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계
문을 넘자 꽃잎이 백명의 눈앞을 가득 채웠다. 크고 작은 다양한 색깔의 꽃들. 얼핏 무질서해 보이면서도
세심한 계산이 느껴지는 경치였다.
혼자만의 생각은 아닌지 곳곳에서 탄성이 터졌다. 제멋대로 사는 초월자들조차 발을 내밀기를 주저했다.
그 완벽한 조화를 해칠까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정원인가. 보기 좋구나.”
백명이 만족스럽다는 듯이 웃음을 머금었다. 코까지 킁킁거리던 그가 다리를 들어 올렸다.
쿠웅!
그대로 발을 내리찍자 지면이 갈라졌다. 꽃잎이 여름철 폭우처럼 흩어지고 먼발치의 정자마저도 무너졌
다. 그토록 아름답던 정원이 단숨에 폐허로 변해버렸다.
“더 예뻐졌군.”
백명은 경쾌한 발걸음으로 꽃잎의 빗속을 걸었다. 그리고 다섯 발짝을 떼기도 전. 그가 고개를 뒤로 돌리
고 깜빡했다는 것처럼 말했다.
“너희 맘대로 하거라. 다 죽여도 괜찮으니.”
그 말에 유선우가 피식 웃고는 앞으로 나섰다.
“자, 자! 선착순으로 무기 받아가세요!”
툭, 투두둑!
유선우가 뿌린 무기들이 바닥에 널브러졌다. 이전에 창고에서 받아온 잡동사니들과 여기까지 오면서 약
탈해온 것들이었다.
초월자들은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었다. 안 그래도 낙원에서처럼 무기를 뽑아 쓸 수 없어 불편하던 참이
었다.
“그런 건 또 언제 준비한 게냐?”
“다 이럴 줄 알고 챙겨왔죠.”
유선우는 검지로 자기 머리를 툭툭 두드렸다. 진상을 아는 이화로서는 어처구니없기만 했다.
한편 엔라는 무기를 받아가는 초월자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확인했다. 그녀는 나중에 빚을 톡톡히 받아갈
작정이었다. 당연히 바가지 씌워서.
“그럼 먼저 가겠습니다!”
“흐, 으흐흐흐….”
초월자들이 물 만난 물고기처럼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중에는 유선우와 친분이 있는 검선도 보였다. 검
선은 어깨를 들썩거리면서 기괴하게 웃고 있었다.
“저 형은 아직도 저러네요.”
“더 심해지지 않았나 싶구나.”
“근데 그냥 보내도 괜찮아요? 죄다 개인행동 하는데.”
유선우가 봐온 투신들은 절대로 약하지 않았다. 어지간한 초월자는 신을 꺾기는커녕 도리어 자신이 꺾일
터. 그런데도 좋다고 달려드니 불나방을 보는 기분이었다.
“제 맘이지. 그간 얼마나 답답했겠느냐.”
“하긴. 그것도 그렇죠.”
다 싸움에 미친 사람들인데 막아봤자 역효과다. 납득한 유선우는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여전히 백명에
게 머리채를 잡혀 있는 명왕이 보였다.
“이놈, 여기서는 죽습니까?”
“히, 히익!”
살벌한 말에 명왕의 몸이 흠칫 떨렸다. 명계를 벗어나 불멸성마저 잃은 상태. 안전장치가 사라지자 그는
두려워서 말조차 제대로 뱉지 못했다.
“죽이고 싶으냐?”
“아주 나중에요. 루프 님한테 드려도 괜찮을 것 같은데.”
“좋아하긴 할 게다. 죽일지는 모르겠다마는.”
“놔주면 그땐 제가 죽이죠, 뭐.”
지금은 점수 따는 게 우선이다. 유선우는 도로 가져온 투명한 사슬로 명왕의 몸을 칭칭 감았다. 얘기를 듣
고 안심했는지 명왕은 제법 얌전하게 굴었다.
‘멍청하기는.’
차라리 여기서 죽는 게 나을 텐데. 유선우의 성정을 잘 아는 엔라는 속으로 코웃음 쳤다.
“슬슬 가자꾸나.”
“어디로 갑니까?”
“우리라고 다를 게 있을까. 지나다니면서 다 죽이면 되겠지.”
“그거 좋네요.”
둘의 말에 이화가 침을 꼴깍 삼켰다. 스승이나 제자나 똑같이 괴물 같았다.
유선우는 백명과 함께 달리기 시작했다. 드넓은 정원을 가로지르자 원형의 분수가 나타났다.
분수에는 흰색 갑옷의 전사들과 창을 든 거구의 사내가 포진해 있었다. 그새 소란을 듣고 달려온 모양이
었다.
“백명, 네놈…!”
백명을 확인하자마자 사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가 격을 발출하자 녹색의 바람이 주변으로 퍼져나갔
다.
백명은 뒷짐을 지고 유선우를 힐끔 쳐다봤다. 시선을 받은 유선우가 히죽거리며 창을 뽑았다.
한편으로 엔라는 눈치 빠르게 사슬을 받아들고 명왕을 걷어차 굴렸다.
“이쪽으로 와!”
“이 잡년이 감히 누굴… 억!”
“콱 씨!”
어이없는 광경에 사내의 집중이 한순간 흐트러졌다. 틈이 드러나자 유선우가 쇄도하며 장창을 휘둘렀다.
카앙!
사내가 황급하게 창을 곧추세워 막아냈다. 궤도에 맞춰 바람을 겹겹이 쌓았는데도 기세가 꺾이질 않았
다.
압도적인 힘에 사내의 자세가 흐트러지고, 유선우의 보랏빛 단창이 섬뜩하게 빛났다.
“막아라!”
다급한 외침에 전사들이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단창은 전사들의 몸을 두 동강 내고 나아갔다. 부하들을
방패로 써먹은 덕에 속도를 조금이나마 줄일 수 있었다.
사내가 창에 바람을 휘감아 마주 내질렀다. 시체들이 갈가리 찢어지고, 창끝과 창대가 맞닿았다.
유선우는 사선으로 세운 창대를 미끄러트리면서 사내에게 접근했다. 그가 다른 손에 쥔 장창을 놓고 손바
닥을 펼쳤다. 그리고 사내의 머리채를 우악스럽게 움켜쥐었다.
“이런 미친…!”
콰앙!
유선우가 놈의 머리를 바닥에 처박았다. 황금빛 돌바닥이 부서져 조각이 사방으로 튀었다.
아래에서 꺽꺽거리는 신음이 흘러나온다. 유선우는 듣는 체도 않고 발로 놈의 뒤통수를 내리찍었다.
쿠웅!
한 번 짓밟자 지면이 주저앉았다. 사내는 고통에 벌레처럼 꿈틀거리면서 발목을 붙잡아왔다. 그 모습을
보며 유선우가 이죽거렸다.
“의외로 단단하네?”
유선우는 바람에 발목이 베이는데도 개의치 않았다. 불멸성을 활용하는 전투에 나름대로 익숙해졌기 때
문이었다.
“언제까지 버티나 보자.”
쿵, 쿵!
“으흡, 크흐읍!”
돌조각이 사내의 입안에 박혀 비명조차 기괴했다. 경악하던 전사들이 정신을 붙잡고 유선우에게 덮쳐들
었다.
유선우는 다가오는 검들을 단창으로 쳐냈다. 부러진 검을 붙잡아 적의 급소에 집어 던지고, 심지어는 검
날을 이빨로 콰득 깨물기까지 했다.
일대 다수의 전투, 개싸움.
가장 잘하는 동시에 익숙한 것이었다.
“어이구.”
전사들이 전멸하자 때마침 사내의 머리가 터졌다. 유선우는 바닥에 침을 퉤 뱉고는 옷매무새를 정리했
다.
“창술을 가르쳐놔도 개처럼 싸우는구나.”
전투를 전부 지켜본 백명이 입을 열었다.
“개처럼 잘 싸우면 됐죠. 창술 안 써먹는 것도 아니고.”
“그래. 많이 늘었어.”
그 말에 유선우가 함박웃음을 지었다. 이런 칭찬은 멋쩍음 없이 받아들일 수 있었다.
***
초월자들은 신계를 제집처럼 돌아다녔다. 어딜 가나 빛이 가득한 신계에 시체가 산처럼 쌓여갔다.
달려온 투신과 전사들.
숨어서 꼴값을 떨던 남신과 여신.
하인을 방패 삼아 달아나던 비겁자들.
창칼을 들든 말든 공평하게 목이 떨어졌다.
유선우의 생각과는 달리 사망한 초월자는 많지 않았다. 백명과 함께 전쟁에서 살아남았던 고참 초월자들
이 일당백의 역할을 해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신계가 평화에 찌들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투신을 제외하고는 전력을 내지도 못하고 어이없게 사
냥당했다.
기세는 갈수록 초월자 쪽으로 기울었다. 적들이 죽으면서 떨어뜨린 무구가 큰 힘이 되었다.
소란이 잦아들었을 때.
유선우가 죽인 신의 숫자는 자그마치 아홉이었다. 부하들까지 합하면 거의 세 자리에 가까웠다.
“어우, 더부룩해.”
시체 위에 선 유선우가 인상을 쓰며 제 가슴을 쓸어내렸다. 하도 먹어치운 탓에 소화하기가 힘들었다. 그
는 후, 하고 숨을 내뿜고는 고개를 들어 올렸다.
“스승님, 저거 뭡니까?”
하늘에는 거대한 천공성 하나가 떠올라 있었다. 그 주위에는 날갯짓하는 남녀가 바글거렸다.
부자연스럽게 아름다운 외모와 순백의 날개.
마치 천사 같은…….
“벌레다.”
벌레였다. 유선우는 놈들을 바라보면서 두어 번 혀를 찼다.
“저 성 지키는 거 같은데. 쟤네가 본대예요?”
“그런 셈이지. 내 기억과는 조금 다르다만.”
“현 의회가 저쪽에 있겠네요. 이제는 의회라고 안 부르나?”
“나도 모른다.”
짧게 대답한 백명이 하늘을 향해 엄지를 퉁겼다. 굵직한 전류가 쏘아지더니 허공에서 폭죽처럼 폭발했
다.
“갑자기 웬. 뭐하신 거예요?”
“소집이다. 준비운동은 마쳤으니 슬슬 전쟁을 해야겠지.”
백명의 말대로 초월자들이 하나하나 모여들었다. 3분도 지나지 않아 모든 인원이 집결했고, 적들과 마주
보는 구도가 만들어졌다.
숫자는 초월자 쪽이 압도적으로 적었다. 그런데도 그들의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했다.
바라마지않던 자유, 그리고 실전.
전장을 바라지 않는 초월자는 단 하나도 없었다.
파지지직!
백명이 발을 내디뎌 허공을 밟았다. 발걸음을 새기듯이 백색의 뇌전이 뒤얽힌다. 이내 그의 입가가 짙은
웃음을 그려냈다.
“선우야.”
“예.”
“즐겁지 않으냐.”
백명은 목소리의 떨림을 숨기지 않았다.
어쩌면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전쟁이다.
물론 어디든지 전장을 찾아갈 수는 있겠지.
그러나 자신에게 유의미한 전투는 두 번 다시 찾아오지 않을 가능성이 컸다.
‘…아니. 한 번이 더 남았나.’
백명의 시선이 유선우에게로 향했다. 언젠가 반드시 자신을 넘을 제자. 그는 만약 죽는다면 제자에게 죽
고 싶었다. 애초에 유선우 외에는 누구도 자신을 죽이지 못할 것이다.
‘아직 죽을 생각은 없다마는.’
낙원에서도 줄곧 무를 단련했다. 답답함은 있었으나 그리 나쁜 시간은 아니었다.
앞으로는 더 즐겁게 살아갈 수 있겠지. 제자의 자식을 보는 것도 썩 기대되었다.
하지만 그러기 전에.
지금을 충실하게 만끽하고 싶었다.
“즐겁죠. 그걸 물어봐야 아십니까.”
유선우는 백명의 뒤가 아닌 옆을 걸었다. 그도 흥분을 감추지 못해 입가가 들썩거렸다.
흉흉한 칼바람과 전류가 마찰한다.
그 속에서 백명이 주먹을 쥐었다.
“양보는 하지 않으마.”
“알아서 주워 먹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백명의 신형이 사라졌다.
쿠르릉!
수백 갈래를 합친 듯 거대한 벼락이 허공에 꽂혔다. 천공성을 둘러싼 투명한 막이 격렬하게 흔들린다.
곧이어 무수한 뇌전이 뻗어져 막 전체에 퍼져갔다. 타닥타닥 튀는 스파크가 결계를 강타했고, 끝끝내 금
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쐐애액!
그때 기다란 창이 정확하게 흠집으로 날아들었다. 창이 닿은 순간 휘황한 빛이 뿜어져 결계를 집어삼켰
다.
막은 버티지 못하고 유리처럼 무너져 내렸다. 그 모습을 보는 적들의 얼굴에는 동요의 기색이 선명했다.
한편으로 초월자들은 광소를 터뜨리며 쇄도했다.
맑은 하늘이 적색으로 물든다. 천지에 열기가 차오르고 붉게 타오르는 태양이 떨어진다.
그리고 태양이 천공성에 떨어지기 직전.
빠지직!
꽃잎 모양으로 펼쳐진 뇌전이 태양을 찢어발겼다. 회심의 일격이 실패하자 토노토가 히스테릭하게 발을
굴렀다.
“아니, 어르신! 매너 없게 왜 이래요! 야!”
“개판이구만. 어휴.”
한숨을 쉰 엔라가 양팔을 쭉 뻗었다. 적들의 날개 위에 얼음꽃이 피어올랐다. 금세 날개 전체가 얼어붙고
수십의 인원이 바닥으로 낙하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새파란 불꽃이 노닐며 그들의 몸을 삼켰다. 불똥이 튀는 모습이 마치 트림하는 것처럼만
보였다.
번잡하기 그지없었다. 한쪽은 가감 없이 자신의 힘을 쏟아부었다. 다른 한쪽은 반항조차 못 하고 철저하
게 사냥당했다.
얼마 지나지도 않아 벌레 떼 같던 무리의 반절이 사라졌다. 창을 휘두르던 유선우는 백명에게로 다가갔
다.
“저건 흠집도 안 나네요.”
둘의 시선이 천공성을 향했다. 온갖 공격이 난무하는 가운데에도 저 성만큼은 멀쩡했다.
“직접 들어가야겠구나.”
“딱 봐도 위험할 것 같은데.”
“쫄았느냐?”
백명이 이죽거렸다. 유선우는 실소를 흘리고는 눈을 가늘게 떴다.
“에이, 설마요.”
쫄았다기보다는 글쎄.
저 성, 조금 가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