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계, 상층
“쏴라!”
포탈을 넘자마자 굵은 함성이 귀청을 때렸다. 곧이어 작살인지 화살인지 모를 작대기가 사방에서 유선우
에게 쏘아졌다.
단지 길기만 할 뿐, 그다지 위협적이지는 않은 투사체. 유선우가 의아함을 느낀 순간에 변화가 나타났다.
화아아악!
작대기들이 적색으로 빛나더니 비대하게 부풀었다. 하나하나가 두꺼운 발리스타처럼 변해 소름 끼치는
소리를 내며 다가왔다.
“이건 좀 새롭네.”
화살비라면 지겹게 맞아봤지만 발리스타가 쏟아진 적은 없었다. 유선우는 허, 하고 탄성을 흘리고는 가
볍게 창을 휘둘렀다.
창끝은 투사체가 아니라 허공을 갈랐다. 주변의 공간이 비틀리며 공격의 궤적을 빗겨냈다.
쿠웅!
발리스타가 바닥에 꽂혀 둔중한 충격음을 토해냈다. 닿지도 않고 가볍게 흘려내자 쏘라고 명령했던 지휘
관이 경악했다.
“마, 말도 안 되는…!”
“말 돼.”
유선우가 히죽 웃으면서 적들에게 쇄도했다. 간수들은 황급하게 석장을 들어 대응하려 했으나 소용없었
다.
창이 번쩍거릴 때마다 그들의 목이 달아났다. 지휘관은 도륙당하는 부하들을 보다가 본능적으로 석장을
앞세웠다.
콰직!
“끄르륵!”
석장은 한 합도 버티지 못하고 부서졌고, 지휘관의 몸이 두 짝으로 갈라졌다.
순식간에 스물의 적을 섬멸한 유선우가 숨을 길게 내뿜었다. 그는 창을 두어 번 털며 새로이 펼쳐진 경치
를 눈에 담았다.
“이번엔 도시야?”
유선우는 높은 언덕 위에 서 있었다. 언덕의 아래에는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가 보였다. 아까는 동양풍
에 가까운 구조물이었다면 이번에는 서양 양식에 가까웠다.
“통일성이 없네.”
“이 정도는 약과지. 하층에는 별 이상한 게 다 있더라.”
뒤에서 구경하던 엔라가 쫄래쫄래 다가와 말을 받았다. 그녀가 성채를 둘러보고는 입을 열었다.
“뭐해? 내려가자.”
“저기 들어가자고?”
“당연하지. 나 길 몰라. 적어도 중층까지는 데려다줄 사람 구해야 돼.”
“그럴 거면 진작 말하지. 하나만 살려둘걸.”
“걔네를 어떻게 믿어?”
틀린 말은 아니다. 죽도록 패서 안내를 시켜봤자 사지로 이끌고 갈 가능성도 있으니까.
허위 정보를 구분하지 못하는 이상은 간수를 생포해도 의미가 없다.
“그럼 써먹을 놈이 있긴 한가?”
“응. 의외로 꽤 많아.”
걱정스레 묻자 엔라가 가볍게 수긍했다. 유선우는 의아해했지만 엔라는 가보면 안다면서 언덕 아래로 달
려갔다.
바깥으로 나와 높아진 텐션이 아직도 유지되고 있는 듯했다. 그는 한숨을 내쉬고는 그녀의 뒤를 따라갔
다.
도시 앞으로 도착하자 겉모습답게 문지기가 입구를 지키고 있었다. 경계는 삼엄했으나 출입에는 문제가
없었다. 당연히 허가는 안 받았고, 멀리서 창을 던져 죽이고 들어갔다.
나타난 도시의 모습은 제법 평범했다. 무기상과 잡화점뿐만 아니라 각종 음식점도 있었다.
심지어는 술집도 있어 유선우의 안에서 명계라는 이미지가 흔들렸다.
“음식은 왜 있는 거야? 안 먹어도 되잖아.”
“기호품이지. 상층은 다 이래. 대부분이 유희에 맞춰져 있어. 여기는 모르겠는데, 도박장이랑 투기장 있
는 곳도 있다더라.”
“화폐는?”
“공적을 수치로 매겨서 쓴대.”
이른바 공적치다. 공적치는 신계에서 내려오는 임무를 완수하거나 명계를 개간하면 쌓인다.
임무는 자주 발생하진 않는 편이기에 대부분 후자의 경우로 벌어들인다.
“물론 간수들이 개간하는 건 아니고, 죄수한테 시키지.”
죄수를 사고팔기도 하며 노예처럼 부린다. 그 과정에서 사망자는 얼마든지 나오지만, 신계는 별다른 터
치를 하지 않는다.
설명을 들은 유선우는 바닥에 질질 끌려다니는 죄수들을 쳐다봤다. 묘한 시선에 엔라가 넌지시 물었다.
“신경 쓰여?”
“아니. 어디나 다 똑같다 싶어서.”
“상층은 다 이런 느낌이야. 어떡할래?”
“뭐를?”
엔라가 발로 바닥을 툭툭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
“다 뒤집거나, 하나만 빼돌려서 안내시키거나.”
“하나만 데려가자.”
“의외네. 깽판 칠 줄 알았는데.”
“귀찮잖아. 도와줘봤자 나한텐 별로 도움도 안 될 것 같고.”
죄수들을 풀어서 혼란을 유도할 수도 있다. 처음부터 염두에 둔 계획이었다. 그러나 명계에 들어오자마
자 접어버린 계획이기도 했다.
죄수들이 하나같이 약해빠졌기 때문이다. 전 관리자는 권능이 거세된 상태고, 물질계 출신은 초월자엔
크게 못 미친다. 간수 하나에도 쩔쩔맬 놈들이다.
“잘 생각했어. 그러면 쓸 만한 애를 찾아야겠지.”
엔라가 골목을 걸으면서 말했다. 그녀와 유선우는 통행인에게서 뺏은 로브로 얼굴을 감추고 있었다. 기
운도 숨기고 있으니 어지간해선 걸리지 않을 터였다.
둘은 침입자답지 않게 대놓고 길 한복판을 누볐다. 엔라는 죄수가 보일 때면 무언가를 찾듯이 쓱 훑어보
고는 했다.
그러기를 한참, 노예상으로 보이는 장소에서 그녀의 발걸음이 멈췄다.
“찾았다.”
엔라가 철창에 갇힌 한 여자를 가리켰다. 여자는 누더기를 입은 채로 사지가 봉쇄되어 있었다.
다른 철창 안에도 수십의 죄수가 있었지만, 그녀만큼 험한 취급을 받는 사람은 없었다.
“쟤가 누군데?”
“목에 이상한 문양 보이지?”
여자의 목을 확인하자 엔라의 말대로 둥그런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문신이라기에는 보기 흉한 모양새였
다.
“반란분자로 찍힌 거야. 우리한텐 도움 되지 않겠어?”
“한 성깔 하게 생겼는데. 얌전하게 굴었으면 좋겠네.”
“어서 옵쇼. 찾으시는 물건이라도?”
대화를 나누고 있자니 기다란 수염의 배불뚝이 사내가 다가왔다. 간수처럼 날개가 달려 있지도 않았고,
생김새가 인간과 차이가 없었다.
유선우는 의아해하면서도 사내의 말에 대답했다.
“저 녹색 머리. 데려갈게.”
“저년 말입니까. 죄송하지만 신분증 부탁드리겠습니다. 아시다시피 관리대상인지라.”
“뭔 신분증도 있어?”
“예?”
“아니야. 일단 이리로 와봐.”
사내가 주춤거리면서 다가왔다. 그러자 유선우가 사내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는 손날을 목에 들이댔다.
그의 손에서는 예기를 띤 푸른빛이 일렁거렸다.
“됐으니까 꺼내와. 인마.”
***
“으허허허헝!”
노예를 강탈당한 사내가 울음을 터뜨렸다.
수천 년간 공적치를 모아서 죄수 신분에서 벗어났건만. 하필이면 관리대상을 빼앗긴 탓으로 다시 죄수로
떨어지게 생겼다.
자신의 재산이라면 문제는 없겠지만 노예 매매는 공공사업이다. 할당받은 노예를 뺏겼으니 그 값을 자신
이 치러야만 했다.
그러든 말든 유선우와 엔라는 휘파람을 불며 떠나갔다. 둘을 따라가던 녹색 머리의 여성이 황당하다는 낯
으로 물었다.
“다, 당신들은 누구죠?”
“주인님한테 말버릇이 그게 뭐야. 버릇없기는!”
엔라가 사나운 표정을 짓고 쏘아붙였다. 자존심이 상했는지 여성이 입술을 까득 깨물었다.
“화났잖아. 어쩔 거야?”
“그냥 장난인데…. 미안.”
유선우가 한숨을 내쉬고는 여성을 쳐다봤다.
“이름 뭐예요?”
“…이슬라입니다.”
“이슬 씨라고 불러도 되죠?”
“편하신 대로 부르십시오.”
“그리 딱딱하게 굴 필요 없어요. 노예로 부려먹으려고 데려온 거 아니니까.”
이슬라가 머뭇거리면서 유선우와 시선을 맞췄다. 그의 진의를 파악하려는 낌새였다. 한동안 눈동자를 들
여다보던 그녀가 조금 전과 같은 질문을 던졌다.
“뭐 하는 사람들이에요? 평범한 자유민 같지는 않은데.”
자유민은 죄수 신분에서 벗어난 이들을 뜻하는 말이다. 그들은 하층민이었을 적의 고통을 알기에 위험한
일에는 끼어들지 않는 편이다. 적어도 자유민 중에 노예를 뺏고 다니는 미친놈은 없다.
“음,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네. 하층에 볼일 있어서 왔어요.”
“하층? 그딴 데를 왜 가요?”
“볼일 있다니까요. 그래서 안내 좀 해줬으면 좋겠는데.”
“…그건 명령이겠죠?”
“일단은 부탁이라고 해두죠. 거절하면 어쩔 수 없고.”
명령이란 소리 아닌가. 이슬라가 똥 씹은 표정으로 자신의 목을 쓰다듬었다. 잠깐 고민하던 그녀가 고개
를 끄덕거렸다.
“뭔진 모르겠지만, 알았어요.”
“생각보다 순순하네. 뒤통수치려는 거 아니야?”
“제가 어떻게요? 당신들이랑 엮인 시점에서부터 탈옥수 취급받을 텐데.”
“그건 몰랐네. 미안해요.”
유선우가 사과하자 이슬라는 떨떠름하게 입을 다물었다. 죄수 구역이 있는 중층에서 상층에서 끌려온 지
어언 5년.
그동안 그녀는 사람다운 대접을 받아본 기억이 없었다. 관리대상으로 찍힌 탓에 죄수 사이에서도 쓰레기
취급을 당하기 일쑤였다.
“그런데 감당할 수 있겠어요?”
“뭘요?”
“이거. 위치 추적도 되거든요.”
이슬라가 자신의 목에 새겨진 표식을 가리켰다. 그것은 낙인일 뿐만 아니라 발신기의 역할도 담당한다.
“밖으로 한 발짝만 나가도 울려댈 거예요. 그냥 버리고 가는 게 낫지 않겠어요?”
이슬라가 자조하는 미소를 지었다. 밝히지 않았다면 자신을 휘말리게 만든 둘을 엿 먹일 수 있었을 터.
하지만 딱히 그러고 싶지 않았다. 생에 미련도 별로 없었고.
“어떤 구조인데요? 해제는 못 하나?”
“가능했으면 진작에 달아났겠죠. 저 건물에서 신호를 받아요.”
이슬라의 눈이 시계탑처럼 생긴 높은 건물을 포착했다. 철창에 갇혀 있었을 때도 선명하게 보이던 건축물
이었다.
유선우도 그것을 쳐다봤다.
“저놈 말이죠.”
“그러니까 헛고생했다 치고-”
쐐애애액!
돌연 매서운 소리와 함께 돌풍이 밀어닥쳤다. 곧이어 송신탑 쪽에서 심상찮은 굉음이 울려 퍼졌다.
다음 순간 묵직한 충격파가 이슬라의 몸을 때렸다. 유선우가 지탱해줬음에도 불구하고 이슬라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녀는 눈알을 화등잔만치 크게 뜨고 한 방향만을 응시했다.
“어, 어라?”
그곳에는 우뚝 서 있던 송신탑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반동으로 인해 도시의 상태도 정상이라 할
수 없는 꼴이 되었다.
혼란에 찬 목소리가 주변에 가득하다. 패닉 속에서 이슬라가 흔들리는 눈으로 유선우를 바라봤다.
도무지 알 수 없는 남자.
그가 아무렇지 않다는 듯한 낯으로 입을 열었다.
“이제 됐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