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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환자님 뭐하세요-174화 (174/179)

명계, 하층

“…내가 누구냐고?”

명왕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달아올랐다. 눈동자에서는 수치심과 분노가 불꽃처럼 일렁거렸다.

잠시간 씩씩거리던 그가 흥분을 가라앉히고 비웃음을 흘렸다.

“하! 싸가지는 여전하네. 널 감옥에 처박은 게 난데, 그걸 잊었다?”

그 말에 백명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그건 또 처음 듣는 말이군.”

“허세 부리지 마. 패배자 새끼.”

“뭔가 오해가 있는 모양이다만… 정정하자면, 날 가둔 건 바로 나다.”

“……뭐?”

“그땐 이쪽의 머릿수가 너무 적었었지. 내가 홀로 남아 신계를 쓸어버렸다면 이후의 책임은 누가 져야 했

겠느냐.”

초월자는 시스템에 대한 지식이 얕다. 심지어는 관리자조차 부릴 수 없으니 차원들을 감당할 수 있을 리

가. 그건 백명에게도 무거운 짐이었다.

“뭐, 지금 생각해보면 우스운 일이다. 현 신계에서도 똑바로 책임지고 있지 않은 듯하니.”

“잠깐만요. 이게 지금 뭔 소리야. 자기 발로 들어갔으면서 빼달라고 했다고요?”

황망한 표정을 지은 유선우가 끼어들었다. 백명이 갇히게 된 과정이 궁금하긴 했는데 설마 자의였을 줄

은. 문 열어준 입장에선 어이가 없었다.

“한창 오만했던 시기였던 지라 그냥 폐관 수련이나 한다고 생각했었다.”

백명도 할 말이 없는지 시선을 피했다. 그가 두어 번 헛기침하곤 다시 당당하게 등을 폈다.

“어쨌든 옛일이 아니더냐. 덕분에 이만한 인원이 모이기도 했고.”

백명이 고개를 뒤로 돌렸다. 부서진 낙원의 문. 그곳에선 초월자들이 하나하나 걸어 나오고 있었다.

그들은 상경한 시골 사람처럼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진짜 나왔네. 하하.”

“풍경은 삭막하다만. 수련하기엔 괜찮은 곳이군.”

“막상 나와보니까 별로야. 차라리 낙원이 더 낫지 않아?”

소풍 나온 아이라도 된 양 입을 쉬질 않는다. 유선우의 모습을 보자 소란이 더욱 격화되었다.

“오, 신입 아닌가! 이거 잘 됐군. 안 그래도 설욕하려고 벼르고 있었는데.”

“내가 먼저야! 이번엔 진짜 안 져!”

“나한테도 발리면서 무슨. 그런데…….”

수십 쌍의 눈알이 유선우의 전신을 훑었다. 누구에게 처맞은 양 너덜너덜한 차림. 그들의 눈매가 가늘어

졌다.

“꼴이 그게 뭐지?”

“감히 어떤 새끼가!”

“그걸 꼭 들어야 아나? 누가 봐도 뻔하군.”

사나운 눈초리가 일제히 명왕에게 쏘아졌다. 명왕은 잠깐 흠칫거렸다가 어금니를 아득 깨물었다. 시선보

다도 자신이 위축됐다는 사실이 그를 흥분하게 만들었다.

“이, 이 버러지 새끼들이…!”

콰아아아!

권능이 되돌아왔는지 명왕을 주위로 어둠이 몰아쳤다. 끝을 가늠하기도 어려운 힘. 경계심을 느낀 초월

자들이 전투태세를 다잡았다.

수많은 격이 서로 뒤섞이며 공간을 잠식한다. 그 속에서 파직, 하고 한 줄기의 전류가 튀어 올랐다.

“건드리지 마라.”

그렇게 말한 백명이 한 발짝 앞으로 나섰다. 가라앉은 눈빛을 한 그가 주먹을 내밀었다.

쿠르릉!

울려 퍼지는 강렬한 뇌명. 백광이 거미줄처럼 뻗어간다. 칠흑의 장막이 간단히 찢어지며 명왕의 사방을

둘러쌌다.

이내 명왕의 몸이 신기루처럼 흩어졌고,

퍼억!

“꺼억!”

백명의 뒤편에서 나타나자마자 복부를 가격당했다. 얻어맞았음에도 명왕은 한 발짝도 밀려나지 않았다.

백명이 멱살을 붙잡고 끌어당겼기 때문이다.

“이 악물거라.”

쩍, 쩌억!

움켜쥔 주먹이 명왕의 온 부위를 타격했다. 높은 콧대가 처참하게 가라앉고 턱이 빠진다. 가슴과 배에 대

포알이 지나간 듯 커다란 구멍이 생겨났다.

“감히, 감히 네가…!”

명왕이 목청을 긁는 소리를 토해내며 백명의 팔을 붙잡았다. 어둠이 벌레처럼 꿈틀거려 바닥에 닿았다.

巨劍지면이 갈라지더니 그 안에서 기둥만 한 거검( )이 솟구쳤다.

“흠.”

백명은 물 흐르듯이 뒷걸음질해 궤적에서 벗어났다. 곧 그의 몸이 전류에 휘감겼다.

파직!

한 줄기 섬광이 달렸다. 거검이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명왕의 전신이 불타올랐다.

“끄으, 허어억!”

새까맣게 구워진 명왕이 털썩 주저앉았다. 백명은 다가가는 대신에 숨을 길게 내뿜으며 발을 굴렀다.

쿠웅, 쿠우웅!

대지가 물이 부글거리듯이 부풀어 올랐다. 가뭄 난 땅처럼 바닥이 갈라지고, 백색의 광채가 뿜어진다.

솟아난 빛이 명왕에게 달라붙어 사지를 묶었다. 사로잡힌 모습이 마치 처형 직전의 사형수를 보는 듯했

다.

“이제 좀 기억나는군. 안 죽는 놈이었지, 아마.”

백명의 기억 속 명왕은 아무리 패도 죽지 않는 벌레였다. 명계 안에서는 가히 완전에 가까운 불멸성을 자

랑하는 존재.

“예전엔 나름 골치 아팠었다만, 지금은 글쎄다.”

백명은 길고 긴 세월 동안 수련에 전념했다. 전쟁 때보다도 확연히 강해진 그가 명왕에게 질 이유가 없었

다.

“스스로 죽고 싶어질 만큼 패면 되겠지.”

백명이 장포의 소매를 걷었다. 그를 멍하니 쳐다보던 유선우가 말했다.

“잠깐만요, 스승님.”

“걱정 말고 보고만 있거라. 제대로 쥐어 박아줄 테니.”

“아니, 그게 아니라.”

유선우가 준비 운동하듯 어깨를 돌렸다.

“저도 때려도 됩니까?”

그 말에 백명의 말문이 막혔다. 그것도 잠시, 그가 픽 웃고는 초월자들을 둘러봤다.

“너희도 패거라.”

“역시 어르신이십니다.”

“우리를 너무 잘 아셔.”

“따, 딱히 신입 때문은 아니고 어르신 말씀이니. 흠흠.”

들뜬 말소리가 무질서하게 섞인다. 저벅거리는 발소리가 유난히 선명하다. 명왕은 오싹 소름이 돋아 필

사적으로 몸부림쳤다.

그러나 날뛸수록 족쇄가 단단히 죄어질 뿐이었다. 전류에 닿은 몸이 불타고 재생된다. 어둠은 흘려내는

족족 집어 삼켜진다.

발버둥 치던 명왕에게 수십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명왕은 고개를 들어 흔들리는 눈으로 앞을 응시했

다.

“이런 고얀 놈!”

유선우가 짐짓 사납게 외쳤다. 어조와는 다르게 그의 얼굴엔 웃음이 가득했다.

우드득, 뿌드득.

자기 손가락을 부러뜨릴 기세로 관절을 꺾는다. 명왕은 처음으로 유선우에게 두려움을 느꼈다.

“너, 너 이 새끼. 죽여버리겠-”

짜악!

명왕의 목이 확 돌아갔다. 뺨이 얼얼하다 못해 불타는 듯이 뜨겁다. 형용할 수 없는 굴욕감에 턱이 파르르

떨린다.

치아마저 따닥따닥 부딪히는 모습을 보며 유선우가 히죽거렸다.

“이제 한 대다.”

***

백명은 봄처럼 따스한 눈빛으로 제자를 쳐다봤다. 시선이 하도 간지러워 유선우는 괜스레 볼을 긁적였

다.

“저기. 왜 그렇게 보세요?”

“대견해서 말이다. 못 보던 새 이만큼 컸구나.”

“안 좋은 모습 보여드린 건 창피하지만요.”

솔직한 말에 백명이 허어, 하고 탄성을 흘렸다.

“성격까지 둥글어진 게 아니냐. 얼마 지나지도 않았건만.”

“전 원래 이랬습니다.”

“아니, 확실히 어른스러워졌다.”

“어색하게 왜 그러십니까, 진짜로.”

유선우가 불편하다는 낯으로 투덜거렸다. 느닷없는 칭찬이 머쓱하기 그지없다. 뒤쪽에서 명왕을 때리는

소리까지 들려오니 진지해지기도 힘들었다.

“어쨌든 오랜만에 보니 좋구나.”

“저도 마찬가집니다. 그런데….”

말을 흐린 그가 데구르르 눈알을 굴렸다. 분풀이로 명왕의 뺨을 후려치고 있는 엔라가 보였다.

반면에 이화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제운희의 아이라면 토노토에게 맡겨뒀다. 부상이 심해 보이더군.”

뭔 소린지는 몰라도 맥락상 이화를 뜻하는 모양이었다. 유선우는 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허전하다 싶더라니. 토노토 씨가 없었네요.”

“그 아이가 들으면 섭섭해할 게다.”

백명이 픽 웃었다. 오늘따라 얼굴 근육이 느슨하다. 그는 풀어지는 표정을 다잡고 진지하게 말했다.

“쌓인 얘기는 많으나 우선 일부터 끝내야겠지.”

“알고 있습니다. 이제부터 어쩔까요?”

“아래로 내려가자꾸나.”

“아래요? 여기가 끝이라고 들었는데.”

“그걸 믿느냐. 이런 큰 곳엔 숨겨진 게 있기 마련이다.”

유선우도 동의하는 의견이었다. 그간의 경험으로 명계엔 드러나지 않은 무언가가 있다고 여기고 있었다.

문제는 파헤칠 필요가 있냐는 것. 그에 대해 묻자, 백명은 가벼이 긍정했다.

“신계에서도 낙원이 열린 건 눈치챘을 게다. 그렇다고 내려오지는 않겠지마는.”

“하긴. 오히려 숨겠죠.”

“그러니 우리가 찾아가야겠지.”

백명이 이를 드러내고 섬뜩하게 웃었다. 그가 웃음을 유지한 채로 명왕에게 다가갔다.

묶인 명왕을 개처럼 패던 엔라와 초월자들은 눈치껏 길을 비켰다.

“어디. 적당히 처맞았으면 안내나 좀 해주거라.”

“꺽, 꺼어어억…….”

“두 번 말하는 건 좋아하지 않는다만. 혹시 아직 덜 맞았나?”

파직!

백명의 주먹에 백색 전류가 휘감겼다. 명왕은 안구가 터져 전류를 보지 못했지만, 본능적으로 위협을 감

지했다.

그가 흠칫거리곤 고개를 푹 숙였다. 굴복의 표현이었다.

***

유선우가 먼저 한 행동은 이화를 중층으로 데려간 것이었다. 도착하자마자 이화는 팔다리가 다시 붙어 쌩

쌩해졌다. 그녀는 몇몇 초월자들의 눈총을 받으면서도 정숙함을 유지했다.

다음으론 명왕의 안내를 따라 하층을 가로질렀다. 동행하는 인원은 거의 백에 달했다. 그마저도 낙원에

남은 초월자들을 제외한 숫자였다.

“근데 어르신, 내려가는 거랑 신계랑 뭔 상관이에요?”

유선우에게 쫑알쫑알 말을 붙이던 토노토가 백명에게 물었다. 그녀는 명계의 사정에 대해 무지했다. 사

후로는 줄곧 낙원에 갇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거기 있는 놈에게 도움을 받을 생각이다.”

“네, 네가 그걸 어떻게…… 악!”

눈을 부라리던 명왕의 이마가 깨졌다. 백명은 손을 탈탈 털고 말을 이었다.

主神“주신( )이 있겠지. 신계에 뒀을 리는 없으니 명계에 처박아뒀을 게다.”

“그 뭐야, 옛날 신이요? 다 죽은 거 아니었나.”

“그놈이 죽었을 리가.”

유선우의 물음에 백명이 피식거렸다. 옛 기억이 백명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완전한 불멸성을 가진 신.

끝까지 싸움을 중재하다가 뒤통수를 맞은 병신.

그리고 술을 좋아하는 오랜 친구.

‘꼰대 같은 놈이었지.’

골골대고 있을 꼴을 상상하니 절로 웃음이 비집어 나왔다. 대화를 엿듣던 이화가 조심스레 끼어들었다.

“혹여 제 주인께선…….”

“이미 알고 있지 않으냐. 제운희는 죽었다.”

“……그렇군요.”

헛된 희망이 피어오르자마자 사그라졌다. 이화가 딱딱한 낯으로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풍경은 시시각각 달라졌다.

이동하면서 명왕은 몇 번이고 틈을 노렸으나 전부 좌절되었다. 30초마다 한 번씩 머리가 터지니 답이 없

었다.

한참을 달리자 드넓은 대지가 펼쳐졌다. 높이의 고저조차 없는 황량한 평지. 그 한가운데에는 거대한 게

이트가 자리해 있었다.

“여기서 보니까 느낌 이상하네.”

“그러게. 앞으로 볼 일 없을 줄 알았어.”

유선우의 중얼거림에 엔라가 동조했다.

“본 적이 있나 보구나.”

“지구에서 지겹게 봤었죠.”

“지구라. 흠.”

백명이 흥미를 보이자 유선우가 맞장구쳤다.

“다음에 구경해보실래요? 스승님한텐 좀 안 맞으려나.”

“생각해보마. 새 제자를 찾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동생 만들어주시려고요? 근데 저만한 놈 없을 텐데요.”

“그 정도는 바라지도 않는다.”

둘은 키득거리면서 게이트를 넘었다. 그러자 눈앞에 들어온 것은 웅장한 건축물이었다.

어둠이 자욱한 대지 위에 세워진 검은 신전.

참으로 컨셉에 충실한 장소였다.

“기억과는 다르군.”

“얘가 꾸민 것 같은데요.”

유선우가 명왕의 엉덩이를 발로 차며 대답했다. 백명은 화답하듯이 머리를 한 번 더 터뜨려주곤 앞으로

걸어갔다.

쿵!

백명이 다섯 발짝을 걷자 검은 석상이 움직였다. 석상의 눈에 붉은빛이 어리고, 다물려 있던 입이 열렸다.

“침입자는-”

콰앙!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석상이 와르르 무너졌다. 백명이 손을 털자 스파크가 잔불처럼 흩어졌다.

“가자꾸나.”

“……아, 네.”

유선우는 어리벙벙한 낯으로 스승의 뒤를 따랐다. 엔라와 이화도 마찬가지였다.

반면에 초월자들은 ‘그러면 그렇지’라는 태도였다.

사실만 말하자면, 신전의 경비는 삼엄했다. 복도에만 수십의 수호병이 있었고 함정도 과하리만치 많았

다.

그냥 그랬다.

“쉽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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