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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환자님 뭐하세요-166화 (166/179)

명계, 상층

순백의 창이 흔들려 잔상을 만들어낸다. 시야가 일그러지고 멀찍이 떨어진 간수들의 몸이 갈라진다.

창이 닿지 않았는데도 적이 죽어간다. 잔인하다기보다는 그냥 기괴하게만 보이는 광경이었다.

‘진짜 뭐 하는 사람이지?’

이슬라는 동행 중에 몇 번이나 봐왔음에도 적응하지 못했다. 처음에는 두려웠고, 다음은 놀랍고 경탄스

러웠다.

지금에 와서는 어처구니없을 뿐이었다.

그녀는 입을 헤 벌린 채로 유선우를 뚫어지라 쳐다봤다. 괜히 창을 털면서 하품을 뱉는 모습마저도 굉장

히 있어 보였다.

강자의 여유가 느껴진다고 할까. 명계에 온 후로 줄곧 약자로서 살아온 그녀로서는 동경할 수밖에 없었

다.

“혹시 신계에서 오신 분인가요?”

“쟤? 전혀 아닌데.”

“그러면요? 명계에 저런 분이 있다고는 들어본 적도 없어요.”

“알아서 뭐하게? 건드릴 생각하지 마. 내 거야.”

엔라가 차가운 음성으로 내뱉고는 콧방귀를 뀌었다. 꼬리칠 마음 따윈 없던 이슬라는 억울할 따름이었

다.

둘이 떠드는 사이에 적을 정리한 유선우가 다가왔다.

“슬슬 짜증난다. 어떻게 죽여도 죽여도 끝이 없어.”

“지구에선 관리자 못 잡아서 안달이더니.”

“그놈들 수준이라도 되면 말을 안 해. 죄다 허접밖에 없잖아.”

관리자급이라도 된다면 유선우도 환영해줬을 터다. 죽이면 죽이는 만큼 힘을 안겨주니까. 문제는 만나는

상대가 전부 조무래기뿐이라는 것이다.

“날 잡을 생각이 있긴 한가?”

“지금은 없어 보이네. 위치만 파악해두려는 거 같아.”

“이러다가 바로 보스전 들어가겠지. 중층으로 넘어갈 때려나.”

“아마도. 이제 얼마 안 남았을 거야. 벌써 포탈만 열 번을 넘게 탔는데.”

엔라가 맞냐고 확인하듯이 이슬라에게 눈길을 줬다. 이슬라는 고개를 끄덕여 수긍했다.

“앞으로 두 구역만 지나면 마지막 구역이에요.”

“확실해?”

“제가 끌려온 길 그대로 이동하고 있어요. 길만큼은 확실하게 기억해뒀으니까 틀림없을 거예요.”

유선우는 문득 이슬라의 얘기에 흥미가 동했다.

“중층에서 끌려온 거죠? 뭐 했길래?”

“…딱히 뭘 해서 이렇게 된 건 아니에요.”

“그럼?”

“꼭 들어야겠어요? 배려도 없네.”

“그냥 가면 심심하잖아요. 내 얘기는 들어봤자 재미도 없을 테고.”

“전 솔직히 그쪽에 훨씬 관심 있는데.”

듣기에 따라서는 수작이라고 볼 수도 있는 말. 엔라의 기준으로는 아웃이었다.

“쓰읍!”

엔라가 눈을 부라리며 위협했다. 노려보는 시선에 이슬라가 떫은 표정을 지었다.

“명계 일은 잘 모르는 모양이죠?”

“오늘 막 왔거든요. 얘는 전에 왔었지만.”

“여기가 맘대로 오갈 수 있는 데가 아닌데… 뭐, 됐어요.”

이슬라가 한숨을 뱉고는 사정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그녀는 오랜 세월 공적치를 모아 자유민의 신분에 가

까워지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에 부당한 상납 요구를 받았고, 그것을 거절했다. 그날을 경계로 그녀와 그녀 주변인이 괴롭

힘을 당하게 되었다. 당연히 이슬라는 열 받았고, 엎었다가 걸려서 인생이 시궁창에 처박혔다.

거기까지 듣자 엔라가 지루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뭐야. 식상하네.”

“원래 남 얘기가 다 비슷비슷한 거죠. 그쪽은 이제 만족했어요?”

“아, 네. 나름대로요.”

유선우는 애초부터 이슬라의 개인사에 별 관심이 없었다. 다만 중층에 대한 정보를 조금 생생하게 듣고

싶었을 뿐이었다.

“공적치는 어떻게 모으는 건데요?”

“여러 가지요. 살아 있을 적에 돈 벌던 거랑 똑같아요. 건설에 참여하거나, 남들 등쳐먹거나. 보통은 모으

다 보면 X 같아서 도박으로 넘어가죠. 난 2천 년 동안 빡세게 모아놓은 거 한순간에 뺏겼고.”

2천 년. 남다른 스케일에 유선우가 혀를 내둘렀다.

“와. 제 나이가 27살인데.”

冥王“완전 젖먹이네. 하여튼 그나마 전 얼마 안 걸린 편이에요. 가끔 명왕( )이 내려주는 지시가 있는데,

그걸로 꿀 좀 빨았었거든요.”

“그건 또 누구예요?”

생소한 호칭을 들은 유선우가 관심을 보였다. 정말로 하나도 모른다는 눈치에 이슬라가 고개를 갸웃거렸

다.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말 그대로 여기 왕이에요. 저 같은 사람한텐 간수장만 돼도 왕처럼 보이지만.”

“계층주인가 하는 놈보다 세요?”

“당연히 그렇겠죠. 신계에서도 섣불리 못 건드린다는 소문도 있어요.”

“너, 은근히 귀 밝네. 그런 얘기는 어디서 들었어?”

단순한 하층민치고는 아는 게 많다. 그렇게 생각한 엔라가 눈을 가늘게 떴다. 이슬라는 능청스럽게 어깨

를 으쓱였다.

“듣기는 뭘. 그냥 같은 처지들끼리 있는 말 없는 말 다 떠드는 거죠. 원래 나라님 얘기는 어디서든 하는 거

니까.”

“…하긴. 그렇지.”

“슬슬 다음 포탈 보일 거예요.”

이슬라는 지금까지처럼 안내를 속행했다. 그녀의 말대로 10분이 지나지 않아 포탈 앞까지 도착할 수 있

었다.

유선우는 잿빛의 기류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뭐해. 안 들어가?”

“들어가긴 할 건데. 이제 곧 중층이라며?”

“제 기억대로라면요. 여기서 바로는 아니고, 한 번은 더 넘어가야 해요.”

“그러면 싸울 준비는 미리미리 해둬야지.”

여태까지의 상황으로 미루어보아 중층으로 가는 길목을 지키고 있을 확률이 높다. 있으나 마나 한 병력이

아니라 단단하게 방비를 해둔 상태로.

어쩌면 계층주라는 놈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냥 돌진해도 이길 자신은 있지만.’

어차피 싸울 것이라면 타이밍은 스스로 잡고 싶었다. 그를 위한 방법. 떠오르는 게 없진 않다.

‘식상한 수가 가장 잘 먹히지.’

***

“허억, 허억!”

청년의 외관을 한 간수가 숨을 몰아쉬며 날개를 펄럭거렸다.

그의 몸은 빈말로도 정상이라고 할 수 없었다. 양쪽 팔은 팔꿈치 아래가 보이지 않았고, 다리마저 한쪽이

없었다.

다행인 점은 날개가 성하다는 것. 가까스로 날개를 지킨 덕에 그는 죽음의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괴물 같은 새끼.’

간수가 조금 전의 상황을 떠올리고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창 한 자루로 동료들을 쉽사리 도륙하던 괴

물. 간수는 처음엔 공적을 쌓겠다고 히죽거렸었으나 이제는 억울할 지경이었다.

‘그걸 우리보고 어떻게 죽이라고?’

임무는 두말할 것도 없이 실패로 끝났다. 하지만 이대로 탈영할 수도 없는 노릇. 그가 살 수 있는 길은 선

견대로서 입을 터는 것뿐이었다.

그는 자신이 살기 위해 고통을 참아내고 비행을 이어갔다.

향하는 장소는 상층과 중층을 잇는 C-8구역.

속칭 ‘굴’이다.

가는 길은 제법 멀었다. 포탈을 찾는다면 금방이겠지만, 침입자와 마주칠 가능성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기적적으로 살아난 목숨을 땅바닥에 버리는 건 사양이었다.

실신한 듯한 통증 때문일까. 하루가 지났는지 일주일이 지났는지도 알 수 없었다.

몽롱한 정신으로 날고 날아 본대가 있는 C-8구역에 도착했다. 그는 착지마저 똑바로 하지 못해 바닥을 구

르면서 외쳤다.

“살려, 살려주십시오!”

“누구지? 소속을 밝혀라.”

멋들어진 날개의 사내가 다가오며 중후한 목소리로 말했다. 날개를 보자 간수는 엉망인 몸을 추슬러 예를

표했다.

“벨루라 님 휘하의 6급 간수, 스튜핏입니다.”

“침입자에 대한 사안이겠군. 복귀 명령은 없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만.”

“시, 시급히 보고 드릴 게 있어 복귀하였습니다.”

“들어나 보지. 네 죄보다 중한 일이기를 바라네.”

스튜핏이 침을 꿀꺽 삼켰다. 그가 머릿속으로 말을 짜낼 때였다.

“무슨 소란인가.”

어느새 둘 사이에 보라색 장포를 입은 남자가 끼어들었다. 남자의 얼굴에는 입과 코가 없었고, 눈밖에 보

이질 않았다.

수십의 눈동자가 자신을 쳐다보자 스튜핏은 오싹 소름이 돋았다.

“자, 자일 님을 뵙습니다.”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그것이…….”

간수는 겪었던 일을 각색해서 설명했다.

침입자를 죽이러 갔지만 속수무책으로 털렸다.

그나마 날개가 정상이었던 자신은 상관의 명으로 어쩔 수 없이 전장에서 이탈했다.

거기까지 말했을 때 자일이 눈을 찌푸렸다.

“일부러 놓아줬군.”

“예, 예?”

“아둔한 놈 같으니.”

퍼억!

가로등처럼 생긴 길쭉한 둔기가 스튜핏의 머리를 찌그러뜨렸다. 자일이 시체를 발로 치우며 하늘을 올려

다봤다.

수많은 눈동자가 각기 다른 방향으로 움직여 전방을 훑었다. 그의 눈에는 우중충한 하늘 외에도 많은 것

이 보였다.

충만한 기의 흐름. 무수한 줄이 자연스럽게 출렁거리다가 갑작스레 움직임을 멈췄다.

이내 하늘에서 눈이 보슬보슬 내리기 시작했다.

쩌어어억!

눈이 바닥에 닿자 가시 돋친 얼음꽃이 피어났다. 투명한 얼음꽃들이 가지를 치듯이 서로를 엮으며 지면을

뒤덮었다.

포탈을 둘러싼 간수들은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찔리고 얼어 죽었다. 주위가 순식간에 고요한 정원으로

뒤바뀌었다.

콰직!

“잡스러운 짓을!”

자일이 자신의 몸을 감싼 얼음을 깨뜨리고 안광을 쏘아냈다. 마찬가지로 살아남은 몇몇이 재빠르게 주변

을 살폈다. 그들의 시선이 간섭력을 숨김없이 흘려대는 엔라에게 집중됐다.

그러자 돌연히 하늘에서 강대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무거우면서도 날카롭게 벼려진 기운.

자일의 눈앞이 일렁거리더니 무형의 창날이 그의 전신을 난도질했다. 비명조차 토하지 못하고 몸이 수십

갈래로 갈라졌다.

하지만 자일은 쓰러지지 않았다. 고깃덩이가 제멋대로 달라붙기 시작했다.

상층의 계층주로서 부여받은 불멸성. 그 권능으로 재생된 자일이 양팔을 높게 들어 올렸다.

카앙!

창대와 둔기가 맞부딪혀 청명한 울음을 뱉어냈다. 자일은 수십의 눈을 부릅떠 침입자를 노려봤다.

반면에 유선우는 히죽 웃기만 했다.

“진짜 안 죽네?”

과연 얼마나 더 패면 죽을까.

그런 호기심에서 비롯된 미소.

그 표정을 본 자일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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