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계, 하층
후우우웅!
북풍한설이 몰아친다. 내부로 진입할수록 바람은 더더욱 거세졌고, 공기는 차가워졌다.
방한구가 없다면 한 발짝을 떼어내기도 힘들 법한 맹추위. 그런데도 유선우 일행은 태연하기만 했다.
“여기는 왜 눈밖에 없어?”
“가다 보면 또 달라져. 나는 이 정도가 딱 맘에 들지만.”
“추위는 질색이에요.”
이화는 불평하는 한편으로 안도의 한숨을 흘리며 바닥을 쓰다듬었다. 정확히는 칼브론의 복슬복슬한 털
을 쓰다듬었다.
“당신이 아니었으면 아무것도 못 하고 도로 올라갈 뻔했어요. 고마워요.”
일행은 계층주인 칼브론을 탈것 삼아 이동하는 중이었다. 바람이 태풍처럼 덮쳐왔으나 칼브론의 몸에 올
라타니 미풍으로 변했다. 쉬발 같은 용족이 바람의 가호를 받는 것과도 비슷한 이치다.
“…크흠. 빚이라고 생각해라.”
“빚은 개뿔.”
유선우가 가소롭다는 양 코웃음을 쳤다. 칼브론은 순간 울컥했으나 속으로만 울분을 삼켜야 했다. 더는
처맞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왜! 왜 이런 꼴을!’
그는 이를 바득바득 갈면서도 비행을 멈추지 않았다. 그야 반항하면 아까처럼 뒤지게 처맞을 테니까. 굴
욕적일지라도 아픈 건 싫고, 목숨은 중요하기 마련이다.
“저, 공께서는 감옥을 열고자 하시는 겁니까?”
“응? 아, 응.”
감옥. 부르는 법은 달라도 낙원을 일컫는 말이다. 찰떡같이 알아들은 유선우는 숨기지 않고 긍정했다.
“어찌 그런 일을?”
“대충 알지 않나? 뻔한 이유 말고는 글쎄. 스승님 부탁이라서.”
“스승님이라 하심은?”
“백명이라고 알아?”
그리 묻는 목소리가 공이 튀는 것처럼 활기찼다. 유선우는 스승의 얘기를 꺼낼 때면 항상 제 코가 높아지
고는 했다.
반면에 칼브론은 헉, 하고 숨을 집어삼켰다.
“배, 백…!”
“당신이 그의…. 그건 몰랐군요.”
이화도 덩달아 긴장해 목울대를 넘겼다. 위축됐을 뿐이지 원망이나 분노는 없었다. 그녀는 옛일의 진상
을 알고 있었고, 주인을 해한 흉수는 초월자가 아니라 다른 신이었다.
“왜 그렇게 쫄아?”
“아, 아닙니다.”
묘한 반응에 유선우가 피식거렸다. 한편으로 칼브론은 머릿속으로 주판을 굴리고 있었다.
‘여기까지 왔으면 감옥까진 금방이다.’
하층 곳곳에는 마수가 도사리고 있지만 위협적이지는 않다. 적어도 유선우에게는.
그를 막으려면 어디서 뭐 하는지도 모르는 명왕이 왕림해야만 한다.
‘이러다가 진짜로 열리면?’
상층 계층주는 이미 죽었다. 이화는 배반했다.
파견된 투신들도 당했다고 판단되는 시점. 명계의 병력으로는 절대로 초월자를 감당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이쪽에 붙는 게 맞나?’
초월자의 우두머리나 다름없는 백명과 그의 제자. 서로의 사이도 나쁘기는커녕 각별해 보인다.
요컨대 유선우는 황금 동아줄이라는 얘기다. 재빠르게 생각을 마친 칼브론이 결의에 차올랐다.
“더 빠르게 가겠습니다. 꽉 잡으십쇼.”
뿌드득!
칼브론의 몸에서 뼈가 어긋나는 소리가 났다. 그의 갈색 털 사이로 두 쌍의 날개가 튀어나와 활짝 펼쳐졌
다.
칼브론은 자신의 신체를 어느 정도 변형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날개 없이 비행하던 그는 날개를 다
니 두 배는 빨라졌다.
그대로 10분가량을 이동하다가 돌연 유선우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가 창을 들려 하자 이화가 먼저 몸을
일으켰다.
“캬아아악!”
정면에서 거대한 지렁이처럼 생긴 마수가 덮쳐들었다. 놈의 얼굴에는 입밖에 보이질 않았다. 이목구비가
있어야 할 자리에 전부 입이 있었다.
이화가 마수를 쳐다보며 검을 뽑았다. 검신이 물결치듯 출렁거리더니 웬 채찍처럼 변했다.
사복검이 휘둘러져 마수의 몸을 썰었고, 다시 한번 허공을 춤췄다. 그러자 은밀하게 다가오던 세 눈 박이
늑대의 목이 떨어졌다.
“슬슬 모여드는군요. 여태까지 안 보여서 이상하다 싶었는데.”
“당연한 일이다. 작전 때문에 입구 근방으로는 통행을 제한했으니.”
“무슨 소리래. 통제가 되는 거야, 안 되는 거야?”
통행을 막을 수는 있는데 병력으로 써먹지는 않는다. 게다가 계층주를 공격하기까지 하니 유선우에겐 묘
하게 보였다.
“안 됩니다. 통행도 제가 내린 명령이 아니고, 신계를 통해서 마수의 우두머리 격 되는 놈에게 전해진 것
이고요.”
“그런데 왜 냅둬?”
“신계와 마수 사이에 조약을 맺었다고 들었습니다. 터전을 보존해줄 테니 간단한 지시라도 들어 처먹으
라고. 마음에는 안 들어도 마수를 청소하는 게 부담스럽기 때문입니다.”
“그럼 네가 여기서 하는 게 뭐야. 쓸모없어 보이는데.”
칼브론은 반박할 말이 없어 입을 다물었다.
아니, 맡은 일이 딱 하나 있기는 했다.
명왕의 따까리. 부하도 아닌 애완동물 느낌이다.
곧이곧대로 대답하기에는 수치스러운 직무였다.
“그보다 터전이라니?”
“…하층은 본디 마수의 땅이었습니다. 그걸 빼앗아서 쓰고 있는 셈이죠.”
“그랬어?”
엔라도 금시초문이었기에 귀를 쫑긋 세웠다. 칼브론은 한낱 관리자가 자신에게 말을 낮추는 게 불만스러
웠으나 꾹 참았다.
“명계는 여러 차원을 이어 붙여서 만들어진 장소입니다. 하층은 전부 괴물들의 영토였고요.”
“그건 또 처음 듣네. 너, 왜 이렇게 협조적이야?”
“목숨은 중하지 않겠습니까. 저도 딱히 지금의 신계에 충성하는 건 아닙니다. 명계에 애착이 있느냐면 그
것도 글쎄요. 맘에 드는 곳은 아니니.”
“원래부터 콩가루였구나. 어째 신계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 같다.”
“그럴 이유가 없으니까요.”
이화가 서늘하게 말했다. 그녀가 분노를 활활 태우며 사방으로 사복검을 휘둘러댔다. 그녀의 분전 덕분
에 유선우와 엔라는 편안하게 쉴 수 있었다.
한참을 이동하고 있자 어느 순간에 급격히 환경이 바뀌었다. 추위는 자취를 감추고, 이번에는 몸이 타는
듯한 더위가 찾아왔다.
붉은 하늘과 지면에서 넘실거리는 불길. 조금 전과는 180도 다른 지형이었다.
“보기만 해도 덥네요. 하아.”
이화가 불평하면서 옷깃을 펄럭거렸다. 칼브론 덕분에 열기는 차단되었으나 기분상의 문제는 어쩔 수 없
었다.
특히 엔라는 이전의 일이 트라우마가 되었는지 질색하는 표정이었다.
“여기는 진짜…. 다신 오기 싫었어.”
“저번엔 낙원까지 어떻게 갔었대.”
“운빨이지. 마수도 별로 없었고, 명왕도 안 만났었고.”
“기왕이면 이번에도 안 걸리면 좋겠는데.”
아무래도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유선우가 가라앉은 눈으로 앞을 주시했다.
***
이후로도 풍경은 몇 번이나 바뀌었다. 아름다운 산호 숲이 펼쳐졌고, 독기가 가득한 늪이 나타나기도 했
다.
칼브론 덕분에 어느 지역이든지 쾌적하게 통과할 수 있었다. 중간보스 격인 마수도 가끔 출몰했으나 유선
우의 적수가 되진 못했다.
“드디어 여기까지 왔네. 슬슬 도착할 거야.”
엔라가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그녀의 눈앞에는 밤처럼 새까만 검은 대지가 펼쳐져 있었다.
검은색의 기운이 일렁거리는 땅. 그것은 마치 무수한 벌레가 들끓는 것처럼 보였다.
“갑자기 마수가 안 보이는데. 이쪽엔 안 살아?”
“아무리 마수라도 이딴 데서 살고 싶겠습니까.”
“원래 걔네 땅이었다며?”
“처음부터 이러진 않았습니다. 전쟁 때문에 변한 거죠. 정확히는 명왕 때문입니다만.”
칼브론은 불쾌함을 숨기지 않고 드러냈다. 정신이 똑바로 박혀 있다면 좋아하기는 힘든 장소였다.
깊숙하게 들어갈수록 피어오르는 기운이 강해졌다. 검은 연기가 칼브론의 등을 타고 올라 일행의 몸에 닿
았다. 다행히도 셋 모두 몸을 지킬 수단이 하나씩은 있었기에 별다른 문제는 없었다.
두 시간쯤을 내리 날다 보니 험준한 협곡 지형이 나타났다.
그리고 머지않아 가파른 두 절벽 사이에서 오로라 같은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
유선우는 설명을 듣지 않았음에도 직감할 수 있었다. 공간이 극심하게 뒤틀려 어지럼증마저 느끼게 하는
‘저것’. 저것이야말로 자신이 목표로 삼아온 낙원의 문이었다.
‘근데 씹. 어떻게 열지?’
들어가는 방법이야 알 만했다. 그냥 몸을 던지면 되겠지.
하지만 그가 해야 할 일은 낙원의 해방이었다. 무턱대고 오긴 왔는데 어떻게 여는지 당최 알 수가 없었다.
절로 입가가 일그러졌다. 유선우는 떨떠름하게 문을 쳐다보다가 문득 그 옆으로 눈알을 굴렸다.
그리고,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다.
빙긋 웃고 있는, 불길함을 두른 청년이었다.
“……!”
드물게도 유선우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이유 모를 공포감에 소름이 오싹 올라왔다.
유선우는 반사적으로 이화와 엔라의 옆구리를 안고 크게 뒤로 뛰었다. 둘이 작게 비명을 질렀으나 그는
듣는 척도 않고 청년을 응시했다.
기이할 정도로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놈은 허공에 앉은 채로 시선만 맞춰올 뿐이었다.
이내 미동도 없던 놈이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생각보다 빨리 왔네.”
중얼거리듯 작은 목소리. 하지만 유선우의 귓가에는 선명하게 들려왔다. 그건 이화도 마찬가지였는지 그
녀가 숨을 떨었다.
“조용히 넘어가나 싶었는데. 기다리고 있었군요.”
“응. 찾으러 다니기는 귀찮잖아. 그리고.”
청년이 말을 흐렸다. 그가 미소를 유지한 채로 산책하듯 걸어오기 시작했다.
“이게 기분 좋거든. 마지막에… 그러니까, 다 끝나기 직전에 밟아주는 거.”
눈가가 뱀처럼 가늘어진다. 그 얼굴을 본 칼브론이 기겁하며 입을 열었다.
“며, 명왕님! 여기 계셨습니까. 보시다시피 제가 이 새끼들을 잡아왔-”
“지랄하지 마. 쓸모없는 새끼.”
명왕의 시선이 칼브론을 향했다. 주변을 뒤덮은 어둠이 들끓더니 칼브론의 전신을 휘감았다. 은은한 빛
이 새까만 기운을 몰아냈으나,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끄으으, 끄흐으윽!”
칼브론의 몸이 어둠에 삼켜져 먼지로 변하고는 다시 재생된다. 사라지고 회복되는 일련의 과정이 수도 없
이 반복되었다.
숨이 넘어가라 지르는 비명을 들으며 유선우가 창 두 자루를 쥐었다.
“오?”
太⼑명왕이 입가를 씰룩이고는 느슨하게 주먹을 쥐었다. 그의 손바닥 안으로 어둠이 몰려들어 태도( )의
형태를 이뤘다.
유선우는 차마 선공을 가하지 못했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자신이 처참히 살해당하는 모습밖에 그려
지지 않았다.
‘스승님을 보는 것 같아.’
백명의 앞에 선 듯한 기분. 익숙한 감각이면서도 동시에 생소하기도 했다. 그때는 어디까지나 대련의 형
식이었기 때문이다.
유선우는 움켜쥔 창대로 이화와 엔라를 툭툭 건드렸다. 그가 명왕의 뒤편에 있는 오로라를 눈짓으로 가리
켰다.
틈을 봐서 낙원으로 달아나라는 뜻. 노골적인 신호였기에 명왕도 쉽사리 알아들었다.
“맘대로 해. 난 별로 신경 안 써. 넘어가도 나오지 못하면 죽는 거나 매한가지니까.”
명왕이 근데, 하며 말머리를 돌렸다. 그가 무기를 잡지 않은 손의 검지를 뻗어 유선우를 지목했다.
“넌 아니야. 거기 쓰레기들이랑은 다르게 놓치면 곤란해질 것 같거든. 네가 가진 것들도 탐나고.”
“설레발은. 누가 준대?”
“무슨 소리야? 줘도 안 가져.”
콰아아아!
장막이 펼쳐지듯이 어둠이 사방으로 퍼졌다. 그 속에서 명왕의 이빨이 희게 빛났다.
“당연히 뺏어야지. 그게 재밌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