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나만 들리는 거야? (3)2020.10.07.
다짜고짜 반말하는 게 기분 나쁠 법도 하지만, 지금은 그런 걸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운전? 왜 여기서 운전 얘기가……. 흡! 술 냄새. 역겨운 술 냄새가 확 풍겨오는 순간 깨달았다. 나 진짜 멍청하구나. 이 자식, 지금 술 취한 상태였었지. 응? 그럼 지금 술 마신 채로 차를 몰고 여기까지 온 거……. 술은 저 자식이 마셨는데, 정신이 번쩍 드는 건 나였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라 등골을 타고 오르는 소름. 그러니까 뭐야? 자칫 잘못했으면 음주운전의 희생양이 될 뻔한 거야? 난 내 바로 앞에 멈춰 서 있는 차를 보면서 마른 침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그때였다.
“운전 못 해?”
혀가 살짝 말린 듯한 목소리. 술 냄새를 맡아서인지 이제야 비로소 강형식의 눈이 풀린 게 보인다. 와씨! 암만 봐도 만취 상태인데. 저 상태로 운전을 한 거야? 나도 모르게 목을 만지며 대답했다.
“우, 운전이야 할 수 있죠.”
젠장. 엇비슷한 연령대. 어쩌면 나보다 어릴 수도 있는데, 누군 초면부터 반말 찍찍해대고 또 누군 존대한다. 더 지랄 같은 건 그게 무척이나 자연스럽다는 거다. 그게 몹시 마음에 안 들어서 인상을 살짝 찌푸렸을 때였다. 어둠을 뚫고 휙 하고 날아온 무언가를 반사적으로 잡아챘다. 받고 나서야 알아챘다. 열쇠? 손안에 꽉 차게 잡히는 리모컨을 보며 눈을 가늘게 해 보였을 때, 강형식이 비틀거렸다.
“뭐해? 안 타고.”
음, 지금 저 말은 나더러 운전하란 뜻이겠지? 어떻게 들어도 그렇게밖에는 해석되지 않는 모양새다. 어쩐다? 잠시 고민했지만, 내가 할 선택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어떤 경우에도 강형식과는 얽히지 말라던 준석이 형의 당부가 아니더라도, 지금 이 순간 처신을 잘못했다간 그대로 잘릴 수도 있다는 위기감이 엄습했기 때문이다. 사실 눈앞에 있는 사람이 재벌 3세라는 걸 감안하면, 이럴 경우 무조건 강형식의 말을 따르는 게 맞겠지만. 안타깝게도 재벌 3세라고 다 같은 재벌 3세가 아니란 거지.
“저어, 죄송합니다. 저도 가고 싶긴 한데, 회장님 식사 차려드리려면 새벽에 일어나야 해서요.”
살살거리며 연기까지 할 자신은 없어서 고개를 숙이며 표정을 숨겼다. 그 와중에도 회장님이란 세 글자에 악센트를 강하게 넣는 건 잊지 않았다. 그런다고 해서 예상했던 분노의 일격이 날아들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말이다.
“뭐야? 씨발! 너도 날 무시하는 거야?”
젠장! 한밤중에 고성이 터지고 있는데도 아무도 안 나타난다. 지이이이잉. 그 와중에도 저만치 떨어진 곳에 달려있는 CCTV는 잘만 돌아간다. 그러니까 뭐야. 아무리 내놓은 자식이라도 상전은 상전이니 함부로 나서긴 뭐하고 일단 지켜보는 쪽으로 마음을 정했다 이거지? 아놔. 얄밉기도 하지.
“그런 거 아닙니다.”
최대한 감정을 죽인 채 대답했다. 안 그래도 만취해서 감정이 격해 있을 상대방을 자극하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하지만, 다 소용없는 짓이었다. 콰-앙! 아우 씨, 깜짝이야! 갑자기 터져 나온 소리에 덜컥한 심정으로 시선을 들어보니 강형식이 자동차 보닛을 주먹으로 친 채 어깨를 부들거리고 있었다. 헐, 저게 얼마짜린데. 아! 나 저 차 가격 모르지. 아무튼, 엄청 비쌀 텐데, 쯧! 주인 잘못 만나서 저 귀하신 몸이 샌드백 취급을 받고 있는 걸 보니 내 마음이 다 아프다. 그때였다. 강형식이 성큼성큼 걸어온다. 움찔. 다가오는 폼이 한 대 칠 기세다. 에이, 씨! 여기서 한 대 맞고 깽값이나 제대로 받아? 객쩍은 생각을 하고 있는데…….
“어?”
강형식이 내 손에서 열쇠를 낚아채 갔다. 그러더니 서슴없이 돌아서 차로 돌아갔다. 그 모습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을 때, 강형식이 차 문을 열더니 운전석에 올라타는 게 아닌가. 아……. 설마? 그냥 취한 것도 아니고, 비틀거릴 정도로 취한 사람이 운전을 한다고? 헐. 죽고 싶어 환장했나? 아니, 그전에 누굴 죽이려고? 조금 전 무섭게 돌진하다가 바로 내 앞에 이르러서야 차가 멈춰 서던 걸 떠올리곤 진저리쳤다. 아우씨! 이러면 안 되는데……. 잠시 후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난 이미 핸들을 잡고 있었다. 당연히 오른발은 페달을 밟고 있었고. 모르긴 몰라도 내가 평생 벌어도 살 수 없을 정도로 비싼 차라 그런가 잘도 나간다. 밟으면 밟는 대로 쭉쭉 나가는 은빛 찬란한 수퍼카는 휘황찬란한 밤거리의 불빛 사이를 빠르게 파고들며 어느새 한강 다리를 건너고 있었다.
***
“하아!”
미친다, 진짜. 내가 어지간하면 이러지 않는데……. 젠장! 왜 산책은 나와가지고. 그래도 어쩔 수 있냐고요. 술 취한 사람이 운전을 하려고 하는데. 게다가 그 사람이 재벌 3세랍니다. 무슨 수로 막냐고. 집안에서도 내놓은 자식인데, 내가 말렸던들 먹혔을까? 그럴 리가. 그래, 그래. 이게 속 편하지. 얼른 데려다주고 와서 자지 뭐. 그나저나 저치도 부모가 없다고 했던가? 그렇게 생각하면 동병상련을 느낄 법도 하지만……. 웃기지도 않는다. 나나 저치나 부모가 없기는 마찬가지만, 따지고 보면 상황이 다르잖아, 상황이! 이쪽은 식당 접시닦이부터 시작해 노가다판에서 막노동까지 해가며 온갖 험한 일은 안 해본 게 없다. 그렇게 간신히 이 빌어먹을 정도로 비루한 삶을 힘겹게 연명해온 반면, 저쪽은 중학생도 되기 전 부모를 잃었다는 상실감에 잔뜩 삐뚤어져선 온갖 사고란 사고는 다치다가 결국 외국으로 도피 아닌 도피. 거기서도 집안에서 보내준 돈 펑펑 쓰면서 방황이라고 쓰고 사치라고 읽으면 딱 맞을 무개념 방종을 실천했다는 건데. 그게 어떻게 같냐고! 그렇긴 한데, 룸미러도 보이는 강형식의 모습이 쓸쓸해 보이는 건 왜일까? 제기랄. 아무래도 아까 들었던 그 멘트들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근데 그거 진짜 뭐였지? 인간X극장? 안 그래도 복잡한 인생인데, 별별 일이 다 생기네. 요즘 허해서 그래, 허해서. 아무튼, 딱 여기까지다. 강형식이 어떤 인간이든, 더 이상은 신경 쓰지 말자. 진짜 진짜 데려다만 주고 오는 거다. 어휴, 오지랖도 넓지. 이놈의 성격 진짜 어쩌면 좋냐. 한 손으로 핸들을 잡은 채 머리를 벅벅 긁고 있을 때였다.
“속도 줄여. 골목에 대 놓은 차들이 많아서 운전하기 힘든 곳이야. 뭐, 차 긁히는 건 상관없지만, 괜히 매스컴 타면 나나 너나 곤란해지잖아?”
얼씨구. 자고 있는 줄 알았더니만. 그나저나 거 새끼, 말하는 본새하고는. 누가 들으면 내가 친구, 아니 저 새끼 쫄인 줄 알겠네.
“안 그래도 조심하고 있습니다.”
불만은 속으로 꾹꾹 쑤셔놓고선 대답했을 때였다. 뒷좌석에 거의 눕듯이 앉아 있던 강형식이 웃음을 터뜨렸다. 아까 저택에서도 들었던 쇠를 갉는 듯한 소리다.
“크크크크…….”
뭐야? 뭐가 웃긴 건데? 딱히 뭐라고 하긴 어려운데 왠지 날 놀리는 기분이라 영 기분이 좋질 않다. 그렇다고 화를 낼 수도 없고. 그저 인상만 찌푸리고 있을 때, 강형식이 웃음을 그쳤다. 뒤이어 들려온 목소리에는 여전히 쇳소리가 남아 있었지만. 음, 그러고 보니 아까보다 훨씬 목소리가 안정되어 있다. 술이 깨나? 그래 봐야 당장에 운전대를 잡을 수 있는 상태는 아니겠…….
“반말하니까 기분 나쁘지?”
“예?”
“뭘 못 들은 척해?”
룸미러로 바라보니 강형식이 픽하고 웃고 있다. 하필이면 또 그때 그가 날 보고 있어서 눈이 마주친 나는 당황해서 눈길을 피하는데…….
“그럼 너도 반말하든가.”
나 참. 지금 그걸 말이라고. 울컥하는 마음이 들었지만, 그렇다고 그의 말대로 할 수도 없는 노릇. 불편한 마음을 숨기며 운전에만 집중하려고 했지만, 그는 집요했다.
“왜? 겁나?”
뭔가 머리가 뜨거워지는 바람에 나도 모르게 울컥했다가 이내 마음을 다잡았다. 하지만, 한숨이 흘러나오는 건 막지 못했다.
“후우.”
또다시 킥킥거리는 강형식. 비뚜름하게 앉아 있던 몸을 뒤척이더니 비척대며 자세를 바로잡는다. 그러곤 또다시 날 바라보는 강형식이었다. 이번엔 나 역시도 룸미러를 통해 내 뒤통수를 향해, 아니 거울에 비친 내 눈을 향해 쏘아지는 눈빛을 피하지 않았다. 피식. 어떤 의미인지는 모르겠지만, 강형식이 다시금 웃는다.
“몇 살이야?”
대뜸 물어오고 있었다.
“……스물일곱.”
오기가 치밀어 뒷말을 잘라냈지만, 정작 강형식은 조금도 개의치 않는 눈치다.
“나보다 한 살 많네.”
여기까지 얘기한 강형식은 시선을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 상태로 마치 남의 얘기 하듯 담담한, 그러나 취기 때문인지 젖은 듯한 음성을 토해냈다.
“왜지?”
“……?”
“왜 운전대를 잡았냐고.”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서 잠시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얘기했다.
“제가 안 하면 손수 하실 거 같아서.”
“……너, 마음이 약하구나. 아니 정이 많은 건가? 그런 말 많이 듣지? 잘은 모르지만, 뒤통수도 많이 맞았을 거 같은데.”
대박. 돗자리 깔아도 되겠다. 아닌 게 아니라 살면서 뒷박 맞은 것만 몇 번인지. 형 동생 하던 사이는 말할 것도 없고, 누님처럼 생각했던 여자한테 돈 떼어먹힌 건 큰일 축에도 들지 못했다. 그렇게 하나둘 가슴에 새겨진 상처들은 여전히 치유되지 않은 채 경계심으로 남았고, 이젠 누구도 진심으로 믿지 못하게 되었달까. 피식.
“그럴 줄 알았어.”
다시금 들려오는 목소리에 상념에서 벗어나 룸미러로 바라보니, 어느새 강형식의 눈이 내게로 향해 있었다. 쯧, 이놈의 표정이 문제다. 이래서 내가 포커를 못 치지. 뭐, 그럴 돈도, 마음도 없지만. 아무튼, 강형식은 내 얼굴을 보곤 고스란히 속내를 읽은 모양이었다.
“하아. 너나 나나…….”
씁쓸한 웃음을 흘리더니 툭 하고 내뱉었다.
“못 보던 얼굴인데.”
“오늘 왔습니다.”
“주방?”
“예.”
“막내가 요새 안 보이더니, 진짜 갔나 보네.”
담담한 목소리는 이내 비릿한 음성으로 바뀌었다.
“알고 있겠지만, 내가 좀 싸가지가 없거든.”
예, 예. 알고 있고 말굽쇼.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아까 집에서 하는 거 보니까 알겠더만. 봉봉도 아니면서, 지금도 툭툭 내뱉는 말투에 싹퉁머리가 알알이 박혀있고. 내색은 못 하고 그냥 듣고만 있을 때, 강형식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에 나는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러니까 형 대접받을 생각은 마라. 대신…….”
“…….”
“앞으로 너도 말 까.”
헐. 뭔 논리가 저런대? 유학 가서 대체 뭘 공부했기에 사고가 저렇게 돌아가는 건지. 황당해서 눈을 치뜨고 있자, 강형식이 눈을 감으며 마저 말했다.
“싫으면 말고.”
그 말을 끝으로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강형식은 눈을 뜨지 않았다. *** 차를 타고 오는 동안 술이 좀 깼을 법도 한데 여전히 비틀거리며 계단을 오르는 강형식을 뒤따르려고 했지만 멈출 수밖에 없었다.
“됐어. 나 혼자 갈 수 있어.”
자기가 그렇다는데야. 난 그저 한차례 어깨를 으쓱해 보이곤 쳐다만 보았다. 그나저나 혀는 왜 저렇게 꼬였대? 나 참, 아깐 말만 잘하더니만. 대체 얼마나 먹었기에 시간이 이만큼이나 지났는데도 깨기는커녕 갈수록 더 댕댕이가 되어가는 건지. 저러다가 네 발로 기면서 짖는 거 아닌지 모르겠다. 픽하고 웃고 말았다. 그래도 물지 않는 게 어딘가. 실제로 얼굴을 보기 전까지 내가 지닌 그에 대한 인식은 말 그대로 상처 입은 들개였으니까. 한데 직접 보니까, 그 정도는 아닌 거 같다. 얼씨구! 혼자 갈 수 있다고 하더니……. 넘어질 듯 넘어질 듯 위태로운 강형식을 보면서 몇 번이나 발을 뗐다 붙였다 하길 반복했는지 모른다. 그러는 와중에도 지나가는 사람들 어깨란 어깨는 죄다 부딪히는 꼴이 불안하기 짝이 없다. 그 바람에 나도 모르게, 강형식이 넘어질 듯 비틀댈 때마다 움찔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마음을 졸이며 지켜보는 가운데, 룸으로 들어가는 강형식.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자, 그럼 이제 돌아가 볼까? 근데, 택시비는 누구한테 받지? 에휴, 됐다. 그냥 개한테 물린 셈 치지 뭐. 다행히 지갑도 가져왔고.
“설마 모자라진 않겠지.”
지갑 속에 든 돈이 5만 원이 다인데, 충분하겠지? 그건 그렇고. 나이트클럽은 처음 와보는데, 웬 놈의 사람이 이렇게 많은 건지. 무슨 도떼기시장도 아니고, 와나! 정신이 하나도 없다. 휑하니 뚫린 너른 공간, 여기저기에 수십 개는 돼 보이는 테이블이 뿌려져 있고, 테이블마다 과일 안주를 비롯한 각종 안주와 술병들이 보이는 가운데 그 좁은 통로로 웨이터들이 솜씨 좋게 움직이고 있다. 아주 그냥 물 만난 고기 같달까. 하긴 하루에도 수십 번은 저 짓을 반복할 테니, 어쩌면 당연한 결과인가. 아무튼, 웨이터들이 한 손에 안주 혹은 맥주 그것도 아니면 여자들의 손을 쥐고서 묘기라도 부리듯 통로를 드나드는 걸 보면서 난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잠시 구경 아닌 구경을 하다가 웨이터 한 명과 눈이 마주쳤다. 아씨, 민망해라. 딱 봐도 저 새끼 뭐야? 하는 눈빛. 난 최대한 자연스럽게 시선을 피하며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그러곤 마치 전화라도 하는 양 귓가에 붙이곤 돌아섰다. 얼른 나가자. 차는 주차장에 잘 대놨으니까 알아서 하겠지. 난 몸만 빠져나가서 이대로 택시를 타고 돌아가면 되는 거 아니겠어? 아, 그 아저씨 진짜! 그만 좀 볼 것이지. 물관리 하려는 건가? 미안하네요. 청바지에 티셔츠 차림으로 와서. 걱정 말라고요. 지금 나갈 거니까. 근데 생각하니까 좀 열 받네. 젠장! 아니 무슨 재벌집 도련님이 이런 데 와서 술을 마셔? 드라마 같은 데서 보면 좀 더 그럴듯하고 은밀한, 그래서 오지게 비싼 술집에서 끼리끼리 모여서들 놀더만. 쿵쾅거리며 들려오는 음악 소리 때문에 더럽게 정신없는데, 이런 데서 술이 넘어가나? 오, 예쁘네. 때마침 지나가는 여자가 날 힐끔거리길래 시선을 피하며 귀에 대고 있던 전화기에 대고 뭐라고 말하는 시늉을 하려던 찰나였다. 부으으으으으. 와씨! 깜짝이야! 귓가에 바짝 붙이고 있던 핸드폰이 강하게 진동하는 바람에 화들짝 놀라 경기 들린 사람처럼 폴짝 뛰었다가 이내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행히 이상하게 보는 사람은 없는 듯하다. 다들 제 할 일들만 할 뿐 내겐 관심 1도 없어 보인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얼른 화면을 확인했다.
“아, 형.”
준석이 형이다.
- 어디냐? 방에 없던데?
“예? 지금 방이세요?”
- 네 형수가 너 속옷 없을 거 같다고 해서……. 뭐야? 음악 소리? 어디냐? 클럽?
“아! 그게 어떻게 된 일이냐면…….”
시끄러워서 하나도 안 들린다는 얘기에 점차로 목소리를 높이고 있던 내 눈에 화장실 팻말이 보인다. 입구 쪽보단 이쪽이 더 가깝다. 얼른 그쪽으로 향하며 저간의 사정을 털어놓았다.
- 뭐, 대충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너 혹시 밖에 나간 건가 해서 알아보니까 보안팀에서 강형식이 나가는 거 확인했다고 하더라. 그래서 강형식이랑 같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긴 했지. 아무튼, 지금도 같이 있다는 거지?
화장실 안에 들어와서 한참 동안 설명을 한 끝에 준석이 형이 물은 말이었다.
“방금까진 같이 있었는데요. 좀 전에 룸에 들어갔어요. 그리고 전 이제 그만…….”
- 설마 그냥 오려고?
“당연하죠. 제가 여기서 뭐해요?”
- 뭐하긴. 간 김에 여자도 좀 꼬시고…….
“아, 뭐에요. 형. 전 지금 짜증 나서 미치겠는데.”
- 농담이야 인마.
“아 몰라요. 전 집에 갈 거예요.”
툴툴거리며 대충 전화를 끊으려는데, 준석이 형이 정색을 한다.
- 그러지 말고 내 말 좀 들어봐.
“예?”
- 그게……. 일이 좀 꼬였달까.
“……무슨 말이에요?”
- 음, 이런 말 해도 될까 모르겠는데. 강형식이 집에서나 내놨지, 그래도 재벌 3세잖냐. 그래서 보안팀에서 언터처블인 거고. 그렇다고 해서 걔들로서도 신경이 안 쓰이는 건 또 아니겠지. 만일에 하나라도 강형식한테 문제가 생기면 걔들이 옴팡 뒤집어쓰니까. 그래서 나한테 부탁하더라. 혹시라도 네가 강형식이랑 같이 있으면…….
부탁? 뭔가 불안한데? 눈을 가늘게 뜨곤 되물었다.
“설마 저더러 보모 노릇 하라는 건 아니죠?”
수화기 너머에서 어색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아 놔. 나쁜 예감은 어쩜 이렇게 빗나가는 법이 없을까.
“싫어요!”
- 얀마. 강형식한테 문제 생기면 너라고 무사하겠냐? 그리고 이참에 보안팀에 빚 하나 지운다고 생각하면 남는 장사잖냐? 안 그래?
아우, 진짜! 오늘 밤 왜 이러냐? 젠장! 내가 다시는 밤에 산책을 하나 봐라.
“후우. 알았어요. 그럼 어떻게 하면 되는데요?”
- 뭘 어떡해? 네가 알아서 해야지.
“에? 그게 다예요?”
- 그럼 무슨 말을 해?
“그래도 뭔가…….”
애당초 나한테 강형식과 되도록 얽히지 말라고 당부한 게 형 아니었나? 그래서 전화가 걸려왔을 땐 살짝 걱정했던 거고. 근데, 이제 와선 완전 태세전환. 이건 애 보기나 다름없는 건데 아무런 조언도 해주지 않는다고? 심지어 난 카드는 말할 것도 없고 돈도 얼마 가지고 있지 않은데? 어째 강형식 얘기가 나오니까 옳다구나 나한테 맡겨놓고 한발 빼는 느낌이다. 서운한 생각이 들어서 투덜거리려던 찰나였다.
- 어쩌겠냐? 이왕 그렇게 된 거 잘해봐.
잉? 뭘 잘해봐?
“그게 무슨 말…….”
- 아, 셰프껜 얘기해놓을 테니, 혹여라도 아침에 들어오더라도 걱정하진 말고. 이만 끊는다.
“여, 여보세요! 여보세……. 형! 형! 야! 야아아아!”
소리쳐보지만 이미 끊겨버린 전화를 멍하니 쳐다봤다. 아니, 뭐 이런 어처구니없는 경우가 다 있대?
“후우! 뭐지? 이 기분은?”
남들이 서로 떠넘기려고 눈치만 보던 짐짝을 얼레벌레 떠안은 느낌인데. 그것도 핵폐기물 급으로 위험하고 찜찜한. 강대국의 강짜에 밀려서 어쩔 수 없이 산업폐기물을 떠안게 된 약소국들의 심정을 왠지 이해할……. 아악! 이게 아니잖아! 아니, 왜 내가 강형식을 떠안아야 하는 건데? 내가 보모야? 솔직히 내 한 몸 건사하기도 벅찬 마당에 슬쩍 스치기만 해도 터져버릴 것 같은 폭탄 같은 존재를 어째서 내가 전담 마크해야 하는 거냐고.
“와나! 뭐 이런…….”
어찌나 기가 막힌지 말도 이어지질 않는다. 그때였다. 덜컹하며 화장실 문이 열렸다. 그러곤 여기서 들을 수 있을 거라곤 상상조차 못한 목소리. 어느새 귀에 익어버린 음성이 들려왔다.
“뭐야? 여기 있었어?”
강형식? 아니 왜 저 자식이 여길……? 의아한 눈빛을 해 보였을 때, 강형식이 비틀거리며 손짓했다. 자길 따라오라는 듯이.
“여깄는지도 모르고 한참 찾았잖아.”
응? 날 찾았다고? 뭐지? 불안한 심정에 머뭇거렸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이미 강형식은 문을 닫고 사라졌으니까.
“아우, 씨!”
머리를 한차례 헝클어트리며 그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