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계, 중층
중층을 맡은 자. 이화의 소개를 듣자마자 유선우가 창을 뽑아 들었다.
평소에 쓰던 순백의 창이 아닌, 짙은 보라색의 창. 상층의 계층주에게서 빼앗은 무기였다.
“그건… 자일이 죽었나 보군요.”
“나도 딱히 악감정은 없었는데 그렇게 됐네. 복수라도 하게?”
“그럴 생각은 없습니다. 여기서 당신을 꺾을 자신도 없고요.”
이화가 담담한 목소리로 부정했다. 정말로 싸울 생각이 없는지 그녀는 무방비한 자세를 유지했다. 하지
만 유선우는 창끝을 내리지 않았다.
‘눈깔 괴물보단 훨씬 센 것 같은데.’
정갈하게 갈무리 된 기운이 오히려 경계심을 불러일으켰다. 뽑지 않은 칼을 눈앞에 둔 감각이라고 할지.
단순히 피지컬만 뛰어났던 상층의 계층주와는 딴판이었다.
유선우가 긴장감에 마른침을 삼킬 때였다. 이화가 엔라를 응시하며 호수처럼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보내고 걱정했는데. 다시 보게 돼서 다행이에요.”
“어, 나? 왜 아는 척이야?”
“기억 안 나시나요?”
이화가 손으로 허공을 휘저었다. 연푸른색의 안개가 퍼지더니, 수염이 너저분하게 자란 중년의 얼굴이
환상처럼 그려졌다.
“…뭐야. 그 아재가 너였어?”
허상을 쳐다보던 엔라가 허, 하고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이내 이화가 기품 있는 손짓으로 안개를 지워
냈다.
“편리한 재주가 여럿 있어서요. 민낯으로 만나는 건 이번이 처음이네요.”
“이게 뭔 소리야.”
이야기를 따라잡지 못한 유선우가 인상을 찌푸렸다. 엔라가 떨떠름한 얼굴로 설명을 시작했다.
“저번에 낙원으로 찾아가면서 몇 번 죽을 뻔했었거든. 특히 하층에서 조금.”
엔라는 관리자 중에서도 무력으로는 최상위권에 속한다. 하지만 결국에는 관리자에 그치는 수준이다.
그녀의 힘으론 계층주는 어림도 없고, 하층의 마수들도 버겁다. 애초에 혼자서 어딘지도 모르는 낙원으
로 향한다는 건 무모한 일이었다.
“근데 웬 아재가 도와주더라. 길도 알려주고. 덕분에 겨우겨우 도착했었지.”
“그게 쟤였다 이거네.”
유선우는 의심스러워하면서도 창을 거뒀다. 이화는 자신에게나 엔라에게나 은인이나 다름없는 셈. 속내
가 수상쩍기는 해도 적대적인 상대는 아닌 듯했다.
“저, 잘은 모르겠지만 혹시 그때 제가 마을에서 본 짐승도…….”
“어떨까요. 말씀드렸다시피 제겐 재주가 많답니다.”
그렇게 말한 이화가 실내의 한구석으로 걸어갔다. 그녀가 평평한 판에 놓인 손거울을 잡아 들고 겉면을
쓰다듬었다. 소중한 물건을 매만지는 듯한 손길이었다.
“이곳이 어디인지 아시나요?”
유선우는 대꾸하는 대신에 이슬라를 쳐다봤다. 그 시선에 이슬라는 떨떠름한 낯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희도 잘 몰라요. 포탈 외에는 출입구가 아예 없어서 정확한 위치도 모르고. 포탈을 발견한 것도 우연
이나 다름없다고 들었어요.”
“알지도 못하면서 뭐 하러 데려왔어요?”
“드릴 게 저 물건들밖에 없거든요. 뒤쪽 보이세요?”
이슬라가 고개를 돌려 뒤를 가리켰다. 그곳에는 셋이 들어온 포탈 외에도 다섯의 포탈이 놓여 있었다. 어
디로 이어져 있을지는 묻고 답하지 않아도 뻔했다.
“저희 말고도 다른 마을도 합심해서 모아온 거예요. 저 중에 세 군데는 망했지만요. 뒤질 거면 포탈 끊고
뒤지라니까 참.”
“이게 다 뭐길래…….”
“유품이에요.”
이화가 말을 받았다. 미세하지만 슬픔이 묻어나오는 목소리였다. 그녀가 유선우에게 다가가 거울을 건네
줬다.
“이건 제 주인께서 남기신 물건이죠.”
유선우는 이화의 말을 곱씹으면서 거울을 받아 들었다. 손이 닿은 순간 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뭐지?’
거울에서 거대하면서도 익숙한 기운이 느껴졌다. 투신에게서 느꼈던 신격과 흡사한 기운. 여태까지 눈치
채지 못했다는 게 의아할 지경이었다.
“이곳에 있는 물건의 반은 장식품이고, 반은 말씀드렸다시피 소유자를 잃은 유품이에요. 원래 주인이 초
월자였든 관리자였든, 아니면 신이었든 간에.”
설명을 듣자 유선우는 문득 여문에게 들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초월자를 휘말리게 한 신계의 내분. 그
것을 도입해보자 윤곽이 서서히 보이기 시작했다.
‘좀 알겠네.’
밀려난 신들이 명계로 피신했고, 명계 역시 전쟁터가 되었다. 그리고 전쟁에 참여한 이들이 하나하나 죽
어가며 유품을 떨어뜨렸다.
그 후에 눈에 띄는 것들은 신계에서 챙겨갔을 터. 반면에 숨겨진 것들은 죄수들이 발견해 이곳에 보관했
다는 소리다.
‘지금껏 발견되지 않은 건 아마….’
귀물은 스스로 존재감을 흘리는 법이다. 그런데도 실내의 공기는 차분하기 그지없었다.
유선우는 이에 대해 짐작이 가는 바가 있었다. 그가 시험 삼아 간섭력을 흩뿌리자 벽에 새겨진 글귀가 은
은하게 빛났다.
힘은 그대로 바깥으로 흘러나가지 않고 벽에 스며들었다. 기묘한 현상을 지켜본 유선우가 입을 열었다.
“여긴 은신처 같은 건가?”
“이해가 빠르시군요. 지금은 창고처럼 쓰이고 있지만, 본래 용도는 그렇죠.”
이화의 눈꼬리가 아래로 처졌다. 청초한 외모 탓인지 애처롭게 보이는 표정이었다.
“이곳은 은신처로선 훌륭했습니다. 누구에게도 발각되지 않았고, 비밀을 누설한 배반자도 없었어요.”
“그런데 왜?”
“명예로운 분들이셨습니다. 숨어 사는 걸 원치 않으셨죠.”
당시를 떠올린 이화가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그러나 명예로웠어도 제겐 비참하기만 했습니다. 그게 제가 당신을 돕는 이유예요. 설명으론 부족한가
요?”
“아니, 충분해. 별로 상관도 없고. 중요한 건 따로 있지.”
유선우가 히죽 웃었다.
“이제부턴 이게 다 내 거라는 소리잖아. 아니야?”
굉장히 만족스럽다.
神物유품이라는 단어가 꺼림칙하긴 해도 신물( )을 얻는 것이다. 인성질로 등쳐먹는 것도 아니라 정당한
방법으로.
이화의 바람이야 낙원을 열어주면 초월자들이 알아서 이뤄줄 터다. 그러니 거리낌 없이 받아가면 되는 일
이다.
‘제가 잘 써드리겠습니다.’
유선우는 경쾌한 발걸음으로 은신처를 누볐다. 그는 유물들을 주의 깊게 살펴봐 등급을 분류했다.
신격이 담긴 상등품은 총 네 개였다.
이화가 건네준 거울과 청색의 비늘갑옷.
언월도처럼 생긴 날붙이.
마지막으로 속이 비쳐 보이는 투명한 사슬.
다른 물건은 품은 힘이 대단치 않거나 쓸모없는 장식품들이었다.
“고만고만한 게 많네. 관리자가 만든 건가?”
“아마도 그럴 거예요. 초월자의 경우엔 잡동사니를 남기는 경우가 잦았죠. 시스템을 쓰지 못하니까.”
“음. 이 네 개 빼곤 딱히 가져갈 필요 없겠다.”
애용하던 창도 슬슬 쓸모를 다해가는 시점이다. 관리자의 물건을 얻어봤자 유용하게 쓰기는 힘들 터였
다.
“선우, 선우.”
엔라가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유선우를 불렀다. 그녀가 눈동자를 반짝거리면서 손을 내밀었다.
“그럼 그 하얀 거는 나 줘.”
“응? 어디다 쓰려고.”
“아브나바 엉덩이에 확 꽂아버리게.”
“뒤끝 오지게 기네.”
“뒤끝이라니. 그걸로 관대하게 끝내주려는 거야.”
다른 의미로 끝나지 않을까. 유선우는 떠름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편애하는 건 아
브나바가 아니라 엔라였다.
‘일단 이거부터 챙기자.’
유선우는 먼저 갑옷을 붙잡고 힘을 불어넣었다. 그러자 여태까지와는 다르게 반발력이 느껴졌다. 거센
진동과 함께 비늘을 날카롭게 세우기까지. 명백하게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돋보였다.
‘앙탈 부린다 이거지.’
튕기면 더 가지고 싶어지는 법. 정복한 뒤에 찾아올 성취감을 상상하자 괜스레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유
선우는 비열한 웃음을 지으며 손가락 마디를 뚜둑 꺾었다.
결과만 말하자면 숙달된 조교의 솜씨는 훌륭했다. 5분도 지나지 않아 갑옷은 유선우 없이는 못 사는 몸이
되었다. 비늘이 보자기처럼 펴지더니 그의 체형에 맞춰 달라붙었다.
화아아악!
휘황한 빛무리가 번쩍였다. 동시에 유선우의 머릿속에서는 하나의 설화가 재생되었다.
사지를 뜯고 머리를 터뜨려도 재생하는 불멸의 거인. 그리고 거인의 몸을 뒤덮은 짙푸른 빛깔의 비늘.
이 갑옷은 죽지 않는 거인의 비늘을 떼어내 만들어낸 신물이었다.
‘오우야.’
효과는 금세 깨달을 수 있었다. 다름 아닌 불멸성을 부여하는 것. 당연히 완전하지는 않겠으나 두말할 것
도 없이 사기템이었다.
유선우는 흡족해하며 그대로 다른 신물들의 소유권도 얻어냈다. 힘의 소모가 상당했지만 다행히도 처음
처럼 거부 반응이 크진 않았다.
특히 무기는 손에 쥐자마자 자신의 이야기를 보여주며 형태를 바꾸었다.
“마음에 들어. 새끼.”
창이라고 하기에는 두껍고, 폴암이라고 하기에는 얇은 두께. 무게가 묵직한 편이었지만 의외로 체감이
나쁘지 않았다.
한편으로 사슬은 완전히 굴복시키지는 못했다.
자격이 부족하다고 여겼는지 혹은 그냥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사용할 수는 있더라도 본래의 위력을 끌어
내기는 힘들 듯했다.
“근데 이건… 뭔지 하나도 모르겠는데.”
유선우가 거울을 들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거부당하지는 않았고, 일화도 끝까지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뭐가 뭔지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반사면이 없는, 알맹이가 빈 거울.
그곳에 해가 떨어지더니 완전한 거울로 변했다.
그냥 그것을 끝으로 영상이 끊어졌다.
“네 주인 거라며. 어떻게 쓰는 건데?”
“깨뜨리면 인과율을 뒤집을 수 있다고 들었어요.”
“그게 뭔 소리야.”
“저도 정확히는 모릅니다. 어찌 됐든 써야 하는 상황을 만들지 않는 게 가장 좋겠죠.”
유선우가 생각에 잠겼다가 긴가민가한 투로 물었다.
“일회용인가? 그럼 왜 진작부터 안 써먹었대.”
“그땐 가지고 계시지 않으셨었으니까요. 그분께서 제게 하사해주셨습니다.”
이화가 아련한 눈빛으로 거울을 응시했다. 그 모습에 유선우가 두어 번 헛기침을 뱉었다.
혹시나 돌려달라고 할까 봐. 어디에 쓰는지는 몰라도 손에 쥐니 놓기는 아까웠다.
“돌려달라 할 생각은 없습니다. 애초에 저는 보관만 했을 뿐이니.”
“에이, 그런 걱정 안 했어.”
너스레 떠는 듯한 말에 이화가 쿡쿡거렸다. 그녀는 시원섭섭한 표정을 지었다가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
다.
“제가 드릴 수 있는 도움은 여기까지입니다.”
“기왕 도와줬으면 아예 같이 다니지 왜.”
“아무것도 없는 몸이지만 목숨만큼은 아까운지라. 그게 아니었다면 진즉 반기를 들었겠지요.”
“누군 안 아까운 줄 아나.”
잠자코 듣고 있던 엔라가 투덜댔다. 이화는 쓴웃음을 짓고는 말을 이었다.
“명왕과는 절대로 부딪히지 마세요. 적어도 명계에선.”
“그건 내 맘대로 되는 게 아니지.”
이화가 낮은 숨을 흘리며 긍정했다.
“그것도 그렇군요. 좀 지쳐 보이시니 휴식하신 뒤에 하층으로 향하시는 게 좋겠죠.”
“그러려고. 넌?”
“다음날에 사자를 보내겠습니다. 하층으로 안내해드리지요.”
“이야. 서비스 좋네.”
유선우는 소유권을 얻은 신물들을 비가시화하고는 실내를 쭉 둘러봤다. 그가 오묘한 표정을 짓자 이화가
의아한 듯 말을 건넸다.
“무언가 하실 말씀이라도?”
“그런 건 아니고. 그냥…….”
유선우가 멋쩍게 볼을 긁적였다.
“잡템도 두고 가려니까 좀 아까워서.”
쓸모는 없을지라도 일단 다 챙기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