다. 머릿속에. - 강형식은 밤새 술을 마셨다. 어쩌면 평생 처음일지 모를 정도로 마음에 드는 친구를 만났으니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그래서인지 그는 지난밤 정말이지 미친 듯이 퍼마셨다. 덕분에 고주망태가 돼버린 강형식은 모르긴 몰라도 깨어나면 엄청난 숙취에 시달릴 게 뻔하다. 큭! 안 그래도 두통이 살짝 있는데 머리통을 통째로 뒤흔드는 소리 때문에 인상이 절로 지어진다. 왜 머릿속에서 울리고 난리냐고. 그나저나 진짜로 이거 나한테만 들리는 거 맞아? 처음 들었을 땐 사람들이 많은 주방 안인지라 솔직히 정신을 못 차렸고, 그다음엔 나이트인데, 이런저런 일들로 워낙 정신없이 몰아치던 밤이었던지라 제대로 살필 수가 없었다. 음, TV도 오디오도 꺼져 있는 게 확실하고. 강형식도 잘만 자고 있다. 혹시나 싶어서 두 손으로 귀를 막아봤지만, 여전히 들린다. 착각인가 싶어서 몇 번이나 귀를 후벼 파보지만, 소용없었다. 어이가 없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한데……. 근데 이거 어디서 많이 듣던 목소리, 아니 톤인데? 선 채로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진짜 많이 닮았네. 음악뿐만 아니라 나레이션의 톤도 확실히 비슷하다. 인간X극장.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이름이 이금……뭐라고 하는 아나운서의 나레이션을 닮아 있었다.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짝퉁 같으니라고.”

그 순간에도 잔잔한 음악을 배경으로 나레이션은 계속해서 들려오고 있었다. - 오늘처럼 술을 많이 마신 다음 날 아침엔 역시 고춧가루를 팍팍 넣은 콩나물국이 최고겠지만, 안타깝게도 재료는 김치뿐이다. 그래도 걱정은 없다. 현재 강형식은 어머니 꿈을 꾸고 있으니까. 아마도 그가 깨어났을 때, 어머니가 생전에 끓여주던 김치찌개를 맛보게 된다면 더없이 기뻐할 것이다. 그가 냄새를 맡는 것만으로도 두근거리고, 침이 꿀떡 넘어갈 정도로 먹음직스러운 김치찌개를 끓여보자. 우선 돼지고기를 달달 볶다가……. 응? 돼지고기? 아, 여기 말고 또 다른 냉동고라도 있는 건가? 아니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라, 이젠 레시피까지 알려주는 거냐? 헐……. 머릿속을 울리는 나레이션을 들으며 난 멍하니 서 있었다. 그러다가 중얼거렸다.

“뭐 이런……. 김치 싸대기 맞는 경우가 다 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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