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환자님 뭐하세요-175화 (175/179)

명계, 심층

쿵, 쿵!

짙게 깔린 어둠 속.

기둥에 묶인 사내가 눈을 떴다.

“…….”

눈꺼풀 사이로 드러난 바다색 눈동자는 공허했다. 치렁치렁한 백발도 쓰고 버린 빗자루처럼 너저분했다.

언제나처럼.

갇혀 있는 시간이 길어지니 굴욕을 굴욕으로 여기지 않게 됐다. 대신에 당연하다 여겼던 것들의 가치가

높아졌다.

‘술을 마시고 싶군.’

맛과 향은 잊은 지 오래다. 그저 자신이 음주를 즐겼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을 뿐. 사내는 흐릿한 정신을

다잡으며 술맛을 상상했다.

쿠우웅!

그러나 아까부터 들려오던 굉음이 상념을 방해했다. 점점 가까워지기까지 하니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시끄럽게 굴기는. 썩을 놈.’

어지간해선 조용한 장소지만, 가끔 이런 일이 생기고는 했다. 명왕이 어디 가서 욕먹고 쿵쾅거리는 것이

다.

그럴 때면 자신에게 찾아와 뺨을 쳐대는 게 놈의 버릇이었다.

뚜벅뚜벅.

이내 굉음이 잦아들고 발소리가 들려왔다. 사내의 눈빛에 의아함이 어렸다.

‘좀 많은데. 신계인가?’

현재 신계는 시스템에 대해 쥐뿔도 모르는 빡대가리들 천지다. 그렇기에 이따금 사내를 협박하러 오고는

했다. 항상 저들이 먼저 빡쳐서 돌아가기 일쑤였지마는.

‘진작 포기한 줄 알았다만… 뭐, 내겐 좋은 일이지.’

놈들이 화내는 모습은 지루한 감금 생활의 단비와도 같다. 사내는 모욕적인 패드립을 떠올리며 문을 주시

했다.

콰앙!

“어억!”

문짝이 날아가 사내의 머리에 처박혔다. 사내는 몸이 터지자마자 복구되어 그대로 문에 깔렸다.

그리고 그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역시 여기에 있었군.”

사내는 앓는 소리를 내다 말고 바깥을 바라봤다. 백명과 눈이 마주치자 사내의 동공이 세차게 흔들렸다.

“자, 자네가 어떻게…….”

“꼴값은 됐다.”

매정하게 말한 백명이 기둥으로 다가갔다. 그는 문짝을 발로 걷어차 치우고는 사내의 상태를 살폈다. 이

내 백명이 못마땅하다는 듯 혀를 찼다.

“못 보던 새 쓰레기가 돼버렸구나.”

“어쩔 수 없지 않은가. 힘을 죄다 잃었으니.”

“이게 문제로군.”

백명이 사내를 묶은 사슬을 붙잡고 전류를 방출했다. 끼긱거리는 불쾌한 소음과 함께 자그마한 흠집이 생

겨났다.

그게 끝이었다. 선명한 청색 사슬은 백명의 힘으로도 쉬이 끊어지지 않았다.

“엿 같은 걸 만들었어.”

“만든 게 문제겠나. 엿 같은 놈에게 넘겨준 게 잘못이지.”

사내가 쓰게 웃었다. 자조하는 모습에 백명이 짜증스레 인상을 구겼다.

그때 잠자코 듣고 있던 유선우가 끼어들었다.

“저기, 그게 뭡니까?”

“저 아이는?”

“내 제자다.”

백명이 올라가는 입꼬리를 애써 내리며 대답했다.

“제자라. 이것 참….”

사내는 어안이 벙벙했다.

갑작스레 찾아온 백명과 그 제자라는 청년.

갇혔을 터인 초월자들과, 말하는 와중에도 처맞는 명왕.

어느 것 하나 실감이 나지 않았다.

자신이 환각에 취해 있는 게 아닐까.

그쪽이 훨씬 설득력이 높았다.

“루프라테스님. 정말로 살아계셨군요.”

“너는…… 아. 제운희가 아끼던 아이구나.”

사내, 루프라테스의 눈이 이화를 담았다. 그의 푸른 눈동자에 복잡한 감정이 어렸다.

이화를 향한 자책감과 미안함, 다른 이를 향한 분노와 원망. 그따위의 감정이 어지럽게 뒤섞였다.

“아니, 그거 뭐냐니까요?”

뒷전으로 밀린 유선우가 뚱한 낯으로 물었다. 그새 잊어먹고 있었는지 루프라테스가 아, 하고 입을 열었

다.

“보다시피 날 묶는 물건일세. 다섯 개를 만들어 세 개는 의회에, 두 개는 투신전에 넘겨줬지.”

“넘겨줬다니. 뭐 하러요?”

“모든 주신이 그리해왔으니까. 독재를 막는 억제력인 셈이네. 본래는 창이나 검 따위를 만든다만, 난 특

이하거든.”

루프라테스는 유일하게 완전한 불멸성을 가지고 있었다. 때문에 자신을 죽이는 무기 대신 사슬을 만들어

넘겼다.

그리고 뒤통수를 맞아 이 꼴이 되어버렸다.

“당연히 열쇠도 만들어 나눴으나… 뭐, 지금쯤이면 전부 놈들 손에 있지 않겠는가.”

“어떻게 생겼는데요?”

“투명한 사슬일세. 이 사슬과 교차해서 끼우면 풀리는 구조지.”

설명을 들은 유선우가 눈을 깜빡였다. 그가 눈알을 굴리자 엔라와 이화가 시선을 마주쳐왔다.

심지어는 명왕마저도.

넷 모두 짚이는 구석이 있었다.

“설마 다섯 개 다 풀어야 하나요?”

“자네들이 원하는 건 신계로 가는 것이 아닌가? 그쯤이면 하나로 충분하네. 무의미한 가정이다마는.”

“이, 이게 무슨…….”

이화의 표정이 기괴하게 변했다. 창고에 그런 귀물이 섞여 있었을 줄이야. 모르고 있던 건 명왕도 마찬가

지였다.

“개, 개소리하지 마! 그딴 말 들은 적도 없어!”

“당연히 못 들었겠지. 현 신계도 네가 가지는 건 원치 않을 터이니.”

“뭐. 뭐?”

“직접 생각해보면 어떠냐. 네놈의 손에 들어갔다 치고, 네놈이 순순히 신계에 넘겨줬을 것 같은가?”

“그걸 말이라고……!”

퍽!

“시끄럽긴.”

백명이 명왕의 머리를 터뜨렸다. 그가 무언가 낌새를 눈치채고 유선우를 지그시 쳐다봤다.

“설마 네게 있느냐?”

“아니, 잠깐만요. 이러면 곤란한데.”

낭패라는 어조에 반해 유선우의 얼굴은 환했다. 어흐흐, 음흉하게 웃은 그가 루프라테스의 앞에 앉았다.

“저기요. 이거 맞죠?”

유선우가 이화에게 받은 사슬을 꺼내 눈앞에서 휘휘 휘둘렀다. 그러자 루프라테스의 동공이 징그러우리

만치 확장됐다.

“어, 음, 어…….”

“말도 못 하시는 거 보니까 맞네. 캬, 아다리가 이렇게 들어맞냐.”

루프라테스가 입을 뻐끔거리다가 외쳤다.

“그, 그래! 하하! 어찌 이런 일이. 고맙네, 고마워! 내 이 은혜는 절대-”

“잠깐만요. 우리 천천히 얘기합시다.”

유선우가 묶인 채 몸을 들이대는 루프라테스를 제지했다. 그의 광대뼈가 하늘 높이 쭉쭉 올라갔다.

“은혜는 아직 이르죠. 제가 이걸 줄지 안 줄지 모르잖습니까.”

“아니, 안 주면 자네 손해….”

“아닌데요? 솔직히 전 여기까지 해도 상관없어요. 제가 스승님께 드린 약속은 낙원 열어주는 거였으니

까.”

“그렇죠?” 백명을 쳐다보며 짧게 물었다. 백명은 혼이 빠진 낯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자, 확인하셨고. 다음은 제 무용담입니다.”

“무용담?”

“예. 제가 이걸 얻느라 죽도록 고생했거든요. 안 그래요?”

이번에는 이화와 엔라에게 눈길을 줬다. 이화는 꺼림칙하다는 기색이었지만, 결국 긍정했다.

“…하마터면 여기까지 오지도 못할뻔했죠.”

“그때를 떠올리면 정말, 흐으윽!”

원래부터 남 등 잘 쳐먹는 엔라는 왈칵 눈물을 쏟았다. 얼마나 서럽게 우는지 그녀를 언짢게 보던 초월자

들마저 가슴이 아릴 지경이었다.

“……그것도 그렇군. 내 것이었다는 양 달라기에는 염치없는 일이지.”

“에이, 왜 말을 그렇게 하십니까. 비록 제가 이러고 있습니다만,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중입니다. 저희 스

승님이랑 돈독한 사이 같아 보이시는데 제가 어찌 외면하겠나요.”

햇살처럼 온화한 음성이다. 어깨까지 두드려주는 모습에 백명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원래 저런 놈이었나?’

백명의 기억 속 유선우는 활기찬 천재 무인이었다. 약간 버릇없을지라도 속은 따뜻한 호인이라고 생각했

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웃는 얼굴이 마치 뱀 같고 혀에 비수를 숨긴 듯하다. 백명이 그토록 싫어하던 사기

꾼과 똑 닮아 있었다.

‘하지만 싫지는 않군.’

팔불출 백명은 제자가 무슨 짓을 하든 예뻐 보였다. 그래, 자기 이득을 챙기는 건 당연하지. 생각해보니

맨입으로 달라는 루프라테스가 훨씬 개새끼 같다.

“돈독하기는. 그냥 아는 사이다, 아는 사이.”

“배, 백명. 날 그렇게 생각했었나?”

“술 몇 번 마셔줬다고 친한 척하면 곤란하지.”

“그렇구만…….”

루프라테스의 고개가 푹 떨어졌다. 까마득한 세월을 갇혀 있다가 이런 소리를 듣다니. 이쯤 되니 진짜로

죽고 싶었다.

“스승님, 친구분한테 너무 그러시지 마세요.”

“으흠. 그래, 내가 속이 좁지는 않으니.”

“물론 알죠. 어쨌든 그, 루프 님?”

“루프?”

“친구 제자인데 애칭쯤은 허락해주십시오. 하하.”

“내 아들놈이 그렇게 불렀었는데. 그립구나.”

“아들처럼 생각하셔도 좋습니다. 선우라고 불러주세요.”

입 터는 유선우를 보며 엔라가 끄덕거렸다.

‘이름 까먹었구나.’

유선우와 오래간 함께해온 그녀다.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러는 사이에도 거래는 이어졌다.

“그래서, 뭘 원하지? 내게 바라는 게 있다는 것일 텐데.”

“바라기는요. 제가 뭐라고 루프 님께 대가를 요구합니까?”

“정말 아니다?”

“당연하죠. 그냥 친해지고 싶어서요. 앞으로 오래오래 볼 사이잖아요, 저희.”

잘그락, 잘그락.

환하게 웃은 유선우가 루프라테스의 말대로 사슬을 엮기 시작했다. 보는 사람이 답답해질 정도로 느린 손

놀림이었다.

“적적하실 때 제가 술벗도 해드리고. 물질계 얘기도 해드리고. 사실 저 요리도 잘하거든요.”

“그건…… 마음에 드는구나.”

루프라테스가 아련한 눈으로 유선우를 바라봤다. 여태까지 교류라고는 자신을 개처럼 패던 명왕과 시스

템을 요구하던 도둑놈들뿐이었건만. 얼었던 가슴이 봄기운에 녹아내리는 기분이다.

하지만 이내 그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것을 본 유선우도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었다.

“혹시 싫으시면-”

“아니, 아니다. 다만 열쇠를 다 찾기 전엔 이곳을 벗어날 수 없으니. 그게 걱정이 되어서 말이다.”

“그거야 뭐. 올라가서 다 조지면 알아서 뱉겠죠. 안 그렇습니까, 스승님?”

“그렇겠지. 아니면 사슬의 소유자를 죽이면 되는 일이다.”

백명이 선선히 긍정했다. 두 사승을 보며 루프라테스가 울 듯이 얼굴을 찡그렸다.

자신을 위해 그렇게까지 해주는 사람이 아직 남아 있었을 줄이야. 기대조차 못 했던 일이었다.

“이제 됐습니다.”

화아아악!

사슬을 완전히 엮음과 동시에 찬란한 빛이 터져 나왔다. 사슬이 집어삼켰던 강대한 힘이 주인에게 돌아간

다. 루프라테스의 눈에 현기가 어렸다.

‘줄 잘 탔다.’

그 모습을 보며 유선우가 씨익 웃었다.

유선우가 자신보다도 기뻐하자 루프라테스는 다시 한번 울컥했다. 그는 애써 목청을 가다듬고 진지한 목

소리로 말했다.

“백명, 자네도 알다시피 난 유약했네. 반동분자들마저 끌어안으려다 이렇게 되었지.”

눈이 백명을 향했다가 이화에게 닿았다.

“네게도 할 말이 없구나. 제운희가 죽은 것도 전부 내 탓이니.”

이화는 말없이 머리를 숙였다. 그녀를 안타깝게 쳐다보던 루프라테스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하지만 이제는 아닐세. 내 반드시-”

“지랄하지 말고 문이나 열지 그래. 그 상태로 뭘 한다고.”

“그, 그랬지.”

힘이 좀 돌아오니 우쭐해졌다. 그가 머쓱하게 헛기침하곤 입을 열었다.

“‫……ﺑﻄﻨﻲ ﻳﺆﻟﻤﻨﻲ‬.”

기괴한 언어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시스템 보정으로도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 입이 달싹거릴 때마다

글자가 튀어나와 삽시간에 허공을 뒤덮었다.

가지각색의 글자가 제멋대로 섞여간다. 타원형을 이루었다가 삼각형으로 바뀐다. 끝에는 사자의 입으로

고정되었다.

그제야 입을 멈춘 루프라테스가 흡족한 듯 웃었다.

“신경 좀 썼네. 나름 괜찮지 않은가?”

백명은 문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피식거렸다.

“퍽이나.”

그렇게 말한 백명이 사자의 아가리로 걸어 들어갔다. 초월자들과 유선우 일행도 그의 뒤를 따랐다.

마지막이 다가오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