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어쩌라고! (1)2020.10.09.
계단을 오르며 강형식이 한 말이 머릿속을 울린다.
“안에도 화장실 있는데, 뭐하러 밖에까지 나와서 싸는 건데?”
이건 또 무슨 시추에이션인가? 그러니까, 강형식은 당연히 내가 자기랑 같이 룸으로 들어갔다고 착각하고 있었다는 건가? 그럼 처음부터 함께 들어갈 생각이었단 건데. 왜? 의문이 들었지만, 입이 열리는 순간 다른 말이 튀어나왔다.
“안에도 화장실이 있어요?”
그렇게 묻는 순간, 강형식의 몸이 무너지듯 내 쪽으로 넘어온다. 순간 나는 그가 발을 헛디뎌 넘어지는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런 게 아니었다. 와락 하고 내 목을 조르듯 팔로 감아오는 강형식이었다.
“그치? 좋지? 클럽 중에서도 방안에 화장실 있는 곳이 몇 군데 없자너. 크크크. 내가 여길 오는 이유 중 하나고. 근데, 말 까라니까, 왜 자꾸 존댓말이냐? 내 말이 웃겨?”
“크윽. 그런 건 아니고…….”
술에 취해서 그런지 힘 조절이라곤 하지 않는 강형식. 힘은 또 어찌나 센지 목을 휘감은 팔뚝 때문에 온몸의 피란 피는 얼굴로 다 쏠리는 느낌이었다. 내 목을 감고 있는 강형식의 팔을 풀려고 낑낑거리고 있을 때, 그가 또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한 번만 더 그래 봐. 확 그냥…….”
그사이 당도한 방문 앞에 이르러 손잡이를 잡으며 말했다.
“말 까라, 응? 흐흐흐. 우리 친구 아이가?”
그가 영화에서 나왔던 어설픈 사투리를 구사하며 내 목을 푼 뒤, 방문을 열고 들어가기 전 머금은 미소가 어쩐지 천진난만하게 느껴지는 건 착각이겠지? *** 분위기 왜 이래? 밖이랑 완전 다르잖아. 쿵쾅거리는 소리가 희미하긴 하지만 문밖에서 들려오는 와중에 이쪽만 딴 세상이다. 양주병들과 안주들이 놓인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남녀를 가르듯 저쪽에 세 명의 남자가, 이쪽엔 한 명의 여자가 앉아 있었다. 놀러들 온 거 맞아? 특히 저 여자……. 이곳에서 홍일점이랄까, 혼자만 여자인데도 팔짱을 끼고 턱을 쳐든 채 강형식을 아니, 날 바라보고 있다.
갈색톤이 도는 긴 머리칼이 웨이브를 그리며 흘러내리고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작은 얼굴엔 누가 봐도 미인이라고 밖엔 말할 수 없는 이목구비가 뚜렷하게 자리를 잡고 있다. 특히 커다랗고 맑은 눈이 은은한 조명 속에서도 찬란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런 눈으로 날 보던 여자가 묻는다.
“누구?”
와놔. 딱 봐도 나보다 어려 보이는구만. 말이 짧다?
“신경 쓰지 마.”
다소 냉담하게 대답하는 강형식. 와우, 얼어붙을 것 같은 공기에 몸이 다 떨린다. 그런 가운데 여자는 말할 것도 없고. 남자들은 아예 눈을 가늘게 뜬 채 날 위아래로 훑고 있다. 한눈에도 뭐야, 저 인간은? 하는 표정이 역력하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강형식은 여자 옆의 빈 소파 위에 쓰러지듯 앉고는 술잔부터 든다. 아……. 이 분위기 어찌할 거냐고. 마음 같아선 ‘죄송합니다!’하고 고개를 숙여 보인 뒤 방을 빠져나가고 싶지만, 흘러가는 상황은 그럴 틈조차 주질 않았다.
“이러려고 날 부른 거야?”
여자가 날을 세우며 물었지만, 강형식은 조금도 개의치 않는다.
“뭐가?”
“몰라서 물어? 나 이런 데서 술 마시고 하는 거 별로 안 좋아하는 거 알잖아.”
“내가 불렀나? 왜 나한테 그래?”
“하아. 그렇게 나오시겠다?”
고개를 한차례 내저은 여자는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이래서 추억은 그냥 추억으로 남겨야 하는 거라니까.”
그녀는 강형식을 향해 다소 사나운 눈빛을 쏘아내며 따지듯 말했다.
“밖에 나가 있어도 소식 다 들리거든? 오빠가 사고뭉치란 얘기 들었어도 믿지 않았는데……. 하! 직접 보니 알겠네. 맨날 이러고 노는 거야? 질 떨어지게. 어릴 땐 안 그러더니 완전 망가졌네. 그것도 하필이면 진수 같은 애들이랑 어울려……. 관두자. 뭐, 내가 오빠 애인도 아니고 신경 쓸 일도 아니지.”
“하연이 너! 왜 형식이한테는 오빠라고 하고 내 이름은 막 부르는 거냐?”
“아쫌! 분위기 좀 봐가면서 끼지? 그리고 형식이 오빠랑 기분 좋게 마실 수 있다고 해서 왔는데, 이게 뭐야? 나 참, 와인이나 한잔하면서 어릴 때 얘기나 좀 하려고 했더니만. 니 눈엔 이게 분위기 좋은 거로 보이니?”
이름이 하연이라고 했던가? 얼굴만 보자면 어지간한 연예인 뺨을 날리고도 남을 만큼 예쁜 여자인데……. 왠지 무섭다. 날 없는 사람 취급하는 것도 그렇고. 뭐, 그냥 이대로 쭈욱 그렇게 취급해주는 쪽이 나로선 더 좋겠지만. 근데, 이 망할 자식이 그렇게 놔두질 않는다. 강형식이 바로 자기 옆자리를 손바닥으로 팡팡 쳐댄다.
“뭐해? 와서 앉지 않고?”
아니 그러니까, 왜? 나는 강형식에게 어째서 그렇게 날 옆에 앉히려고 구는지 눈빛으로 물었다. 그런 눈빛은 나만이 아니었다. 일제히 쏟아진 눈빛. 방 안에 있는 모두가 같은 눈빛이다. 아, 한 명만 빼고. 하연이라는 여자만 내게 시선 한번 주지 않고 오히려 테이블 건너편에 앉은 세 명의 남자들을 노려보았다. 덕분에 날 보던 남자들의 눈동자가 살짝 떨리는가 싶더니 그중 한 명…… 진수라고 불리던 남자가 눈알을 굴리며 그녀에게 술잔을 내밀었다.
“일단 한잔하자.”
“내가 왜?”
“왜긴. 형식이도 왔는데 기분 좋게 한잔하자는 거지.”
“그래. 하연아. 너 귀국한 거 축하도 할 겸. 겸사겸사지.”
“흥. 내가 한국 들어온 게 언젠데.”
“그러니까. 늦게라도 이렇게 축하 자리를 마련한 거 아니냐.”
남자들이 그녀를 달래고 있을 때, 먼저 잔을 든 것은 뜻밖에도 강형식이었다. 물론 분위기에 휩쓸려 그런 것 같진 않았다. 오히려 그녀나 남자들과는 전혀 상관없는 이유랄까. 그가 내게 술잔을 내밀었다. 이미 잔에 술은 반쯤 채워져 있었다.
“블루인데, 괜찮지?”
“브, 블루?”
“마셔.”
“그게 저어……. 운전해야 해서…….”
“대리 부르면 되지, 뭔 걱정이야.”
얼떨결에 그가 내민 술잔을 받아들고 어떻게 해야 하나 머뭇거리고 있는 사이, 방 안의 분위기는 다시금 얼어붙었다. 아, 진짜 살벌하다, 살벌해. 뭐 상관없지. 오늘뿐인 만남이니까. 설마 다시 볼일 있겠어? 그나저나 이걸 마셔 말아? 아이씨! 안 그래도 짜증 나는데 확 마셔버려? 아냐 아냐. 운전은 그렇다 치고 내일 아침엔 어떡하려고? 출근 이틀째인데 술 냄새 풀풀 풍기면서 주방에 서자고? 그랬다가 뒷감당을 어떻게 하려고. 아서라. 지금 내가 이럴 때냐?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거리며 유혹을 이겨내려고 애쓰고 있을 때였다. 따라라라, 라라……. 응? 이건? 귓가로, 아니 머릿속에서 울려대기 시작한 음악을 들으며 눈을 치떴다. 아니나 다를까. 뒤이어 나레이션이 들려오기 시작한다. - 강형식은 지금 술을 마시지 않고서는 참을 수 없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로 유일하게 자신의 버팀목이 되어 주었던 할머니에 대한 그리움. 이제 곧 자정이 지나고 나면 그 할머니의 생신이기 때문이다. 헐. 별의별 걸 다 알려주네. 그러니까 뭐야? 내일이……. 오늘도 몇 시간 남지도 않았지만, 아무튼 곧 있으면 강형식의 할머니 즉 마나님의 생일이라는 건데. 그래서 강형식이 그 난동을 피운 건가? 아니면 그저 치기 어린 어리광에 불과한가? 어느 쪽인지는 몰라도 어렴풋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지금 강형식의 마음이 어떠한지를. 후우, 가슴 한곳이 텅 빈 듯 마음이 헛헛하고 폐부를 옥죄는 듯한 그리움 때문에 미칠 것 같겠지. 만일 아직도 할머니에 대한 애정이 남아 있다면 말이다. 괜스레 예전 생각이 났다. 학교에서 한창 수업 중이었을 때, 담임선생님이 오셔서 부모님께서 사고로 의식을 잃고 병원으로 이송되었다는 소식을 전해줬을 때의 일이. 술……. 마셔볼까? 나는 술잔을 들어 유리잔 안에서 찰랑거리는 호박빛 액체를 바라보았다. 일 년에 한 번 부모님 기일 때 찾아뵈어 두 분 묘에 따라주곤 하는 소주의 그 맑은 빛이 떠올랐다. 겨우 몇천 원짜리 술이지만, 아버지께서 평소 즐겨 마시던 술. 그럴 땐 어머니께선 또 술이냐며 타박을 하시곤 했지만, 결국 배추전이라든가 안줏거리를 해오셔선 곁을 지키시곤 하셨지. 그러다가 가끔 한두 잔 거들기도 하시고. 술잔 속의 술은 다르지만, 묘하게 마음을 울린다. 이건 대체 얼마짜리일까? 설마 제법 3세씩이나 되는 놈이 쩨쩨하게 한 병에 몇만 원 하는 술을 마실 리는 없고. 게다가 여기 있는 네 명의 남녀 또한 어지간한 집안의 자제들 같진 않은데. 모르긴 몰라도 정·재계에서 내로라하는 사람들을 부모로 뒀을 게다. 어쩌면 강형식처럼 어디 어디 그룹의 아들딸들일지도 모르지. 블루라고 했던가? 술치곤 참 이상한 이름을 가졌다고 생각하지만, 아무튼 눈앞으로 가져오자 풍기는 냄새만 봐도 비싼 술임은 틀림없다. 크큭, 그래. 내 인생에서 이런 고급술을 마셔볼 기회가 또 어디 있을까. 까짓 마시자. 생각해보면 나처럼 요리를 하는 사람은 그것이 음식이든 술이든 간에 기회만 온다면 무조건 맛을 봐두는 게 맞다. 그래야만 혀끝에 남은 그 맛을 잊지 않고, 그걸 밑천 삼아 요리의 맛을 극상까지 끌어올리고 또 때론 새로운 요리를 만들어 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결심을 굳힌 나는 술잔을 들어 입에 가져갔다. 그러곤 거침없이 술을 마셨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따라라라라, 라라……. 아, 잊고 있었다. 아직까지 음악이 사라지고 있지 않았다는 것을. 이 말은 곧 나레이션 역시 끝나지 않았다는 얘기고. - 하지만, 강형식은 되도록 빨리 여기서 나가는 편이 나을 터다. 왜냐면 이하연의 술잔 속에는 남자들이 그녀 몰래 탄 향정신성 약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자칫 이번 일에 연루된 게 알려지기라도 하면 가족들의 시선은 말할 것도 없고 할아버지의 눈 밖에 날 테니까. 푸하아악! 약이라는 말을 듣기 무섭게 나는 술을 뿜어냈다. 그런 나를 방 안에 있던 이들이 이상하다는 듯 쳐다보았고, 개중에는 욕설을 내뱉는 이들도 있었다. 물론 강형식 역시 나를 쳐다보고 있다. 하지만, 난 그를 보지 않았다. 내 시선이 닿아있는 곳은 다름 아닌 이하연. 정확히는 그녀가 막 입가로 가져가고 있는 술잔이었다. 팟!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나도 모르게 뻗어 나간 손에는 이미 그녀가 들고 있던 술잔이 들려 있었고, 정신을 차렸을 땐 술잔은 손을 떠난 뒤였다. 슬로모션처럼 허공에 흩날리는 호박빛깔 술. 느리게 흐리던 시간이 벽을 때리며 깨지는 술잔으로 인해 다시금 빠르게 흐르기 시작했다.
“시발!”
누군가 소리쳤고, 또 누군가는 비명을 내질렀다. 그런 와중에도 나와 이하연은 서로를 쳐다본 채 시선을 교환했다. 뭐야 너? 하는 눈빛이 역력하다. 놀란 얼굴이라 그런가. 눈 진짜 크네. 다만, 좀 차갑게 느껴져서 부담스럽다. 나도 모르게 시선을 돌리자, 강형식이 눈짓으로 묻고 있었다. 왜 그런 짓을? 내가 막 입을 열려는 찰나였다.
“컥!”
누군가 내 멱살을 잡아 온다. 진수인지 뭔지 하는 놈이다.
“이 새끼! 지금 뭐 하는 짓이야! 씨발 놈이 여기가 어디라고 지랄이야, 응!”
멱살을 잡고 있는 손을 쳐대며 켁켁대자, 강형식이 나섰다.
“그 손 놔라.”
“허! 강형식! 진짜 이러기야? 이 새끼가 너한테 뭔지는 모르겠는데, 네가 우리한테 이러면 안 되지! 씨발! 내가 너한테 이런 대접 받으려면 그동안…….”
탁탁! 타악! 몇 번 만에 간신히 멱살 잡은 손을 털어내곤 소리쳤다. 더 이상은 참기 힘들어서.
“수, 술…… 술에 약 탄 거……쿨럭……잖아!”
순간 싸늘해지는 방 안의 분위기. 강형식이 남자들, 그중에서도 진수라는 놈을 노려보며 물었다.
“저 말……. 사실이야?”
“어? 그, 그게…….”
“사실이냐고 물었다.”
“야, 야아. 그럴 리가 있냐? 우리가 미쳤다고…….”
말은 그렇게 하고 있지만, 당황하는 모습이나 더듬는 말투 하며 태도 자체가 이미 사실이라고 시인하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꿈틀. 강형식의 눈이 찡그려지며 눈썹이 이지러지는 순간이었다. 그가 눈을 감는가 싶더니 이내 눈을 번쩍 뜨곤 고함치고 있었다. 방 안에 그가 내지른 고함이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지금 뭐하는 거야! 재밌을 거라고 하더니, 겨우 한다는 짓이 이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