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계, 중층
노골적인 도발. 그에 가장 먼저 반응한 건 갑옷 차림의 전사들이었다. 그들은 재빠르게 진형을 가다듬고
유선우에게 덤벼들었다.
사방을 점하고는 교묘하게 시간차를 두어 검을 찔러온다. 유선우는 창을 풍차처럼 한 바퀴 돌려 모든 검
격을 쳐냈다.
서로의 무기가 부딪치자 전사들의 몸이 뒤로 쭉 밀려났다. 예상보다도 창에 담긴 힘이 강했던 탓이다. 그
들뿐만 아니라 유선우도 예상치 못했다.
‘힘 조절이 어려운데.’
무기만 밀어내고 단숨에 목을 취할 셈이었건만. 적당한 힘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하기가 어렵다. 그는 내
심 혀를 차면서 다른 창을 하나 꺼내 들었다.
‘좀 짧게.’
단창을 상상하니 검보다 약간 긴 정도의 창이 손에 잡혔다. 상층의 계층주가 남겨준 전리품이었다.
‘이렇게 쓰는 건가?’
힘을 불어넣자 창끝에 보라색의 기운이 모여들었다. 유선우는 먼저 장창을 휘둘러 회피를 유도하고, 거
리를 좁혀 단창을 휘둘렀다.
네 명의 전사가 서로에게 밀집하며 동시에 검을 곧추세웠다. 완벽한 타이밍이었다. 그러나 창에 닿자마
자 기운이 폭발해 방어를 깨뜨렸다.
콰직!
검이 단번에 부러지고, 넷의 몸이 흉측하게 우그러진다. 유선우는 곧바로 주의를 거두곤 뒤를 돌았다.
반원을 그리듯 장창을 휘두른다. 달려들던 적들이 추풍낙엽처럼 나가떨어진다. 초장부터 열댓의 동료가
죽자 전사들이 일제히 거리를 벌렸다.
겁을 먹었다기보다는 서로 의사소통을 나누는 낌새. 유선우는 굳이 추격하지 않고 그들의 외견을 주시했
다.
‘뭐 하는 놈들이지?’
전신이 투구로 가려져 있고, 체형이 죄다 똑같아 개개인을 분간할 수가 없다. 공산품이라도 보는 기분이
었다.
‘일단 약한 건 아닌데. 적어도 내가 잡았던 관리자들보단 세.’
하나하나의 힘은 대단치 않더라도 연계가 뛰어나다. 투신을 죽이기 이전이었다면 상당히 고전했으리라.
하지만 그때와 지금은 장비부터가 천지 차이다.
‘신중할 필요는 없겠어.’
유선우의 눈이 가라앉았다. 그가 가볍게 장창을 휘둘렀다. 창격이 형상화되어 뻗어 나간다. 그 뒤를 따르
듯이 허공을 박차 과감하게 돌진했다.
전사들은 파괴력을 경계해 방어보다는 회피 위주로 움직였다. 그러나 그들은 속도마저도 유선우를 따라
가지 못했다.
검이 허무하게 허공을 가르고, 찰나의 틈이 죽음으로 직결된다. 쉰에 이르는 전사들의 숫자가 순식간에
스물가량으로 줄어들었다.
유선우가 추가로 셋의 목을 날렸을 때.
그의 뒤편에서 뇌광이 쏘아졌다.
쐐애액!
고속으로 내지른 창이 그대로 벼락을 꿰뚫었다. 번개가 열 갈래로 찢어지더니 뱀처럼 창대를 타고 기어올
랐다.
유선우는 호신강기를 전개하며 공격 범위에서 벗어났다. 추격을 대비하려는 순간, 문득 옆구리에서 고통
이 느껴졌다.
“읍….”
신음을 흘리며 아래를 내려다봤다. 세검이라 부를 만한 얇은 칼날이 몸을 꿰뚫고 있었다.
칼의 길이가 10m는 족히 넘는 기이한 검.
그 끝에는 청년의 얼굴을 한 투신이 보였다.
“핫! 종잇장이라도 뚫은 느낌인데.”
“입 털 시간 있으면 더 때려. 등신아.”
유선우가 찢어진 호신강기를 다시 전개해 칼날을 밀어냈다. 그가 장창을 휘둘러 칼을 쳐냈다.
급으로 밀리지 않는 신물이었는지 얇은 두께임에도 부러지지 않았다. 그러나 충격으로 인해 검이 놈의 손
에서 벗어났다.
부우웅!
쏘아진 창격이 공간을 잘라내며 나아갔다. 전사들이 황급히 투신의 앞으로 달려들어 방패 역할을 해냈
다. 다섯이 희생되고도 기세가 죽지 않아 투신의 오른쪽 팔다리가 날아갔다.
“끄으으윽! 이, 이 새…!”
“이렇게 하라고.”
어느새 거리를 좁힌 유선우가 단창을 투신의 가슴에 찔러넣었다. 그대로 창끝에 기운을 불어넣었다. 보
라색 광채가 번쩍이더니 놈의 몸이 터져 나갔다.
그야말로 압도적이었다. 첫 공격을 운 좋게 피해 온전한 상태였던 투신이 쉽사리 죽어버렸다.
무기를 찔러넣기는 했으나 유선우의 상처는 이미 말끔하게 아물어 있었다.
“이, 이화! 가만히 서서 뭐 하는 게냐!”
한 투신이 겁에 질린 음성으로 외쳤다. 한심하기 그지없는 모습에도 이화는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손을 휘적거리자 장검이 가녀린 손에 잡혔다.
“알아서 조심해.”
유선우가 이화를 응시하며 말을 건넸다. 담담한 어조에 그녀가 빙긋 웃고는 검을 집어던졌다.
유선우가 아닌, 명령했던 투신의 얼굴을 향해서.
푸욱!
“끄어억…!”
얼마나 힘이 들어갔는지 칼이 눈알을 찌르고 머리를 관통해 빠져나왔다.
이화는 날아가듯 땅을 박차 그대로 검을 잡아챘다. 칼자루를 역수로 쥔 그녀가 투신의 목을 잘라냈다.
“네, 네 이 년이 감히!”
살아남은 하나가 꼬장꼬장한 목소리로 호통쳤다. 당황한 건 유선우도 마찬가지였다.
“뭐야. 죽기 싫다며?”
“부끄럽게도요. 그러니 부디 제가 연명할 수 있도록 힘 써주시길.”
“허. 처음부터 말할 것이지.”
“확신을 얻은 건 지금이라서요.”
이화가 화사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우아한 몸짓으로 칼을 털고는 입을 열었다.
“조금 박쥐 같을지도 모르겠네요. 경멸하셨나요?”
“아니. 오히려 맘에 들어.”
“그러신가요.”
잔잔한 웃음소리가 흐른다. 전장에 어울리지 않는 훈훈한 기류가 피어올랐다.
그때 전사들의 호위를 받던 투신이 눈을 부라렸다.
“네년이 정녕 정신이 나갔구나. 처음부터 들이는 게 아니었어. 제운희, 그년처럼 사지를 찢었어야 했거
늘!”
“…….”
이화가 호통이 들려온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눈웃음까지 짓던 그녀의 얼굴이 싸늘하게 식었다. 그녀
는 말조차 아깝다는 듯이 입을 다물고 발을 내디뎠다.
“거둬준 은혜도 모르고…. 저 반역자의 목을 쳐라!”
지시가 떨어지자 전사들이 검을 내세웠다. 그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승산은 없었지만, 태어나기를 충견
으로 태어난 그들에게 자유의지는 없었다.
“야. 하지 말아봐.”
유선우가 사슬을 뻗어 이화의 발목을 묶었다. 익숙하지 못해 전투에도 쓰지 않았던 물건. 아군에게 쓴다
는 게 우습기는 했어도 그에게는 중요한 일이었다.
“무슨 일이신가요. 참으라는 말씀이라면-”
“하나는 봐줘도 둘은 안 되지.”
“…네?”
“내 거라고.”
심각하리만치 진지한 음성이 앉았다. 그 말을 들은 투신이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가, 악귀처럼 낯을
구겼다.
“네놈, 네놈이 감히!”
모욕을 감내하지 못한 투신이 달려들었다. 그의 손에서부터 뇌전이 방출되어 사방에 흩뿌려졌다.
“아까 너였구나.”
뒤에서 번개를 쏘던 놈이다. 유선우는 단창과 사슬을 손에서 놓고 빛무리로 되돌렸다. 장창을 두 손으로
쥔 그가 창을 단숨에 내리그었다.
허공에 은백색의 선이 그어졌다. 투신의 몸과 함께 지면이 갈라지고, 우중충한 하늘이 엇갈렸다.
쩌저저적!
공간이 유리처럼 깨지며 지반이 무너진다. 발밑이 위태위태해 몸이 휘청거린다. 자세를 바로잡던 유선우
는 정신을 차리곤 주변을 둘러봤다.
“그거 어딨어, 그거!”
“네, 네?”
“먼저 죽은 놈이 쓰던 거 있잖아. 칼!”
“그거라면 아마 저쪽에….”
이화가 어리벙벙한 표정으로 한 방향을 가리켰다. 그곳을 확인한 유선우가 고개를 위아래로 흔들었다.
“챙겨올 테니까 그, 누구였지. 네 부하한테 연락해서 엔라 좀 불러줘.”
“엔라라면… 당신의 동행 말인가요?”
“그래. 하층 가야 할 거 아니야. 입구 막히면 어떡해?”
그제야 이화가 아, 하고는 정신을 집중했다.
유선우는 그녀에게서 눈을 떼고 전리품을 얻으러 달려갔다. 주위에는 이미 투신과 전사들이 남아 있지 않
았다.
***
유선우와 엔라, 그리고 이화는 다 무너져 가는 절벽 아래로 몸을 던졌다. 다갈은 동행하지 않았다. 그의
안전을 걱정한 이화의 지시였다.
중층에 내려올 때도 그랬듯이 반쯤을 낙하하자 공간이 뒤틀렸다. 순식간에 경치가 바뀌고 공기마저 돌변
했다.
도착한 하층에는 지독한 한기가 퍼져 있었다. 꽁꽁 얼어붙은 지면과 하늘에서 쏟아지는 눈보라. 살이 도
려지는 듯한 맹렬한 추위가 엄습해왔다.
“하아아…. 막상 와보니 후회되네요.”
이화는 몸을 움츠리고 자신의 양팔을 쓰다듬었다. 분위기에 휘말려 따라왔건만 중층을 벗어나니 탈력감
이 몸을 휘감았다.
그녀는 여태껏 계층주의 권한에 의존하지는 않았으나 체감은 상당했다.
“생각보다 안락하네.”
“그치?”
반면에 유선우와 엔라는 태연한 모습이었다. 오히려 상층이나 중층에서보다 활기차기까지 했다.
설산에서 태어난 엔라와 그녀의 권능을 받은 유선우. 그들이 추위에 벌벌 떨 리가 만무했다.
“근데 얘네는 다 뭐야.”
유선우가 무심한 눈빛으로 주위를 훑어봤다. 그의 눈에 담긴 것은 포진해 있는 전사들이었다. 그들은 방
금 몰살한 이들과 똑같은 갑옷을 입고 있었다.
“도주를 대비해서 대기시켜둔 게 아닐까요.”
“슬슬 귀찮은데. 피곤하기도 하고.”
유선우가 지긋지긋하다는 듯이 불평했다. 그는 중층에서의 전투로 인해 피로감을 느끼고 있었다. 소모한
힘도 컸지만, 수확한 신격과 간섭력을 소화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럼 제가….”
“아니, 내가 할 거야.”
엔라가 나서려는 이화를 제지했다. 그녀는 손을 탈탈 털면서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었다. 홈그라운드라고
할 만한 환경 덕분에 자신감이 솟아난 것이다.
우우우웅!
엔라가 양손을 뻗자 지면을 뒤덮은 눈이 붕 떠올랐다. 눈의 장막이 펼쳐져 전사들을 가뒀고, 떨어지던 눈
보라는 그녀의 머리 위로 모여들었다.
이내 뭉쳐진 눈덩이가 얼어붙더니 거대한 발의 형태로 바뀌었다.
쿵, 쿠웅!
발이 미친 듯이 바닥을 찍어눌렀다. 충격에 떨어져 나간 파편은 자그마한 칼날이 되어 장막을 헤집고 다
녔다.
“아하하하! 다 뒈져!”
웃음소리와 지축이 흔들리는 소리가 뒤섞인다. 여파가 상당했는지 근처의 설산에서도 눈사태가 일었다.
그 재해마저도 엔라의 권능으로 인해 커다란 주먹으로 바뀌었다.
“아, 스트레스 풀린다. 아아아아아!”
⼿⾜엔라가 세상을 다 가진 표정으로 소리쳤다. 그녀는 한참이나 얼음 수족( )을 내리꽂은 뒤에야 후련하
다는 듯이 미소지었다.
마지막으로 그녀가 주먹을 쥐자 얼음덩이와 눈의 장막이 일제히 폭발했다.
먼지처럼 작은 파편이 반짝거리며 하늘을 장식했다. 그 경치를 바라보던 유선우에게 이화가 물었다.
“저분은 관리자라고 알고 있는데. 아닌가요?”
“응? 맞는데 왜?”
“일개 관리자가 어떻게 저런….”
이화가 예전에 봤던 엔라는 저만큼 강하지 않았다. 지형의 이점이 있는 건 그때도 마찬가지. 그리고 당시
의 엔라는 신계의 전사들을 압도할 수준은 아니었다.
그녀의 의문에 유선우는 어깨를 으쓱이기만 했다.
‘어쩌면 나랑 붙어 있었던 게 좋게 작용했을 수도 있지.’
상성을 맞춘 상대와 말 그대로 한 몸이 되었던 것. 그게 서로에게 도움이 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굳이 대답해주진 않았다. 확실하지도 않고 무엇보다 설명하기 귀찮으니까.
“정리됐으면 슬슬-”
유선우가 출발하자고 말을 꺼내려 할 때.
일행의 발밑으로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남의 구역에서 제멋대로 날뛰는구나.”
위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유선우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하늘에는 난생처음 보는 동물이 둥둥 떠 있었다.
“뭐야 쟨. 특이하게 생겼네.”
연체동물을 연상시키는 길쭉한 몸체. 그러나 표면에는 비늘 대신에 갈색의 털이 자라나 있었다.
이목구비도 파충류보다는 포유류에 가까웠다. 그중에서도 개처럼 생겼다고 할지. 비대한 몸집에 비해 제
법 귀엽게 생긴 놈이었다.
“칼브론. 이곳의 계층주예요.”
그렇게 말한 이화가 검을 뽑아 들었다. 그녀가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자 칼브론이 콧방귀를 뀌었다.
“반항심은 진작에 꺾인 줄 알았는데. 오래도 참았군.”
“당신과 말을 튼 기억은 없습니다. 괜히 아는 척하지 마시죠.”
“안타까움에 한두 마디쯤 해주는 것뿐이다. 지금이 네 마지막이 될 터이니.”
칼브론이 담담한 어조로 말하고는 셋을 힐긋 쳐다봤다. 그가 유선우에게서 눈을 뗀 순간,
뻐억!
경쾌한 타격음과 함께 칼브론의 턱이 뒤로 젖혀졌다. 난데없는 고통이 그의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었다.
칼브론이 혼란스러워하는 사이, 유선우는 기다란 등 위에 엉덩이를 깔고 앉았다.
“네놈, 이게 무슨… 억!”
목이 조여지는 감각에 칼브론이 아래를 내려다봤다. 그러자 늠름한 자신의 몸체가 투명한 사슬에 휘감겨
있는 모습이 보였다.
잘그락.
유선우가 사슬을 잡아당기며 음흉하게 웃었다.
“너, 빨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