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휴가
유선우의 일상은 순식간에 정신없어졌다.
그는 먼저 가족과의 일부터 해결했다. 벌써 세 번째이기 때문인지 나름대로 조리 있게 설명할 수 있었다.
가족들은 전부 듣기도 전부터 눈물을 흘렸다.
아들이, 오빠가 겪어온 고통. 그리고 앞으로 넘어야 할 난관. 그것들에 아무런 도움이 될 수 없음이 그들
을 슬프게 만들었다.
가족들의 431-9 차원으로의 피난은 곧바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며칠간 심적으로나 환경적으로나 준비
를 할 필요가 있었다.
잠시나마라도 거주지를 옮기는 것이다.
한두 시간으로 끝나는 일이 아니었다.
다음으로 유선우는 헤네스와 오르시아에게 지구 상식을 가르쳤다.
그러는 한편으로 연인들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네 명 모두가 한 성깔씩 하는 편이기에 피곤함이 상당했
다.
어디 그뿐이랴. 지인들이 하루가 멀다고 교회로 찾아와 소란스럽게 떠들어댔다. 제국 피습 건이 원인으
로 유선우의 복귀가 대륙에 알려졌기 때문이다.
부웅!
‘휴가는 개뿔. 쉴 수가 없어.’
- 지금 쉬고 있네, 왜.
‘…그 소리가 아니잖냐.’
나무 앞에 주저앉은 유선우가 속으로 하소연했다. 그가 한숨을 내쉬자 붕붕거리던 바람 소리가 멎었다.
아침 댓바람부터 창을 휘두르던 리디가 수련을 중지한 것이다.
“저기, 스승님. 제가 혹시 잘못하고 있습니까?”
“응? 뭐를?”
“아까부터 한숨만 쉬십니다.”
리디가 창끝을 바닥에 향하고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스승이 수련을 지켜보며 썩은 표정을 짓고 있으니 제
자로선 거북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심정을 짐작한 유선우가 손사래를 쳤다.
“아니야. 그냥 좀 피곤해서.”
“그러십니까. 제게 부족한 건 없습니까?”
“글쎄다. 이렇게 찔끔 봐서는 잘 모르겠네.”
유선우는 부정했지만 사실 부족한 점은 몇이고 눈에 띄었다. 리디는 분명 훌륭한 무인이었으나 인간을 기
준으로 봤을 때 그렇다는 얘기. 초월자의 시선에서는 턱없이 모자랐다.
하지만 굳이 지적하지는 않았다. 그가 백명에게 배운 창술은 초월자를 기준으로 고안한 무공이었기 때문
이다.
가르쳐준다고 해서 스펀지 빨아들이듯 배울 수 있는 종류가 아니다.
‘약간 정도야 가르칠 수 있겠지만….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적어도 한두 달로 끝나지는 못할 터. 그리고 유선우는 진득하게 수련을 봐줄 수는 없는 상황에 있었다. 책
임도 못 지면서 바람만 넣었다가는 역효과를 불러올 가능성이 컸다.
“아쉽습니다.”
어영부영 넘어가자 리디가 고개를 살짝 숙였다. 시무룩한 모습에 유선우가 피식거리며 물었다.
“질책한 것도 아닌데 왜 그래?”
“그게… 다행이다 싶긴 합니다만 예전처럼 배우고 싶은 마음도 있습니다.”
“얼씨구. 그땐 맨날 우는소리 했었으면서.”
“몸은 힘들었을지라도 매일 보람찼었습니다. 아마도.”
리디는 스승과 함께 다니던 시절을 회상하면서 미소를 머금었다. 그녀의 잔잔한 표정을 보자 유선우는 감
회가 새로웠다.
처음 봤을 때만 해도 자신만큼 독기에 차 있었는데. 야생동물처럼 날카로웠던 제자가 여러모로 어른스럽
게도 자랐다.
‘괜히 뿌듯하네.’
유선우는 만족스럽게 웃곤 엉덩이를 일으켰다. 그는 어깨를 으쓱거린 뒤에 기다란 나뭇가지 하나를 뽑았
다. 나뭇가지를 쥐고 두어 번 휘두르자 기분 좋은 바람이 불어왔다.
“스승님?”
“오랜만에 대련이나 할까.”
“대련…….”
리디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대련이 대체 얼마 만인지. 이전에는 매일 같이 창을 섞었었지만 4년도 더 된
옛적의 일이었다.
기억이 오래된 탓에 추억 보정이라도 걸렸을까. 그녀의 머릿속에서 대련이란 설레는 애정행각으로 변해
있었다.
“하, 하고 싶습니다!”
“뭐야. 자신 있나 봐?”
“그런 건 아닌데….”
“둘 다 일찍도 일어났네요.”
둘 사이에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유선우가 옆으로 고개를 돌리자 다가오는 박아연이 보였다. 잠이 덜 깼
는지 그녀가 입을 가리고 작게 하품했다.
“선우 씨는 피곤하지도 않나 봐요.”
“졸리면 더 자요, 그냥.”
“괜찮아요. 그보다 나올 거면 깨워주지. 혼자 일어나기 싫은데.”
어젯밤 유선우는 박아연과 동침했다. 그는 낮이나 밤이나 성실하게 연인들을 대했다. 전부 자신이 받아
들인 여자들이니 케어도 제대로 해주겠다는 마음가짐이었다.
“그럼 다음부터 그러죠 뭐.”
“까먹지 말고요. 둘이 뭐 하고 있었어요?”
“얘 수련 좀 봐주려고요. 리디-”
“…생각해보니 일이 있었습니다.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리디가 고개를 까딱거려 박아연에게 인사하고는 등을 돌렸다. 그녀는 빠른 걸음으로 교회 안으로 돌아가
기 시작했다.
태도가 명백하게 수상쩍다. 유선우가 가늘게 뜬 눈으로 박아연을 쳐다봤다.
“박아연 씨. 혹시 쟤 때렸어요?”
“네?”
“아니, 좀 욱하는 면 있잖아요.”
“…지금 저보고 리디 씨 괴롭혔냐는 거예요?”
“정색하지는 말고요. 미안합니다.”
박아연은 잠깐 유선우를 째려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요즘 이상하긴 해요. 멍하게 쳐다보기도 하고 반응도 조금씩 늦고. 뭐랄지, 피하는 느낌이에요.”
“진짜 무슨 짓 한 거 아니죠?”
“저한테만 그런 줄 알아요? 세정 씨들한테도 똑같아요.”
“음….”
유선우는 턱을 매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신경 쓸 일이 원체 많아 리디에게선 눈을 떼고 있었다. 아무래도
이쯤에서 상담이나 한번 거쳐야 할 듯했다.
“쉬발 씨라도 있으면 괜찮을 텐데.”
“뭐라고요?”
“쉬발 씨요. 둘이 친하지 않나요? 티격태격하기는 해도.”
“…아, 그 새끼. 까먹고 있었네.”
용왕과 딸 얼굴만 보고 돌아오겠다던 놈.
이미 닷새가 넘도록 감감무소식이다.
‘빤스런 했구만.’
유선우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복귀가 늦으면 맞아야지.
업계의 상식이다.
***
용이 사는 산맥의 한 중턱에 자리한 둥지.
그곳에서는 때깔 좋은 두 흑룡이 부녀 싸움을 하고 있었다.
“도망가야 한다니까는! 아빠 말 좀 들어라!”
“듣고 있어. 둥지에서 소리 좀 지르지 마. 민폐잖아.”
“아니… 제발 이번 한 번만 얌전히 굴어줬으면 좋겠구나.”
“나보고 자립심 기르라 했었던 게 누군데?”
쉬발의 딸, 루루가 콧방귀를 뀌었다. 그녀는 아버지에겐 시선도 주지 않고 마력의 흐름에 집중했다.
방출된 마력이 거미줄처럼 펴지더니 그녀의 비늘을 덮었다. 그러자 시커먼 비늘의 색이 서서히 변하며 노
란빛을 띠기 시작했다.
마력을 조작하는 솜씨가 썩 훌륭했다. 하지만 쉬발은 딸의 성장을 기뻐하기는커녕 고함만 질러댔다.
“태평하게 염색이나 할 때가 아니란 말이다! 뭐든지 사줄 테니까!”
“아빠한테 그럴 능력은 있고?”
“뭐, 뭐?”
쉬발은 딸의 버릇없는 말투에 말문이 막혔다. 그는 화가 나고 어처구니없는 한편으로는 가슴이 아려왔
다. 자신이 가정교육을 이따위로 했다는 게 서글프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루루의 말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그녀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쉬발을 응시했다.
“그리고 태평하게 뭐? 내가 왜 이러고 있는지 몰라서 물어?”
“…아직도 비늘이 창피한 게냐.”
“그래! 애들이 수컷답다고 얼마나 놀리는데! 왜 하필 아빠 닮아서. 엄마는…!”
“그만!”
쉬발이 노호성을 터뜨렸다. 그가 씩씩거리며 부릅뜬 눈으로 루루와 시선을 맞췄다.
둘 사이에서 ‘엄마’라는 단어는 꺼내서는 안 될 금구였다.
“그 얘기는 그만하자꾸나.”
머리가 지끈거린다. 쉬발은 눈을 질끈 감고는 흥분을 가라앉히려 애썼다.
그럴수록 루루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이미 몇 년 전에 세상을 떠나신 어머니. 항상 그분의 화제를 회피하
려는 아버지의 태도가 도무지 용납되지 않았다.
“엄마가 부끄러워? 얼마나 멋진 분이셨는데.”
“귀가 막힌 게냐. 그만하라고 했을 텐데.”
쉬발이 그르릉거리며 낮은 울음소리를 뱉었다. 그는 루루의 말과는 달리 사별한 아내가 부끄럽지 않았
다.
그저 처참하게 죽은 그녀를 떠올리기가 괴로웠을 뿐. 루루는 어머니의 난도질당한 어머니의 시체를 보지
못했으나 그는 아내의 시체를 보았다.
그때의 기억은 아직도 뇌리에 선명하게 각인되어 있었다.
“아빠는 항상 그런 식이야. 됐어!”
루루가 표독스럽게 쏘아붙이고는 미성숙한 날개를 펼쳤다. 그녀는 질풍노도의 시기답게 가출할 속셈이
었다.
쉬발이 딸의 이름을 외치려는 순간,
“바깥에 다 들린다, 이것들아.”
“허어억!”
난데없이 들려온 음성에 쉬발이 몸을 크게 떨었다. 하지만 그는 도망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어느새 유
선우가 자신의 등 위에 타올라 있었기 때문이다.
“오, 오라버님?”
날아가려던 루루도 익숙한 목소리에 날개를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그녀의 큼지막한 눈동자에 유선우가
담겼다.
“그렇게 부르지 말라니까. 오랜만이다.”
“오랜만이어요!”
반가움을 가득 담아 외친 루루가 휘황한 빛에 휘감겼다. 그녀가 인간의 모습으로 변하고는 유선우에게 안
겨들었다.
“어이고. 조심해.”
폴리모프한 루루는 중학생이나 고등학생쯤 되어 보이는 외관이었다. 유선우는 그녀를 안아주면서 철컹
철컹이라는 말을 떠올렸다.
‘나보다 나이도 훨씬 많은데 말이야.’
- 그보다 앞 봐봐. 가관이다.
엔라의 말에 시선을 돌리자 쉬발이 길쭉한 목을 뻗어 자신의 등 위를 쳐다보고 있었다.
쉬발의 얼굴은 험악하게 찌푸려진 상태였다. 사람 한둘은 거뜬하게 묻을 기세다.
“표정 풀자. 응?”
“형님, 제 딸은 절대 안 됩니다.”
“얘가 날 따르는데 어쩌라고? 루루야, 나 뭐 아무것도 안 했지?”
“그럼요, 당연하죠. 앞으로 잔뜩 해요!”
루루가 킁카킁카하며 유선우의 가슴팍에 이마를 비벼댔다. 유선우는 흩날리는 단발 머리카락을 쓸어내
리면서 쉬발을 향해 웃어 보였다.
“이, 이, 이 악마 같은!”
쉬발이 분에 차 부들부들 떨었다. 그는 딸의 피를 대량으로 뽑아간 유선우가 사랑받는 게 이해되지 않았
다.
단지 목숨을 몇 번 구해주고.
고작 제 어미의 복수를 해줬을 뿐인데.
그것만으로도 딸의 무한한 호의를 사니 아비의 입장에선 치가 떨렸다.
한마디로 그냥 딸바보다.
‘끝까지 표정 안 푸네. 어쩔 수 없지.’
유선우가 속으로 혀를 찼다. 그가 루루를 살짝 떼어내고는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루루야. 내가 쉬발이랑 어디 갔었던 거 알지?”
“펠리시르 님께서 말씀해주셨어요. 불러주셨으면 제가 갔을 텐데.”
“미안. 그래도 네 아빠한테 도움 많이 받았다. 특히 미국이란 데서 말이야.”
“형님, 그건! 그건 안 됩니다!”
쉬발의 동공이 지진 난 듯이 떨리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부녀 싸움을 한 직후다. 골이 깊어진 상태에서, 아빠가 자신으로 폴리모프해 마스코트 노릇을
했다는 게 밝혀지면.
가족 간의 사이가 삐걱거리다 못해 나락으로 떨어질지도 모른다.
그리고 유선우는 증거물까지 가지고 있었다. 영상을 녹화해둔 아티팩트. 그가 아공간 주머니를 뒤적거리
면서 쉬발에게 눈짓으로 말했다.
‘앞으로 잘하자. 응?’
언제 충신 버프가 빠졌는지는 모르겠지마는.
당근으로 안 된다면 철저히 채찍으로 조련할 뿐인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