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환자님 뭐하세요-170화 (170/179)

명계, 중층

결과적으로 유선우는 창고의 모든 물건을 챙겼다. 잡동사니 하나를 남기지 않고 전부 쓸어 담은 그는 이

화에게 답례의 말을 전했다.

그것을 바라보며 이슬라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왜 저 사람이 감사를 받지?”

창고로 유선우를 안내해준 건 이슬라였다. 물건도 태반은 죄수들이 모아온 것이었고. 그런데 계층주가

대뜸 나타나서 선심 쓰듯이 넘겨주다니…….

‘지가 뭔데?’

어이도 없고 좀 억울하다. 결과는 똑같을지라도 기분이 영 불편했다. 유선우의 호의도 자신이나 마을보

다는 이화에게 향한 듯했고.

“뭐라고 했어요?”

“아, 아니에요.”

유선우의 물음에 이슬라는 애써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말을 넘겼다. 대놓고 툴툴거릴 배짱은 없었다.

“그보다 오늘은 쉬겠다고 하셨었죠. 따로 원하시는 곳이라도?”

“딱히요. 뭐 다 비슷비슷해 보이던데.”

낙원에서 별의별 건물을 다 구경해본 유선우에겐 도긴개긴으로만 보였다. 촌장의 집도 가장 클 뿐이지 그

리 훌륭해 보이지는 않았다.

“그럼 저희 집으로 안내해드릴게요.”

“상관은 없는데. 너 집 있어? 잡혀갔었으면서.”

엔라가 가볍게 물었다. 배려도 없는 말에 이슬라가 쓰게 웃었다.

“집은 항상 남아돌죠. 끌려가도 철거는 안 해요.”

“그러고 보니 진짜 왜 끌려갔었던 거예요? 아까 말한 건 다 구라였다 치고.”

“별로 다를 거 없어요. 간수 놈 거기를 콱 씹어버렸거든요.”

“어우야.”

셋은 담소를 나누며 마을을 가로질렀다. 집으로 들어가자 이슬라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평생 못 돌아올 줄 알았는데…….’

새삼스레 가슴이 울컥거린다. 이슬라는 감정을 추스르며 유선우와 엔라에게 방을 건네줬다.

둘은 이리저리 둘러보지도 않고 여독을 풀겠다며 방으로 들어가 침대에 누웠다.

“으, 빳빳해. 뭐로 만든 거야?”

“바깥에 짐승 털 뽑았나 보지.”

엔라는 투덜거리다가 갑작스레 히죽 웃었다. 그녀가 유선우에게 거머리처럼 찰싹 달라붙고는 머리를 비

비적거렸다.

“으으응. 역시 이게 좋아.”

“그러게. 좀 허전한 느낌이었는데. 붙어 있으니까 낫다.”

유선우는 엔라의 뒤통수를 감싸 안았다. 맞닿은 부분을 통해 청량한 감각이 전해진다. 엔라와 함께 낙원

을 나온 후로 몸속에서 항상 느껴지던 감각이다.

“넌 애들이랑 맨날 뒹굴었으면서.”

“에이. 그거랑은 다르지.”

“뭐가 다른데?”

엔라가 장난스럽게 말꼬리를 잡으며 유선우의 위에 올라탔다. 은근슬쩍 몸을 문지르면서 일어난 탓에 그

녀의 옷매무새가 흐트러졌다.

둘이 피곤함도 잊고 음양합일을 시작하려 할 때,

끼이익.

불쾌한 소음을 토해내며 방문이 열렸다.

“혹시 뭐 필요하신 거 있으시면…… 아.”

이슬라가 침대를 보고는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그대로 문을 닫았다.

아무것도 못 봤다는 것처럼.

‘내 실수네.’

남녀가 같이 들어갔는데 노크도 안 한 내가 나빴지. 3분도 안 지나서 달라붙을 줄은 몰랐지만 어쨌든.

이슬라는 겸허하게 잘못을 인정했다.

***

명계에도 낮과 밤은 존재한다. 밤이 되자 보랏빛 하늘에 남색이 번져갔다. 천체가 없으니 낮이나 밤이나

칙칙한 건 매한가지였다.

“엔라. 하층까지는 얼마나 걸릴 것 같아?”

“응? 잘 모르는데. 빠르게 움직이면 내일 안에 도착할 거야.”

“내일이라.”

되뇌는 말에 엔라가 유선우의 얼굴을 지그시 쳐다봤다. 그녀가 검지로 뺨을 콕콕 찌르면서 물었다.

“왜 그래?”

“생각보다 빨리 왔다 싶어서.”

“좋은 거지. 어렵게 생각할 게 있나?”

“아니. 이러다가 3일도 안 지나서 돌아가면 좀 쪽팔리잖아.”

유선우는 최소 한두 달은 예상했었기에 분위기를 팍팍 잡고 왔다. 최후의 결전이랍시고 마음도 단단히 먹

었고.

그런데 막상 까보니 생각보다 훨씬 이르게 끝날 듯했다.

“그리고 이상할 정도로 순조롭다 싶어서.”

명계에 들어와 만난 적들은 약해빠진 놈들뿐이었다. 그나마 상층의 계층주는 봐줄 만했어도 큰 위협은 아

니었다.

“여기로 내려와선 새 장비까지 얻었고. 이화랑 싸울 일도 없어 보이고.”

“음……. 듣고 보니 편하게 오긴 했다. 난 저번엔 여기까지 끌려왔었는데.”

죄수 시절을 떠올린 엔라가 진저리난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유선우는 꺼림칙하다는 표정으로 말을 이

었다.

“쉽게 가는 게 이상하단 말이지. 어째 내 인생 같지가 않아.”

“무슨 소린지는 알겠지만… 별걱정을 다하네.”

그저 피해의식일 뿐이다. 엔라는 그렇게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리고 30분도 채 지나지 않은 시각.

휴식을 취하고 있는 사이에 마을에서 소란이 일었다.

바깥이 어수선해지자 유선우와 엔라는 현관을 넘었다. 밤에 떠드는 놈들을 훈계해줄 작정으로.

그러자 경계심을 드러내고 있는 마을 사람들과 웬 짐승 하나가 보였다.

날개 달린 백색의 호랑이였다. 놈은 유선우를 발견하고는 이족보행으로 총총거리며 다가왔다.

“여기 계셨군요. 당장 움직이셔야 합니다.”

“넌 또 누군데?”

“다갈이라고 합니다. 이화 님께서 보내셨습니다.”

“아, 그래. 생각보다 빨리 왔네.”

그 말에 다갈이 그르릉, 하고 낮게 울었다.

“그것이…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어이고. 이럴 줄 알았어.”

“예?”

“아니야. 가면서 얘기하자.”

조금 전까지만 해도 순조로운 진행에 불안해하고 있었건만. 막상 현실로 다가오니 유선우는 불안감이 깨

끗이 사라짐을 느꼈다.

중간중간 한 번 발목을 잡혀줘야 큰 난관으로부터 멀어진다고 할까. 이른바 액땜이다.

“올라타십시오.”

다갈이 널찍한 등을 내보였다. 유선우와 엔라가 그 위에 올라타자 접혀 있던 날개가 펄럭거렸다.

둘은 하늘로 날아오르면서 아래를 내려다봤다. 마찬가지로 자신들을 올려다보는 마을 사람들이 보였다.

그중에는 이슬라도 있었다. 그녀는 난데없는 헤어짐에 호들갑을 떨지 않고 고개만 숙여 인사했다.

은혜는 입었지만 서로 간의 교류는 그다지 많지 않았다. 그냥 그뿐인 사이. 유선우도 옅게 웃어주고는 다

시 앞을 바라봤다.

다갈은 아래를 힐긋거렸다가 허공에서 발을 두어 번 굴렀다. 이내 그가 날갯짓을 시작하자 풍경이 책의

페이지를 넘기듯이 바뀌었다.

“오, 빠르네.”

“제 유일한 장기니까요.”

“그래? 꽤 세 보이는데.”

은근한 목소리에도 다갈은 일일이 반응하지 않았다. 유선우가 싱겁다며 피식거렸고, 엔라가 본론을 꺼냈

다.

“그래서 뭔 상황이야?”

“위에서 병력을 보내왔습니다.”

“상층… 은 아니겠고. 신계에서겠구나.”

“예. 지금은 ‘절벽’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하더군요.”

절벽은 중층과 하층을 잇는 통로다. 이미 들어 알고 있던 유선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오히려 숨어 있어야 할 때 아니야?”

“그래봤자 머릿수가 더 많아질 뿐이겠죠. 다행히 아직은 선견대 수준이라고 합니다.”

엔라의 질문에 다갈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곧이어 그가 심각한 목소리로 단언했다.

“그쪽도 문제입니다만, 늑장을 부리다가 명왕이 움직이게 되면 끝입니다. 차라리 지금 강제적으로 뚫는

게 나을 겁니다.”

“이화는?”

“그분께서도 절벽에 계십니다. 신계 측에서 호출을 받으셨다고.”

“싸우는 척이라도 해줘야겠네. 별로 좋아하진 않는데.”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꽉 잡으시죠.”

다갈은 한시도 쉬지 않고 비행을 이어갔다.

그동안 하늘은 짙은 남색으로 물들었다가 다시금 보랏빛을 되찾았다. 낮이 돌아오고 나서야 유선우가 다

갈의 등을 두드렸다.

“여기까지면 됐어.”

“괜찮으시겠습니까?”

“어. 적어도 길 잃지는 않겠네.”

유선우는 황야 너머로 멀찍이 보이는 거대한 언덕을 쳐다봤다. 그 건너편에서 확연한 존재감이 느껴지고

있었다. 매복하고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었는데, 숨을 생각은 없는 기색이었다.

“도발하는 건가.”

“그보단 오든 말든 상관없다는 거겠지. 네가 안 가면 저대로 병력 모아서 중층을 쓸면 되니까.”

“지금도 충분히 많은 것 같은데. 뭐, 됐다.”

그렇게 말한 유선우가 엔라에게 시선을 줬다.

“얘랑 기다리고 있어.”

“뭐? 여기서?”

“응. 괜히 건드리지 말고.”

유선우의 몸이 빛무리에 휘감겼다.

그의 상체가 청색의 비늘갑옷에 뒤덮이고, 손에는 은백색의 두꺼운 창이 들렸다. 마지막으로 허리춤에는

투명한 사슬이 벨트처럼 휘감겼다.

“저 새끼들. 다 내 거야.”

신물을 두른 유선우가 다갈의 등에서 뛰어올랐다. 그가 호기롭게 뛰쳐나가자 엔라가 헛웃음을 흘렸다.

“저런 미친놈.”

“안 따라가셔도 되겠습니까?”

“어… 나한테까지 존대할 필요는 없는데. 내가 너보다 잘난 것도 아니고.”

“이게 편합니다.”

“그럼 그러든가.”

사양은 한 번이 끝이다. 그러려니 받아넘긴 엔라가 어느새 멀어진 유선우의 등을 바라봤다.

“내가 가봤자 별로 도움도 안 돼. 관리자 잘렸어도 반항 못 하는 건 똑같으니까. 그리고….”

엔라가 뒷말을 흘렸다. 그녀의 입술이 다시 벌어지기도 전에 시야가 살짝 일그러졌다.

기묘한 현상에 다갈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그때 허공에서부터 청명한 빛줄기가 떨어져 내렸다.

쿠우우웅!

귀가 먹먹해지는 폭음. 더불어 강풍이 불어닥쳤다. 다갈은 가까스로 몸을 가누면서 전방을 주시했다.

“……허어.”

눈앞에 보이던 비대한 언덕.

그것이 어느샌가 사라져버렸다.

***

“놀래라. 어우.”

유선우는 휘둥그레 뜬 눈으로 자신이 만들어낸 광경을 확인했다.

운석이 연속적으로 꽂힌 것처럼 끝도 없는 구덩이. 그리고 주변에 널브러진 갑옷 조각들과 형체를 알 수

없는 시체들.

터무니없는 위력이다. 창을 휘두른 본인도 당황을 금치 못했다.

‘사기잖아.’

유선우의 시선이 창으로 옮겨갔다. 창신이 손안에서 스마트폰처럼 떨리며 울음을 내뱉는다. 그 모습이

마치 숨을 고르는 듯해 보였다.

‘그 대신에 소모도 크네.’

조금뿐이지만 피로감이 느껴졌다. 자신의 내부를 관조하던 그가 주변으로 눈을 돌렸다.

“뭘 그렇게 데려왔어?”

익숙한 기운을 품은, 신격을 보유한 이가 세 명.

순백의 전신 갑옷과 장검으로 무장한 이들이 오십 안팎. 그리고 묘한 눈빛을 향해오는 이화.

한차례 정리했음에도 여전히 숫자가 상당했다.

“후우, 후욱!”

“이 무례한…! 감히 누굴 내려다보는 것이냐!”

“뭣들 하는 게냐. 역적을 처단하라!”

투신들이 눈을 부라리며 일갈했다. 셋 중에 멀쩡한 건 한 명뿐이었고, 둘은 팔이 한 짝씩 날아가 있었다.

그들의 얼굴에선 분노와 경악의 감정이 또렷하게 드러났다.

모든 이들의 시선이 유선우에게 쏘아졌다. 허공을 밟고 선 그가 아래를 내려다보며 손을 까딱거렸다.

“다 들어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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