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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환자님 뭐하세요-163화 (163/179)

마지막 휴가

유선우는 쉬발에게 본인의 처지를 상기시켜주고는 교회로 돌아왔다. 게이트를 타고 다니는 그에게 거리

따위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아브나바가 징징거릴지라도 며칠 정돈 멋대로 살기로 했다.

“어라. 그 누구야, 쉬발 씨 데리고 온다더니 혼자네요.”

게이트를 넘고 나타난 유선우에게 소피아가 말을 걸었다. 그의 옆에는 용은커녕 개미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유선우는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며칠 휴가 줬어요. 딸이랑 사이가 좀 안 좋길래 화해도 시켜줄 겸.”

“와, 자기 사람은 진짜 잘 챙기는구나.”

“제가 그런 면이 있긴 하죠.”

유선우는 입에 침도 안 바르고 뻔뻔하게 내뱉었다. 그가 한 차례 주변을 둘러보고는 소피아에게 물었다.

“혹시 리디 어딨는지 알아요?”

“아까 황성으로 간다고 들었어요. 부하들 훈련 일정 있다던가.”

소피아는 차세정이 아이릴과 친해졌듯이 리디와 나름대로 가까워져 있었다. 이따금 리디가 피하는 모습

을 보이기는 해도 서로 담소를 나눌 정도는 됐다.

“그래요? 다시 일 시작했나 보네.”

“늦는다고 했었으니 밤쯤에나 올 거예요.”

“밤이라…….”

“왜요?”

“아니요, 그냥.”

유선우는 아무것도 아닌 척 말을 얼버무렸다. 남자의 본능인지, 혹은 숱한 경험으로 단련된 감각인지. 그

의 머릿속에선 오늘 밤의 장면이 흐릿하게나마 그려지고 있었다.

마냥 틀린 예감은 아닐 터였다.

***

달빛이 아스라이 내려앉은 밤.

리디는 도둑처럼 살금살금 걸으며 교회의 복도를 가로질렀다. 그녀는 발소리를 죽인 채 자신의 방으로 향

했다.

급하게 다닐 필요는 없었지만, 밤마다 간헐적으로 들려오는 그렇고 그런 소리가 그녀에겐 괴로웠다.

‘그런데 오늘은 조용하네.’

고요한 복도를 보아하니 오늘의 상대는 차세정인 모양이다. 그 여자가 유선우와 동침할 때면 항상 교회가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철저하게 방음에 주의를 기울이는 듯했다.

일행 사이에선 둘에 대해서 의문의 목소리가 크다. 둘이 어떤 플레이를 즐기기에 그토록 조심하냐는 의문

이다.

그런 화제가 나올 때면 리디는 매번 입을 다물고는 했다. 그녀가 할 말이라고는 방음은 당연하지 않냐는

상식적인 말뿐이었다.

‘내가 왜 여기 있는 걸까.’

저번 일로 인해서 황성에선 눈칫밥을 먹고, 교회에선 소외감을 느끼고. 자존감이 떨어질 뿐인 나날이다.

“하아.”

리디가 한숨을 내쉬며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별생각 없이 윗옷의 옷자락을 잡았다. 훌러덩 집어던

지려는 순간 그녀의 손이 우뚝 멈췄다.

침대 위에 유선우가 걸터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어, 어라. 스승님?”

“늦었네. 일찍 일찍 좀 다녀.”

“…죄송합니다?”

리디는 정지한 채로 눈만 끔뻑거리다가 허겁지겁 옷을 내렸다.

“무슨 일이십니까?”

리디가 헛기침해 목청을 가다듬고 물었다.

“일은 너한테 있겠지.”

“예?”

“요즘 이상해 보이더라. 고민이라도 있어?”

유선우는 잔잔한 목소리로 말하며 리디를 응시했다. 그녀의 찌푸려진 얼굴에선 복잡한 감정이 훤히 드러

났다. 어두운 밤이었지만 낮만큼이나 선명하게 보였다.

“말해봐. 들어줄게.”

“…다짜고짜 뭐라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그래?”

아닌 것 같은데. 그렇게 덧붙인 유선우가 옅게 웃었다. 그가 침대에서 일어나고는 방문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흠칫.

한 발짝씩 다가가자 리디가 몸을 떨었다. 그녀는 시선을 내리깔고 애꿎은 옷자락만 붙잡았다.

유선우는 그녀의 위축된 모습을 잠깐 흘겨보더니 그대로 지나쳐갔다.

“아니면 말고.”

무심한 목소리가 리디의 귓가에 앉았다. 리디는 울컥하면서도 아무런 말도 뱉지 못했다. 그녀는 유선우

가 자신을 여자로 보지 않는다고 생각했으니까.

이전의 아이릴과도 비슷했다.

그리고 리디는 아이릴보다 소심했다.

리디는 십여 초가 지난 뒤에야 뒤를 돌아봤다. 그러자 뜻밖이게도 발을 멈추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유

선우가 보였다.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쓴웃음을 짓는 얼굴. 언제까지나 애 취급을 하는 모습에 리디의 감정이 북받쳐 올랐

다.

“스승님은 항상 그런 식이십니다.”

“응?”

“매번 다 안다는 것처럼 잘난 척 엄청 하시는데. 제가 보기엔 개뿔도 아니라 이겁니다.”

“…그게, 미안하다?”

유선우가 멋쩍게 볼을 긁적였다. 그는 오늘만큼은 제자의 뇌절을 너그러이 봐주기로 마음먹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리디가 눈을 부릅뜨고 쏘아붙였다.

“아주 똥멍청이십니다. 여자는 왜 그렇게 밝힙니까? 맨날 복도에서 앙앙앙앙! 열 받아 죽겠단 말입니다!”

“보, 복도에서 한 적은 없는데.”

“다 들린다 이겁니다. 그게 밖에서 하는 거랑 뭐가 다른지 모르겠습니다.”

이렇게까지 들으니 유선우도 할 말이 없어 고개만 끄덕였다. 리디는 한참을 씩씩거리다가 물기 젖은 목소

리로 말했다.

“전 스승님한테 여자가 아닙니까?”

입술을 질끈 깨문 탓에 발음이 뭉개졌다. 하지만 알아듣는 데 지장은 없었다.

고백이나 다름없는 말. 예상 그대로의 전개에 유선우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리디에게 가까이 다가가

대답을 건넸다.

“나도 아닌 줄 알았는데, 맞는가 보다.”

“…예?”

“다 들었으면서 뭘.”

유선우가 싱겁다는 듯이 피식거렸다. 리디는 혼란에 빠져 시선을 가만히 두지를 못했다. 한동안 눈알만

데굴데굴 굴리던 그녀가 기어드는 목소리를 냈다.

“정말입니까?”

“못 믿겠어?”

“그, 전 말투도 딱딱해서 여자답지도 않은데.”

“그것도 매력이지. 귀엽고 괜찮아.”

사실 유선우 개인의 호불호로는 불호에 가까웠다. 하지만 그는 리디의 말투에 관해선 아무 참견도 할 수

없었다.

‘내가 시켰었지 아마.’

리디가 야생동물처럼 사납던 시절의 일이다. 복종의 근본은 말투부터라고 생각했기에 다나까 말투를 강

제했었다.

“제, 제가….”

리디는 칭찬이 어색해 고개를 푹 숙이고 중얼거렸다. 그러다가도 유선우의 옷소매를 붙잡고는 애원하듯

이 잡아당겼다.

“그래도 못 믿겠습니다. 증명해주십시오.”

“뭐 어떻게?”

“…….”

능글능글한 말에 리디가 고개를 들어 올린 채 눈을 감았다. 유선우가 반응을 보이지 않자 제 손으로 입술

을 매만지기까지 한다.

‘음.’

뻔한 신호였다. 유선우도 알아차렸으나 그는 그냥 가만히 있었다.

“……?”

5초쯤 지나니 리디가 실눈을 떠서 상태를 살폈다. 유선우가 시치미 뚝 떼고 얼굴을 가져다 대자 또 질끈

눈을 감는다.

하는 짓이 제법 귀엽다.

‘얘가 이런 면도 있었구나.’

유선우는 더 놀리려다 말고 리디에게 입을 맞췄다. 호기심이나 재미보다는 그녀에게 닿고 싶다는 충동이

커졌다.

***

유선우와 리디는 아침이 될 때까지도 잠들지 않았다. 둘에게는 쌓인 대화가 많았다. 유선우는 주로 듣는

편이었지만 지루함은 없었다.

긴 교류를 마친 끝에 유선우가 침대에서 일어나려 했다. 그때 리디가 지나가듯이 물었다.

“스승님. 언제 가시는 겁니까?”

“글쎄.”

딱히 일정을 정해두지 않았다. 그저 필요한 일을 마치고 적당한 시기에 명계로 향할 계획이었다.

유선우는 잠시간의 고민을 거친 뒤에 말했다.

“오늘 밤에.”

***

유선우는 진행하던 일을 전부 끝마쳤다. 오르시아와 헤네스를 지구로 파견했고, 가족의 피난까지 정리를

끝냈다.

짧은 휴식을 거친 뒤에 밤이 찾아왔다. 그는 연인들과 한 차례 신파극을 찍고는 침대 위에 누웠다.

금방 갔다 올게.

유선우는 여느 때처럼 가볍게 말했다.

단지 여행을 다녀온다는 듯한 말투로.

기다리는 이들의 걱정을 덜어줄 수 있도록.

그것을 끝으로 유선우가 눈을 감았다. 눈과 입이 다물린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존재감이 사라졌다.

그가 떠나자마자 방 안의 분위기가 무거워졌다.

“또 이렇게 됐네요. 정말.”

불편한 정적을 몰아낸 것은 아이릴이었다. 그녀는 쓰게 웃으면서 유선우의 뺨을 쓰다듬었다. 우울한 표

정이었지만 이전처럼 크게 충격을 받거나 악다구니를 쓰지는 않았다.

이미 한 번 겪었던 일이었다. 오히려 상황은 그때보다도 나았다. 유선우는 죽어가지도 않았고, 평온한 낯

으로 잠들었다.

곁을 지키면 언젠가는 돌아올 것이라 믿었다. 그건 박아연도 공유하는 감정이었다.

한편으로 소피아는 복잡한 낯으로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리디도 그에 못잖게 침울한 기색이었다.

“세정 씨는 어쩔 거예요?”

“…….”

“세정 씨?”

“네, 네?”

소피아의 물음에 차세정이 몸을 흠칫거렸다. 넋이 나가 있는 모습에 소피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렇게 놀라요? 그냥 계속 여기 있을 생각인가 싶어서.”

“소피아 씨는요?”

“나만 그렇게 부르네. 언니라고 해요 그냥.”

차세정이 황망하던 표정을 다잡고는 어색하게 미소지었다. 반응이 시원찮아 소피아가 머리를 설레설레

저었다.

“저는 돌아갈까 해요.”

“지구로요?”

“네. 마음 같아선 계속 있고 싶지만… 제가 할 일이 여기에 있는지 모르겠네요.”

소피아는 지구로 돌아가 헌터로서 활동할 생각이었다. 이곳에 남는 사람이 있다면 고향을 지킬 사람도 필

요하다고 여겼다.

유선우가 오르시아와 헤네스를 보내긴 했지만, 소피아는 스스로가 무언가를 한다는 감각을 가지고 싶었

다. 그래야 조금이라도 무력감이 덜할 테니까.

그 뜻을 헤아린 차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잠든 유선우의 얼굴을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전 남을게요.”

“잘 생각했어요. 언니까지 가면 나 심심해서 죽어.”

아이릴이 투덜거리면서 차세정에게 달라붙었다. 그녀가 들은 대로라면 앞으로 교회는 조용해질 터였다.

“아연 언니는 거기 어디야. 똥파리 만나러 간다 그랬죠?”

“인사나 드릴 겸해서요. 오가는 게 오래 걸리니까 한동안 거기서 지낼 수도 있겠네요. 수련하기에도 좋

고.”

“만나도 제 얘기는 하지 말아줘요. 그 여자랑 엮이기 싫으니까. 리디는 일 다시 시작했다고 그랬고요.”

박아연은 요정여왕, 체나를 만나러 요정의 숲으로 향할 예정. 그리고 리디는 기사단장 일로 바빠질 예정

이었다.

“무슨 나만 간호하나?”

“스승님이 어디 아프신 것도 아니잖습니까.”

“그것도 그렇지만요. 언제 잘못될지 모르잖아요.”

유선우의 상태는 저번과는 딴판이었다. 강신의 대가를 받지도 않았고, 심신이 분리된 악영향도 없었다.

적법한 절차를 거친 덕에 아티팩트로 생명 유지를 할 필요가 없었다.

기간이 길어지면 상황도 달라지겠지마는. 그때는 제국의 국고를 또 거덜 내면 되는 일이다.

“아니, 잠깐만. 혼자 있으면 좋은 건가?”

아이릴이 심각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동안 유선우를 독점할 상상에 입꼬리가 히죽 올라갔다.

의식이 없는 건 아쉽지만 마냥 나쁜 일도 아니었다. 여태껏 못해본 일을 여러모로 시도할 수 있으니까.

“헤, 으헤헤….”

아이릴의 머릿속이 꽃밭으로 변했다. 그녀의 음흉한 웃음에 차세정이 실소를 터뜨렸다. 차세정은 유선우

의 손을 감싸 쥐곤 속으로 말했다.

‘일어나기만 해봐, 아주.’

요 며칠간 치밀하게 계획을 짜뒀다. 결혼식은 어디서 올리고, 아이는 몇 명을 낳을지. 가사 분담은 어떻게

하고, 애 교육은 또 어떻게 할지.

그녀의 머릿속도 아이릴만큼이나 꽃밭이었다.

***

유선우는 이전처럼 아브나바를 통해 여문에게 향했다. 말랑말랑한 구름을 밟자 지팡이를 짚고 있는 노인

이 보였다.

“생각보다 늦게 왔군. 목이 빠지는 줄 알았네.”

“뭐 며칠이나 지났다고요.”

“기다리는 입장에선 어쩔 수 없지. 하루도 길게 느껴졌으니 말일세.”

여문이 흘흘 웃으면서 다가왔다. 기다렸다는 불평이 마냥 과장은 아닌지 그가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자, 그럼 시작함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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