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계, 하층
검은 태도가 머리 위로 떨어져 내린다. 재빨리 반응한 유선우가 장창을 크게 휘둘렀다.
서로의 무기가 맞닿자 태도에서 어둠이 뿜어졌다. 흑색 연기가 커튼이 쳐지듯 허공을 덮었다.
밀려드는 어둠을 보며 유선우는 뒤로 거리를 벌렸다. 성공적으로 회피했다고 생각한 순간, 문득 고통이
느껴졌다.
“윽…!”
가슴팍에 기운이 달라붙어 있었다. 기운은 비늘갑옷을 녹이고 안으로 파고들었다.
유선우는 자신의 가슴을 찔러 해로운 기운을 몸 밖으로 긁어냈다. 그의 신체가 복구되기도 전, 명왕의 형
체가 스르르 흩어졌다.
곧이어 유선우의 뒤편에서 어둠이 넘실거렸다.
쐐애액!
이화의 사복검이 날아들어 유선우를 엄호했다. 그러자 허공에서 새카만 손이 연쇄적으로 돋아나 검을 붙
잡았다.
콰득!
손이 길쭉한 검신을 각각 다른 방향으로 잡아 뜯었다. 계층주의 무기가 나무젓가락처럼 간단하게 손상되
었다.
그러는 사이, 유선우는 아래로 낙하하면서 단창에 힘을 불어넣었다. 보랏빛 기운이 창끝에 맺히자 그가
과감하게 창을 집어 던졌다.
자색의 광채가 흑색 장막을 뚫으며 지나간다. 그러나 투창의 기세는 금세 꺾여, 장막에 삼켜졌다.
‘사기잖아, 미친.’
속으로 욕지거리를 뱉은 유선우가 단창을 역소환했다. 그가 장창을 양팔로 쥐어 내지르자 거력이 쏘아졌
다.
투신들마저 압도했던 힘. 명왕도 경시할 수 없었는지 어둠을 갈무리해 자신의 몸을 감쌌다.
새카만 보호막이 찢어지고 복원되는 과정을 반복하기를 한참. 우중충한 하늘에서 색이 빠지더니, 크고
작은 구체들이 생성되었다.
명왕이 손짓하자 구체들이 빗물처럼 떨어져 내렸다.
엔라가 양팔을 들어 올렸다. 바닥에서 네 개의 얼음 기둥이 솟구쳤다. 천장을 덮듯이 하늘이 얼어붙고 구
체가 움직임을 멈췄다.
막아낸 건 좋았으나 문제는 유지하는 것이었다. 어둠이 날뛰어 시시각각 그녀의 간섭력을 먹어치웠다.
“하아, 하아…!”
이내 엔라가 주저앉아 숨을 몰아쉬었다. 고작 수 초간 막아냈을 뿐인데도 간섭력이 송두리째 날아갔다.
그 사이에 이화의 부러진 검에서 새파란 불꽃이 피어올랐다. 불꽃은 허공을 노닐며 구체를 지워내고는,
명왕에게로 떨어졌다.
“마음에 들어.”
명왕이 중얼거렸다. 그가 바람개비 돌리듯 태도를 한 바퀴 휘둘렀다. 고리처럼 둥그렇게 맺힌 어둠이 이
화의 청염을 삼키고, 전방위로 퍼져간다.
유선우는 엔라의 앞으로 달려가 부르르 떨리는 장창을 뻗었다. 가까스로 연기를 몰아낼 수는 있었지만,
억지로 내지른 반동이 그의 팔을 뒤틀었다.
“아흑!”
한편으로 이화는 미처 막아내지 못했다. 그녀는 두 팔과 한쪽 다리를 잃어버린 채로 바닥을 굴렀다.
‘이래선 답이 없다.’
전투가 시작된 지 얼마나 지났다고 하나가 전투 불능에 빠졌다. 그나마 엔라는 상태가 괜찮더라도 전력으
로 기대하기는 힘들 터. 미안한 말이지만 차라리 혼자가 낫다.
판단을 내린 유선우가 입을 열었다.
“엔라. 낙원으로 들어가.”
“…미안.”
짐덩이가 될 줄이야. 이럴 거라면 처음부터 말을 들었어야 했다. 엔라는 그렇게 자책하며 주먹을 으스러
지라 쥐었다.
“됐으니까 가서 기다리고 있어. 어떻게든 해볼게.”
그 말에 엔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애써 몸을 추스르고는 낙원의 문으로 향했다.
엔라를 내려다보던 명왕이 아, 하며 탄성을 터뜨렸다.
“어디서 봤다 싶었더니 저번에 걔였구나. 그때 그냥 놔줬던 게 이렇게 될 줄은 몰랐네. 아주 놀라워.”
“지금도 내버려 뒀으면 좋겠는데.”
“딱히 상관은 없어. 말했다시피 난 너만 죽이면 되니까.”
명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근데 하나만 물어볼게. 낙원에서 어떻게 나왔지? 모르는 새 샛길이라도 뚫렸나?”
“그랬으면 네가 우리 스승님한테 뒈졌겠지.”
“스승? 예전 초월자 중에도 너보다 나은 놈은 별로 없었… 아, 설마.”
그가 이를 드러내고 히죽 웃었다.
“너, 백명의 제자였구나. 어쩐지 닮았다 했어.”
“뭐 인마? 내가 누굴 닮아?”
“하는 짓 말이야. 그것보다 뭔가 오해가 있는 모양인데.”
명왕이 손바닥을 펼쳤다. 그 위로 새까만 기공이 퐁, 하고 피어났다. 곧이어 줄곧 유들유들하던 그의 표정
이 싸늘하게 굳었다.
“내가 백명보다 세.”
기공이 던져졌다. 유선우는 위험을 감지하고 자리에서 벗어나려 했다.
하지만 지면에서 손이 튀어나와 그의 발을 묶었다. 찰나의 지체가 치명적인 틈으로 이어졌고, 먹빛의 구
체가 눈앞에 도착했다.
푸욱!
구에서 수백 갈래의 가시가 뻗어졌다. 가시가 유선우의 전신을 꿰뚫고는 일제히 폭발했다. 폭발에 노출
된 신체가 8할가량 사라졌다.
유선우의 의식이 필름처럼 끊어졌다가 다시 붙었다. 영혼이 통째로 깎여나가는 듯한 고통. 끔찍한 감각
이다.
곧 갑옷이 부여한 불멸성이 그의 몸을 복구했다. 다시 생겨난 망막에 거대한 칼날의 모습이 맺혔다.
촤르륵!
무의식적으로 뻗은 사슬이 태도를 옭아맸다. 그러자 뜻밖이게도 어둠이 가라앉았다.
“…뭐지?”
명왕은 잠시간 의아한 눈빛으로 사슬을 쳐다봤다. 그는 금세 시선을 거두고는 다른 손을 활짝 펼쳐 내질
렀다.
쿠웅!
일장에 얻어맞은 유선우가 뒤로 쭈욱 밀려났다. 몸이 회복되자마자 복부에 커다란 바람구멍이 뚫렸다.
그는 멀어지는 의식의 끈을 필사적으로 붙잡으며 사슬을 휘둘렀다.
명왕이 아닌 엎어진 이화를 향해서. 성공적으로 이화를 잡아챈 그가 그녀를 낙원의 문 안으로 집어 던졌
다.
“쓸모없는 짓을 다 하네. 넘어가도 죽는 건 마찬가지일 텐데. 아, 눈앞에서 죽는 건 보기 싫다 이건가?”
이화가 유선우의 편으로 돌아섰다지만, 낙원의 초월자들은 그것을 모른다. 그리고 그녀와 그들의 사이는
절대로 좋지 않다. 오히려 험악하다고 보는 편이 정확했다.
“네 동족한테 맞아 죽는 게 더 어이없고 개 같은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뭐, 이해는 해.”
“……후우.”
유선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목을 좌우로 당겨 관절을 꺾는다. 이내 그가 감정이 희미한 눈빛으로 명왕을
똑바로 응시했다.
“야. 말이 좀 많다.”
“…….”
명왕이 침묵했다. 그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지만 잠시뿐이었다.
그 짧은 말을 잘못 들었을 리가 없다. 그래서 다음으로는 발언의 진의를 파악하려고 애썼다.
‘단순한 도발인가?’
타당한 선이지만 이해는 가지 않았다. 도발은 엇비슷한 놈들 사이에서나 통하는 잡기술이다.
압도적인 강자에게 시비를 걸어봤자 명을 재촉할 뿐일 텐데. 아니면 혹시 숨겨둔 한 수라도 있는 것일까.
“아니, 아니지.”
깊이 고민하던 명왕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최근엔 줄곧 처박혀 있었기 때문인지 쓸데없는 생각이 많
아졌다.
“역시 닮았어. 백명도 그랬었단 말이지. 항상 자기가 가장 잘났다고 생각하고, 자기보다 강한 놈은 없는
줄 알아. 자기 머리 위에 누가 있다는 걸 절대로 인정하질 않아.”
아무리 돌아봐도 우습다. 그딴 놈을 부담스럽다고 여겼었던 자신이. 그놈의 제자를 막겠답시고 이러고
있는 것도 한심했다.
“그 새낀 쓸데없이 자존심만 세우다가 저딴 데 처박혀놓고 아직도 반성 못 했-”
“듣다 보니까 알겠어.”
유선우가 명왕의 말을 끊었다. 심신이 너덜너덜한데도 그의 표정은 여유롭기 그지없었다.
오연하게 치켜든 턱, 내려다보는 시선, 삐뚜름하게 올라간 입꼬리. 교본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정석적
인 비웃음이었다.
“열등감 뒤지네, 너. 스승님한테 처맞기라도 했나?”
“이 새끼가…!”
촤아아악!
명왕의 전신이 완전히 먹빛의 기운으로 물들었다. 그가 흉흉한 안광을 흩뿌리며 맹수처럼 달려들었다.
여태까지와는 기세부터가 달랐다. 유선우의 수준으로는 막아내거나 회피할 수 없는 속도였다.
하지만,
콰직!
거리가 좁혀진 뒤에도 유선우는 멀쩡했다. 대신에 이화가 넘겨줬던, 거울이 산산이 조각났다.
번쩍!
거울 파편이 흩어지며 백광을 토해냈다. 안구가 타버릴 듯 강렬한 섬광이 어두컴컴한 천지를 비춘다.
빛은 마치 정화라도 시키는 것처럼 어둠을 몰아냈다. 그 속에서 명왕의 흔들리는 눈동자가 유선우를 담았
다.
“뭐, 뭘 한 거지?”
태어났을 적부터 자유자재로 다뤄온 권능. 그것이 어째선지 통제되지를 않았다.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느끼지 못한 탈력감이 엄습했다.
“나도 몰라.”
유선우도 답을 주지 못했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이판사판으로 일을 벌였다. 인과율을 뒤집는다는 수상쩍
은 말에 목숨을 맡겼다.
거울을 명왕이 직접 깨게 만든 건 혹시나 효과가 더 좋아질까 봐. 그냥 그게 전부였다.
엔라와 이화를 보낸 것 역시 어떻게 될지 전혀 모르기 때문이었다.
“될 대로 돼라. 하하.”
해탈한 웃음소리가 가볍게 붕 떠올랐다.
새하얀 빛은 번쩍거리며 물 만난 물고기라도 된 양 날뛰었다. 머지않아 모든 어둠이 걷히고는 한 방향으
로 집중되기 시작했다.
낙원의 문. 기괴한 오로라 안으로 광채가 빨려들어간다. 빛을 삼킨 오로라가 차츰차츰 확장된다.
천지가 격렬하게 진동하며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것을 쳐다보던 유선우와 명왕은 곧 일어날 일
을 직감했다.
‘열린다.’
둘의 생각이 겹쳤다.
다음 순간, 허공에 금이 갈라졌다. 공간이 유리처럼 깨졌다.
까마득한 세월 동안 흠집도 가지 않았던 문.
낙원의 문이 부서졌다.
그리고 그 속에서, 누군가의 그림자가 보였다.
그림자가 서서히 작아지고, 선명해진다.
물끄러미 쳐다보던 유선우가 고개를 푹 떨궜다. 그의 입술에서 마른 웃음이 비집어 나왔다.
“진작 이럴걸. 아끼다가 똥 될 뻔했네.”
인과율.
원인 없이는 아무것도 생기지 않는다는 법칙.
그것을 뒤집는다. 원인 없이 무언가가 벌어진다는 뜻이다. 아니면 반대로, 합당한 원인이 있는데도 결과
가 뒤집힌다는 의미겠지.
그게 어떤 식으로 작용해서 이렇게 됐는지는 모른다. 소유자가 살아남으려면 이것밖에 없다고 판단했을
지도.
이제는 무엇이든 상관없는 일이다.
유선우는 볼썽사나운 미소를 지은 채 문을 바라봤다.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뒷짐을 진 채로 걷는 스승의
모습이었다.
“너는 항상 처맞고 다니는구나.”
백명의 시선이 제자에게 향했다. 빈말로도 온전하다고는 할 수 없는 행색이었다. 옷은 엉망인 데다, 드러
난 살갗에도 먼지와 그을음이 가득했다.
“이래선 내 체면이 죽지 않으냐.”
“참나. 지금 체면이 문젭니까.”
“내겐 중요한 일이지.”
그렇게 말한 백명이 실없는 웃음을 흘렸다. 곧 그의 눈이 명왕에게로 닿았다. 시선이 마주치자 명왕이 악
귀처럼 인상을 구겼다.
“백명……!”
“음?”
사나운 얼굴을 쳐다보던 백명이 눈썹을 늘어트렸다. 그가 의아하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누군데 아는 척이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