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휴가
431-9 차원으로 넘어온 지구인은 차세정뿐이 아니었다. 소피아도 게이트를 넘었고, 유선우의 인생사를
들었다.
얘기를 끝마치자 유선우가 한숨을 토해냈다.
‘더럽게 길어.’
둘을 배려해서 일부러 따로따로 불러왔건만. 30분은 족히 걸리는 이야기를 두 번이나 하니 입이 다 아프
다.
유선우가 엄살을 부리는 한편으로 소피아는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게이트의 실체와 지구를 개판으로 만든 흑막. 가볍게 받아들이기에는 그녀에겐 너무도 무거운 화제였다.
“솔직히… 혼란스러워요. 방금까지 일하다가 부랴부랴 와서 더 그런 것 같아.”
“믿기 힘들죠? 사실 저도 실감은 잘 안 나요.”
“아니, 믿어요. 믿는데. 그냥 머리가 복잡해서.”
유선우는 이마를 부여잡는 소피아를 보며 피식 웃었다.
“여기저기 둘러보면서 천천히 생각해요. 아, 혹시 바쁘면 다시 지구로 보내줄-”
“아니요! 하나도 안 바빠. 이대로 일주일 빼먹어도 돼요.”
“뭐야. 되게 신났네요. 다짜고짜 데려와서 욕먹을 줄 알았는데.”
“당연히 신나죠. 다른 사람들은 절대로 못 해볼 경험이잖아요.”
소피아는 431-9 차원에 지대한 흥미가 있었다. 타 차원 여행이라니. 즐기지 않으면 손해다.
“그리고 결국은 또 없어지겠단 소리니까. 그때까지라도 같이 있고 싶어요.”
“그러려고 부른 거예요. 일단 밖으로 갑시다.”
유선우는 소피아를 바깥으로 이끌었다.
마지막 휴가가 시작되었다.
***
뉴페이스 둘이 들어온 대신 하나가 빠졌다. 쉬발이 용왕과 딸에게 다녀오겠다며 일행에서 이탈한 것이
다.
유선우는 쉬발의 탈주를 생각 없이 용인했다가 곧바로 후회했다.
성비가 개판 났다.
남자가 하난데 여자는 다섯.
그중에서 넷이나 연인으로 두고 있다.
위장이 절로 아파올 지경이다.
하지만 유선우의 걱정은 기우로 끝났다.
“세정 언니도 변장하는 게 낫지 않아요? 머리카락 눈에 띄는데.”
“응? 그럼 염색 정도만 해볼게. 신기하네.”
의외로 분위기가 화목했다. 특히나 아이릴이 차세정에게 사근사근하게 군다. 둘이 잘 맞을 줄은 알았는
데 생각보다도 친해지는 게 빠르다.
소피아에게 사정을 밝히는 사이에 말을 튼 것일까. 의아하게 느낀 유선우는 박아연을 따로 불러 물어봤
다.
“저 둘이 무슨 일 있었어요?”
“뭐가요?”
“아이릴이 좀 온순해 보여서요. 아깐 죽어라 째려보더니만.”
“아, 그게….”
박아연이 어색한 낯으로 설명했다.
“세정 씨 눈치 엄청 빠르더라고요.”
“눈치요?”
“아이릴 씨가 꼽주려는 거 귀신같이 알아채고 먼저 말 걸던데요? 세정 씨가 그렇게 웃는 거 처음 봤어요.”
미녀를 좋아하는 게 어디 남자뿐인가. 여자도 똑같다. 차가운 인상의 미녀가 활짝 웃으며 다가오자 아이
릴도 쓴소리를 못 했다.
차세정이 칭찬까지 몇 마디 더해주니 아이릴은 어느새 언니언니 거리고 있었다.
“반대로 소피아 씨는 싫어하는 것 같고요.”
“미국에서도 그러더니. 무슨 억하심정이라도 있나.”
“가슴이 천박하대요.”
“참나.”
유선우가 실소를 흘리면서 소피아를 봤다. 그녀는 한창 리디에게 이런저런 말을 거는 중이었다. 활발한
성격이 어디 가지는 않은 모양이다.
“별로 안 삐걱거려서 다행이죠?”
“네. 진짜로.”
“이럴 때 잘해요. 저한테도 신경 좀 써주고요.”
“잘해야죠. 여러모로.”
박아연이 슬며시 유선우의 손을 잡았다. 그녀가 지나가듯이 물었다.
“언제까지 여기 있으려고요?”
“한 일주일 정도요. 또 병실에서 신세 지겠네요.”
유선우는 431-9 차원에서부터 명계로 향할 계획이었다.
안전을 고려한 선택이다. 명계로 떠나면 관리자들이 좋다고 지구에다 게이트를 열어댈 테니까.
아브나바도 언제 잘릴지 모르니 지구보단 이곳이 형편이 좋았다.
‘문제는 얼마나 걸릴지 모른다는 건데.’
- 아예 가족들까지 데리고 와. 너 없는 동안 지구 X창나면 어떡해.
‘그래야겠네. 근데 X창이 뭐냐, X창이.’
모르는 새 엔라의 말투가 저급해졌다. 도도하게 다리를 꼬던 모습은 떠올리기도 힘들 지경이다.
혼자 떫은 표정을 짓는 유선우를 박아연이 이끌었다.
“준비 다 했나 보다. 슬슬 가요.”
***
일행은 복작거리는 거리로 나섰다. 다행히도 양아치에게 시비 걸리는 등의 귀찮은 일은 없었다. 일부러
귀족처럼 치장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보다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그냥 관광이 더럽게 재미없었다.
“되게 할 거 없네요.”
“그러게요. 음식도 입에 잘 안 맞고.”
소피아가 말하고 차세정이 받았다. 그녀들도 처음에는 흥미진진했었다.
본 적도 없는 식물들과 영화에서나 보던 건물들. 수인이나 엘프들도 간간이 보이니 꿈이라도 꾸는 기분이
었다.
그런데 신기함도 잠깐뿐이더라. 현대와는 미의식이 달라 의류점은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았다.
노점상의 음식은 가격만큼이나 맛도 저렴했고, 도시 곳곳에서 똥내가 났다.
즐길 거리라는 게 하나도 없었다.
“그나마 마법도구점이 재밌긴 했는데. 좀 수수했죠?”
“생각해보면 당연한 거죠. 위험한 걸 도시 한복판에서 팔 리가 없지.”
평화로운 판타지 세상은 이다지도 노잼이었다. 비단 둘뿐만 아니라 원주민인 아이릴과 리디도 지루해했
다.
“제가 뭐 하고 살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도요. 선우 간호할 때는 시간 잘 갔었는데. 언니는 어떻게 여기서 3년이나 지냈어요?”
“전 나름 재밌었어요. 처음 몇 달 빼곤 체나 님 밑에서 보내서.”
“아, 맞다. 요정들은 좀 시끄럽죠.”
불평하는 원주민 둘에게 유선우가 말했다.
“근데 너넨 일하러 안 가?”
“가보긴 할 건데 일은 안 할 거예요. 전쟁도 끝났는데 성녀가 일하면 다들 싫어할걸요?”
“왜? 너 인기 많지 않나.”
“그게, 아까 들어보니까 교황이 골골거린다더라고요.”
정치적으로 복잡한 상황이라는 거다. 지금 아이릴이 나서면 교황 후보들이 오해할 우려가 있다. 안 그래
도 인기 많은 성녀이니 진짜로 교황이 될지도 모른다.
“그 할배는 맨날 오늘내일하면서 잘 살더라. 이번 기회에 그냥 네가 교황 해. 내가 밀어줄게.”
“절대 싫어요. 귀찮아.”
“그럼 됐고. 넌?”
유선우가 리디를 보며 물었다. 리디가 머쓱하게 볼을 긁적거렸다.
“아무런 말도 없이 지구로 갔었던 거라…. 솔직히 좀 무섭습니다.”
“아브나바가 알아서 케어도 해줬겠지.”
“그런 겁니까?”
“큰일 생기면 내 밑으로 네 위로 다 모이라 해.”
“스승님한테도 윗사람이 있습니까?”
“여기엔 없지.”
싱겁게 웃은 유선우가 리디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갔다 와. 부하들도 볼 겸.”
“그럼 저녁쯤에 교회로 가겠습니다.”
“그래. 이따 보자.”
리디는 황성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녀는 일행과 멀어지던 중에 고개를 뒤로 돌렸다.
인파 사이로 유선우와 그의 연인들이 보였다. 재미없다 지루하다 말하면서도 행복해 보이는 모습이다.
“…….”
리디는 한동안 복잡한 눈빛으로 그들을 쳐다봤다. 그녀는 그들 사이에서 자신의 자리가 잘 보이지 않았
다.
***
휴가의 첫날이 지고 찾아온 새벽.
아이릴은 바닥에 주저앉아 벽과 귀를 맞대고 있었다. 그녀가 달라붙은 벽 너머는 유선우의 병실이었다.
‘이상하네. 왜 이렇게 조용해?’
유선우가 차세정과 함께 들어가는 장면을 두 눈 똑바로 뜨고 봤다. 그런데도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는
다.
벌써 30분째 잠잠하다. 이러다가는 아이릴의 인내심이 먼저 바닥을 보일 기세였다.
‘설마 안 하지는 않을 테고.’
아이릴이 알기로 유선우는 성욕에 미친놈은 아니어도 충분히 욕망에 충실했다. 거기도 잘 서는 그가 차세
정과 한 침대에서 잔다면 가만히 있을 리가 없다.
아이릴은 그렇게 판단했다.
‘아티팩트라도 썼나?’
유선우에게는 신비한 물건이 많다. 용왕에게서 뺏어온 것들과 밤의 왕국에서 털어온 것들.
그중에는 방음 결계를 펼쳐주는 물건도 있을지도 모른다.
‘에이, 김 샜어.’
아마도 똑 부러지는 차세정이 부탁한 모양이다. 유선우는 소리엔 별 신경도 쓰지 않으니까.
나름 조심이야 하겠지만 원천봉쇄할 생각은 아예 안 한다.
아이릴은 속으로 혀를 차면서 침대로 돌아갔다. 오랜만에 홀로 누워 있자니 외로움이 밀려온다. 그녀가
한숨을 푹푹 내쉬는 때였다.
작은 노크 소리가 울려 퍼졌다.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아니었다. 들려오는 방향은 뒤편의 창문.
고개를 돌리자 창밖에는 리디가 서 있었다. 어째서인지 굉장히 심각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거기서 뭐 해요? 저녁에 온다더니 늦었-”
“급한 일이 생겼습니다.”
“네?”
아이릴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리디는 골치 아프다는 듯이 인상을 확 구기며 대답했다.
“군대가 이쪽으로 오고 있습니다.”
“군대요? 전쟁이라도 났어요?”
“전쟁이라고 할지…. 흡혈여왕이 흡혈귀들을 이끌고 진군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 말에 아이릴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녀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고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선우에겐 말했나요?”
“안 하는 게 좋다고 판단했습니다.”
“잘했어요. 절대로 말하지 마세요.”
아이릴은 유선우가 오르시아에게 미련이 있다고 생각했다. 둘이 만나게 된다면 감정의 동요가 클 수밖에
없으리라.
지금 같은 평화로운 시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일이다. 그녀는 유선우의 짧은 휴가를 방해하고 싶지 않았
다.
“저희끼리 처리하죠. 상황은 어떻다던가요?”
“현재 황성에서 회의 중입니다. 자세한 건 가면서 얘기하겠습니다.”
“알겠어요. 그 전에 잠깐만요.”
아이릴은 종이를 찾아 쪽지 한 장을 남겼다. 교회 본산에 일이 생겼으니 다녀온다는 내용이었다. 그녀는
쪽지를 눈에 띄는 장소에 놓아두고는 리디에게 물었다.
“당신은요? 뭐라 말은 해두는 게 좋을 텐데.”
“……아니요. 저는 괜찮습니다.”
“뭐, 그래요. 자기 맘이지.”
아이릴은 잠옷에서 발목까지 오는 하얀색 예복으로 갈아입었다. 준비를 끝마친 그녀가 창밖으로 몸을 던
졌다.
“가죠. 그년을 다시 잠재워야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