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휴가
해가 기지개를 켜는 이른 아침시각.
유선우는 짧은 수면을 마치고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나른함과 함께 온기가 전해져 온다. 옆에 누운 차세
정의 몸에서 느껴지는 체온이다.
유선우는 괜스레 손가락으로 코를 쓱 하고 매만졌다. 그는 혹여나 차세정이 깰까 조심조심 몸을 일으켰
다.
‘뭐부터 해야 하나.’
생각해둔 예정은 있었다. 다름 아닌 가족들을 데려오는 것. 물론 강제가 아니라 차분한 대화를 나눌 셈이
었다.
- 어차피 말할 거면 처음부터 하지 그랬어.
‘아니, 지금이라서 말하는 거지. 내가 지구에서 해온 게 있으니까.’
귀환 초기에는 쥐뿔도 없는 미필 백수였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여태까지 헌터로서의 모습을 차고 넘칠 만큼 보여줬다. 그 화려한 행보가 설득력
을 더해줄 터다.
‘근데 아직 시간이 이르네.’
어제 차원을 넘었을 때 한국의 시간대는 아침이었다. 반면에 이곳은 낮이었으니 지금쯤 한국은 한창 밤중
일 것이다.
새벽부터 난리를 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우선 서너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그러고 보니 리디는 왔나?’
저녁에 온다던 애가 어제 하루 동안 보이질 않았다. 평소에는 말 잘 듣는 제자인 만큼 걱정이 될 수밖에 없
었다.
- 별걱정을 다 하네. 그냥 부하들이랑 술이라도 먹었나 보지 뭐.
‘하긴. 한 달 만에 왔으니까.’
- 그래. 걔가 어디 가서 맞고 다닐 애도 아닌데 과보호야, 과보호.
‘누가 뭐래?’
유선우는 태평하게 하품을 쩍쩍 내뱉었다. 그는 한동안 우두커니 서 있다가 머리를 긁적거렸다.
‘……산책이나 갔다 올까.’
- 어흐흐흐. 산책은 무슨.
‘뭐, 왜. 바람 쐬러 간다고.’
- 그러시구나. 오늘 밤에 넘어뜨리나 했네.
유선우는 한숨만 푹푹 쉬었다. 이전까지만 해도 자신은 놀리는 쪽이었건만. 언제 위치가 바뀌었는지 요
즘은 엔라에게 조롱만 당하고 있다. 슬슬 옛날이 그리워지는 나이다.
***
유선우는 몸을 청결히 한 뒤에 복도로 나갔다.
걷고 걸어 식사 준비가 한창인 식당에 들렀고, 다음에는 리디가 아침 단련을 할 법한 자그마한 정원으로
이동했다.
“어라. 일찍 일어났네요?”
정원으로 가자마자 박아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째 알아차리는 게 굉장히 빠르다. 주변에서 뛰노는
정령들에게 들은 모양이다.
”그쪽도요. 원래 아침 약하지 않았어요?“
“딱 이 시간대가 정령이 잘 모이거든요. 그래서 어지간해선 아침에 수련하고 있어요. 저번에 여행 다닐
땐 못했었지만.”
“그때 좀 웃겼었는데. 아침마다 얼굴 퀭해서는.”
“으…. 괜히 얘기 꺼냈어.”
당시를 떠올린 박아연이 시선을 확 피했다. 인사하면서도 유지되던 집중력이 단번에 흐트러졌다. 정령들
이 떠나가기 시작하자 그녀가 한숨을 폭 내쉬었다.
“집중 다 깨졌네. 같이 밥이나 먹으러 가요.”
“그 전에 혹시 리디 어딨는지 알아요?”
“글쎄요. 어제부터 안 보이던데.”
박아연이 대답하고는 한 방향을 쳐다봤다. 어제 아이릴이 사용했던 방이 있는 장소다.
“그러고 보니 아이릴 씨도 안 보이네요. 아침에 보고하러 온댔는데.”
“보고요?”
“아, 그런 게 있어요.”
박아연이 어색하게 받아넘겼다. 그녀는 아이릴에게서 간밤의 도청 결과를 보고받을 예정이었다. 시킨 게
아니라 본인이 신나서 말해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런데 코빼기도 보이지 않으니 이상할 노릇이다. 늦잠이라기에는 아이릴의 아침은 항상 빨랐다.
“오늘따라 교회도 조금 허전한 느낌이고…. 방 좀 확인해봐야겠네.”
유선우와 박아연은 식사하기에 앞서 아이릴의 방으로 향했다. 문을 열어보니 사람은 온데간데없고 쪽지
만 남아 있었다.
유선우는 아이릴이 남긴 메시지를 읽고는 턱을 매만졌다. 고심에 빠진 그의 모습을 보며 박아연이 물었
다.
“뭐라고 쓰여 있는데요?”
“교회에 일 생겨서 본산으로 가본답니다.”
“교회 일… 잘 상상이 안 가네요.”
“저도요. 설마 교황 죽었나?”
아이릴이 가야만 하는 상황이 그 외에 있을까. 떠오르는 건 전쟁뿐인데, 갑자기 전쟁이 터졌을 리가.
유선우는 한참을 끙끙거리다가 말했다.
“일단 밥부터 먹읍시다.”
***
식사를 마친 뒤 유선우는 황성으로 향했다.
차세정과 소피아는 박아연에게 맡겼다. 박아연은 고집부리지 않고 얌전히 그를 배웅해줬다. 그녀는 아침
부터 시끄러운 황족들을 만나고 싶지 않았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래. 수고해.”
황성으로 향한 유선우는 얼굴만으로 문을 통과했다. 변장 마법을 사용한 간첩이라고 의심받는 일은 없었
다.
그를 사칭하는 간 큰 놈은 세상에 몇 없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가끔 튀어나왔었지만 전부 유선우에게 걸
려서 죽었다.
“유선우 공 아닌가! 왔다고는 못 들었네만.”
“안 알려줬으니까.”
“서, 선우 님! 절 찾아오신 건가요?”
“너 누구야?”
황성의 복도를 걸어 다니자 당연하게도 주목이 쏠렸다. 만나는 귀족마다 아는 체를 하니 성가시기 그지없
다.
유선우는 인사를 건성으로 받아넘기면서 알현실로 향했다. 흐릿한 기억을 되짚어 걷다 보니 묘한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어라.’
창밖으로 분주히 움직이는 무리가 보였다. 바쁜 와중에도 정연한 움직임과 때깔 좋은 갑옷. 딱 봐도 기사
단이다.
‘쟤네가 어디 소속이지?’
기사단은 저마다의 표식을 갑옷에 새기고 다닌다. 어떤 이들은 문양이 촌스럽다고 까이는 경우도 파다하
다. 주로 유선우가 깠다.
그리고 현재 보이는 이들은 날개 모양의 상징을 달고 있었다. 유선우는 기억을 되살려봤지만 잘 떠오르지
않았다. 대신에 엔라가 대답해줬다.
- 그거네, 그거. 그리핀 같은 동물 타는 애들.
‘뭐야. 네가 어떻게 알아?’
- 새삼스럽게 왜 이래? 나 너 똥 싸는 거까지 본 사람이야.
‘아, 맞네.’
엔라는 유선우만큼이나 431-9 차원에 대해 빠삭했다. 몇몇 부분에선 유선우보다 나았다.
그녀는 시간축이 다른 낙원의 협곡을 이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비교적 이전의 기억이 생생하게 남아 있었
다.
‘근데 뭐가 저렇게 바쁘대.’
- 글쎄. 무슨 일 생긴 거 아냐?
‘어째 느낌이 싸한데.’
오늘따라 세상 돌아가는 꼴이 이상하다. 유선우는 근질근질한 감각을 느끼면서 발걸음을 재촉했다.
“유, 유선우 님?”
“어, 안녕.”
“이곳은 폐하의 어전입니다. 아무리 당신일지라도-”
“어, 꺼져.”
근위 기사들도 알아서 비켜줬다. 함께한 세월이 있으니 얼굴만 봐도 마음이 통하는 모양이다.
막힘 없이 알현실의 문 앞에 도착한 유선우가 다리를 들어 올렸다.
쿠웅!
문이 헐거운지 살짝 두드렸는데도 활짝 열렸다. 나타난 실내에는 생각보다도 사람이 많았다.
황족 몇몇과 실용성 쥐뿔도 없는 갑옷을 입은 사내들. 그리고 옥좌에 앉은 초로의 노인까지.
국가의 수뇌부치고는 전체적으로 연령대가 낮았다. 비단 제국뿐만이 아니라 대륙의 어느 나라나 다 이런
느낌이다. 오랜 전쟁으로 인해 세대교체가 빨라진 까닭이다.
유선우는 눈알을 굴려 알현실을 쓱 훑었다. 당연하게도 그에게 시선이 쏠렸고, 눈이 마주치는 경우도 잦
았다.
상대의 반응은 셋으로 엇갈렸다.
“어떤 무례한…… 커험!”
욕하다 말고 부자연스럽게 시선을 피하거나,
“시, 신창…….”
눈을 반짝거리면서 부담스럽게 쳐다보거나,
“오, 오오오! 선우 아닌가!”
호들갑 떨며 친한 척하거나.
예외적으로 황제만은 반응이 달랐다. 불청객을 보자마자 그의 눈동자가 미친 듯이 흔들렸다.
온몸에서 식은땀이 비 오듯이 흘렀고 호흡이 가빠졌다. 영웅이라기보다는 귀신을 본 듯한 태도다.
“저, 정숙하라.”
체면을 생각한 황제가 태연함을 가장해 말했다. 황제 생활만 수십 년 차. 무표정을 연기하는 데는 일가견
이 있었다.
“오랜만이군. 반갑기는 하다만, 보다시피 반겨주기엔 상황이 여의치가 않다.”
“그래 보이네.”
“무례는 용서할 테니 잠시만-”
“무례?”
유선우는 말꼬리를 잡으며 알현실의 카펫을 밟았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황제가 움츠러들어 자라목이 되
었다.
4년 전 유선우가 떠나던 날의 기억이 떠오른 탓이다. 당시 유선우는 수십의 기사들을 손쉽게 떨쳐내고 황
족들의 싸대기를 후려쳤었다.
“줄 잘 타라. 알지?”
자리의 전원에게 하는 말이다. 찰떡같이 알아들은 귀족들이 침을 꼴깍 삼켰다.
곧 정적이 찾아오자 유선우가 본론을 꺼냈다.
“보니까 무관들이 많네. 아까 기사단 나가는 것도 보였고. 어디랑 전쟁해?”
“그, 그게 말이다….”
“말 꺼내는 데까지 5초 준다.”
막무가내식 발언에 황제가 주변에 시선을 줬다. 그러자 젊은 귀족 하나가 나서서 설명을 시작했다.
내용 자체는 단순했다. 밤의 왕국의 흡혈귀들이 난데없이 국경을 침범했다. 그림자에 숨어 이동하는 특
유의 기술로 재빠르게 달려오고 있다고.
제국은 교회의 도움을 받아 그들을 막으러 나섰다고 한다.
사정을 듣자 유선우가 눈썹을 찌푸렸다.
“나한테 도와달라 하지. 왔다는 건 리디나 아이릴한테 들어서 알았을 텐데.”
“그게, 성녀께서 함구해달라 하셨습니다.”
청년 귀족이 어색한 투로 말했다.
황제가 직접 설명하지 않은 것도 책임의 회피를 위함이었다. 그리고 유선우가 그런 수작을 모를 리가 없
었다.
“너, 이름 뭐야?”
“파를 후작의 장남, 로이드라고 합니다.”
“그래. 기억해둘게.”
그 말에 로이드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는 자신이 라인을 탔음을 직감하고 환희에 떨었다.
“근데 둘이 갔으면 내가 할 것도 없겠네. 슬슬 상황 끝나가려나.”
“그것이…. 전세가 영 좋지는 못합니다.”
“뭐? 왜?”
분명 흡혈귀는 수면기를 거치면 강해지기는 한다. 하지만 기하급수적인 수준은 아니고, 3할가량이 한계
선이다.
그마저도 재활 기간을 거쳐서 서서히 강해지는 것. 현재의 오르시아로서는 리디와 아이릴에게 속수무책
이어야 옳다.
다른 흡혈귀들은 기사단과 교회의 인원들이 맡으면 되는 일. 둘이 밀리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의아해하는 유선우에게 로이드가 어두운 낯빛으로 말했다.
“마탑에서 적측에 가세했습니다.”
“…어디?”
“마탑입니다. 탑주와 원로들이 직접 나섰다더군요.”
유선우가 이마를 부여잡았다.
“이런 미친.”
***
악마와의 전쟁으로 불모지가 된 루밀 평원.
그곳에선 한창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척박한 땅 위는 핏빛의 안개로 자욱했다. 안개가 기사들의 갑옷 안으로 스며들어 살점을 녹였다.
“끄으으윽!”
강인한 기사일지라도 참기 힘든 고통이었다. 이미 거품을 물고 쓰러진 이들이 몇이나 있었다. 하지만 여
태까지 사망자는 단 한 명도 나오지 않았다.
화아아악!
지상에 찬란한 빛이 내려앉았다. 광채가 기사들의 몸을 감싸더니 상처를 완전히 회복시켰다. 다치는 족
족 치유되는 모습이 좀비 떼가 따로 없었다.
‘차라리 죽고 싶다!’
그들은 안개 속으로 돌진하면서 눈물을 삼켰다.
아파 죽겠는데 죽지는 않는다. 성녀가 함께한다길래 마냥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했었건만. 막상 와보니
인세의 지옥이었다.
콰아아앙!
한편으로 최선두에선 굉음이 쉴 새 없이 울려 퍼졌다. 아이릴과 오르시아가 충돌하는 소리였다.
“방해하지 마라! 내 지아비를 만나겠다는 게 그렇게도 잘못됐다는 것이냐!”
“누가 당신 지아비예요, 누가!”
“하! 질투하는 게로군. 네년의 그 새까만 속을 모를 줄 알았느냐.”
“질투는 당신이 해야겠죠. 선우 인생에서 썩 꺼져요!”
아이릴이 쥔 망치가 비대하게 부풀었다. 망치를 내려찍자 오르시아가 그림자 속으로 몸을 숨겼다.
그녀가 사라지자마자 하늘에 마력이 가득 차올랐다. 허공에 수십의 마법진이 그려지더니 불길이 뿜어져
나왔다.
“아윽…!”
마법을 미처 피하지 못한 아이릴의 몸이 불타올랐다. 육체의 손상은 금세 회복되었으나 정신적으로 짜증
이 치밀어 올랐다.
그녀가 도끼눈을 뜨고 하늘을 올려다봤다.
“진심으로 교회와 척을 지겠다는 건가요?”
보랏빛 머리카락의 여성이 공중을 날고 있었다.
마탑주, 헤네스 엘레니아.
일찍이 유선우의 동료였던 여자다.
“우리가 언제부터 사이좋았다고. 그리고 시비는 네가 먼저 걸었지.”
“뭐라고요?”
“벌써 까먹었어? 내가 선우 면회를 몇 번이나 요청했는데!”
유선우가 병상에 누워 있었을 때의 일이다. 헤네스는 면회를 바란다는 서찰을 지겹도록 보냈었다.
개인적으로 움직이기에는 그녀의 위치가 문제였다. 마탑과 교회는 사이가 험악한 편인지라 마탑주가 멋
대로 드나들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하지만 아이릴은 요청을 줄기차게 거절했었다. 아직 유선우의 상태가 호전되지 않았다는 이유였다. 그때
는 헤네스도 납득하며 쾌차를 기원했었다.
“3년이나 참았어. 나았으면 나았다고 말이라도 해주던가!”
그렇게 가슴 졸이며 참고 참기를 3년.
갑자기 유선우가 깨어났단다.
그마저도 정식 서찰이 아닌 풍문으로 들었다.
“참다 참다 변장하고 찾아갔더니 여행 갔다더라? 이 개새끼야.”
“아니, 그걸 왜 저한테…….”
“한마디는 해줄 수 있었잖아!”
일갈과 함께 웅혼한 마력이 흘러나왔다. 보통 원한이 아닌 모양이다. 헤네스가 마법을 구현하려는 순간,
공기가 미세하게 흐트러졌다.
콰직!
흉흉한 붉은빛을 머금은 창이 헤네스에게 쏘아졌다. 창은 그녀가 두르고 있던 보호막을 산산이 조각냈
다.
“말이 많습니다.”
헤네스의 뒤에서 나타난 리디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가 다시 창을 휘두르려 하자, 사방에서 나무
줄기가 나타나 그녀의 발을 묶었다. 탑주를 따라 나온 원로들의 마법이었다.
틈을 노리면 적도 틈을 노려온다.
기사들을 치유하면 흡혈귀들도 재생한다.
서로 괴로울 뿐인 소모전.
정신 사나운 개판이 수 시간이나 계속되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전장에 게이트가 출현했다.
난데없는 현상에 전투가 일순간 멈췄다. 모든 이들이 싸우다 말고 게이트를 쳐다봤다.
그 기묘한 정적 속에서 유선우가 성큼성큼 걸어 나왔다. 그는 오연한 눈빛으로 전장을 훑어보고 말했다.
“다 꿇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