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계, 상층
엔라는 절벽 위에 걸터앉아 다리를 흔들고 있었다. 그 아래에는 먼지구름이 자욱했지만, 그녀에게는 흐
릿함 없이 선명하게 보였다.
“안 도와줘도 되는 거예요?”
엔라의 한 발짝 뒤에 서 있던 이슬라가 물었다. 다급하다기보다는 기가 질렸다는 듯한 목소리였다.
“뭐 하러? 알아서 잡겠지.”
“그건 그렇지만.”
이슬라가 대꾸하며 밑을 내려다봤다.
쿠웅, 쿠웅!
연달아 울려 퍼지는, 귀가 먹먹해지는 굉음.
먼지 속에서 신난 얼굴로 창을 휘두르는 유선우가 보였다. 대조적으로 자일은 눈동자를 뒤룩뒤룩 굴리면
서 맹공을 떨쳐내려 애썼다.
누가 봐도 유선우가 압도하는 구도였다.
“햐. 나도 계층주한테는 못 비비는데.”
엔라는 자일을 찍어누르는 유선우를 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한낱 고등학생이었던 그가 10년도 안 되어
이만큼 성장했다.
武性어느 차원을 뒤져봐도 유선우에 버금가는 재능은 없을 것이다. 천부적인 무성( )을 가지고 태어났다
고 볼 수밖에 없었다.
“너도 여기서 응원이나 해.”
“으, 응원이요?”
“그래. 오이구! 잘한다, 내 새끼!”
엔라는 창피하지도 않은지 팔을 휘휘 저으면서 외쳤다. 부끄러움은 남의 몫. 이슬라는 은근슬쩍 두 발짝
뒤로 떨어졌다.
떫은 표정을 짓던 이슬라가 유선우를 보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저 사람이라면…….’
이슬라의 시선이 묘한 열망을 띠었다.
한편으로 유선우는 전투에 모든 감각을 집중시키고 있었다. 상태를 미루어보아 승기를 잡은 것은 확실했
다.
자일의 회복력은 확실히 경이로웠지만 그뿐이었다. 자일이 가진 불멸성은 당연하게도 완전하지 못했다.
그러나 마냥 낙관할 수는 없었다. 자일은 온몸이 베이면서도 맹수처럼 틈을 노리고 있었다.
꽈악!
자일이 손바닥을 펼쳐 창을 가로막았다. 창이 그의 손을 꿰어내고 백색의 스파크를 토해냈다.
시스템이 부여한 권능을 저해하는 전류. 유선우가 몇 번이고 도움을 받아온 것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회복력을 미세하게 깎는 수준에서 그쳤다. 아무리 정성을 들여 만든 무기라고 한들 제작
자는 아브나바다. 한낱 관리자의 힘으로 계층주의 권능을 방해할 수는 없었다.
‘템빨도 슬슬 끝이네.’
낙원의 문을 열 때까지만 버텨주기를. 그렇게 바라면서 유선우는 창대를 앞으로 내밀었다.
창끝이 자일의 손바닥을 관통해 어깨까지 꿰어냈다. 자일은 창을 뽑아내지 않고 오히려 더욱 파고들었
다.
그가 멀쩡한 한 손을 들어 올렸다. 둔기의 끝에 보랏빛의 광채가 맺혔다.
유선우는 창에서 손을 놓고 황급히 뒤로 뛰었다. 곧이어 목표를 놓친 둔기가 지면을 강타했고, 압축된 힘
이 터져 나왔다.
쿠우우웅!
원형으로 퍼진 충격파가 주변의 지형지물을 파괴했다. 땅뿐만 아니라 하늘마저 뒤흔드는 괴력.
그 여파에 유선우가 밟고 있던 보이지 않는 발판이 무너져내렸다.
‘힘 더럽게 센데. 맞았으면 골로 갔겠어.’
유선우는 죄다 갈라져 불안정한 땅바닥에 착지했다. 그러자 무방비 상태라고 판단한 자일이 과감하게 몸
을 퉁겼다.
방어를 도외시한 채 눈을 번뜩이며 돌진해온다. 유선우는 아무것도 쥐지 않은 손으로 창을 잡은 자세를
취했다.
두 손을 중심으로 시야가 일그러진다. 자일은 유선우에게서 흘러나오는 기의 흐름에 주의를 기울였다.
거리가 좁혀질수록 그의 얼굴에 의심의 기색이 앉았다.
‘뭐지?’
기가 날뛰기는커녕 바다처럼 잔잔하다. 그런데도 본능은 위험하다며 경종을 울리고 있었다.
자일은 오랜 세월 갈고닦아온 직감을 무시하지 않았다. 그가 달려나가다 말고, 둔기를 바닥에 내리찍어
급제동을 걸었다.
기세를 전부 멈추지 못해 몸이 반쯤 앞으로 내밀어졌다. 그러자 자일은 자신을 베어 넘기는 무언가를 느
꼈다.
푸확!
⼼심( )으로 빚어진 의념의 창이 휘둘러졌다. 자일의 반신이 수백 갈래로 잘게 썰려 흩뿌려졌다.
그에게 꽂혀 있던 백색의 창이 빙글빙글 돌며 하늘을 날았다. 유선우는 창을 잡아채 그대로 자일을 후려
쳤다.
“끄윽!”
그새 재생을 끝마친 자일이 양팔을 올려 창대를 막아냈다. 팔이 부러지면서 그의 몸이 뒤로 주욱 밀려났
다.
유선우는 내팽개쳐지던 둔기를 향해 마력의 실을 뻗었다. 묶어서 잡아당기자 자일의 무기가 물 흐르듯이
손에 잡혔다.
“그 누구야. 오반이? 그놈 새끼보다 네가 낫다.”
유선우가 자일의 무기를 붕붕 휘두르면서 말했다. 적당한 무게감과 착 감기는 그립감이 일품이었다.
“……무슨 소리를.”
“이름이 잘 기억 안 나네. 하여튼 그런 게 있어.”
이름도 흐릿한 투신.
그놈보다도 눈앞의 눈깔 괴물이 마음에 들었다.
수준은 엇비슷해도 방심하지 않는다는 점이 특히 괜찮았다. 잘 안 죽으니 때릴 맛이 난다는 것도 고득점
이다.
‘근데 너무 안 죽는데.’
힘이 빠져가는 건 보이지만 회복력만큼은 여전히 괴물 같은 수준. 죽이려면 최소 10분은 더 패야 할 듯했
다.
‘시간 끄는 건 안 좋아.’
적지의 한복판. 언제 지원이 도착할지 모른다. 대부분은 잡것들이겠지만, 명왕이라는 놈이나 신이 가세
할 수도 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위험해질 가능성이 농후하다. 이슬라는 어쨌든 엔라는 신에게 반항하지 못하니까.
유선우는 잠시간 머리를 굴렸다. 그러던 와중 무언가가 눈에 밟혔다.
‘저게 중층 입구인가?’
광활하게 펼쳐진 대지의 한구석.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커다란 우물이 보였다. 그것을 보자마자 유선우는
땅을 박차 자일에게 달려들었다.
“가만히 있어. 새끼야.”
뻗어오는 손을 둔기로 쳐내고 창으로 놈의 목을 꿰뚫었다. 유선우는 자일을 붙잡은 채로 하늘 높이 도약
했다.
부우우웅!
유선우는 자일의 몸을 꿴 상태로 우물을 향해 창을 집어 던졌다. 자일은 필사적으로 몸부림쳤으나 유선우
가 쫓아가며 둔기로 후려쳐서 얌전하게 만들었다.
둘의 몸이 우물에 삼켜졌다. 고속으로 낙하해 우물을 반쯤 지나쳤을 때였다.
얇은 막을 통과한 감각과 함께 자일의 회복력이 더뎌졌다. 상층의 주인으로서 부여받은 불멸성이 사라진
것이다.
“아, 안 돼!”
“돼.”
빠각!
유선우가 허공을 박차 자일의 머리를 짓밟았다.
그대로 우물을 내려가 땅에 닿은 순간.
압력에 지면이 우그러지고 자일의 몸이 풍선처럼 터져 나갔다.
그리고 정적이 앉았다.
5초가 지나고 10초가 지나도 변화는 없었다. 흩뿌려진 자일의 고깃덩이는 재생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진작에 이럴걸. 헛고생했어.”
김이 빠지는 결말이다. 하지만 예상했던 결과였기에 허무함까지는 없었다.
유선우가 엔라에게 계층주에 대해서 질문했을 때 들었던 말. 엔라는 계층주가 강하냐는 물음에 ‘적어도
자기 구역에서는’이라고 대답했었다.
‘회복력 빠지면 오반이가 훨씬 낫지.’
자일에게서 주의를 거둔 유선우가 창을 놓았다. 창이 빛무리로 변하는 모습을 보고 있을 때였다.
전리품으로 얻은 둔기에서 변화가 일어났다.
화아아악!
둔기가 보라색의 광채에 휩싸이더니 창의 형태로 뒤바뀌었다. 자일이 죽은 탓에 소유권이 넘어온 모양이
었다.
유선우가 새로이 얻은 창을 시험 삼아 휘휘 저어봤다. 때마침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혼자 가길래 놀랐잖아. 그건 뭐야?”
“새 무기. 쟤가 줬어.”
유선우는 창끝으로 고깃덩이를 가리키며 대답했다. 게임이었으면 드롭률이 극악이었을 텐데. 죽여서 뺏
을 수 있으니 굉장히 혜자스러운 느낌이다.
“진짜로 계층주를…….”
이슬라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상처 하나 입지 않고 계층주를 죽이는 존재.
그녀는 그만한 힘을 가진 이들에 대해 짚이는 바가 있었다. 여태까지는 설마설마 해왔지만 그 외에는 떠
오르질 않았다.
“당신은… 초월자인가요?”
“어라. 어떻게 알았어요?”
유선우가 창을 휘두르다 말고 반문했다. 긍정하는 말에 이슬라의 얼굴이 환희로 물들었다.
“마, 말도 안 돼… 진짜였구나.”
“아니, 묻잖아요. 자기 얘기만 하지 말고.”
유선우가 떨떠름하게 반응한 한편 엔라는 낯을 차갑게 굳혔다.
명계에는 초월자에 대한 정보가 거의 퍼져 있지 않다. 물질계에서 온 이들은 애초에 알 리가 없고, 관리자
출신들은 시스템에 의해 입막음을 당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슬라는 알아서는 안 되는 정보를 알고 있다. 엔라는 아까부터 이슬라가 무언가가 숨기고 있다고
느꼈다.
중층까지 안내해준 건 고맙지만, 슬슬 처리할 때가 되었다.
엔라의 심경을 알아채지 못한 이슬라는 경쾌한 발걸음으로 앞장섰다. 그녀가 잔뜩 들뜬 목소리로 말했
다.
“일단 따라오세요. 가서 설명해드릴게요.”
“어디로 가는데?”
“저희 마을이요.”
이슬라가 회백색으로 물든 숲을 성큼성큼 걸어갔다. 유선우는 그녀의 등을 보다가 엔라의 손을 감싸 쥐었
다.
“그냥 냅둬.”
“왜?”
“좀 궁금해서. 써먹으면 편할 것 같기도 하고.”
그 말에 엔라가 고민에 잠겼다. 한동안 침묵해 있던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됐어.”
퉁명스레 말하고는 엮은 손에 깍지를 낀다. 유선우는 피식 웃으면서 이슬라의 뒤를 따라갔다.
***
“위쪽이 너무 시끄러운데.”
빛이 들어오지 않는 명계의 심층.
들끓는 어둠 속에서 한 남자가 중얼거렸다.
“네가 아끼던 애도 죽었네. 기분 어때?”
남자가 비웃는 목소리로 허공에 말을 던졌다.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그는 싱겁다는 듯이 픽 웃고는 손을 휘적거렸다.
손짓에 따라 끝없이 깔린 어둠이 한 곳으로 모여들었다. 검은 안개가 남자에게로 빨려 들어가더니 얇은
옷처럼 그의 몸을 휘감았다.
밤이 걷힌 뒤에도 그곳은 여전히 어두웠다.
흐릿한 시야 너머로 보이는 것은 두꺼운 기둥이었다. 기둥에는 윤기 없는 백발의 사내가 주저앉은 채로
묶여 있었다.
“아니, 이젠 아무렇지도 않으려나. 아무렴 배신한 새낀데.”
이죽거리는 음성이 가볍게 떠 올랐다. 백발 사내를 쳐다보던 남자, 명왕이 몸을 일으켰다.
“맘 같아선 그냥 내버려 두고 싶지만. 그건 또 부담된단 말이야.”
명왕이 성가시다는 듯이 머리를 벅벅 긁었다.
명계에서만큼은 신마저도 내려다보는 강자. 그런 그에게도 두 번 다시 상대하고 싶지 않은 존재가 있었
다.
“천천히 갔다 올게. 눈이라도 붙이고 있든가.”
명왕이 등을 돌려 바깥으로 걸어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