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환자님 뭐하세요-178화 (178/179)

신계

난데없이 바닥에 처박힌 아트마는 정신이 혼미했다. 통증은 거의 느껴지지도 않았다. 그보다 미칠 듯한

굴욕감이 머릿속을 헤집었다.

그는 자신이 경계할 이는 백명뿐이라고 생각했었다. 백명 외에는 날파리와 다름없다고. 그나마 강한 놈

들도 토끼나 강아지와 같다고 여겼었다.

“손 내놓으라고. 안 들려?”

그런데 저 새끼는 무어란 말인가.

아니, 누군지는 안다.

의회의 안건으로 다뤄졌던 인간.

평화롭던 신계를 쑥대밭으로 만든 원흉.

아트마는 진작부터 유선우에게 분노하고 있었다. 찢어 죽일 상상을 했다. 사지를 갈아서 제 입으로 마시

게 하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 쓰러져 있는 건 자신이었다.

“흐르르르…!”

아트마가 낮게 울며 아귀의 얼굴을 들이밀었다. 자신의 목에 걸린 사슬을 물어뜯을 셈이었다. 사슬의 생

김새가 눈에 들어오자 그가 숨을 집어삼켰다.

‘이게 왜 저놈에게!’

루프라테스를 속박하는 사슬. 아트마가 그것을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에 담긴 힘이 막대하다는 것 역시도 알았다. 직접 사용해봤으니 모르는 게 이상했다.

‘아니, 상관없다.’

이 사슬은 루프라테스에게 사용할 때 진가를 발휘한다. 애초에 그와 관련된 일화를 박아넣어 만든 물건이

니까. 다른 대상에게 써도 충분히 강력한 귀물이긴 하나 그뿐이다.

백명을 꺾으려 동포와 부하까지 먹은 자신이다.

그깟 사슬 따위야 간단하게…….

치지직!

자그마한 소리가 귀를 스친다. 일순간 정신이 끊어졌다. 의식이 돌아왔을 때는 시야가 막혀 있었다. 뒤통

수를 밟히는 감촉을 느끼고서야 눈앞이 바닥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어째 싱겁게 끝나게 생겼구나.”

아트마를 밟은 백명이 비웃듯이 읊조렸다. 어느새 그의 몸은 백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여느 때처럼 전류를 휘감은 모습이 아니었다. 마치 벼락 자체가 사람의 형상을 띤 듯했다.

“끄, 흐으으……!”

아트마는 엎어진 채로 부들부들 경련했다. 수치심과 무력감에 치가 떨렸다.

백명이 새하얗게 물든 눈으로 아트마를 내려다봤다. 그가 입김을 뿜듯이 숨을 가느다랗게 뽑았다.

백색 연기가 너울너울 춤춘다. 그의 눈앞에 백색의 구슬이 비눗방울처럼 떠올랐다.

툭.

백명이 손가락을 튕겨 구슬을 터뜨렸다. 구슬 속에서 섬광이 뿜어졌다. 백광이 물감처럼 번져 적색 장막

을 지운다. 허공을 뒤덮은 눈알이 하나하나 사라진다.

‘어우, 눈부셔.’

강렬한 빛에 유선우가 눈을 찡그렸다. 좁아진 시야에 백명의 뒷모습이 담겼다. 스승의 몸은 실체 없는 전

기처럼 보였다.

“대체 저게 어딜 봐서 무술인지.”

유선우가 질림 반 감탄 반으로 중얼거렸다.

빛이 잠잠해지자 백명이 갑작스레 유선우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가 턱짓으로 사슬을 가리켰다.

“그거 꽉 잡고 있거라.”

“옙.”

백명이 발을 치우고 아트마를 일으켜 세웠다. 복부에 정권을 꽂아 넣자 거대한 몸이 허공을 날았다.

촤르륵!

유선우가 팽팽해진 사슬을 잡아당겼다. 멀어지던 아트마의 몸이 끌려오더니 다시 처맞아 날아간다.

왕복할 때마다 속도가 빨라진다. 호흡이 딱딱 맞아떨어진다.

갈수록 백명의 자세는 아크로바틱해졌다. 반면에 아귀의 거구는 눈에 띄게 작아져 갔다.

몇 번을 반복했을까.

대충 200번쯤은 한 것 같다. 유선우가 지겨워할 즈음에야 아귀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졌다.

아트마는 사람의 형체로 돌아간 뒤로도 계속 맞았다. 추가로 50대가량을 맞자 무자비한 폭력이 끝났다.

“꺼어, 허어어억….”

아트마의 고개가 갈대처럼 흔들거렸다. 무겁던 눈빛은 초점이 흐릿해 혼이 나간 듯했다.

“캬. 역시 시원시원해.”

“그래도 저건 좀…….”

“시, 싫어. 싫어어어!”

초월자들은 상쾌하게 웃거나 눈을 돌렸다. 명왕의 머릿속에선 트라우마가 재생됐다.

얼마 지나지 않아 어색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아트마의 불규칙한 숨소리만이 배경음처럼 깔렸다.

“흐, 흐흐. 하하하!”

돌연 아트마가 실성한 듯 웃음을 터뜨렸다. 잔뜩 쉰 목소리가 광기를 더한다. 그가 눈을 번뜩거리며 백명

을 노려봤다.

“네놈은 언제나 괴물 같군.”

“누가 할 소리를.”

“처음 봤을 때부터 그리 생각했다. 나보다도 탐욕스럽고, 미쳐 있다고.”

옛날 일이다. 백명의 머릿속에선 진즉에 지워진 옛날 일. 그러나 아트마에게는 기억에 박제된 것처럼 선

명했다.

“아직도 눈에 선하다. 의회에 앉아 쉴 새 없이 손가락을 까딱거렸었지. 볼 때마다 오싹하더군.”

“내 맘대로 손장난도 못 치나? 아주 개소리만 늘었어.”

개소리라. 아트마가 이죽거렸다.

“스스로가 더 잘 알겠지. 네놈이 다음엔 무얼 죽일지 기대되는구나. 앞에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었을 때,

갈증을 어떻게 달랠지. 뭐… 알 것 같기는 하다만.”

형형한 시선이 유선우에게 닿았다. 뜻을 알아차린 백명의 얼굴에서 감정이 지워졌다.

“부디 나보다 나은 돌부리가 나타나기를 바라마.”

쩌어억!

아트마의 등 뒤에서 공간이 벌어졌다. 검붉은 선이 빽빽하게 그려진 세계가 현세에 겹쳤다. 아트마는 눈

꺼풀을 닫고 그곳으로 몸을 던졌다.

아니, 던지려 했다.

잘그락!

“기다려!”

개에게 지시하듯 호통친 유선우가 사슬을 잡아당겼다.

줄 건 주고 가야지.

자결을 허락한 기억은 없다.

유선우는 꼴사납게 쓰러진 아트마를 자신의 발밑까지 끌어왔다. 그리고 놈의 가슴에 창끝을 내리꽂았다.

“……!”

핏빛 눈동자가 격렬하게 흔들린다. 바쁘게 수축하는 동공에서 증오가 뚝뚝 흘러나온다.

유선우는 감정의 격류를 고스란히 받아내면서 씩 웃었다.

“뭐. 왜?”

아트마가 분노한 기색으로 입을 뻐끔거렸다. 유선우는 듣지도 않고 장창에 기운을 불어넣었다. 그러면서

마음속으로 놈의 명복을 빌어줬다.

‘막타 놓칠 뻔했네.’

이내 휘황한 빛이 아트마를 집어삼켰다. 그의 생기가 꺼져가며 강대한 격이 부서지기 시작했다.

격의 파편이 밀물처럼 밀려온다.

유선우는 정신이 아득해짐을 느끼며 미소지었다.

‘최종 보스치고는 쉬운 감이 있긴 한데.’

원래 마지막은 동료빨, 템빨이다.

***

유선우는 한동안 눈을 뜨지 못했다. 그는 자신의 내부에서 아트마와 싸워야 했다. 낙원에서 관리자의 파

편과 싸웠던 때처럼.

결과는 패배였다.

처참하지는 않더라도 확실한 패배.

아귀의 한 끼 식사가 되어서야 깨어날 수 있었다.

“일어났구나.”

의식이 돌아오자마자 익숙한 목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 유선우는 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

렸다. 둥둥 떠다니는 구름 소파에 앉은 백명과 루프라테스가 보였다.

“어라. 풀려나셨네요.”

루프라테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대학 붙은 자식 보듯이 흐뭇하게 웃었다.

“전부 백명과 네 덕분이지. 정말로 고맙구나.”

“고맙기는요. 근데 저 얼마나 이러고 있었어요?”

“나흘이다. 아마 과식한 탓이겠지. 피로도 적잖이 쌓여 있었고.”

백명의 대답에 유선우는 쉽사리 수긍했다. 고작 이틀간 얼마나 많은 격을 먹어치웠던가. 그동안 휴식도

한 번밖에 취하지 않았었다. 아무리 정신체여도 앓아눕는 게 당연했다.

“제가 그, 쓰러진 뒤로는요?”

질문하자 루프라테스가 설명을 시작했다.

루프라테스는 아트마가 죽고 나서야 완전한 자유를 얻었다. 주신의 권한을 되찾은 그는 신계로 돌아와 숙

청을 감행했다.

숨어 있던 잔당까지 전부 죽였기에 그가 신계의 마지막 신이 되었다고. 거기까지 들은 유선우는 “신계 개

망했네요” 하고 웃었다.

“초월자에게 투신전을 맡기기로 했네. 백명이 수장을 맡아줘서 얼마나 다행인지….”

“명계는요?”

“한창 정리 중일세. 별 미친 짓을 다 해뒀더군.”

현재 명계는 문제투성이였다.

죄도 없이 끌려온 죄수와 처벌하기에는 뭣한 간수. 구조 자체가 개판이니 전체적으로 갈아엎어야만 했

다.

“일을 덜어줄 수뇌부라도 얼른 채워 넣어야 하는데, 적당한 인재가 없으니 문제야.”

계층주가 둘이나 죽어버렸다. 명왕은 신계의 감옥에 갇혀 엔라의 장난감이 되었다. 유일하게 멀쩡한 이

화는 스스로 감투를 벗어던졌다.

“혹시 자네만 괜찮다면-”

“아, 싫어요. 절대 안 합니다.”

“한 번 듣기라도 해보면 안 되나?”

“진짜 싫어요. 제발.”

명왕 시켜주려 했건만.

루프라테스가 시무룩해져 주절거렸다.

본인이 싫다니 억지로 권유할 수도 없었다.

“지구는 어떻게 됐나요?”

“걱정하지 말게. 엔라에게 들어 전부 처리했네.”

엔라의 이름을 말하는 목소리가 묘하게 따스하다. 유선우가 의아한 기색을 내비치자 반응이 돌아왔다.

“우리 며느리 아닌가. 썩 귀엽더구나.”

“아, 아. 예.”

주신님 점수는 언제 딴 걸까.

요즘 들어 엔라가 영악해진 감이 있다.

“어쨌든 여러모로 문제야 많다마는, 앞으로 조율할 일이겠지.”

그렇게 말한 루프라테스가 돌연 진지한 낯을 지었다.

“정말로 고맙네. 몇 번을 말해도 모자랄 지경이야.”

“고마우시면 뭐… 으흠.”

“그래, 원하는 거라도 있나? 뭐든 말해주게.”

간 쓸개 다 빼줄 듯한 표정이다. 유선우는 입맛을 다셨다가 따뜻하게 미소지었다.

“바라기는요. 다음에 술이나 한잔해주세요.”

“그런 거야 언제든지 괜찮다만.”

“그거면 충분합니다, 전.”

호구 짓은 싫어한다만 상대에 따라 다르다. 루프라테스 앞에서는 얼마든지 호구가 되어줄 수 있다.

주신 빽은 소중하니까.

“욕심이 너무 없군.”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루프라테스의 입이 귀에 걸렸다. 그가 주섬주섬 품을 뒤지더니 웬 구슬 하나를

꺼냈다.

“자네가 그리 말할 줄 알고 미리 준비했네. 사양 말고 받아주게.”

“아, 이러시면 곤란한데.”

유선우는 부담스럽다는 낯으로 구슬을 홱 낚아챘다. 요리조리 살펴본 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게 뭐죠?”

“천공성의 열쇠일세. 사실 내 선물이라기에는 뭣하지. 백명이 자네에게 넘기라더군.”

“아, 그래요?”

유선우가 백명에게로 눈을 돌렸다. 확인하는 시선에 백명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 네가 싫다면 어쩔 수 없지만.”

“스승님께서 주시는 거잖아요. 거적데기여도 좋습니다.”

천공성은 더 좋고. 유선우는 혹시나 뺏어갈세라 손안에 구슬을 숨겼다.

“말은 잘하는구나. 대신에 조건이 하나 있다.”

“조건이요. 일단 들어볼게요.”

신계 일이라도 시키려나. 조금 귀찮다.

눈을 가늘게 뜨자 백명이 피식 웃었다.

“혼인식은 여기서 올리거라.”

“……예?”

“못 들은 척 말고. 네가 혼인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 아무래도 나와는 관련이 없던 일이니 더더욱.”

따사로운 어조가 괜스레 짠하다. 유선우는 저도 모르게 머리를 끄덕일 뻔했다.

“여기로 데려오긴 힘들지 않을까 싶은데요.”

“인간인 아이들은 별수 없겠지. 대신에 방금 얘기한 관리자 있지 않으냐. 그 아이와는 여기서 식을 올려

줬으면 좋겠구나.”

진심 어린 말에 유선우는 잠시간 고민했다. 엔라와 결혼이라. 사람이 아니라 그런지 상상하기가 좀 힘들

었다.

‘말 꺼내면 놀라려나.’

놀라긴 해도 좋아하기는 할 거다. 처음에는 귀를 의심하다가, 아닌 척 입가를 들썩이겠지. 상상해보니 절

로 미소가 지어졌다.

“알겠습니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요.”

“상관없다. 피차일반 시간은 남아도니까.”

그 말을 듣자 유선우는 감회가 새로웠다.

무려 18살 때부터 걸어온 길고 긴 고생길.

고비를 몇 번이나 넘어서 드디어 끝에 다다랐다.

이제는 멈춰서서 풍경을 만끽할 때다.

정상에서도 눈비가 내릴 수는 있겠지마는.

두렵기보단 새로운 여흥으로 기대될 뿐이다.

“스승님은 누구 안 만나세요?”

“내 무공이 뭔지 잊었느냐.”

“아, 아아…….”

백명은 동자공의 달인이었다. 유선우는 말문이 막혔다가 능글능글한 표정을 지었다.

“무공보다 가치 있는 사람도 있겠죠.”

“실없는 소리를.”

백명은 말도 안 된다며 웃어넘겼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가슴의 간질거림이 느껴졌다.

“뭐, 기대는 되는구나.”

***

“……니, 언니.”

차세정은 자신의 어깨를 흔드는 감각에 눈을 떴다. 그녀는 졸린 눈을 비비며 파묻은 고개를 들어 올렸다.

“으응…….”

흐릿한 시야로 글자가 빼곡하게 적힌 양피지가 보였다. 또 책상에서 잠들었구나. 침 흘리진 않았겠지. 자

신의 침 냄새가 밴 책이 벌써 몇 권인지 모르겠다.

“언니는 왜 맨날 이러고 자요? 허리 굽겠다.”

아이릴이 툴툴거리면서 등을 쓰다듬어줬다. 환한 빛과 함께 활기가 차세정에게 스며들었다. 졸음기가 가

신 차세정은 고맙다며 말하곤 고개를 돌렸다.

“…….”

바보같이 커다란 침대.

편안하게 눈을 감은 유선우.

벌써 3개월째 변함없는 광경이다.

차세정의 눈에 울적함이 스쳤다가 지워졌다.

우울해할 필요 없다. 기다릴 수 있다.

여태까지와는 다르게 손을 뻗으면 닿긴 하니까.

차세정은 부스스한 머리를 뒤로 넘기면서 침대로 다가갔다. 한가운데에 엉덩이를 깔고는 유선우의 볼을

콕콕 찔렀다.

‘그래도 화는 나네.’

사람을 얼마나 기다리게 하는 건지. 꽃 같은 20대가 이렇게 날아가는 게 조금 억울하다. 심술이 난 그녀가

유선우의 코를 잡아 살짝 비틀었다.

“잘생긴 새끼.”

맨날 나쁜 새끼 연호하는 것도 질려서 바리에이션을 줬다. 근데 아침부터 창피하네. 차세정은 제 꼴이 우

스워 피식거렸다.

그때였다.

“남사스럽게 왜 이래.”

코앞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눈꺼풀은 닫혀 있는 채로 입만 움직였다.

환청인가 싶어 아이릴을 쳐다보니 눈알이 왕방울만치 커져 있었다. 차세정의 고개가 다시 홱 돌아갔다.

자신의 그림자 아래로 흑갈색 눈동자가 보였다.

“……너.”

“표정 좀 무섭다. 때리는 거 아니지?”

내가 어떤 표정을 지었길래.

아니, 그보다 무슨 말을 해야 하지?

답지도 않게 차세정의 사고가 뒤죽박죽 꼬였다. 그녀의 당황한 모습을 보며 유선우가 미소지었다.

“오랜만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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