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휴가
유선우는 일어나자마자 차세정에게 전화했다. 한동안 기다린 끝에 졸음 가득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응…. 왜?
“그쪽으로 갈게. 시간 좀 내줘.”
- 지금 보자고?
“응. 여행 가자.”
스스로 말하고도 뜬금없는 감이 있었다. 차세정도 어이가 없었는지 대답이 늦었다.
- 지금 5시야, 미친놈아…….
“그럼 아침이지. 천천히 준비해.”
- 이상한 소리 좀 하지 마. 너 아니었으면 전화도 안 받았어.
“대표님 전화도?”
- 주말 새벽에 전화하는 게 대표야? 개새끼지.
중간중간에 하암, 하고 하품 소리가 끼어든다. 유선우는 안 되겠다 싶어 혀에 기름을 발랐다.
“하여튼. 빨리 보고 싶어서 그래.”
- 으… 진짜 새벽부터 왜 그래. 나 화 안 났어.
“화? 뭔 소리야?”
- 소피아 씨랑 여행 갔던 거 찔려서 이러는 거잖아. 아니야?
아니라고 말하려다가 목구멍에서 집어넣었다. 부정하면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들 것만 같았다.
“잘 아네. 그러니까 가서 씻어.”
- 하아, 진짜로 신경 안 쓰는데. 좀만 이따가 와. 짐 챙기려면 좀 걸려.
신경 안 쓴다면서 여행은 기대되는 모양이다. 유선우가 피식거리자 차세정이 투덜댔다.
- 뭐가 웃긴다고. 그보다 어디로 가는데? 비행기 타?
“그보다 훨씬 빠른 거.”
게이트 타고 간다.
***
아직 해가 제대로 오르지도 않은 이른 시각.
차세정은 화장뿐만 아니라 속옷에도 힘을 팍 주고 집을 나섰다. 약속 장소로 향하면서 그녀는 속으로 쉴
새 없이 툴툴거렸다.
‘다짜고짜 뭐야. 참나.’
자는 사람 깨워다가 여행을 가잔다. 아무리 생각해도 어이없는 새끼다. 전화 도중 자신이 욕 한마디를 안
했다는 게 신기할 지경이었다.
‘근데 좀 기대되네.’
한편으로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남자친구와 여행은 살면서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꼬일 대로 꼬인 차세정
의 인생에 그런 달달한 경험은 여태 한 번도 없었다.
그래서 소피아와 미국 간다고 들었을 때는 얼마나 심란했었는지. 화가 났었다기보단 굉장히 서운했었다.
‘그래도 뭐. 지금은 나랑 가니까.’
차세정은 입가를 히죽거리면서 걸었다. 오늘따라 아침 공기가 유난히 상쾌하다. 분명 미세먼지지수가 높
다고 들었는데. 신기할 노릇이다.
‘맨날 이랬으면 좋겠다.’
컨디션이 좋았다. 딱 방금까지만.
이따금 밀회하는 장소인 뒷산에 도착하자마자 기분이 곤두박질쳤다.
“유선우.”
“어, 왔어?”
“해명해.”
차세정이 미리 기다리고 있던 유선우에게 다가가 말했다. 그녀의 눈은 유선우가 아니라 그 옆을 향했다.
그곳에는 듣지 못한 인원이 4명이나 있었다.
남자 하나와 여자 셋. 성비부터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특히 묘하게 인상이 흐릿한 여자가 째려보는 게 상
당히 열 받는다.
“그게, 이 사람들은….”
“알아. 너 미국에서 방송할 때 봤어. 저분만 처음 보네.”
차세정이 쉬발을 쳐다봤다. 당연하게도 그녀는 그가 해츨링 루루임을 몰랐다.
“…여행이라길래 둘이 가는 줄 알았는데. 미리 말이라도 해주지.”
“저기, 세정 씨. 너무 실망하지 마요. 생각하는 거랑은 다를 거예요.”
박아연이 어색하게 말을 건넸다. 차세정은 크게 숨을 토해내 화를 다스렸다.
“죄송해요, 언니. 인사부터 해야 했는데.”
“이해해요. 선우 씨가 사람 빡치게 하는 면이 있긴 하죠. 맨날 말이 한마디씩 부족해.”
“그런데 무슨 말이에요? 생각이랑 다를 거라니….”
“보면 알아.”
유선우가 대답하고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아무도 없음을 확인한 그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지금 열어줘.”
쩌어어억!
신호를 주자 곧바로 게이트가 출현했다. 난데없는 상황에 차세정이 숨을 집어삼켰다. 그녀가 혼란스러워
하는 기색으로 물었다.
“유, 유선우? 네가 한 거야?”
“다 말해줄게. 네가 듣고 싶어 하는 거 전부.”
“아니, 지금 게이트가….”
“한 번만 믿어줘.”
진지하면서도 따스한 음성이다. 차세정은 어째선지 유선우가 어른스럽게 보였다.
무언가를 결심한 듯하기도 했고, 오랜 방황을 끝마친 듯하기도 했다. 그로 말미암아 지금이 어떤 중요한
분기점임을 알 수 있었다.
차세정이 침을 꼴깍 삼키면서 게이트를 응시했다.
고민하는 도중에 다른 네 명이 먼저 게이트를 넘어갔다. 자신을 배려한 행동임을 눈치 빠른 그녀가 모를
리 없었다.
“…하아, 알았어. 들어가면 되는 거지?”
물음에 유선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차세정은 수차례 심호흡을 반복해 결심을 굳혔다. 그녀가 당차게 발
을 내디뎠다.
유선우는 차원을 넘는 차세정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엔라가 그에게 말을 걸었다.
- 괜찮겠어?
‘뭐가?’
- 쟤한테 말하는 거 싫어했잖아, 너.
‘싫어하진 않았지.’
조금 무서웠을 뿐이다. 이미 지난 일이 관계에 영향을 주지 않았으면 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쓸데
없는 걱정이었다.
‘가기 전에 먼저.’
유선우는 스마트폰을 꺼내 소피아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정확히 1시간 후에 지정한 장소에서 기다리라
는 내용이었다.
소피아를 한국으로 부르기에는 오래 걸리니 게이트를 열어서 픽업할 셈이었다.
- 게이트 여는 것도 간섭력 엄청 나가는데. 아브나바도 슬슬 거덜 나겠다.
‘마지막이니까 한 번쯤은 괜찮잖아.’
- 하긴. 고 새끼가 징징대든 말든 무슨 상관이래.
엔라가 새침하게 말했다. 한결같은 모습에 유선우가 피식 웃었다.
‘슬슬 좀 봐줘라.’
- 너 같으면 봐줬겠어?
‘글쎄.’
다섯 번 정도 죽도록 패고 용서하지 않을까.
지금껏 그만큼 버틴 사람이 없어서 잘 모른다.
***
“스읍, 하아. 스으읍!”
“오자마자 뭐해요? 변태같이.”
“너도 해봐라. 공기가 꿀맛이다.”
“스읍, 하아! 정말입니다. 앞으로는 감사하면서 살아야겠습니다.”
쉬발과 리디는 차원을 넘자마자 공기의 맛을 즐겼다. 숨만 쉬어도 건강해지는 감각. 미세먼지 가득한 지
구에 비하면 이곳은 거의 극락이었다.
“이게 무슨…….”
한편으로 차세정은 경악에 입을 다물지를 못했다. 그녀의 눈앞에는 고딕풍의 교회 건물이 자리해 있었
다.
심지어는 호기심 넘치는 눈을 향해오는 아이들도 보였다. 번듯한 문명의 모습이었다.
“신기하죠? 저도 처음에 세정 씨랑 똑같았어요.”
“어, 어떻게 된 거예요? 왜 게이트 너머에….”
“그냥 받아들여요. 그게 편하니까.”
박아연은 경험자답게 조언을 던져줬다. 차세정은 당혹해하다가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한동안 고민
에 잠겨 있다가 입을 열었다.
“대충 알겠어요. 아니, 모르겠지만. 어쨌든 유선우가 맨날 어디로 사라졌었는지는 알겠네.”
“…어라. 적응 굉장히 빠르네요.”
“눈치 하나는 자신 있거든요.”
차세정은 바쁘게 두리번거렸다. 한국과는 달리 낮이었기에 주변이 훤히 보였다.
지구가 아니라는 생각 때문일까. 어디에나 있을 법한 길가의 풀들마저 낯설게 느껴졌다.
“세정 씨라고 했죠? 일단 들어가서 얘기해요.”
여태까지 조용히 있던 아이릴이 끼어들었다. 어느새 변장을 푼 그녀가 긴 머리카락을 찰랑거리며 앞으로
나섰다. 교회로 걸어가는 발걸음은 자못 당당했다.
“아깐 안 보였는데. 누구세요?”
“저 말인가요? 뭐라고 말해야 하나.”
자기가 말 걸어놓고 뜸을 들인다. 차세정이 어이없어하는 한편 아이릴은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여기 건물주예요.”
본래는 황실과 교회의 공동 소유였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저번에 샀다.
***
일행은 비어 있는 예배당으로 이동했다.
유선우는 설명하기에 앞서 일행에게 자리를 비켜달라고 부탁했다. 차세정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라며 박
아연만을 남겨두었다.
그리고 기나긴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그는 이번엔 관리자와 신계에 대해서도 숨기지 않았다. 모
든 비밀을 명명백백하게 밝힌 것이다.
얘기를 끝마친 후로도 차세정은 한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복잡한 표정을 보아하니 생각을 정리하는 모양
이었다.
대신에 박아연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전에 그 누구더라, 아브나바 님한테 들었던 거랑 굉장히 다르네요.”
“어쩔 수 없죠. 여기에선 유일신이니까 입조심 하는 거예요.”
“아이릴 씨들한테 숨겨야 하나요?”
“가급적으로는요. 솔직히 전 아무래도 상관없다 싶긴 한데, 아브나바한텐 빚이 있거든요.”
박아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기야 자기가 믿는 신이 거의 말단이라는데 누가 좋아할까. 특히나 성녀인
아이릴은 충격이 심할지도 몰랐다.
납득하고 있자 한숨 소리가 흘렀다.
차세정의 입에서 나온 소리였다.
“듣고 나니까 회사 다니는 내가 바보 같아.”
“의심 안 해?”
“너 나한테 거짓말했어?”
“아니, 그건 아닌데.”
“그럼 믿어. 네가 무슨 소릴 하든 다.”
어조가 담담해 진심이라는 게 와닿았다. 유선우는 그녀의 믿음이 더할 나위 없이 고마웠다.
“근데 그 엔라라는 여자 좀 보고 싶네.”
- 미, 미안해!
엔라가 들리지도 않을 사과를 했다. 그녀는 죄책감 때문인지 유달리 차세정에게 약했다.
“유선우.”
차세정이 나지막이 부르며 유선우에게 다가갔다. 그녀가 그의 뒤통수를 붙잡고 자신의 어깨에 파묻었다.
“뭐야. 왜 그래.”
“그냥. 말해줘서 고맙다고.”
이후로는 한마디를 잇지 않고 머리만 토닥였다.
힘들었겠다, 고생했구나.
그따위의 말 없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지켜보던 박아연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녀는 나가 있을게요, 하고는 예배당을 나섰다.
둘만이 남자 잠시간 정적이 감돌았다. 어색하기는커녕 편안한 고요함이다. 둘은 딱 달라붙은 채로 분위
기를 만끽했다.
그러던 중에 차세정이 말문을 열었다.
“그런데 있잖아.”
“응?”
“저 언니랑도 잤어?”
***
유선우가 431-9 차원에 발을 내디뎠을 때였다.
제국과는 머나먼 장소. 밤의 왕국에서 그의 방문을 알아차린 존재가 있었다.
“하아아…….”
죽은 듯 굳게 닫혀 있던 눈꺼풀이 서서히 열렸다. 피처럼 붉은 눈동자가 어두운 침실에서 요사스럽게 빛
난다.
깊은 잠에서 깨어난 흡혈여왕, 오르시아가 상체를 일으켰다. 이전과는 달리 그녀의 몸에는 아무런 상처
도 없었다. 오히려 잠들기 전보다도 강대한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오르시아는 침대에서 벗어나지 않고 눈을 감았다. 잠기운에 취한 게 아니었다.
머나먼 곳에서 느껴지는 희미한 연결감을 곱씹었다. 유선우에게 새긴 부부의 징표에서 전해져 오는 감각
이다.
한동안 미동조차 없던 그녀가 입을 열었다.
“질레.”
“여기 있사옵니다.”
어둠 속에서 시종, 질레가 무릎을 꿇었다. 황급하게 달려온 탓에 옷매무새가 흐트러져 있었다.
“그동안 별일은 없었느냐.”
“한 가지 보고 드릴 것이.”
새빨간 눈동자가 질레를 향했다. 질레는 고개를 숙인 채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이전에 부군께서 방문하셨었습니다.”
“……정말인가?”
“어찌 감히 거짓을 고하겠습니까.”
오르시아가 숨을 잘게 떨며 자신의 목걸이를 매만졌다. 아기를 보듬듯이 애정 어린 손길이다. 이내 그녀
가 늘씬한 다리를 뻗어 바닥을 밟았다.
“병력이 필요하겠구나.”
“병력이라 하심은….”
“아이와 노인을 제외하고 전부. 기용할 수 있는 모든 인원을 불러모으거라.”
오르시아의 눈이 형형하게 빛났다.
“남편을 만나러 가야겠다.”